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화
“술이요?”
가람의 얼굴이 미묘하게 변하자 남자가 손사래 쳤다.
“이상한 사람 아니올시다. 그냥 술 한잔하고 가라고.”
산비탈을 얼굴이 시뻘겋게 되도록 달려 내려와 하는 말치고는 어딘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다. 가람의 눈초리가 가늘어지자 남자가 당황한 얼굴로 변명을 늘어놓았다.
“이번에 술을 담그고 있는데 맛이나 보고 가라고 부르는 거요. 진짜 이상한 사람 아니라니까.”
이상하다. 충분히 이상하다. 가람이 천천히 반걸음 뒷걸음질 쳤다. 남자는 울상을 지으며 자신의 말주변 없음을 원망했다. 너무 다짜고짜 본론을 꺼낸 탓인가.
“내 말 조금만 들어 주시오!”
그렇게 외친 남자가 줄줄이 사연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사연인즉슨, 남자와 남자의 작은 동네에서 처음으로 상단에 술을 납품하는데 그 맛이 외지인에게도 통할까 싶어 지나던 외지인을 찾던 중 가람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 근처에는 외지인이 드물다. 길에서 좀 벗어난 곳이니 사람의 왕래가 적은 장소를 찾아 일부러 걸음한 가람이 아니라면 거의 아무도 오지 않을 장소였다.
그래도 냉큼 따라가기엔 그간 겪은 일이 있어서 가람은 모든 사연을 듣고도 떨떠름한 얼굴로 서 있었다. 수상한 사람이다. 가야 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칼에 거절하지 않는 이유는, 한 번만 좀 도와 달라며 울상을 짓는 남자의 얼굴에 에루시오가 겹쳐지기 때문일까.
달빛 아래에서 눈알이 다 녹을 것처럼 눈물을 쏟아 내던 그 청년을 생각하자 모진 마음을 먹기도 쉽지 않았다.
너무 벽을 쌓고 사는 것도 좋지 않다. 지금까지 자신이 어떤 태도였는지 지난번에 자각하지 않았던가.
물론 멍청하게 당하는 것도 내키지 않았지만 험한 꼴이 두려워 사람을 피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바보나 할 짓이다. 그리고 딱히 두려워할 논리적인 이유도 없었다. 목숨이 하나라면 아껴야 함이 마땅하지만 그것도 아니니.
가람은 조금 부드럽게 마음을 먹기로 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이다.
그래, 가서 어울려 보고 판단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차피 좋은 일과 나쁜 일이 공존하는 것이 세상 아니던가. 마냥 경계한다고 좋은 것도 아니다.
그리고 총과 수류탄으로 무장한 데다 죽지도 않는 자신과 술맛 좀 봐 달라며 부탁하는 촌부 중 누가 더 경계 대상인지는 자명하다.
애초에 자신이 지나치게 날을 세우는 것도 과잉 방어인 것이다. 허튼짓을 하면 단번에 머리라도 날려 버릴 듯이 경계하고 있는 자신이라니.
“알았어요. 같이 가 드릴게요.”
남자가 누런 이를 다 드러내며 환히 웃었다. 술을 마셔 줘서 고맙다고 연신 인사하는 그 모습에 가람은 상인에게 거나하게 등쳐 먹히는 그의 미래가 보이는 것 같았다.
그나저나 상인이라니, 칼츠버그의 에르비에르만 상단에서 도망치다시피 나온 가람으로서는 반갑지 않은 상대다.
“갑시다! 얼마 안 멀어요!”
가람이 도망치기라도 할 것 같았는지 남자는 손을 덥석 붙잡고 가람을 이끌기 시작했다. 오르기 힘들다고 하면 업어 가기라도 할 기세였다.
손을 잡아 오는 굵은 손마디는 노동으로 다져진 것이다. 평생 나무를 도끼로 내려치고 온갖 것들을 이 손으로 잡고 길러 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해 가람의 손은 가늘기 짝이 없다. 물론 총질로 좀 거칠어지긴 했지만 그 뼈대가 어디로 가는 것은 아니다.
가람이 커다란 손에 멈칫한 만큼이나 그쪽도 조금 굳어졌는데, 아마도 가람에게 술을 먹여야겠다는 의지가 강했던 탓인지 곧 극복하고 씩씩하게 손을 꽉 잡아 왔다.
남자를 따라 올라가자 약 다섯, 여섯 가구 정도가 있는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마을이라기보다 산장 몇 개를 모아 둔 것에 가까운 느낌이었는데 수풀에 교묘하게 숨겨져 있는 탓에 그에게 불려 오지 않았다면 모르고 지나쳤을 것 같은 장소였다.
어쨌거나 덥수룩한 수풀을 헤치고 가람이 나타나자 약 열 쌍의 눈이 일제히 날아들었다.
“오! 데려왔군!”
“내 술부터 먹게 해!”
“무슨 소리야, 내 술부터 맛보게 하라고!”
둥그렇게 둘러 지은 집들의 중앙에는 산더미 같은 술통이 쌓여 있었다. 남자들이 실랑이하는 사이 가람은 자신을 안내한 남자에게 들었던 말과 이 상황 사이에 있는 옅은 괴리를 발견해 냈다.
분명 상인에게 출품할 술이 외지인에게 통할지 안 통할지 맛을 좀 봐 달라고 들은 것 같은데, 이건 마치 술맛의 심사라도 맡아야 할 분위기가 아닌가.
“저기.”
“이거, 이것부터 봐 주시오!”
이의를 제기하려는 가람의 앞에 커다란 술잔이 불쑥 내밀어졌다. 술잔의 손잡이는 커다랗고 퉁퉁한 손가락이 붙잡고 있었다.
손가락이고 손등이고 털이 덥수룩하다. 내미는 기세에 밀려 얼떨결에 술잔을 받아 들자 일시에 사방이 고요해졌다.
가람은 자신이 이 일대 모든 사람들의 주목을 받고 있음을 깨닫고 조금 황당해졌다. 대체 왜 이런 처지에 놓인 건가?
“마, 마셔 봐요.”
지나가던 곰에게서도 삥을 뜯어낼 수 있을 것 같은 험악한 인상의 남자가 아기 토끼 같은 여린 눈망울로 가람을 바라보며 부탁했다.
기도라도 하듯 가람의 앞에 반쯤 무릎을 꿇은 그는 깍지 껴 마주 잡은 두 손을 바들바들 떨고 있었는데, 하얗게 질린 손을 보니 어지간한 바윗덩이라도 목 졸라 죽일 수 있을 만한 악력이 집중되고 있는 듯했다.
말을 해도 도저히 들어 줄 만한 분위기가 아니다. 가람은 손안에 든 술잔을 내려다보았다. 맑은 황금색의 액체가 아주 약간의 점성을 갖고 찰랑이고 있다.
약간 거리를 두고 들고 있는데도 술잔에서 피어오르는 단내가 코를 자극한다.
조심스럽게 입술을 가져다 대고 슬쩍 맛을 보자 혀에 착 감기는 적당한 단맛과 상쾌함에서 농후한 꿀 향이 풍겨났다.
꿀 술인가.
맛이 그리 나쁘지 않았기에 제대로 한 모금 삼켜 보았다. 아주 섬세한 탄산이 들어 있었는데, 탄산수를 썼다기보다 발효 과정에서 생긴 것으로 보였다.
맥주에서 풍기는 맥아 특유의 고소한 향도 섞여 있는 것을 보아 그 방법이 맞는 듯싶다. 가람은 다시 술을 삼켰다.
개미 기침 소리도 들릴 것 같은 적막 속에서 가람이 술을 삼키는 소리만이 뚜렷하다.
모든 사람들이 술을 삼키는 가람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어떤 반응 하나라도 더 잡아내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한 방울을 다 삼키고 입술을 핥은 가람이 딱딱하게 긴장한 사내들을 한 바퀴 휘둘러보았다.
입을 여는 사람들은 없었지만 충분했다. 평생 물을 마셔 본 적 없는 사람처럼 가람의 소감을 갈망하고 있었다.
“아주 좋은데요.”
정말로 좋았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가람의 칭찬은 진심이었다.
짧은 그 한마디에 술을 건넨 남자가 뛸 듯이 기뻐했다. 그러나 곧 다음 술이 가람에게로 휙 내밀어진다. 조금 신경질적인 인상의 깡마른 남자였다.
“내 과일주도 마셔 봐 주시오!”
나도! 내 술도 맛봐 줘! 불붙은 것처럼 갑자기 앞다투어 외치기 시작하는 사람들 덕분에 가람은 거부할 시기를 놓쳐 버렸다. 그리고 그것이 술판의 시작이었다.
산딸기, 꿀, 곡물, 도토리, 과실 등 이름 모를 재료들로 갖은 솜씨를 부려 담근 술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나무잔과 흙그릇, 단단한 과일의 속을 파내어 만든 잔까지 술잔 또한 다양했다.
한 잔 한 잔에 저마다의 철학이 담겨 어느 것 하나 평범하지 않은 독특한 술들이었다.
남자들의 권함에는 끝이 없어서, 가람은 선 자리에서 순식간에 거푸 여섯 잔의 술을 맛보아야만 했다.
“그런데, 뭐 하는 분이시오?”
가람이 일곱 잔째의 술을 맛보고 내려놓을 때쯤이었다. 조심스레 질문한 사람은 맨 처음 가람에게 꿀 술을 건네었던 남자였다.
커다랗고 맑은 눈동자가 험악한 얼굴 안에서 괴물 속의 보석처럼 빛난다.
가람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남자의 물음을 뒤로하고 손에 든 잔을 내려다보았다. 잔에 묻은 술 방울이 경사를 따라 천천히 미끄러지고 있었다.
“이 술, 뭐죠?”
꿀 술과 비슷하지만 마치 소나무 향기 같은 시원한 풍미가 있었다. 술을 건넨 남자가 가람의 감탄을 읽고 의기양양하게 대답했다.
“송진으로 맛을 낸 거요. 진하지? 마치 꿀처럼 농후하지 않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은 산뜻하지. 꿀 술은 너무 달아. 그런 건 애들이나 마실 술이지.”
제 술을 추켜올림과 동시에 다른 이의 술을 깎아내린 남자가 히죽 웃었다. 꿀 술을 만든 남자가 울컥한 얼굴로 벌떡 일어섰다.
주먹이라도 오갈 듯이 흉흉한 분위기였으나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겹다는 반응이었다. 하루 이틀 있는 일이 아닌 모양이다.
아마도 이런 식으로 제 술만이 최고라고 여긴 탓에 상관없는 제삼자의 평가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맛있어요.”
“그렇지?”
가람의 짧은 소감에 남자가 푹 웃는다. 흐뭇한 얼굴에는 인정받았다는 기쁨이 넘실거렸다. 그의 어깨 너머에서 누군가가 다시 질문한다.
“그런데 정말로 뭐 하는 분이시오?”
“에헤이, 그런 거 알아서 뭐 하려고.”
“그래도 궁금하지 않나?”
“술맛만 봐 주면 돼. 괜히 쓸데없는 질문 해서 사람 불편하게 만들지 말아.”
“아니, 불편하게 만들다니? 내가 무슨 못할 말 했나?”
짧은 실랑이 속에서 질문이 반복된다. 아직 술맛을 보여 주지 못한 몇몇은 가람이 기분이 상해 떠날까 봐 노심초사하는 얼굴로 질문하는 사람을 만류했다.
질문을 던지는 이는 대부분 이미 가람이 술맛에 대한 평가를 내려 준 이들이었는데, 한시름 덜고 나니 다른 것에 관심이 쏠린 모양이었다.
남자들의 목소리가 멀리서 윙윙대는 파리 날갯짓처럼 들린다. 가람은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한 손으로 뺨을 쓸었다.
얼굴의 감각이 둔하게 느껴졌다. 방금 깨달은 것인데, 손에 들고 있는 술잔이 어느새 다른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가람이 다 비운 송진 술 대신 누군가가 약삭빠르게 제 술을 손에 쥐여 준 모양이었다.
가람은 술잔을 들고 있지 않은 반대편 손을 천천히 쥐었다가 펴 보았다. 손의 감각이 멀다. 아마도 취한 모양이었다.
그래도 정신을 바짝 붙잡고 있었는데, 일곱 잔이나 거푸 마시고 나니 약간 알딸딸했다.
혀가 눌어붙은 것 같은 취기가 나른하게 몸을 옭아맨다. 그러나 아직 가람이 맛보지 못한 술들이 제 차례를 기다리며 줄 서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인지 궁금해하는 게 그렇게 나쁜 거냐고!”
소곤소곤 실랑이를 벌이던 사람 중 한 명이 답답하다는 듯 소리쳤다. 그 목소리는 웅웅거림 사이에서 비교적 선명하게 가람의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가람은 심드렁한 기분으로 대답했다. 그런 질문은 너무나 많이 들어 지겨울 지경이었다.
“여행자예요.”
“여행자?”
“네. 동대륙에서 왔어요.”
여행자라고 하면 으레 어디서 왔느냐 하는 질문이 따라붙었기 때문에 가람이 선수 쳐서 덧붙였다.
이런 만남은 이제 너무나 익숙해져 처음 같은 설렘은 사라진 지 오래다.
이런 종류의 인연은 가지 끝에 부는 바람과도 같아서 가지를 떨리게 할 뿐 부러뜨리거나 휘게 할 수는 없었다. 만나고 웃거나 잠시 떠들다가, 그뿐.
“아, 동대륙에서 왔구먼. 어. 그러고 보니 얼굴이 너무 지저분해서 잘 몰라봤어.”
누군가가 무심코 그렇게 말하자 옆에 있던 사람이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찍었다. ‘여자한테는 그런 말 하면 안 돼!’ 하는 소곤거림에 ‘여자였어?’ 하는 경악이 따라붙는다.
“체구가 조그맣잖아. 여자지. 목소리도 여자 같잖아.”
“아, 목소리가 여자네.”
깨달았다는 듯한 그 말에는 가람의 목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에서 여성성을 부정하고 있었다.
‘목소리가 여자네.’가 아니라, ‘목소리만 여자네.’라고 하는 것이 어감상 더 어울리는 말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가죽옷으로 겹겹이 두른 가람의 차림새는 어느 것 하나 향긋한 것이 없었다.
하나로 묶은 머리칼도 후드로 푹 눌러 가렸으니 여자인지 남자인지 알아보기 힘든 것이 당연했다.
몸의 선이 드러나는 차림도 아니라서 가람은 심심찮게 키가 작은 남자, 혹은 소년으로 오해받았다.
“여자 혼자 여행하는 건 드문 일인데.”
누군가가 걱정이 담긴 목소리로 말했다. 그것에 동조한 몇몇이 조심하라며 떠들기 시작한다.
가람이 그 소리를 물끄러미 듣고 있는데 아까부터 조용히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 세드릭? 어디 가.”
“뭐 안주 할 거라도 있는지 짐머한테 가 보려고. 저래 봬도 아가씨인데 안주도 없이 술을 권하기는 좀 그렇지.”
저래 봬도라는 말이 거슬렸으나 가람은 그를 따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갑자기 일어선 탓에 머리가 핑 돌고 잠시 의식이 깜빡인다.
한 걸음 내디뎌 보니 균형 잡기가 조금 힘들다. 얼굴도 뜨끈했다. 해도 다 떨어지지 않았는데 얼굴이 벌게지도록 취하다니.
“어? 아가씨는 어디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