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화
에루시오는 스스로가 목격한 상황을 의심하고, 또 부정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가람은 흔들리는 그 표정에서 그가 상황에 대한 확신을 가질 만큼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지켜보았음을 깨달았다.
침묵으로 가득한 긴장 속에서 에루시오가 입술을 달싹인다. 그러나 흘러나오는 말은 없었다.
침묵 속에서 서로를 가르는 시선만이 현란하다. 에루시오는 한참 동안 와르르 쏟아질 것 같은 눈으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가람은 그 시선을 받으며 그의 다음 행동을 유추하고 그것을 무마하기 위한 방법을 강구했다.
아마도 소리를 질러 경비병을 모으려나. 머리가 잘 돌아간다면 경비에게 자신의 침입을 알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는 기사 지망생이니 이것은 그의 실적이 되겠지. 아니면 분노할까? 나를 이용했다고 감정을 터뜨릴까.
도망가는 건 어렵지 않다. 지금 차원 문을 열고 저쪽으로 넘어간다면 충분하겠지.
그러나 그 방법으로 이 일을 수습할 수 있을까? 수배가 된다면? 그 여파는 어디까지 흘러갈까. 수배가 된 상태에서 패스를 찾으러 움직일 수 있을까?
만약 여의치 않다면 패스를 사용해야 할 텐데. 패스를 써야 한다니. 그러느니 차라리, 에루시오만 조용히 시킨다면.
죽은 자는 말이 없는 법. 가람의 눈이 비릿한 결론을 머금고 가라앉았다.
그런 도중에도 머릿속은 치열하게 공방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녀로서도 에루시오를 입막음하는 것이 내키는 결정은 아니었다.
그러나 해야 한다면 망설임 없이 실행할 수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에루시오를 좀 방심시킬 필요가 있었다. 일단은 웃어 주는 것이 좋을까?
뒤엉켜서 시끌거리는 머릿속에서 그녀를 끄집어낸 것은 말을 떼기 전 입술이 떨어지는 아주 작은 소리였다.
대단히 긴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가람은 에루시오가 큰 소리로 발을 구르기라도 한 것처럼 민감하게 반응했다.
팽팽하게 조여진 긴장 위로 에루시오의 떨리는 목소리가 파고든다.
“왜……. 왜 거기서 나오시는 겁니까?”
한바탕 난리라도 치를 거라는 예상과는 달리 그의 반응은 대단히 온순했다. 가람은 입에서 뛰쳐나가려는 말을 잡아 삼켰다. 상황이 이런 이상 어떤 말도 변명밖에 될 수 없다.
가람은 그저 침묵했다. 그리고 에루시오가 자의적인 해석을 내놓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사실 이제 패스도 손에 넣었으니 이곳에 더 이상 미련이 없었다.
그런 가람의 굳은 표정을 바라보던 에루시오가 조금 망설이다가 다시 질문했다.
“무슨 일 있어요?”
걱정 가득한 그 말이 가람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에루시오는 염려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를 처음 발견했을 때 짓고 있던 표정과는 매우 달랐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의 표정 어디에도 배신감이나 분노는 없었다.
가람은 몹시 혼란스러워졌다. 그리고 의아했다. 왜 걱정하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건가?
함정일까? 방심하게 하고 수월하게 뒤통수를 치기 위함인가.
가람은 그의 행동을 세밀하게 분석했다. 시선과 입매,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손동작 하나까지.
“아무 일도 없어요. 그런데 에루시오는 여기에 웬일이에요?”
일단은 떠보기부터. 가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질문하자 에루시오는 잠시 혼란스러워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곧 질문에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그게. 가람 씨가 이쪽으로 갔다고, 여기 오면 만날 수 있을까 해서…….”
수줍게 고백한 에루시오는 아주 작게 ‘가람 씨가 저를 만나려고 이곳으로 오셨다고 생각했는데.’ 하고 덧붙였다.
경비병의 교대 시간을 파악하기 위해 데이트 장소로 거의 후원을 사용했으니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어쨌거나 저 달아오른 귓불은 연기가 아니다. 아니, 연기가 아니라 믿고 싶었다.
가람은 금방이라도 뽑을 듯이 붙잡고 있던 허리 뒤춤의 권총에서 손을 떼었다.
가람의 누그러진 분위기를 알아채고 에루시오가 조심스레 다가선다.
걱정과 혼란으로 가득한 그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어색하게 받아들이며 가람은 아주 찰나라도 폭력적인 방법으로 상황을 무마하려고 한 자신에 대하여 반성했다.
언제부터 자신이 이렇게 범죄 지향적인 사람이 되었단 말인가. 이건 다 모르드레드 때문이다.
예전에 자신을 알던 사람들이 지금의 모습을 보면 뭐라 생각할지. 새삼스러운 자각에 가람은 한숨을 삼켰다.
가람이 씁쓸한 표정을 짓자 에루시오의 눈이 더욱 염려로 물들었다. 그는 진심으로 가람을 걱정하고 있었다. 걱정의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그 감정은 진짜였다.
가람은 그에게 사과했다. 그를 죽이려는, 혹은 그에 준하는 상태로 만들려고 했던 결정에 대한 사과였다.
“미안해요.”
“미안하다니, 뭐가요?”
에루시오가 다급하게 가람의 말을 붙잡는다. 가람의 의도와는 달리 그녀의 사과는 에루시오가 불안해하던 어떤 부분의 기폭제가 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절박하리만치 되묻는 그에게 차마 ‘당신을 죽이려고 했던 게 미안하네요.’ 하고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다행히 가람은 섬광과도 같은 순발력으로 적당한 대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요.”
아직 그가 무엇을 걱정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이 남아 있지만 그 점은 사실 그리 중요하지 않다.
호감을 품고 있는 여자가 7층 높이의 벽을 타고 오르내리는 걸 목격했는데 무언들 걱정되지 않겠는가?
어쨌거나 가람은 적당히 이런 식으로 분위기를 몰아가서 대화를 수습하고 얼버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걱정했어요.’, ‘걱정하게 해서 미안해요.’, 그리고 가벼운 포옹, ‘잘 자요. 별일 아니었어요.’ 끝. 아름답지 않은가?
그러나 에루시오의 두 눈에 가득 차오르는 습기를 발견한 순간 가람은 계획이 아주 크게 틀어졌음을 깨달았다.
“역시 저는 의지가 되지 않는 거예요?”
“네?”
“저, 저 누나 좋아해요.”
돌연 그렇게 말한 에루시오는 다음 순간 둑이 무너지듯 울음을 터뜨렸다. 장성한 남자의 울음은 결코 아름다운 것이 못 된다.
다행히 깊은 밤이 가려 주어 가람은 에루시오의 수염 자국을 타고 흐르는 눈물이나 콧물을 세밀하게 보는 것은 피할 수 있었지만 다른 것은 피할 수 없었다.
시간을 의식했는지 목 놓아 울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억눌림을 참지 못하고 발작하듯 튀어나오는 깊은 흐느낌은 결코 가벼운 것이 아니었다.
그는 울음에 뒤섞어 드문드문 무언가를 고백했는데, 딸꾹질과 흐느낌에 묻혀 대부분 알아들을 만한 상태가 못 되었지만 그래도 말하고자 하는 의도는 파악할 수 있었다.
저는 정말 누나를 좋아해요. 나는 누나가 정말 좋은데. 누나 눈에 나는 애송이고. 누나가 힘든 일이 있어도 상담 상대도 못 되는, 나는 왜 이렇게 힘이 없는 애송이인가와 같은 이야기였다.
가람은 우는 청년의 어깨를 어색하게 두드리며 새삼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다시 반성했다. 쉽게 넘어가려고 해서 벌받는 거야.
“누, 누나는 제가 싫어요?”
어느 쪽인가 하면 가람은 딱히 에루시오에게 별 감정이 없었다. 그래도 지금까지는 꼬박꼬박 가람 씨라고 하던 사람이 갑자기 누나라고 하니 기분이 묘했다.
가람 누나. 누나. 귓가에 맴도는 그 목소리가 옛 기억을 끌어 올린다. 서툰 발음으로 ‘누나.’ 하고 말하던 검은 말이 떠올랐다. 그 환영 위로 에루시오가 울먹이며 말했다.
“아, 알아요. 누나는 공작님을 좋아하는, 흐끅. 그런 거라는 거.”
뜬금없는 소리도 이 정도면 수준급이다. 가람은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아 침묵했다.
그러나 침묵을 긍정이라고 생각했는지 에루시오가 다시 제 코를 들이켜며 말했다.
“다 들었어요. 새로운 방을 받았다고. 공작님이 점찍어 둔 상대라고, 공작님의 정부가 될지도 모른다고 라캄 경이…….”
가람은 갑자기 멍청이가 되고 싶었다. 저 정부라는 말이 어떤 뜻을 갖고 있는지 알지만 이번만은 알면서도 다른 뜻으로 받아들이고 싶었다.
‘정부, 국가에 있는 그런 거요?’ 하고 썰렁한 농담을 던지며 웃어 버리고 싶은 욕구가 무럭무럭 피어났지만 가람은 침착하게 질문했다. 그녀는 상황을 수습해야 했으니까.
“라캄 경?”
“제가 모시는 기사님이요.”
이야기를 들어 보니 어지간히 짓궂은 성격의 사람인 모양이다. 가람은 에루시오가 그에게 이런 식의 이야기를 들으며 심심찮게 놀려 먹혔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런 거 아니에요.”
“누나는 공작님을 좋아하는 게 아닌 거예요?”
“좋아하다니. 맹세코 그런 감정 없어요.”
타이르자 잠시 안심하던 에루시오가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 가람은 몹시 피곤했다.
“설마, 공작님이 강제로?”
공작은 성에 없는데, 에루시오는 모르는 모양이었다. 가람은 친절하게 알려 줄까 하다가 그 화제로 덜미가 잡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적당한 변명을 찾지 못해 가람이 입을 다물자 에루시오가 자신의 망상에 확신을 가지고 외쳤다.
“역시 그런 거였어! 이 나쁜 새끼!”
공작을 토막 내서 죽이기라도 할 기세였다. 에루시오는 몹시 흥분해서 자신의 추측에 대한 근거를 내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라캄 경이라는 사람에게 들은 것으로 보였는데, 대부분 귀족들의 어두운 부분에 대한 이야기였다. 출장이라고 핑계를 대고 고용인들과 놀아난다거나 하는 음모론이었다.
무차별적으로 쏟아지는 비난과 폭언에 가람은 속으로 공작에게도 사과했다.
어쨌거나 내버려 두면 공작이 돌아오는 대로 사달을 낼 것 같아 가람은 일단 에루시오를 말리기로 했다.
“에루시오. 공작님은 그러지 않았어요. 진정해요.”
“그, 그래요? 무슨 사정인지 제게 말해 줄 수 없나요? 제가, 제가 도와드릴 테니까.”
“미안해요.”
거의 미칠 것처럼 보이던 에루시오는 가람의 대답에 그대로 굳어졌다. 그러곤 이보다 더 비참할 수는 없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가 서 있는 곳에만 비가 내리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입막음당했군요. 약점을 잡혀서. 비열한 놈들!”
가람은 대체 자신의 어느 부분이 그렇게 연약하게 보였는지 몹시 의아했다. 에루시오는 방금 자신이 7층을 맨몸으로 오르내린 것을 잊어버린 것처럼 보였다.
“알았어요. 더 묻지 않을게요.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예요. 결국 전 수습 기사도 못 되는 종자에 불과하니까 저를 의지하시긴 쉽지 않겠죠. 이해해요. 하지만 방에서 도망쳐 나오는 걸 제가 본 이상 이제 방관할 수도 없어요. 전 누나를 좋아하니까. 제 심정을 이해하신다면, 제가 돕게 해 주세요.”
가람은 그제야 에루시오의 행동을 조금 납득할 수 있었다. 아마 자신이 오르는 것은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무슨 이유가 있어서 방에서 허겁지겁 도망쳐 나왔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7층에서 벽을 타고 내려올 만큼 위급한 일이 있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이 성의 사람들은 다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 인간이 있을 줄이야!”
분개하는 에루시오는 누군지 모를 미지의 인물에게 적개심을 불태우고 있었다.
아마 처음 본 배신감 어린 표정은 가람 자신을 향한 것이 아닌 어떤 미지의 인물에 대한 배신감이었던 모양이다.
“혹시 나중에라도 그 나쁜 사람, 말하고 싶어지면 알려 주세요. 제가 꼭 기사가 되어 혼내 줄 테니까.”
이를테면 이런 걸까. 부패한 성의 관리인이 공작이 성을 비운 날 가람을 괴롭히기 위한 목적으로 공작의 방으로 불러냈다거나, 혹은 괴롭힘을 피해 아무도 없는 공작의 방에 숨어 있다가 벽으로 도망쳤다고 생각한 걸까.
어찌 되었건 청년의 망상은 상당한 수준인 것 같았으니 가람이 생각지 못한 방향으로 떠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와중에도 가람에 대한 의심이 한 톨도 없어 보인다는 점에서 그녀는 새삼 사랑의 위대함을 느꼈다.
콩깍지는 정말로 대단하다. 아니, 이 순수한 청년의 사랑이 대단한 걸까. 그래도 조금쯤은 의심할 법도 할 텐데.
도둑이라거나 아예 그런 방향으로는 전혀 생각지 않는 점이 에루시오의 대단한 점이었다.
그의 안에서 자신은 아마 날개만 안 달린 완벽한 여신쯤 되지 않을까.
그가 보이는 절대적인 신뢰에 마음이 간질간질했다. 그와 더불어 죄책감이 더욱 강해진다.
자신은 최악의 경우 에루시오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도망칠 생각까지 했는데.
가람은 새삼 자각했다. ‘나는 정말로 나쁜 방향으로 가고 있었구나.’ 하고, 그래서 에루시오에게 더욱 고마웠다.
“도망치고 싶어요?”
그가 진지한 얼굴로 질문했다. 가람이 생각하는 동안 에루시오는 무언가를 결심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그 내용이 또 뜬금없어서 가람은 대답도 못 하고 어물어물 넘겼다. 그런 가람의 불분명한 태도는 그에게 확신을 주는 것이었다.
“도망치고 싶겠죠! 약점이나 잡혀서 사는 이곳에서의 생활 따위! 누나를 여기에 밀어 넣어서 억지로 일하게 만든 그 사람도 괴로움에 한몫하는 사람이겠죠?”
웨이든에 대한 이야기다. 가람은 이 질문에 확실하게 대답하지 않으면 차후에 웨이든이 곤란해짐을 자각하고 부정하려 했지만 순간 입이 말을 듣지 않아 침묵해 버렸다.
도의적으로는 부정해야 함이 옳지만 그 바람둥이에 남 골려 주기 좋아하는 녀석은 좀 골탕 먹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게다가 에루시오는 자신이 부정한다고 해서 받아들일 분위기도 아니었다.
이 결정으로 인해 차후 자신이 소매치기했던 여성을 유혹해 감옥에서 빠져나온 웨이든이 사귀는 여성을 일터에 몰아넣어 착취하는 인간쓰레기라는 오해를 잠깐 사게 되지만 그건 나중의 일이다.
에루시오는 대답이 얼른 돌아오지 않자 가람이 너무나 큰 고통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는 거라 해석하고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가람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어차피 패스도 찾았고, 공작의 조사가 계속되면 뒷일이 구려질 것 같은데 남아 있을 이유가 없다. 망설임은 짧았다.
“떠나고 싶어요.”
그 말이 마치 방아쇠라도 된 것처럼 에루시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리고 가람을 잡아끌더니 으슥한 곳에 그녀를 몰아넣었다.
“여기 숨어 있어요. 도망치게 해 줄게요.”
딱히 도망칠 이유는 없었지만 그녀는 순순히 에루시오의 요구에 따라 주었다.
잠시 뒤 나타난 에루시오는 커다란 짐 꾸러미를 갖고 있었다. 아마 가람의 방으로 가서 챙겨 온 모양이었다.
방을 옮기고 짐을 제대로 풀지도 않아서 꾸러미는 그녀가 싸 놓은 그대로였다. 빠진 물건은 당연히 없다.
그러나 짐 꾸러미에서 가람은 자신의 것이 아닌 주머니를 하나 발견했다.
“이건 뭐예요?”
“제가 조금 챙겼어요. 나가면 고생이니까.”
조금 쑥스러운 듯 이야기한 에루시오가 금세 긴장감을 되찾더니 다시 가람을 이끌기 시작했다.
어차피 거절해도 받아 달라 실랑이하게 될 것이 분명해서 가람은 그러려니 하고 주머니를 챙겨 두었다. 적당히 나중에 실수인 척하고 발치에 떨어뜨리거나 하면 되겠지.
에루시오는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것 같은 솜씨로 마구간에서 말을 빼 와 가람을 태워 주었다. 그리고 뒷문으로 안내해 내보내는 솜씨까지 보통이 아니다.
뒷문의 경비가 없는 시간까지 절묘하게 파악하고 있는 것이, 공작가의 보안이 심히 걱정될 정도였다.
“이쪽으로 나가시면 돼요. 말은 적당한 곳에서 버리면 되돌아올 거예요.”
해가 뜨기 직전 가장 어두운 시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에루시오가 말했다. 말에는 아쉬움이 절절했지만 경비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상황상 작별 인사가 길 수는 없었다.
가람이 무어라 화답하려는 순간, 에루시오가 말의 엉덩이를 두드렸다.
“뒷일은 걱정하지 말아요. 가람 씨가 떠난 건 제가 너무 치근거려서 도망친 걸로 할 테니까.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알아서 할 것도 없이 며칠간 에루시오만 신경을 좀 곤두세우다가 말 것이다. 가람은 헛웃음을 삼키며 말의 고삐를 단단히 붙잡았다.
차가운 새벽 공기 사이로 말굽 소리가 울려 퍼진다. 착한 말이었다. 에루시오만큼이나.
한참 동안 달려서 칼츠버그를 벗어난 가람이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대체 일이 왜 이렇게 된 건지.
마치 사랑의 도피라도 하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반쯤 웃으며 말의 등에 돈주머니를 매달아 돌려보내 주었다.
그리고 그 후 행상인에게서 구입한 신문에 에르비에르만 상단의 성추행 및 직위를 이용한 불합리한 일에 대해 대대적인 감사가 있었다는 기사를 발견하고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우연이었지만 이 일을 계기로 부패를 일삼던 기사들이 꽤 많이 잘려 나갔다고 한다.
에루시오는 그 후로도 가람에 대해 의심 어린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는지 그녀는 아무런 문제 없이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그 사람의 어떤 모습, 어떤 상황을 보아도 그 사람의 편에서 긍정적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이 사랑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위대한 애정에도 불구하고 에루시오의 감정은 보답받지 못했다. 안타깝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사랑하고 그녀는 방랑하기 때문에.
Chapter 22
“거기! 이보시오!”
멀리서 부르는 소리. 시냇물을 건너려던 가람이 돌에 무성한 이끼를 피해 발을 내딛는다.
단단하게 몸이 고정되었음을 확인한 가람은 그제야 소리의 주인을 찾아 주변을 둘러보았다.
돌 사이를 흐르는 얕은 개울이 가득하고 잡초나 이끼, 쪼개어지고 마모된 돌멩이가 쓰레기처럼 나뒹굴고 있다.
덕분에 무언가를 찾아내는 행위는 제법 많은 노력을 필요로 했고 대부분 별 소득 없이 끝났다.
가람이 둘러보는 사이 부르는 목소리는 끊어졌다. 딱히 자신을 부른 것도 아닌 것 같으니 그냥 무시하고 계속 갈까 하는 순간, 다시 목소리가 가람의 발을 잡아챘다.
“이봐요, 거기 가죽옷 입은 당신 말이오!”
목소리가 아까보다 좀 더 가깝다. 가람은 저 멀리서 남자가 자신에게로 걸어오고 있음을 깨닫고 잠시 기다리기로 했다.
평소라면 이런 누군지도 모를 사람의 부름 따위는 무시하고 제 갈 길 갔겠지만, 목소리에 깃든 절박함이 가람의 자비를 끌어내었다.
사실 그렇게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패스는 충전 중이라서 어차피 크게 바쁜 것도 없었기 때문이다.
가람은 근처의 적당하게 큰 돌에 걸터앉아 잡풀에 가려 보이지 않는 남자가 가까워지기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그사이에도 남자는 간간이 가람을 소리쳐 불렀는데, 그쪽에서는 가람이 보이고 가람은 남자를 발견할 수 없는 것을 보아하니 그녀보다 높은 지대에서 내려오고 있는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급박한 모양인지 외침에는 헐떡임이 가득했다.
칼츠버그를 떠나온 지 열흘. 가람은 그동안 어떤 도시에도 들르지 않았다. 그녀는 주로 숲이나 낮은 산에서 시간을 보냈다.
산이라곤 해도 그리 깊지 않은 산이라 위험한 일은 없었다. 심심찮게 약초를 뜯으러 나온 아낙이나 나무를 하러 나온 나무꾼을 만나기도 했으니까.
아마 지금 자신을 부르는 남자와도 그런 종류의 만남일 것이다.
성으로 둘러싸인 도시 외에도 사람이 사는 곳은 있어서 지나치게 깊은 숲이 아니라면 드문드문 작은 단지를 이루고 사는 촌락을 발견할 수 있다.
예전 바랄라인을 떠나 잠시 들렀던 솔터의 어머니, 리사 할머니가 있던 마을도 그런 종류다.
그런 마을은 이름도 없어서 지도에도 표시되어 있지 않았는데, 덕분에 발견할 때마다 보물을 찾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곳의 사람들은 대부분이 순박하고 외지인에게 친절했다. 아니, 정확히는 여자 외지인에게 친절했다.
가람과 달리 우연히 함께 들렀던 남자 여행자는 마을 청년들의 대단한 경계를 받았었으니. 그 청년은 마치 물소 무리에 뛰어든 새끼 사자처럼 보였다. 허튼짓을 할까 경계하는 그 시선들이란.
그들과 가끔 인사 나누며 길에 보이는 나무 열매를 따 먹기도 하고 혹은 누군가의 집에 초대받아 하루 신세 지기도 하며 가람은 그렇게 떠돌았다. 그 생활이 좋아서는 아니었다.
이슬 머금은 축축한 땅바닥에서 잠들고, 언제 빨았는지도 모를 가난한 촌부의 이불에서 잠드는 것을 좋아할 사람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자고 일어나면 간밤에 몸이 반쯤 썩었는지 온몸에서 덜 마른 걸레에서 나는 것 같은 퀴퀴한 냄새가 피어오르고 삭신이 쑤시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이 그 생활을 고수한 이유는 마음이 훨씬 편안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 비단 이불을 덮고 잔들 무슨 소용인가?
다음 날 눈떴을 때 도시가 잿더미가 되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떨 바에야 그냥 개미와 이웃하며 바닥에서 자는 편이 낫다.
모르드레드에 대한 공포는 이제 거의 없지만 그래도 놈이 그려 내는 불쾌감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다.
불안과 함께 달라붙은 그 감정은 가람의 그림자에 스며들어 발바닥에 끈끈하게 눌어붙어 있었다. 그 끈끈한 불쾌감이 가람이 도시로 발 돌리지 못하는 까닭이다.
“아직 있군!”
빼곡한 잡풀을 헤치고 누군가가 불쑥 개울가로 다가섰다. 키는 가람보다 한 뼘 반 정도 크고 머리는 지푸라기 같은 푸석푸석한 금발이었다.
아무렇게나 자른 모양인지 듬성듬성한 것이, 허수아비에서 삐져나온 지푸라기가 솟은 것처럼 여기저기가 삐죽삐죽하다.
남자는 가람을 발견하곤 대단히 안도하며 한달음에 다가섰다.
“내려오면서 중간부터는 여기가 안 보여서 혹시나 떠났을까 봐 얼마나 걱정했는지. 기다려 줘서 정말 고맙소!”
“별것도 아닌걸요.”
매끄럽게 대답하면서도 가람은 슬그머니 한 손을 총 위에 올려 두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리고 남자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은밀하게 움직여 그와의 거리를 조절했다.
그가 그녀의 허용 범위를 넘어서는 곳까지 들어오면 앉아 있던 돌에서 일어나 반걸음 정도 물러서는 식이다. 그러면 대부분은 스스로도 깨닫지 못하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가람이 그렇게 상대와 거리를 두는 이유는 매우 간단한 것이다. 총은 멀리 있을수록 유리하니까.
“그래도, 헉. 아, 잠깐 숨 좀 돌리겠소.”
무언가 이야기하려던 남자가 허리를 굽히고 무릎을 잡은 채 숨을 가다듬었다. 어지간히 급하게 달려온 모양이었다.
“천천히 말씀하세요. 제가 뭔가 도와드릴 일이라도?”
“그게, 술 좋아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