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39화 (139/256)

29화

가람이 적당한 의자 하나를 골라 앉으며 말했다. 이런 미친 짓을 겪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익숙해지는 모양이었다.

불가사의할 정도로 차분한 마음이 자신의 것이 아닌 것처럼 어색했다. 그러나 편리했다.

죽음에 대한 공포가 사라졌다고 해도 작은 떨림조차 없는 이 기분은 정말로 이상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덜덜 떨기도 이제 와 새삼스럽다. 그러기엔 너무나 멀리 온 것이다.

잃을 것이 별로 없어 굴욕을 자처할 필요가 없는 이 상황을 가람은 달가워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모르드레드는 한참 동안 미동 없이 서서 차분한 시선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긴 관찰 끝에 그가 평가하듯 말했다. 안타까워하는 것 같기도 하고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한 기묘한 어조였다.

“두려움이 사라졌군.”

연극이라도 관람하는 듯이 여유롭게 앉아 이 상황을 바라보던 가람은 그저 어깨만 으쓱였다.

모르드레드가 할 고문 따위는 이제 별로 두렵지도 않다. 손가락이든 눈알이든 뽑아 보라지, 그깟 목숨은 몇 개나 있다.

“내가 두려워하길 바란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거였어?”

변태 같은 새끼. 아니, 변태 새끼. 가람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악취미에 대해 비난했다.

어떤 대답도 돌아오지 않았으나 그녀는 스스로 결론을 얻고 차게 일갈했다.

“그러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내 앞에서 동료를 죽이지 말았어야지. 내가 살인에 무뎌지게 하지 말았어야지. 인간의 자른 단면 따위에 익숙해지게 만들지 말았어야지!

가람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수많은 말들을 내리누르고 진심으로 유감스럽다는 듯 말했다. 자신의 말이 최대한 가증스럽게 느껴졌으면 하는 마음을 가득 담아.

“이제 두려움으로는 나를 조종할 수 없네. 이를 어쩌나.”

“그런 것 같군.”

별다른 안타까움의 기색도 없이 모르드레드가 덤덤하게 수긍했다. 그 순간 조용히 상황을 관망하고 있던 람카차로에게 이변이 닥쳤다.

그로서는 모르드레드가 자신을 잊어 주기를 정말로 간절히 바랐겠지만, 상황이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 풀리는 것은 아니지 않은가.

시작은 다리였다. 관절이 원래 접히는 방향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제멋대로 구겨진 다리를 시작으로 팔, 허리 따위가 척척 접히기 시작했다.

콰직, 하는 소리와 함께 엉치뼈가 세로로 접히고 눈 깜짝할 사이에 그의 부피가 절반으로 줄었다.

바닥에는 피와 뭔지 모를 장기에서 빠져나온 액체가 뚝뚝 떨어져 지저분한 흙투성이 바닥에 얼룩을 만들었다.

뒤늦게 스스로에게 닥친 일을 자각한 람카차로가 반쯤 접힌 턱으로 다급하게 외쳤다.

“사, 사려 저어…….”

뭉그러진 발음으로 내뱉은 애원 한마디. 악인의 유언치고는 모범적이라 할 수 있다.

람카차로가 남긴 유언을 세상에 알린다면 그에게서 괴롭힘 받은 많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들이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지만.

몇 번의 작업 후에 람카차로는 어린아이 주먹만 한 크기가 되었다. 가람은 그가 인간의 형태에서 조금 거무튀튀한 빛깔의 단단한 덩어리가 되는 것을 감흥 없는 얼굴로 바라보았다.

정도 이상의 잔인한 광경에 놀라지 않은 것은 아니었으나 모르드레드의 시선이 내내 자신을 핥듯이 관찰하고 있어 반응을 내보이기 싫었던 것이다.

하지만 가람과는 달리 그 광경을 목격한 남자들의 눈은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람카차로와 친분이 있다는 사실을 감안하더라도 어마어마하게 놀란 것이다.

몇몇은 자신이 해야 할 행동을 완전히 잊어버렸는지 멍청한 얼굴로 믿을 수 없다는 듯 람카차로의 덩어리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모르드레드는 마치 흥미로운 실험이라도 진행한 듯이 태연하게 이야기했다.

“이 상태로도 살아 있어. 귀를 가져다 대면, 봐. 심장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지 않아?”

빈 소라 껍데기에서 파도 소리라도 듣는 듯이 귀를 가져다 대던 모르드레드는 람카차로의 덩어리를 가람에게도 권했다.

그러나 가람은 반사적으로 그것을 쳐 내었다. 덕분에 바닥의 기울기를 따라 람카차로의 덩어리가 데굴데굴 구르다가 굳어 있던 남자들 중 하나에 닿았다.

남자는 우락부락한 덩치가 민망할 정도로 파르르 떨었다. 금제 덕분에 움직일 수 없으니 그 정도였지 만약 몸을 움직일 수 있었다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발광했을 기세였다.

무리도 아니다. 방금 전까지 사지 멀쩡하던 인간이 정체불명의 작은 공으로 압축당하는 것을 생으로 목격하고도 침착할 수 있다면 이미 여러 가지로 인간으로서 나락으로 떨어진 것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람카차로의 동지들은 가람보다 나았다. 그들은 가람이 보여 주지 않는 보편타당한 인간의 반응을 표현하려 필사적인 것처럼 보였다. 흉악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몇몇은 치미는 구역질을 되삼키고 있다.

“더러운 새끼.”

가람이 이를 바드득 갈아붙이며 일갈했다. 그 말에 모르드레드가 연극처럼 과장되게 깜짝 놀라더니 손을 들어 스스로를 가리켰다.

“나 말이야? 냄새라도 나는 건가?”

그는 능청스러운 태도로 제 옷깃을 들어 냄새를 맡기까지 했다.

그 가증스러운 태도에 가람은 슬슬 이 상황이 견딜 수 없어지고 있음을 자각했다. 날카로워지는 기분을 억누르려 노력했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다.

모르드레드가 바로 앞에서 미친 짓거리를 일삼고 있는데, 그리고 그 더러운 저의가 훤히 눈에 보이는 마당에 날카로워지지 말라는 것이 무리였다.

하, 이제 와서 내가 다시 벌벌 떠는 꼴이라도 보고 싶으신 건가?

“그래, 아주 썩은 내가 난다. 미친 노인네의 역겨운 냄새 말이야.”

그 말과 동시에 가람은 참지 못하고 권총을 들어 그를 쏴 버렸다. 모르드레드는 총탄을 막지도, 피하지도 않았다.

작은 쇳덩이는 그대로 그의 로브를 뚫고 작은 구멍을 내었다. 그러나 피가 나오지는 않았다.

가람은 경험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총탄이 꿰뚫음과 동시에 재생했기 때문이겠지.

“아, 실수했어.”

제 구멍 난 옷을 내려다보던 모르드레드가 고저 없는 억양으로 중얼거렸다. 다시 고개를 든 그 얼굴에는 표정이라곤 없었다.

가람보다 더 메마르고, 무기물보다 더 무기물 같은 얼굴은 아름다운 형태를 하고 있기 때문인지 마치 잘 빚은 공예품 같았다.

“예전처럼 두려워서 파들파들 떨 때가 재밌었던 거 같은데.”

안타깝다는 듯이 말하지만 그것에 진심은 없다. 잠시 후회하는 듯한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던 모르드레드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재미가 없어졌으니 그만 떠난다는 태도다.

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어 그가 떠난 빈자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말로 떠난 건가? 왜 갔지? 내가 두려워하지 않아서? 정말로 그 이유인가?

가람이 혼란에 빠진 사이 모르드레드의 부재를 느낀 사람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그들의 눈에는 가람이나 모르드레드나 비슷한 인종이었다.

자각하지 못한 상태로 고개를 든 사람들과 시선을 마주하던 가람은 문득 그 눈에 녹아 있는 감정을 눈치챘다.

마치 미친 여자를 바라보는 것 같은 시선. 혐오와 불가해함, 그리고 옅은 공포가 묻어나는 달갑지 않은 맛의 감정.

너무한데. 물론 자신의 정신이 청정한 것은 아니지만 미친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마치 모르드레드를 보는 것 같은 그 시선들이라니. 가람은 괜히 불쾌해져 미간을 찌푸렸다.

그 능력만 강한 정신적 금치산자와 함께 싸잡아 묶는 짓은 너무 과하지 않은가. 그 자식에 비해 자신은 몹시 정상적인 사람인데.

물론 최근엔 큰일이 좀 있어 비이성적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강해졌지만, 자신은 여전히 착한 사람이었다.

비이성적. 그 단어에 가람은 잠시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눈앞에서 얼떨떨하게 몸을 일으킨 덩치들은 모르드레드가 금방 다시 돌아올 것 같기라도 한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더니 하나둘 문 쪽으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벌써 문고리에 손을 댄 사람도 있었다. 막 문을 열려는 그 남자의 뒤통수를 향해 가람은 들고 있던 총을 쏴 버렸다.

밖에 나가서 떠들어 대기라도 하면 곤란하지. 보아하니 벌써 자신과 모르드레드를 싸잡아 보고 있는데, 저주니 미신이니 하는 것을 덧붙여 과장되게 부풀리기라도 하면 곤란하다.

뒤통수로 뇌를 쏟아 내며 풀썩 쓰러지는 남자를 확인하고 가람은 문 근처에 있는 사람 몇을 더 쏴 죽였다.

문가에 시체가 쌓이자 문을 향해 접근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반 시간 전까지만 해도 가람을 향해 조롱을 퍼붓던 작자들이 지금은 눈치 살피기 바쁘다. 그런 것과는 상관없이 가람의 총은 계속해서 불을 뿜었다.

“왜, 왜 우리를 죽이는 거요!”

꽤 점잖은 말투로 누군가가 외쳤다. 가람은 뜻밖의 질문을 들은 기분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렇게 외친 남자를 바라보던 가람은 어린아이에게 알려 주듯 차근차근하게 대답했다.

“밖에 나가서 소문내면 곤란하잖아요.”

지금 이 자리에서 소문내지 않겠다 멍청한 소리를 하는 남자는 없었다. 숟가락질이라도 하는 것처럼 태연하게 방아쇠를 당기는 모습을 보니 그런 말을 해도 먹히지 않을 것이 당연했다.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남자들에게 가람은 덧붙이듯 설명했다.

“그리고 당신들 어차피 다 범죄자잖아요?”

죽어도 상관없는 범죄자 말이에요. 다음 말은 연거푸 이어지는 총성에 묻혀 아무도 들을 수 없었다.

Chapter 21

무역 도시 칼츠버그가 최근의 무역 활성화로 얻은 것은 경제적인 부뿐만이 아니다.

모여드는 이방인들과 신대륙으로 떠나고자 하는 이들이 몰려들어 칼츠버그의 치안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여전히 화려하고 평화로운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칼츠버그의 밤은 무법자들에게 차근차근 갉아먹히고 있다.

치안 당국은 격무를 핑계로 안이한 대처를 일삼고 있으며 이것은 칼츠버그가 무법자들의 전쟁터가 되는 것을 방조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젯밤 일어난 무법자들의 여관 집단 살극에 대하여 치안 당국의 일차원적인 사건 종료 처리 방식에서 이러한 근무 태만을 확인할 수 있다.”

가람은 읽던 것을 내려놓고 주스를 마셨다. 적당한 먹을거리와 읽을거리가 함께하는 카페에서의 정오가 보통 그러하듯 가람은 나른한 여유에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가 읽던 것은 칼츠버그 소식지라는 것으로 용병 길드와 상회에서 만들어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는 일종의 신문이었다.

패스를 찾으러 나와 잠시 생각을 정리할 겸 카페에 앉아 있었더니 웬 꼬마가 종이 뭉치를 들고 다니기에 신기해서 구입한 것이었다.

그녀가 동대륙으로 떠나기 전까지만 해도 이런 것은 찾아보기 힘들었는데 어느새 생겨났다. 급변하는 칼츠버그라는 말이 확 와닿는 순간이었다.

종이가 비싸니 어쩔 수 없겠지만 신문은 3실버치고는 좀 조잡한 감이 있었다.

그래도 어젯밤의 일이 어떤 식으로 처리되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된 것은 꽤 괜찮은 수확이었다.

하긴 귀족의 죽음을 수사하기도 바쁜 마당에 범죄자들의 떼죽음을 조사할 필요가 있으랴.

어찌 됐건 결과적으로 가람에게는 잘된 일이었다.

어젯밤 가람이 그 무뢰배들을 학살하는 데 걸린 시간은 5분도 되지 않았다.

2층에 있던 꼬맹이들은 아래층의 분위기가 좀 험악해지기 시작하자 바로 도망친 모양인지, 상황이 종료된 뒤 올라가 확인해 보니 2층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하긴, 그런 곳에서 일하는 만큼 눈치가 빠르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들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후로 목격자가 있는지 꼼꼼히 확인하고 떠나긴 했지만 그래도 찜찜하긴 했는데, 이런 식으로 확인하니 머릿속이 깔끔해지는 기분이다.

“그래도 편집은 괜찮네.”

손가락으로 내려놓은 신문을 툭 친 가람은 고개를 들어 눈앞의 웅장한 성을 올려다보았다.

그 성이 그녀가 이렇게 카페에 앉아 있는 이유였다. 이미 짐작할 만한 일이지만, 이번 패스는 칼츠버그 공작성 안에 위치하고 있었던 것이다.

덕분에 가람은 칼츠버그 공작성을 둘러싸고 형성된 번화가의 카페에서 아침부터 내내 성을 오가는 사람을 관찰하고 있었다. 성으로 드나들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세 시간 정도 이 자리에 앉아 지켜본 결과 공작가의 출입문을 넘는 것은 그리 까다롭지 않아 보였다.

슬쩍 상회 사람인 척하고 물건을 나르는 척 숨어들어도 신경 쓰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출입문을 넘어 내성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은 공작가의 가솔들이나 되어야 가능했다.

“공작가에 임시직으로 들어가면 제일 좋은데.”

그런데 임시직이라는 게 있긴 한가? 음료 잔에 장식된 과일 조각을 질겅거리며 가람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고민해도 별 뾰족한 수가 나오지 않는다. 자신을 한 일주일 정도만 공작가 내성에 찔러 넣어 줄 만한 사람이 어디 없을까.

물론 잠입이나 공작성 내부의 사람과 은밀한 거래를 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위험 부담이 너무 크다.

다른 방법이 전혀 없다는 결론을 얻지 않는 이상 가람은 그런 방법은 고려 대상에서 제외시킬 생각이었다.

달그락.

가볍게 흔든 컵에서 얼음이 부딪혔다. 가람은 컵을 들고 잠시 멍하니 행인이 오가는 거리를 내다보았다. 드리워진 차양의 그림자 밖으로 일상을 사는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쏟아지는 햇살을 얼굴 가득 받고 있어 누구 하나 뺄 것 없이 모두 빛나고 있었다. 다시 컵을 흔든다.

얼음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가람은 카페에 앉아 있는 자신이 어떤 그림을 그려 내고 있는지 자각했다. 눈앞의 풍경에 오래전 추억의 냄새가 덧씌워진다.

지금의 풍경은 그때와는 전혀 다른데도 분위기는 기억 속의 그것과 같다. 아니, 그 광경이 빚어내는 마음은 그때와 같은 모양이다.

가람은 순간 자신이 과거로 돌아가 추억 속 한 풍경 속에 앉아 있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추억이라고 할 것도 없을 정도로 보잘것없는 기억의 한 조각일 뿐인데도 너무나 애틋했다.

예전에도 종종 카페에서 공부를 하다가 잘 풀리지 않으면 밖을 내다보곤 했다.

눈이 부시도록 맑은 날 거리를 활보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잠시 과제로부터 현실 도피를 하기도 했었지.

지금 자신은 리포트를 쓰고 있지도 않고, 전공 공부를 하고 있지도 않았지만 기분은 그때와 비슷했다.

손에 잡힐 것같이 아스라한 기분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자신은 이렇게나 변해 버렸는데도, 변했다고 생각하는데도 추억을 느끼는 심장은 그때와 같은가.

돌아가기까지 모을 패스가 이제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일까. 유난히 이런 감정이 자주 찾아든다.

막상 끄집어내어 겹쳐 보는 기억은 낡고 낡아 제대로 된 형태도 없이 그저 느낌만 일렁거리는 것이라 가람은 그것에 현재를 씌웠다.

그 행동으로 추억은 실존하게 된다. 그 순간을 맞이하면 늘 울컥하고 무언가가 터져 나오는 것이다.

그 감정은 분노와는 다른 방향으로 강력해서 도무지 참아 낼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분노가 심장을 뜨겁게 한다면 이 감정은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었다.

그렇게 뒤섞인 추억은 추억도 현재도 아닌 무언가로 바뀌어 버렸다. 그런 식으로 왜곡된 추억만 한가득이다. 이제 순수하게 남아 있는 추억도 몇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람은 그 행동을 멈출 수가 없었다. 비슷한 광경을 찾아 추억을 덧씌우면 잠시나마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으니까.

아마 이 기분도 다시 떠올릴 때엔 지금 순간이 덧칠되어 있겠지.

“꽃 사세요. 예쁜 언니.”

앳된 목소리에 돌아보자 작은 손으로 조심스레 가람의 로브 자락을 잡아당기고 있는 꼬마가 있었다.

다른 쪽 손에는 판매 상품인지 잘 엮어 만든 꽃다발이 몇 뭉치 놓여 있었다. 손님을 대하는 첫 멘트도 그렇고 제법 장사 수완이 좋은 꼬마였다.

“오늘 아침에 꺾은 꽃이에요. 향이 무척 좋아요.”

너무 어려 성별의 구분이 가지 않는 아이는 가람의 테이블에 꽃이 놓여 있지 않은 것이 진심으로 안타깝다는 듯이 호소했다.

가람은 아주 여리게 생긴 남자아이처럼 보이기도 하고 강한 인상의 여자아이 같기도 한 꼬마에게 질문했다.

“얼마니?”

“2실버예요! 화관은 3실버구요! 오래가요, 벽에 걸어서 장식해도 좋아요. 집에 향기가 돌게 해 줄 거예요.”

안타깝게도 가람은 화관을 걸 만한 벽을 갖고 있지 못했기에 2실버짜리 꽃묶음만 한 단 구입했다.

다음에도 이용해 달라며 허리를 숙이고 물러난 아이는 곧 다른 손님을 찾아 나섰다.

그 작은 등을 잠시 바라보다 가람은 손에 든 꽃에 코를 대었다. 약간 달달하고 싱그러운 향이 제법 좋았다. 옅게 레몬 같은 냄새가 나기도 했다.

한껏 꽃향기를 즐기고 고개를 들어 다시 고민에 빠져들던 차에 가람은 낯익은 얼굴을 발견했다. 노천카페의 바로 건너편 테이블에 막 앉는 커플이 몹시 익숙했다.

굳이 말하자면 남자 쪽의 얼굴이 매우 친숙하다. 이름이, 그러니까, 웨이든이라고 했던가.

가람이 뚫어지게 바라보자 시선이 따끔했는지 그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러다 가람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더니 매우 어색하게 딴청을 부리는 것이 아닌가.

대놓고 알은척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라 가람도 그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지만 자신은 그가 필요했다.

웨이든은 에르비에르만 상단의 측량사다. 그가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가람이 가진 패 중에는 가장 유력한 끈이었다.

만약 그가 능력이 없다면 그와 이어져 있는 다른 사람을 통해 성으로 들어가는 길을 알아보는 것도 좋겠지.

어쨌거나 뾰족한 묘안이 없어 고민하던 가람에게는 하늘에서 내려온 동아줄이나 다름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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