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가람은 일부러 이 상황을 계산적으로 생각하려고 노력했다. 감정을 배제하고 이성을 끌어 올린다.
지금 이 상황에 감정은 하등 쓸모가 없었다. 불안과 공포, 깊은 죄책감 따위에 심취해서 어쩌겠다는 건가?
이런 판단이 비인간적이라고 해도 어쩔 수 없었다. 패스 앞에서는 저도 모르게 이렇게 되는 것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다. 가람은 지금까지 그렇게 생존해 왔고, 그렇게 스스로를 지켜 왔다.
그녀는 오래된 기억 속에서 자신이 꾸며 내려는 감정을 정말로 갖고 있던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했는지 떠올렸다. 앞으로의 작업에 필요한 자료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꽤 어색함이 따르겠지만, 에루시오는 비교적 무딘 성격이고 가람에 한해서는 아마도 냉철한 판단을 할 수 없는 상태일 것이기 때문에 그녀는 그 점에 대해서는 딱히 고민하지 않았다.
그 날부터 가람은 에루시오와 저녁 데이트를 즐겼다. 처음에는 어색해하던 에루시오는 점점 기대를 갖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일이다. 가람이 그렇게 되도록 의도적으로 행동하고 있었으니까.
그러나 가람은 말을 함으로써 현재 상황을 구체화시키는 행동은 피했다. 그리고 에루시오도 이 설레는 상황을 즐기는 것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추궁하지 않았다. 가람에게 있어서는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데이트의 시간은 점점 늦어졌고 그 범위는 넓어져 갔다. 복도를 잠시 거니는 것으로 시작된 데이트는 며칠이 지나자 공작의 후원으로까지 그 영역을 확장했다.
두 사람이 워낙 자주, 그리고 밤늦게 공작성을 배회했기 때문에 밤 순찰을 도는 순찰병들은 이제 두 사람을 목격해도 그러려니 하게 되었다.
공기보다 가벼운 입을 가진 게릭 덕분에 두 사람의 핑크빛 기류가 온 성에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제 슬슬 들어가 봐야 하지 않을까요?”
가람과 달리 다음 날 새벽부터 일어나야 하는 에루시오가 넌지시 말했다. 미련이 뚝뚝 묻어나는 어조였다.
데이트를 한 지 스무 날이 지났고, 가람이 착실히 그와 있는 시간을 늘린 덕분에 지금 시각은 자정에 가까웠다.
하지만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 인적이 드문 시간과 ‘그’ 위치에 순찰병이 없는 시간은 파악했고, 밤늦게 돌아다녀도 에루시오를 만나러 가는가 보다 하고 여겨지도록 자신에 대한 인식도 만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기숙사까지 돌아오는 시간을 벌어야 했다.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어요.”
영혼도 감정도 없는 말이었지만 효과는 대단했다. 가람의 작은 목소리에 에루시오는 망치에 뒤통수라도 맞은 것 같은 표정을 짓더니 곧 헤벌쭉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목이 떨어져 나가지나 않을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이런 모습을 목격할 때마다 가람도 죄책감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단단히 스스로를 다잡았다.
마음의 어두운 부분이 뾰족하게 속삭인다. 그에게 미안해? 그래서 뭐? 그와 정말로 사귀기라도 하려고?
아니면 정말 더 질질 끌기라도 할 생각이야? 아예 결혼해서 이쪽 세상에서 영원히 살지그래? 우습지도 않아.
이 말들은 효과가 있었다. 감정은 감정이고 현실은 현실이다. 휩쓸리는 순간 진흙탕으로 빠져 후회하게 될 것이다. 고지가 이제 눈앞에 있는데 어디로 시선을 돌린단 말인가.
다짐은 흔들리는 가슴을 묵직하게 내리눌렀다. 어둡고 깊은 그 속으로 가람은 계속해서 가라앉았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있다가 들어가요. 내일 피곤하겠지만.”
“아닙니다. 괜찮아요! 밤새도록이라도 이렇게 있을 수 있는걸요!”
에루시오가 급히 외쳤다. 순박하고 충성스러운 눈동자가 열렬히 사랑을 고백하고 있다.
가람은 낯간지러운 기분에 다시 마음이 조금 무거워졌지만 최선을 다해 그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고마워요.”
그 노력이 헛되지 않아 가람은 이틀 뒤 원하는 시간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매우 아슬아슬한 시점이었다.
공작이 가람의 신원에 대해 거의 파악했다는 말을 지나가는 소문으로 들었기 때문이다.
부정적인 신호는 아직 포착되지 않았지만 켕기는 구석이 많은 그녀를 초조하게 만들기는 충분했다.
그러나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면 큰일이었기 때문에 가람은 마지막 하나가 준비되기를 기다렸다.
작전에 필요한 것은 셋. 자신이 밤늦게 공작성을 돌아다녀도 수상히 여겨지지 않을 만한 이유와 공작의 방 창문 앞에 아무도 없는 시간, 그리고 마지막으로 공작이 이 성에 없는 날이다.
처음 둘은 이루어졌지만 마지막 하나가 해결되지 않은 덕분에 가람은 초조함과 싸우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했다.
어쩌면 에루시오와 결혼식을 올린 다음에야 패스를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자조적으로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가람은 공작이 반드시 성을 비울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공작은 상단의 주인이고, 상단의 주인은 위험한 일은 하지 않는다고 해도 계약을 위해 출장을 가야 할 일이 많을 것이다. 가람은 그 순간을 기다렸다.
하녀들의 수다에 끼어 슬쩍 지나가는 말로 질문해 얻어 낸 정보로는 약 일주일에 한 번씩 성을 비운다고 했다. 가람이 노리는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기다림과 데이트, 그리고 무료한 업무로 가득 찬 나날이 공기처럼 무게 없이 흘러갔다.
작전의 날까지 어느 것도 소홀히 할 수 없었기 때문에 가람의 피로는 점점 누적되었다. 하지만 그것은 정신적인 것에 한정되었고 육체는 매우 팔팔했다.
그녀는 일찍 업무를 마치고 에루시오와 저녁 데이트를 하기 전 비는 시간에 스스로의 육체를 담금질했다.
이번 작전에는 높은 육체 능력이 필요했다. 패스로 구입한다면 간단할 일이지만, 그건 낭비 중의 낭비다.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에 패스를 쓰는 것은 너무나 멍청한 짓이었다.
그런 반복적인 노력 속에서 나날은 흘러가 마침내 가람이 작전을 거행하기로 한 날이 되었다.
공작도 성을 떠났고, 에루시오는 훈련으로 바쁜 나머지 오늘은 볼 수 없다. 매우 적절한 날이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다시 잡기 힘들리라. 정신에 날을 세우며 가람은 언제나처럼 게릭에게 인사하고 집무실을 떠났다.
“오늘부터 숙소가 변경되셨어요.”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 가람에게 막 침대 시트를 끌어 내리던 하녀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가람은 그 발치에서 선반에 올려 두었던 물건들이 가지런하게 정리되어 한 묶음으로 묶여 있는 것을 발견했다.
지니고 있던 양날 검과 단검은 성으로 올 때 놔두고 왔으니 들켜선 안 될 물건이야 없었으나 그래도 하녀의 손을 탄 것이 꺼림칙했다.
짐에는 베이스캠프에서 챙겨 온, 이쪽 세계에서는 낯설기 짝이 없는 물건들이 여럿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그 전까지 전혀 낌새를 느낄 수 없었던 가람이 조금 굳은 얼굴로 되물었다.
“숙소가 변경되었다구요?”
“네. 제가 안내할 테니 이리로.”
가람이 기존에 묵고 있던 방은 침대 하나와 책상, 그리고 몇 개의 선반이 있는 작은 방이었다. 초라한 방이었지만 그래도 아늑한 맛이 있었다.
사실 가람은 방의 질에 거의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저 쥐나 벼룩이 끓지 않는 정도로 만족했다.
그리고 가람과 같은 일꾼들은 대부분 이런 방에 묵었으니 특별히 신경 쓸 일도 아니다.
“저기, 무슨 일이죠?”
하녀가 싸 둔 보퉁이를 들고 따라 걸으며 가람이 초조하게 질문했다. 가람은 이 이변이 달갑지 않았다. 작전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더욱 그러했다.
가람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종종걸음으로 걷고 있던 하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대답했다.
“공작님의 결정이세요.”
새침하긴 하지만 목소리에 별다른 경계는 없다. 이 하녀는 아는 것이 없는 것 같았다.
아리송해하던 가람은 잠시 후 방에 도착한 후 공작이 내린 결정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인상적인 업무 능력을 보여 준 모양이었다. 안내된 방은 일개 일꾼의 방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훌륭한 것이었다.
방의 창문은 은으로 장식되어 있었고 벽에는 수가 놓인 태피스트리가 걸려 있었다.
온갖 기하학적인 문양의 직물이 방을 장식하고 있었는데, 벽에는 책장까지 마련되어 있다. 심지어 침대에는 향낭도 들어 있었다.
가람이 정말로 이 상단에서 일할 생각이었다면 몹시 고무적인 기분이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올가미가 목을 조여 오는 것 같은 답답함을 느꼈다.
공작에게 잘 보이는 것까지는 좋았지만 그 후가 문제다. 별다른 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심각한 상황까지는 되지 않은 것 같지만 패스를 찾고 여기서 벗어나려고 할 때 공작이 과연 보내 줄까? 이렇게까지 욕심내는 인재를?
“공작님께 감사하시고 쉬세요.”
톡 쏘듯 말한 하녀가 질시하듯 바라보다 총총걸음으로 방을 나갔다. 홀로 남은 가람은 복잡한 얼굴로 주변 장식을 둘러보았다. 한숨을 쉬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신속히 제가 해야 할 일을 찾아 움직였다. 벌써 해가 지고 있다. 채비를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그녀는 가장 먼저 초에 불을 붙였다.
단 하나의 초. 그리 밝지는 않았지만 그 이상 밝을 필요도 없다. 초는 가람의 움직임을 그림자로 그려 내었다.
충분치 못한 빛이 그러하듯 초가 그려 내는 풍경은 음울하다. 적은 빛 속에서 가람은 검은 상의와 검은 바지를 입었다.
허리춤에 다는 고리 또한 검은 것이다. 거기에 꿰는 로프 또한 검으며, 갈고리 또한 검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온통 검은 가람은 마치 어둠에 스며들 것처럼 보였다. 마지막으로 그 위에 어두운 계열의 외투를 걸치자 장비가 모두 은폐되었다.
거울 앞에서 스스로를 점검한 가람은 조심스레 방을 나섰다. 복도의 순찰병들과 능숙하게 인사를 나눈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기색으로 후원으로 향했다.
후원과 연결된 공작성의 유리창. 7층 높이의 그 방이 그녀의 목표였다.
5층 창문으로 나가서 오른다면 더 쉽겠지만 안타깝게도 밤에 내부 계단을 사용하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몇몇 담당 하녀만이 오르내릴 수 있을 뿐이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이곳의 벽은 장식적인 세공이 가득하기 때문에 오르기 그리 어렵지 않다는 점이다.
물론 그것이 7층이라는 높이를 고정 끈 하나 없이 오르는 공포를 없애 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밤중 성벽에 깡깡거리며 정을 박고 줄을 고정하면서 오를 수도 없는 노릇이니 맨몸으로 벽을 타는 것 외에는 도리가 없다.
하지만 무섭다고 패스를 사용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가람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무섭다는 이유로 패스를 사용한 적이 없다.
그녀가 패스의 사용을 진지하게 고려하는 때는 어떤 방법으로도 그 패스의 획득이 불가능할 때뿐이다. 공포는 패스 사용의 이유가 될 수 없다.
후원으로 숨어든 가람은 주변을 충분히 살핀 뒤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들자 치마를 허리에 묶어 올리고 벽을 타기 시작했다.
어둠 속에서 벽을 타는 것은 생각보다 더 두려운 일이다. 그리고 허공에서 발을 떼는 용기와 체력의 소모를 견뎌 낼 인내도 필요하다.
다행스럽게도 가람은 충분한 인내와 용기를 갖고 있었다.
경비가 오기 전에 공작의 방 안으로 들어가야 했기 때문에 가람의 동작은 신속했다.
그녀는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벽을 올라 마침내 공작의 방 창문에 도착했다.
손등의 바늘은 정확히 창문 안을 가리키고 있다. 모든 일이 순조로워 가람은 그간의 준비 작업에 보람을 느꼈다.
창문 앞에서 잠시 방 안의 동태를 살핀 가람은 방 안에 별다른 기척이 없음을 확인하고 한 팔로 몸을 지탱했다.
몸을 지탱하는 팔에 단단하게 근육이 일어선다. 다른 팔로 가람은 문을 따기 시작했다.
창문의 잠금쇠 사이에 준비해 온 끌을 넣어 가볍게 두드리자 얇은 고리가 툭 끊어진다. 조심스레 방 안으로 밀어 넣은 발은 소리 없이 바닥에 안착했다.
그 상태로 가람은 커튼 뒤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온몸이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커튼 너머의 방 안은 몹시 고요했다. 공작이 머물지 않으니 방의 경계를 최소화한 모양이었다.
가람은 한숨 돌리며 혹시라도 있을 경비병을 대비해 커튼 틈으로 빠끔히 밖을 내다보았다.
방 안에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것을 확인한 가람은 거침없는 움직임으로 공작의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공작의 방에는 잠들기 전 서류를 훑어보기 위함인지 간이 책상이 놓여 있었는데 바늘이 그녀를 이끄는 곳은 바로 그 책상의 서랍이었다.
잠겨 있다면 부술 생각까지 했지만 다행히 서랍은 가람이 가볍게 잡아당기자 별 저항 없이 끌려 나왔다.
책상 서랍을 뒤적이려던 가람은 문득 어떤 소리를 들었다. 그녀의 모든 정신이 책상 서랍에 쏠려 있었기 때문에 그 소리를 들은 것은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것은 소리라기보다는 기척에 가까운 것이었는데, 공작의 침실 문 밖에서 나고 있었다.
기척의 위치를 탐지한 가람은 순식간에 이것이 어떤 상황인지 눈치채고 날랜 움직임으로 커튼 뒤로 숨었다.
가람이 커튼 뒤로 숨기 무섭게 곧 침실 문이 열렸다. 들어온 것은 하녀였다.
한 손에 등잔을 든 그녀는 방 안을 한 번 주욱 둘러보고 약간 흐트러진 침대 시트를 정리한 뒤 만족스러운 얼굴로 방을 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 커튼이 휘날렸다. 가람은 자신이 들어온 창문을 닫지 않았다는 것을 깨닫고 당황했다.
가람의 당황과는 상관없이 이상함을 느낀 하녀는 시시각각 가까워지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가람은 커튼에 가려진 채로 급히 창밖으로 몸을 뺐다. 그리고 창문 아래에 매달려 숨죽였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 탓에 별로 큰 움직임이 없었는데도 숨이 턱까지 찬다. 식은땀에 젖은 등을 차가운 바람이 후벼 팠다.
가람은 혹시나 제 숨소리가 들릴까 보이지 않는 머리 위의 기척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다행히 하녀는 창문의 고리가 망가진 것만 확인하고 짧게 푸념했다.
“이런, 망가졌잖아. 그래도 공작님이 없을 때라 다행이네.”
만약 공작이 방에 머물고 있었다면 창문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방치한 자신에게 문책이 돌아왔을 것이다.
그녀는 안도하며 자신의 행운에 감사했다. 그리고 걸쇠를 챙겨 방을 나섰다.
가벼운 걸음 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기다린 가람이 다시 창틀을 잡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한달음에 패스를 챙겨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온 그녀는 후들거리는 팔다리를 갈무리해 벽을 타고 내려왔다.
올라갈 때와 달리 내려오는 것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급히 내려오느라 팔다리를 긁혀 생채기가 좀 나긴 했지만 대수롭지 않은 상처다. 게다가 얻은 패스가 꽤 커서 더 기분이 좋았다.
공작의 방에서 손에 넣은 패스는 200패스.
가람은 750이라 떠오른 손등의 숫자를 흐뭇하게 내려다보았다. 250패스. 이제 정말로 조금밖에 남지 않았다. 한 달, 혹은 두 달. 가슴이 벅차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흘러나오려는 콧노래를 삼키며 말아 올린 치마를 내리고 자리를 떠나려던 가람은 돌아서는 순간 흠칫했다.
낯익은 얼굴. 새파랗게 질린 젊은 청년이 나무 뒤에 서 있었다. 배신감에 비틀린 입술과 흔들리는 시선.
에루시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