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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141화 (141/256)

31화

잔뜩 기대에 젖어 있던 웨이든이 일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가람이 그의 팔뚝을 움켜쥐었을 때였다.

천천히 다가온 가람은 웨이든에게서 주머니를 받아 가는 대신 그의 팔을 잡아 소매치기 목표인 여자에게 내밀어 보여 주었던 것이다.

뒤늦게 상황을 파악한 웨이든이 팔을 빼려고 했지만 가람의 우악스러운 팔 힘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이거 혹시 아가씨 지갑 아니에요?”

“어머!”

짧게 비명을 올린 여자는 순식간에 상황을 파악했다. 가람은 침착하게 상황을 정리해서 그녀가 지금 한 판단이 옳음을 확인시켜 주었다.

“소매치기당하실 뻔했어요.”

“소매치기라고요!?”

여자가 외친 말은 지나던 치안대를 불러오기 충분한 성량을 갖고 있었다.

안색이 변해 너무나 놀랐음을 피력하며 소리치려는 그녀의 앞으로 치안대가 후다닥 달려오더니 일단 웨이든의 사지를 붙잡았다.

그 신속함은 최근 칼츠버그의 치안대를 질타하는 여론을 다분히 의식한 것이었다.

“무, 무슨! 야! 너 어떻게!”

기겁한 웨이든이 발광하며 팔다리를 허우적거렸다. 붉으락푸르락하는 그 반응이 심상치 않았던지 치안대 중 한 명이 가람에게 질문했다.

“혹시 아는 사람입니까?”

“설마요. 제가 저런 소매치기와 알고 지낼 사람으로 보이시나요?”

제법 있는 행색의 여행자처럼 보이는 가람은 절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가람의 깔끔한 부정에 치안대는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웨이든을 연행해 유유히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귀를 따갑게 하는 웨이든의 욕지거리가 그림자처럼 남아 귓가를 간질이다가 곧 사그라진다. 소매치기를 당했던 여자도 웨이든과 함께 떠난 모양인지 보이지 않았다.

순식간에 정리된 상황 속에서 가람은 홀가분하게 상회로 걸음을 옮겼다. 빤히 보이는 웨이든의 속셈을 못 알아채는 것이 오히려 힘든 일이었다.

그녀는 사실 이 골목에 도착했을 때부터 규칙적으로 순찰을 도는 치안대를 눈여겨봐 둔 상태였다.

계속해서 소매치기를 실패해 웨이든이 직접 나서게 하고 그를 연행시킨다. 이것은 모두 가람의 작전이었다.

“어? 혼자 오신 겁니까? 웨이든은요?”

홀로 상회로 돌아온 가람에게 서기가 어안이 벙벙한 표정으로 질문했다. 가람은 담담하게 대답해 주었다.

“늘 하던 취미 생활의 대가를 치르고 있죠.”

“설마.”

짚이는 구석이 있는 표정에 가람은 무언으로 긍정해 주었다. 미간을 짚고 한숨을 내쉬는 그에게 가람은 짧은 위로를 건네었다.

솔직히 가람은 웨이든에게 심한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기 때문에 그 위로는 의례적인 것이었다.

심할 것은 또 무엇인가? 어차피 그 짓은 웨이든이 제게 하려던 장난질이었는데. 똑같이 돌려준 것뿐이었다.

“소매치기 같은 경범죄는 한 달 정도의 감옥 생활이니까 곧 돌아올 거예요.”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정말로 보내시다니.”

서기는 원망하는 듯 후련해하는 듯 복잡한 심정이 어우러진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언젠가 한 번 대가를 치르기를 바랐지만, 그래도 막상 제 친구를 감옥에 보내고 나니 기분이 그리 좋지만은 않은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웨이든의 장난질에 협조하긴 했으니 거래는 성립된 것이다. 가람은 자신의 보수를 받아야겠다는 태도로 당당히 요구했다.

“이제 자리 비었죠?”

가람은 사실 웨이든이 순순히 비켜 주리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성격이라면 은근슬쩍 말을 바꾸어 제 장난을 질질 끌고 갈 것이 분명했다. 그녀는 일을 조금 확실하게 처리한 것뿐이었다.

“어쨌든 사람이 필요한 것은 사실이니. 따라오시죠.”

서기는 자리에서 일어나 서류 몇 장을 챙겼다. 그러더니 문득 뭔가 떠오른 표정으로 가람에게 질문했다.

“혹시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라 제게 웨이든의 허가가 필요한지 물어봤던 겁니까?”

가람은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 능청스러운 얼굴에 서기는 잘못 걸려든 제 친구의 명복을 빌어 주고 싶었다.

“제가 그렇게 안 했으면 웨이든이 그렇게 했을 테니까요.”

“그건 그렇죠.”

가람의 말에 서기는 자신의 친우에 대해 상기하고 곧 깨달음을 얻었다. 굳이 자신이 걱정할 필요도 없이 어디서든 잘 지내는 녀석이었다.

아마 철창에 갇히더라도 암컷 쥐라도 꾀어내 열쇠를 훔쳐 탈출할 녀석이다.

웨이든이 알게 된다면 스스로의 인생에 대한 고찰에 빠져들 만한 평가였다.

어쨌든 서기는 웨이든을 머릿속에서 털어 버리고 그 녀석 대신 떠안게 된 일에 대해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다들 착한 사람들입니다.”

앞서 걷던 서기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가람은 그 말이 자신이 함께 일하게 될 사람들에 대한 것임을 뒤늦게 알아챘다. 어딘가 안심시키려는 것 같은 태도에 가람은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

웨이든을 감옥에 보내 버리는 수완을 보여 주긴 했지만 자신의 외형이 불러일으키는 편견은 쉽게 사라질 만한 성질의 것이 아니다.

서기는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일해야 하는 젊은 동양 여자를 배려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배려는 고마운 것이지만 가람은 묘한 기분이 들었다. 지금 자신에게 해야 할 말은 그런 것이 아닐 텐데, 갑자기 공작성에서 무보수로 일하고 싶어 하는 인물이 수상하지도 않단 말인가?

어째서 무보수로 공작성에서 일하고 싶어 하느냐는 의문은 서기가 가지기 충분한 것이다. 그리고 가람은 그 질문에 대해 타당하게 느껴질 만한 거짓 답변을 여럿 준비해 둔 상태였다.

그러나 그런 만반의 준비가 허무해질 만큼 서기는 아무런 질문을 하지 않았다. 가람은 서기의 이어지는 말에서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칼츠버그 공작님은 좋은 분이죠. 게다가 당신은 동대륙 사람이니 상회 내에서 할 만한 일도 많을 거예요. 열심히만 한다면 원하던 결과가 있을 겁니다.”

“제가 원하는 결과가 뭔지 아시고 그런 말씀을 하시나요?”

“저를 얕보시는군요. 사실 저도 처음엔 무보수로 일하려고 하는 것이 좀 이상하다고 생각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현명한 방법이더군요. 칼츠버그는 동대륙 사람을 필요로 하는 일이 많긴 하지만 좀처럼 채용을 하진 않죠. 어디나 그럴 겁니다. 출신도 알 수 없는 사람을 큰돈이 오가는 거래에 쓸 수는 없지요. 그러니 일단 일을 해서 스스로를 증명하고 나서 정식으로 채용됨을 기대하시는 거 아닙니까?”

의문형으로 매듭짓기는 했지만 서기는 스스로의 추리를 확신하고 있는 표정이었다.

가람은 괜히 살을 붙이는 대신 그의 추측을 긍정하기로 했다. 쓸데없이 생각이 많은 사람은 이런 면에서 매우 편리하다.

“맞아요. 똑똑하시군요.”

“뭘요. 당신의 방식은 일종의 투자니까요. 이해하기 어렵지도 않았습니다. 저도 서기 일을 하긴 하지만 상인인지라. 상인의 기본은 투자죠. 어쨌든 투자가 성공적이길 바랍니다.”

제 생각이 맞아 듦에 뿌듯한 표정을 지은 서기는 가람의 앞날을 축복해 주었다. 가람이 생각하는 성공과 서기가 생각하는 성공은 기준이 조금 다른 것이겠지만 가람은 고맙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고마워요.”

“자, 좀 빨리 걸을까요. 해 지기 전에는 들어가는 게 좋으니. 그리고 방은 웨이든이 쓰던 방을 쓰시면 됩니다. 아마 침대 시트를 바꾸는 것이 좋으실 겁니다. 이상한 것이 묻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조금 민망한 듯 마지막 말을 빠르게 마무리한 서기가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그러지 않아도 청소를 할 생각이긴 했던 가람은 조금 뒤늦게 ‘이상한 것이 묻어 있다.’의 말뜻을 깨달았다.

그리고 굳이 방이 지저분하지 않더라도 통째로 쓸고 닦기로 결심했다. 고작 며칠이라 해도 웨이든의 방탕한 생활이 묻어나는 방에서 지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상회와 공작성의 거리가 그리 멀지 않았기 때문에 오래 걸을 필요는 없었다. 서기의 안내에 따라 외성의 성문을 지나 내성으로 들어서자 사뭇 분위기가 다르다.

외성이 마치 화려한 거리 같은 느낌이라면 내성은 그야말로 성이라는 느낌이었다.

줄줄이 늘어선 대리석 기둥과 값비싼 집 안 장식품이 여기저기 전시되어 있었는데, 동대륙 무역의 대가라는 명성답게 동대륙에서 공수해 온 것 같은 장식물도 여럿 보였다.

공작성의 거대한 회랑을 지나고 경비가 늘어선 복도를 따라 걸으며 가람은 패스를 찾는 일이 생각보다 수월치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예상한 것보다 공작성에는 눈이 많았다. 굳이 가람이 성을 돌아다니는 것을 제지하지 않는다고 해도 이렇게나 많은 눈을 달고 움직이는 것은 좀 부담스러운 일이다.

늘 홀로 패스를 찾아다녔던 가람이기에 그 사실은 유독 무거웠다.

“사람이 참 많죠?”

사각지대가 어디쯤 있을까 하고 몰래 집을 둘러보던 가람은 서기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슬쩍슬쩍 곁눈질로 살폈는데도 서기는 다 알고 있다는 표정이었다. 순간 등줄기를 따라 긴장감이 빳빳하게 일어났다.

“네. 많네요.”

수상하게 보였을까? 여유로운 척 대답했지만 가람은 조금 초조했다. 그러나 지나친 기우인 모양이었다.

“칼츠버그 공작성은 성 중에서도 화려하고 우아하기로 유명하죠. 게다가 딱 보기에도 집에 부가 넘쳐흐르니 어지간한 귀족들이라도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거의가 넋을 놓는답니다. 물론 귀족 자존심이 있으니 대놓고 바라보진 않지만요. 그렇게 흘끔거리지 말고 정식으로 감상해도 괜찮아요.”

빙글빙글 웃는 서기의 얼굴에는 장난기가 묻어나고 있었다. 아마 그는 때때로 이런 식으로 집을 방문하는 방문객들을 놀려 주며 즐거움을 얻는 모양이었다.

예상치 못한 짓궂은 면모다. 웨이든과 친우이면서도 거의 닮은 점이 없어 의아했는데 이런 점은 좀 닮은 것 같다. 가람은 그 생각을 조용히 말했다,

“이런 장난기는 웨이든을 닮으셨군요.”

“예?”

서기가 기대한 반응은 가람이 조금 쑥스러운 듯이 뺨을 붉히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기대와 현실에는 약간의 괴리가 있었고, 그 사실은 서기를 당황시켰다.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해 헤매는 서기에게 가람이 결정타를 날렸다.

“역시 친구끼리는 닮게 되나 봐요. 그쪽은 차분한 성격이라 생각했는데 의외네요.”

어깨를 으쓱인 가람은 서기가 무언가 말을 하기 전에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화제를 바꾸었다.

“그러고 보니 저희 아직 이름도 모르네요. 성함이 어떻게 되시나요? 전 가람이에요.”

서기는 방금 들은 충격적인 의견에 항의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일단 물어 온 질문을 무시하지 못하고 대답했다.

“아, 저는 도인입니다. 도인 뷔 데버너. 준남작이지만 그냥 도인이라고 부르면 됩니다.”

“아, 귀족이셨군요.”

“뭐, 거의 평민입니다. 영지도 없고, 제 성도 없고, 물려줄 수도 없고. 그냥 능력이 있어 받은 직급에 불과하니 크게 신경 쓰지 마십시오.”

그가 굳이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가람은 전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반면 도인은 가람의 말이 매우 신경 쓰이는 모양이었다.

끈질기게 질문하려는 도인의 기색을 읽고 가람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리고 적당히 타당한 지적으로 그의 주의를 돌렸다.

“그런데 제가 웨이…….”

“혹시 이 방이 제가 일하게 될 곳인가요?”

가람이 눈앞의 나무문을 턱짓했다. 사실 도인이 가람의 흘끔거림을 놀렸을 때부터 두 사람은 더 이상 걷지 않고 있었다.

걸음을 멈추었으니 목적지에 도착한 것일 거라 추정한 가람이 그 사실을 지적한 것이다.

두 번 연이어 때를 놓치자 도인은 다시 그 주제에 대해 말을 꺼내기 아주 어색해졌음을 깨달았다.

여기서 더 물고 늘어지면 소심한 남자가 될 뿐이다. 그는 한숨을 삼키고 포기하는 방향으로 스스로의 마음을 추슬렀다.

“예. 여깁니다.”

작은 나무문.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문이었다. 도인은 노크도 없이 그 문을 벌컥 열었다.

방 안에는 서류와 책, 그리고 몇 개의 원목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두 개의 책상을 제외하곤 모두 비어 있었다.

그나마도 하나는 올바르지 못한 용도로 사용되고 있었다. 누군가 의자 대신 책상 위에 앉아 있었던 것이다.

문이 열리자마자 후다닥 책상에서 내려오긴 했지만 장님이 아닌 이상 못 볼 리가 없다.

도인을 본 두 남자는 나쁜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있었다. 그 둘에게 서릿발 같은 도인의 말이 내리꽂힌다.

“하라는 일은 안 하고 또 놀고 있는 겁니까?”

가람은 눈을 가늘게 떴다. 깨갱 하는 두 남자 중에 한 남자가 몹시 낯익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그를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 얼굴이긴 한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러나 가람보다 남자가 그녀를 기억해 내는 것이 더 빨랐다.

그는 책상에서 내려와 어정쩡하게 서서 도인을 흘긋거리다가 뒤늦게 가람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어, 당신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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