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비록 예전 그가 가람의 주머니를 두 번이나 소매치기하고, 가람의 객실에 몰래 숨어 들어와 금고를 훔쳐보려고 했던 별로 유쾌하지 못한 일도 있었지만 그의 성격상 그리 오래 담아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 지금 가람을 피하려고 드는 것도 앙금이 남아서라기보다 그 전에 그가 취했던 태도의 연장선일 뿐인 것 같았다.
가람의 경고로 인해 웨이든은 가람을 좀 무서워하고 있었으니 꺼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는 아쉬운 것이 있는 가람이 먼저 다가갈 수밖에 없어서 은근슬쩍 웨이든에게 할 말이 있다는 눈짓을 보냈다.
그렇게나 꺼린다면 무시할 법도 하건만 웨이든은 가람의 신호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는 한숨을 푹 내쉬곤 동행한 여성에게 양해를 구한 뒤 슬쩍 자리에서 일어나 가람에게 다가왔다.
외면하고 싶은 기색이 역력했으나 후환이 두려워 와서 듣는다는 태도였다.
“잘 지냈어?”
가람의 살가운 인사에 웨이든은 잠시 경계 어린 표정을 짓다가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뭐, 그런데 벌써 서대륙으로 온 건가?”
보통 동양인들이 서대륙으로 오는 것은 단발성 여행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서대륙에서 동대륙으로 돌아간 동양인은 거의 열에 아홉이 다시 돌아오지 않았고, 돌아오는 나머지 하나도 몇 년은 동대륙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건너오니 가람과도 같은 경우는 매우 드물다 할 수 있었다.
“여기가 그리웠거든.”
얼굴을 찡그린 웨이든이 탐색하는 시선으로 가람을 훑다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다른 여자를 흘긋 바라보더니 마지못해 의자에 앉았다.
“안부 인사나 하자고 부른 건 아닌 것 같은데. 보다시피 기다리고 계신 분이 있어서 빨리 끝내 줬으면 좋겠는데.”
“애인?”
“어.”
즉답에 가람은 조금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웨이든을 로아나의 애인 정도로 취급하고 있던 가람으로서는 그 대답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로아나는?”
“전전전 애인.”
로아나와 헤어진 건 그렇다 쳐도 그사이 셋이나 더 갈아치웠다는 말인가. 자신이 동대륙에서 보낸 시간은 겨우 서너 달도 되지 않는데.
물론 배를 탄 시간까지 포함하면 반년이 넘는 시간이지만 웨이든도 배를 탔으니 피차일반이다. 단순 산술로 생각하면 거의 한 달에 한 번 애인을 바꿨다는 뜻인데.
“그러다 칼 맞으면 어떡하려고.”
가람의 진심 어린 충고에 웨이든은 익살스러운 태도로 어깨를 으쓱였다.
“나같이 잘난 남자를 누가 해쳐?”
“촐랑대긴.”
“사람은 많이 만날수록 좋은 거고 사랑은 많이 할수록 좋은 거지. 너도 먼지떨이마냥 뚱하게 있지 말고 어디 가서 멋진 청년이라도 꼬셔 보라고. 봄이 온다니까?”
“그래, 지금이 봄이긴 하지.”
가람이 동대륙에 가 있던 사이 서대륙은 겨울을 지냈다. 겨울이라고 해도 이런 중부 지방은 크게 기후의 변화가 없고 기껏해야 크페타인 쪽이 좀 더 추워지는 정도다.
갑자기 사랑 예찬을 시작한 웨이든을 한심하게 바라보던 가람은 문득 자신이 주제에서 한참 벗어나 있음을 깨달았다.
“물어볼 게 있는데.”
“그 얼마나 오묘한……. 어, 물어볼 거? 좋은 남자 고르는 방법이라면 내가 잘 알지.”
퍽이나. 속으로 짧게 코웃음 친 가람은 내색하지 않으며 말했다.
“에르비에르만 상회에서 일하고 싶은데 자리 좀 있어? 칼츠버그 성 내부에서 일하는 걸로.”
가람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눈을 껌뻑이던 웨이든이 한 박자 늦게 음흉한 웃음을 지었다.
“이건 지금 나한테 부탁하는 건가?”
“그런 거지.”
“부탁치고는 너무 딱딱하지 않아? 동대륙인이라 잘 모르나 본데, 부탁은 이렇게 하는 게 아니라 좀 더 사근사근하고 귀엽게…….”
흐흐 하는 의성어가 어울릴 법한 표정으로 손짓을 동원해 이상적인 부탁의 형태를 그려 내는 웨이든의 얼굴은 건수를 잡았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었다.
가람은 당연히 잡혀 줄 생각이 없었다.
가람의 손이 허리춤을 잠시 더듬었다가 테이블 위로 올라왔고, 가벼운 탁음과 함께 검은 총이 모습을 드러냈다. 방아쇠에 손가락을 건 그 모습은 영락없는 협박이었다.
그 물건이 무엇인지 알고 있는 웨이든은 대번에 얼굴에서 유들유들한 표정을 지웠다.
“아, 알았어. 장난 좀 친 건데 무슨 여자가 이렇게 살벌해선…….”
당연히 쏠 생각은 없었고 단순 협박용이었지만 웨이든의 말에 가람은 자신의 사고방식이 너무 폭력적으로 변한 게 아닌가 심란해졌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게 유용하니까. 그리고 이외에 어떤 반응을 보여 줄 수 있을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어떡했을까? 당황했을까? 그래서야 웨이든에게 말려들 뿐이다. 지금이 딱 적절했다. 이런 녀석에게 말려들면 정말로 끝이 없을 테니까.
“나도 장난이야.”
“무슨 장난이 이래? 여자가 애교도 없고 말이야.”
“이게 내 애교야.”
가람의 담담한 대답에 웨이든이 다시 투덜거렸다. 그것을 잠시 듣고 있던 가람이 총으로 탁자를 가볍게 두드리며 재촉했다.
“매력 있는 남자 웨이든 씨. 그만 투덜거리고 어서 본론 좀 말해 볼래요? 매력적인 여성분도 기다리고 있잖아요?”
여상스러운 그 어조에 웨이든이 어처구니없는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입으로 네가 매력적이라는 거야?”
“아니, 네 애인.”
“아하. 어쩐지…….”
웨이든이 매우 빠르게 수긍했다. 범인이라면 기분이 상할 만한 반응인데도 가람은 그런 하찮은 것에는 전혀 신경이 쓰이지 않아 그의 대답만을 재촉했다.
그러나 웨이든은 순순히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여기서는 좀 힘들고, 에르비에르만 상회로 와. 내 친구와도 이야기가 되어야 하니까.”
말을 마친 웨이든이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문득 기다리고 있는 여성을 흘긋 바라보더니 나직하게 당부했다.
“내일 와. 오전. 오늘은 우리 예쁜이랑 즐거운 시간을 보내야 하니까.”
그러시겠죠. 가람이 짧게 혀를 찼다.
* * *
웨이든의 당부대로 가람은 다음 날 정오가 조금 지난 시간에 에르비에르만 상회를 찾았다.
급한 마음을 생각하면 새벽부터 쳐들어가고 싶었지만 부탁하는 입장에서 바쁠 것이 분명한 아침에 찾아가는 것은 적절하지 않은 선택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가람이 찾은 시각의 상회는 조금 한가했다. 상회의 안쪽에는 막 점심을 먹은 사람들이 나른하게 앉아 잡담을 나누고 있었는데, 가람은 그 사이에서 어렵지 않게 웨이든과 그의 친구인 서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웨이든은 서기의 책상 근처에 아무렇게나 쌓인 짐 상자 위에 걸터앉아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가람이 다가가자 기척을 느낀 모양인지 급히 말을 멈춘다. 험담이라도 하다가 딱 끊는 것 같은 모양새다.
어떤 것이든 가람 자신이 들어서 유쾌할 대화를 하던 중은 아닌 것 같았다.
어젯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얼굴이 반들거리는 웨이든은 둘째 치더라도 서기의 안타깝다는 시선은 매우 신경 쓰이는 것이었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딱한 처지의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시선으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는데, 제 짓궂은 친우에게 걸려든 그녀를 몹시 가여워하는 기색이었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기대에 가득 차 생동감이 넘치는 웨이든의 얼굴이 가람은 거슬렸다.
“안녕하세요. 저를 왜 그런 시선으로 보시는지 물어도 될까요?”
자신이 오기 전 나누었을 대화가 손에 잡힐 것처럼 훤하게 보였지만 가람은 일부러 생글생글 웃으며 질문했다.
그 말에 서기는 뒤늦게 저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자각하곤 표정을 갈무리했다. 그러나 금세 원래 표정으로 돌아가 가람을 슬픈 얼굴로 바라보았다.
가람은 마치 젖도 못 떼고 죽은 강아지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서기의 표정이 딱 그런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그 표정은 그런 대상에게나 어울리는 것이지 자신에게 향하기에 적합한 것은 아니었다.
“이 녀석의 일을 대신 해 주기 위해서 부탁을 들어주다니. 아가씨도 참…….”
그 뒤에 붙을 말을 차마 할 수 없다는 듯 서기는 말문을 잇지 못했다.
그런 제 친구를 바라보던 웨이든이 팔꿈치로 제 친구를 꾹 찌르더니 히죽 웃는다. 악동 같은 장난기가 줄줄 흘러내리는 것 같은 미소였다.
“뭘 그래. 내 입장에서도 정말로 어려운 부탁을 들어주는 거라고. 내가 얼마나 일을 하고 싶어 하는지 알잖아.”
서기는 곧바로 항의하려고 했다. 세상에서 가장 허무맹랑한 소리를 들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러나 구체적인 말이 이어지기도 전에 웨이든에게 입이 틀어막혀 간단히 저지당했다.
“무슨 헛소……. 읍읍읍!”
“레티시아.”
제 입을 막은 손을 떼어 내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서기가 순간 조용해졌다. 잠시 갈등 어린 침묵이 이어진다. 그리고 그는 침울하고 자기혐오에 젖은 얼굴이 되어 가람에게 사과했다.
“미안합니다, 아가씨. 저의 종족 번식 본능 때문에 가여운 아가씨를 저 멍청이에게서 구해 주지 못하는군요.”
돌아가는 것을 보아하니 레티시아는 여자의 이름인 모양이었다. 아마 웨이든이 서기의 연애 사업을 좀 도와주고 있는 모양이었고, 그걸 빌미로 그를 쥐락펴락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어쨌거나 가람과는 크게 상관없는 일이라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제가 할 일이 웨이든의 일인가요?”
“뭐, 그렇죠. 이 녀석 측량사라 배를 타지 않을 때는 그냥 날백수나 다름없거든요. 그래서 데려다가 단순 계산이라도 시켜 먹는 거죠. 상회에는 계산할 일거리가 참 많거든요. 아차, 아가씨 셈은 할 줄 알죠?”
“네. 잘해요. 그런데 일을 하는 데 웨이든의 허가가 필요한가요?”
“허가까지야. 그냥 자리만 비면 되죠. 진짜 간단한 일이거든요. 정말로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양이 많아서 그렇지.”
서기와 자신이 맡을 업무에 대해 몇 마디를 주고받던 가람은 문득 자신이 번지수를 잘못 짚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혹이 들었다.
웨이든이 아닌 서기에게 부탁하는 것이 차라리 낫지 않을까? 그녀가 마악 입을 떼려는데 웨이든이 선수를 쳤다. 쓸데없이 눈치만 빠른 바람둥이 같으니. 가람이 짧게 혀를 찬다.
“이 녀석한테 부탁해도 소용없을걸. 그건 내 소관이거든. 어차피 내 일을 대신 하는 거라서 내가 빠져 주지 않으면 못 해. 자리가 비어야 할 수 있다는 이야기지.”
히죽거리는 모양새가 아주 작정을 한 것 같았다. 가람은 절로 나오는 한숨을 누르고 순순하게 질문했다.
“내가 뭘 해 주면 돼?”
“간단해. 내 일을 좀 도와주면 되는 거지.”
그 일이라는 것은 알 만한 것이다. 능글맞은 표정이나 짓궂은 눈빛만 봐도 그가 생각하는 것이 문장이 되어 읽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상황이 이렇다 보니 넘어가 주는 수밖에 없다. 수작을 부리고 싶다는 속내를 훤히 보면서도 어쩔 수 없이 끌려가는 것은 정말로 고달픈 일이다.
하지만 웨이든이 정말로 정도 이상의 수작을 부린다면 손 놓고 당할 생각도 없었다.
물론 웨이든도 목숨이 아깝다면 섣부른 짓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기껏해야 장난, 하지만 좀 피곤해질 장난이겠지.
“좋아. 말해 봐.”
항복의 제스처를 보이자 웨이든은 가람에게 자신을 따라올 것을 요구했다. 가람은 순순히 걷는 척하면서 방향을 가늠했다.
이쪽 방향으로 계속 가면 번화가가 나온다. 가람이 앉아 차를 마시던 번화가와는 조금 다른 의미의 번화가였는데, 더러운 골목과 온갖 사람들이 바글거리는 시장이 위치했다.
이쯤 되면 그 장난의 정체를 눈치채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애 같으니. 가람은 앞에 걷고 있는 웨이든의 등을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눈치챈 것 같은 얼굴인데. 그래, 내 취미를 좀 도와주면 돼.”
인적 드문 냄새나는 골목길에서 웨이든이 매우 만족스러운 얼굴로 선언했다. 역시나. 가람은 탄식하고 싶은 기분으로 한숨과 함께 질문했다.
“소매치기?”
“어허. 누가 듣는다. 어쨌거나 자, 가서 한번 해 봐.”
“하라고? 내가 하는 건 돕는 거라며?”
“해 봐야 어떻게 돕는 건지도 알 수 있잖아.”
충동이 치솟는다. 살랑살랑 눈웃음치는 그 얼굴을 그대로 후려쳐서 판다 같은 꼴로 만들어 주고 싶다.
이곳이 골목길이라는 사실은 그 생각을 억누르기 힘들게 만들고 있었다. 어차피 볼 사람도 없을 텐데.
아니, 아니지. 그러면 다 된 밥에 코 빠뜨리기나 다름없으니 참아야 한다. 이런 한심한 장난질에 놀아나는 것도 정말로 짜증 나는 일이지만.
고개를 드는 폭력적인 욕망을 억누르며 가람은 떨떠름하게 알겠노라 대답했다.
그러나 소매치기라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날카로운 판단과 날렵한 손놀림, 사람의 심리를 지배하며 그 틈을 대담하게 파고드는 배짱이 두루 갖추어져야만 제대로 해낼 수 있는 작업인 것이다.
물론 노력하면 못할 만한 일도 아니었지만 가람은 도무지 의욕이 나지 않았다.
덕분에 가람의 성공률은 한없는 제로에 수렴했다. 웨이든이 찍어 주는 표적에게 접근해 소매치기를 시도했지만 모든 시도는 실패로 돌아갔다.
돈주머니를 빼기도 전에 가람과 부딪힌 행인들이 제 옷매를 추스르거나, 혹은 부딪혀 미안하다며 멀찌감치 떨어졌기에 미수범으로 잡혀가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러나 가람의 계속되는 실패에 웨이든은 노골적으로 불만을 터뜨렸다.
“좀 잘해 봐. 내가 그게 아니라고 했잖아!”
“했잖아.”
“너무 못하잖아. 너 할 마음이 있긴 한 거야?”
솔직히 말하자면 가람은 전혀 할 마음이 없었다. 그러나 웨이든에게 그 사실을 내색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나도 열심히 하곤 있어. 어떻게 설명만 듣고 바로 하라는 거야?”
정말로 억울한 표정을 지으며 가람이 자신의 노력을 호소하자 열을 올리며 가람에게 소매치기의 노하우를 가르치던 웨이든은 결국 답답함을 못 이기고 직접 나섰다.
사실 이런 행동은 그가 처음 의도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상황이지만 웨이든은 그 사실을 전혀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다. 감정이 때때로 이성을 지배한다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잘 보라고. 보고 따라 해.”
제 생에 이렇게 둔한 여자는 처음 봤다며 혀를 차던 웨이든이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덩달아 진지하게 맞장구치며 가람이 속으로 중얼거렸다. 거참 성실한 도둑놈이네.
“내가 저 여자에게 가서 부딪히고 잡아 줄 거야. 그리고 은밀하게 돈주머니를 빼서 너한테 주면 그걸 들고 떠나는 거야. 이 정도는 할 수 있겠지?”
“그 정도야 뭐.”
웨이든이 가리킨 여자는 쇼핑이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지 짐 가방을 잔뜩 들고 있었다.
과연, 저렇게나 짐이 많으니 돈주머니 하나 없어져도 쉽게 알아채기 힘들겠지.
가람은 슬슬 웨이든이 대상으로 삼는 사람들의 공통점을 알 것 같았다.
“잘해. 눈치껏 가까이 와.”
잠시 가람을 미덥지 않다는 듯 바라보던 웨이든은 곧 당당하고 큰 보폭으로 목표물을 향해 걸어갔다.
그대로 스쳐 갈 것같이 보였지만 그는 실수를 가장하여 여자와 호되게 부딪혔다.
짐이 바닥에 흩어지고 엉덩방아를 찧기 직전의 여자를 잡은 그의 손이 슬쩍 돈주머니를 빼낸다. 정말로 날렵한 손놀림이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미처 못 봤네요.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미끈한 제 얼굴을 무기 삼아 멋들어지게 웃어 보이는 웨이든의 얼굴에 여성의 시선이 고정된다.
가람은 혀를 차며 골목 안쪽에서 걸어 나왔다. 일행인 것을 들키면 곤란하니 골목 안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가람이 걸어오는 것을 발견한 웨이든이 슬쩍 미소 지었다.
가람에게 그렇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사실 웨이든의 속셈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마침 근처를 지나는 경비대가 있으니 돈주머니를 가람에게 넘겨주고 그녀를 소매치기로 몰아 실컷 골려 주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그런 속내를 꿈에도 모르는 가람은 순진한 걸음으로 자신에게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