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43화 (143/256)

33화

게릭은 가람에게 감정이 없느냐 물었지만 절대 그렇지 않았다. 온통 흐릿한 감정들 사이에도 독보적으로 존재하는 감정이 있었다.

갈망. 너무나 원해 원한다는 사실마저 당연하게 되어 그저 그것이 삶의 의미가 되어 버린, 늘 그것에 둘러싸여 있어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할 정도로 너무나, 너무나 원하는.

그것을 위해서라면 눈앞의 자신을 좋아하는 것이 빤히 보이는 청년의 감정 정도는 얼마든지 이용해 줄 수 있었다.

청년에게는 잔혹한 일이 되겠지만 이용할 수 있는 것이 보이는데 어떻게 가만히 있을 수 있단 말인가.

하물며 그것이 바라 마지않는 목적을 달성하기 더없이 마땅한 수단이라면.

“예…….”

에루시오가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가람은 생긋 웃었다. 기억에 따르면 그에게 이렇게 웃어 주는 것은 거의 처음 있는 일이다.

“혹시 알려 줄 수 있나요? 구경할 수 없다는 건 알지만, 그래도 위치만이라도 알고 싶어요.”

가람은 에루시오가 절대 자신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음을 알고 있었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이용하는 것은, 그것도 제게 호감을 품고 있는 상대의 감정을 기만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그러나 가람의 마음 깊이 어딘가 어두운 부분이 차갑게 읊조린다.

내키지 않을 것은 또 무엇인가? 어차피 패스를 모아 본래 세계를 되찾으면 다시 볼 일도 없을 곳인데.

시커멓게 차오르는 차고 묽은 감정을 외면하며 가람은 맑은 눈동자로 에루시오를 바라보았다. 사심 하나 없는 것 같은 표정은 완벽하게 연기된 것이다.

그를 통해 공작의 방을 알아낸다고 해서 당장 쳐들어가거나 하는 무식한 방법으로 그에게 피해를 끼칠 생각은 없었다.

이 질문은 그저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정보 수집의 일환일 뿐인 것이다.

에루시오는 그 날 저녁 가람과 함께 복도를 거닐며 어떤 지점으로 가 그곳의 두 층 정도 위에 공작의 방이 있음을 알려 주었다.

그 사실은 가람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지만 그래도 그로 인해 확신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제법 큰 수확이었다.

이제 그곳이 어떤 용도로 사용되는 방인지 알았으니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도 결정할 수 있다.

가람은 푸르스름한 밤 아래에서 슬쩍 붉게 물든 에루시오의 귓불을 무시하며 복도를 거닐었다.

뒤따르는 에루시오의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고 있음을 가람도 알고 있다. 그 반응의 이유도 알고 있다. 정말로 그저 알고만 있었다.

가람의 심장은 단 한 박자의 감흥도 없이 침착하게 뛰고 있다. 그 담담한 심장이 에루시오에게 느끼는 것은 아주 산뜻한 감정이었다. 편리함. 그는 편리하다.

그것은 아주 독특한 경험이었다. 트리거와 같이 돌보고 싶어 하는 옅은 온기 어린 감정이 아니라 채 여물지 못한 채 맹목적으로 다가와 친절하게 굴고 싶어 안달이 난 그 태도는 예전이라면 가람에게 깊은 감동을 선사했을 것이다.

그러나 가람은 에루시오에게서 범용으로 사용되는 어떤 도구에게서 느끼는 것과 같은 무게의 감정을 느낄 뿐이다.

예전이라면. 무심하게 생각하면서도 가람은 그 단어에 이질감을 느꼈다. 다시 스스로에게 되묻는다.

과연 정말로 내가 감동을 느꼈을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가람은 작은 의문을 흩어 버리고 에루시오와 작별했다. 그리고 다음 단계에 착수했다.

자신이 가야 할 장소에 주인이 있음을 알았으니 이제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인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처음 이 저택에 들어왔던 때와 같이 하루하루 착실하게 일하기 시작했다.

서류는 더욱 꼼꼼하게 처리하고, 간혹 남들보다 빨리 끝냈음을 은근히 주변에 알리기도 하면서 가람은 천천히 스스로의 유능함을 내보였다.

가람이 맡는 서류의 분량은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고, 며칠 후 가람은 남들의 서너 배는 많은 양을 하면서도 그들의 반도 안 되는 시간 만에 일을 끝내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것은 윗사람을 만나기 위한 가장 정석적인 방법이었다. 시간이 좀 들긴 하지만 가람은 시간이 많다. 그녀는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람의 계획대로 기회는 곧 찾아왔다. 그것은 여느 때와 같은 한가로운 오후에 갑작스러운 부름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가람이 저택에 들어오고 나서 약 스무 날이 지났을 무렵, 그녀의 꼼꼼한 일 처리에 대단히 감명받은 누군가가 가람의 존재에 대해 공작에게 고한 모양이었다.

“공작님께서 부르시니 자리를 정리하고 따라오세요.”

늘 오가며 다과를 전해 주던 하녀가 조용히 말했다. 가람은 자신이 기다리던 것이 드디어 왔음을 깨닫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딱히 정리할 것은 없었다. 일은 애초에 다 끝냈기 때문이다.

게릭이 가람을 바라보며 고무적인 손짓으로 무언가를 표현하고 싶어 했지만 가람은 해석할 수 없었다. 하지만 굳이 추측하자면 축하나 격려의 의미가 담겨져 있을 것이다.

“공작님 앞에서는 예를 갖추세요.”

종종걸음으로 걷던 하녀가 등 뒤의 가람에게 충고한다. 가람은 담담하게 수긍했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공작의 집무실에 도착했다.

생각보다 몹시 가까이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었는데도 지금까지 공작을 만나지 못했다는 점이 불가사의할 정도였다.

어쨌거나 보초가 열어 주는 문 안으로 들어서자 하녀가 조용히 뒷걸음질로 물러났다. 방 안에 들어선 것은 가람밖에 없었다.

“아, 왔군.”

문이 열리는 기척을 느끼고 책상 앞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서른 초반 정도 되어 보이는 선량한 인상의 미남자였다.

항간에 도는 소문을 듣고 냉철한 이미지를 상상하고 있던 가람으로서는 조금 의외였다.

색이 옅은 금발과 선량해 보이는 맑은 푸른 눈이 인상적이었는데 장식적인 수염 아래로 단아한 입술이 시선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었다.

“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답 직후 가람은 자신의 말이 적당한 인사말이었는지 조금 고민했다. 공작은 흐음, 하고 팔짱을 끼더니 고개를 조금 젖히고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이라고?”

꿰뚫는 것 같은 시선이었다. 선량하던 얼굴이 단숨에 돌변했다. 등줄기를 따라 꼿꼿하게 일어서는 긴장을 내리누르며 가람은 책잡히지 않을 만한 자세로 그 앞에 섰다.

“네. 한가람입니다.”

“이거 의외인데.”

칼츠버그 공작이 턱을 매만지며 미간을 좁혔다. 그는 가람의 반응을 이끌어 내려는 듯 간격을 넓게 두고 말을 이었다.

“웨이든을 내쫓고 대신 들어와 며칠 동안 무섭도록 완벽하게 일했다고 하기에 어떤 야심가인가 했더니.”

공작은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그 사실은 가람을 더욱 긴장하게 만들었지만 겉으로 보일 정도는 아니었다.

그녀는 공작이 말을 모두 끝내고 자신에게 입을 열기를 요구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섣불리 입을 열었다가 황소의 뒷발에 밟혀 죽는 개구리 꼴이 되면 곤란하다.

“눈에 야심이라곤 없군.”

가람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호선을 그리는 입술에 공작의 한쪽 눈썹이 슬쩍 올라간다. ‘웃어? 이것 봐라.’ 하는 생각이 든 공작이 다소 도발적으로 질문했다.

“그래, 무슨 속셈이지?”

“속셈은 딱히 없습니다.”

“속셈이 없다?”

“그저 서대륙 귀족가의 문화를 접해 보고 싶었을 뿐입니다.”

대답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인지 공작은 눈살을 찌푸렸다. 가람은 스스로 대답하면서도 이 대답이 몹시 가식적으로 느껴지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가람을 응시하던 공작이 툭 털어 내듯 손짓했다.

“뭐, 자네는 인재야. 다른 면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산술적인 서류 처리에서는 아주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네. 그래서 한 가지 제안을 하고 싶군.”

제안이 있으리라는 것은 예상했던 바이다. 가람은 뒷말을 기다리며 담담하게 공작을 응시했다.

“정식으로 우리 상회에서 일해 줬으면 좋겠군. 지금처럼 웨이든 대신이 아니라. 그리고 조금 더 중요한 일을 해 줬으면 하는데…….”

바라 마지않던 제안이다. 패스만 찾으면 미련 없이 이 성을 떠날 것이지만, 적어도 패스를 찾는 동안에는 좀 더 자유로운 위치에 있을 필요가 있었다.

만약 정식으로 직원이 된다면 적어도 에루시오만큼의 활동 영역을 확보할 수 있으리라.

며칠 동안 열심히 일한 이유는 바로 이것을 위한 것이었다. 가람이 냉큼 그러마 하고 대답하려는데, 공작이 슬쩍 사족을 붙였다.

“물론 자네의 신분을 확실히 한 다음에 말이야. 다행히 우리는 동대륙과 많은 교류를 하고 있어서 자네가 어느 가문의, 어떤 지방의 사람인지도 확인할 수 있지. 사실 할 수 있게 된 지도 얼마 되지 않았지만.”

이건 예상치 못한 것이다. 가람은 낭패한 기분이었다. 칼츠버그 상회에서는 동양인을 중요한 업무에 고용하지 않았고, 고용한다고 해도 거의 바깥일인 통역 따위였다.

그래서 가람이 내부에 들어오기 위해 웨이든을 이용한 것이 아니던가.

물론 많은 수고를 들인다면 동양인의 신분을 증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수고를 들이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런 수고를 들인 적도 없었기 때문에 가람은 스스로의 신분을 증명하는 것에 대해 전혀 걱정하지 않았던 것이다.

‘일을 너무 잘했나?’

그런 수고를 감수하면서까지 자신을 붙잡고 싶어진 건가. 가람은 적당히 할 걸 하고 뒤늦게 후회했지만 아마도 적당히 했다면 공작을 만날 일도 없고, 그가 어떤 사람인지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결국 이 일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우리 상회의 가족이 될 사람이 저쪽 대륙에서 범죄를 저지르고 도망쳐 오기라도 했다면 큰일이지 않나? 아, 물론 자네가 그랬을 리는 없겠지만. 어디까지나 만약을 위한 것이네. 뭐든 확실히 하는 것이 좋지.”

칼츠버그 공작의 시선이 탐색하듯 가람을 응시했다. 그 시선을 받으며 그녀는 침착하게 머리를 굴렸다.

시골의, 칼츠버그 영지의 정보가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시골 출신이라고 할까? 하지만 시골 출신이 어떻게 서대륙까지 올 돈을 마련할 수 있지?

아니면 일단 얼버무리고 제안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고 할까. 아니야. 이건 의심을 살 거야.

가람은 지금 이 순간이 패스를 찾기 위한 방법을 결정해야 할 때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지간하면 느긋하게 정보를 수집하며 신뢰를 쌓아 올바른 방법으로 공작의 침실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예를 들어 위층을 출입하다가 하녀와 슬쩍 친해져서 청소를 도와준다거나 하는 명목으로 방을 방문하는 등의 법에 위배되지 않는 방법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없다.

가람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자신이 밟았던 동양의 지명은 거의 기억하고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몇 개 정도는 머리에 담고 있었다.

중요한 것은 오직 패스뿐. 그것에 어떻게 도달하는지는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방법적인 것이든, 정신적인 것이든.

“칼바람 산맥 아래의 하늘가에서 자랐어요.”

“하늘가? 그쪽이라면 내륙이라 자주 가진 않지만 제법 이름 있는 가문이라 들었지.”

제길. 안타깝게도 칼츠버그 공작은 하늘가를 알고 있었다. 대충 둘러댈 생각이었던 가람은 자신의 거짓말이 금세 탄로 날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좀 더 많은, 치밀한 거짓말이 필요했다.

“가문 사람은 아니고…… 그쪽 마을에서 자랐어요. 사실 머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는데, 사는 곳을 자주 옮겨 다녔거든요. 하지만 그곳에서 가장 오래 머물렀어요. 보시다시피 여행을 좋아해서 어릴 때부터 많이 다녔기도 하구요.”

“부모님은?”

“여행 중에 돌아가셨어요.”

“연고가 없다는 뜻이로군. 곤란한데. 혹시 신분을 증명할 패가 있는가?”

“네.”

가람은 늘 지니고 있던 옥색 패를 보여 주었다. 하늘 운화가 선물한 그것이다.

공작은 그것으로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가람은 이런 조치는 임시방편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잠깐 동안은 스스로를 증명할 수 있겠지만 결국 깊게 파고들었을 때 모든 것이 탄로 나게 된다.

그녀가 범죄자가 아니라는 것은 증명할 수 있지만 가람이 절대로 증명할 수 없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성장 과정은 절대 증명할 수 없다. 어디서 자랐는지, 어떤 친구를 사귀었는지. 물론 거기까지 가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안 간다는 보장도 없다.

누구도 어린 시절을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 하늘에서 뚝 떨어진 인물인 자신은 분명 수상한 인물이었다.

가람은 아주 잠시 잠깐 고용인의 뒷조사를 하는 거냐 하고 도덕에 호소할까 하는 충동이 들었지만 곱게 그 말을 삼켰다.

상대는 공작이다. 높디높은 단상 위에 있는 사람. 이곳의 신분 제도가 어찌 되는지는 모르지만 이방인의 주장이 먹힐 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차라리 멍청하고 배 나온 색욕 가득한 뚱보라 자신을 침실로 끌어들이려는 수작이라도 부렸다면 나았을지도.

아니, 그랬다면 사태는 더 나빠졌을지도 모른다. 공작의 침실에서 공작의 시체가 발견되었을 테니까.

“그래, 나가 보게. 계약서는 신분 확인 후에 쓰도록 하지.”

패를 다시 허리춤에 정리하며 가람은 고개를 깊게 숙이고 방을 나왔다. 만나 본 공작은 매우 정석적인 인물이었다. 부패하지도 않고 명석한 두뇌에 냉철한 인물.

몹시 선량한 인상이라 멋모르는 사람이라면 얕잡아 볼지도 모르지만 아마도 그건 그가 유도하는 것인 듯하다. 가람 또한 그 선량한 인상에 조금 방심하지 않았던가.

방법은 정해졌다. 복도를 지나 늘 일하던 집무실의 문을 열자 게릭이 반색하며 가람을 반겼다.

“어땠어요? 공작님이 뭐라고 하세요? 잘 되면 한턱내는 겁니다.”

“아직 그렇게 잘 되진 않았어요.”

“이런. 하지만 좋은 소식 있을 거예요.”

“그러길 바라야죠. 그런데 혹시 에루시오 오늘 오나요?”

앞으로의 계획. 그것에는 에루시오가 필요했다. 어떤 용도로든 그는 유용하게 쓰일 것이다.

가람의 부드러운 미소에 게릭은 그녀가 공작에게 받은 제의로 인해 마음을 정한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의 상상은 순식간에 구만리 밖으로 뻗어 나가 어느새 기사가 된 에루시오와 공작성에서 출세한 가람이 결혼식을 올리는 순간으로까지 발전했다.

“아마 올 거예요!”

함박웃음을 지으며 외치는 게릭에게 가람이 마주 미소 지었다.

“빨리 왔으면 좋겠네요.”

와, 정말 좋아졌나 봐. 에루시오 좋겠구만. 게릭이 속으로 히죽 웃으며 다소 방정맞게 맞장구쳤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는 달리 가람의 머릿속은 차가운 계산으로 가득했다.

웃으며 휘어지는 눈 안에 자리한 서늘함은 둔한 게릭으로서는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 차가움은 의도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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