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48화 (148/256)

38화

“야수들판, 얼마 전에 전부 불타서 사라졌잖아. 거기 있던 야수들도 다 타 죽었을 테니 저 녀석이 슬퍼하는 것도 당연하지.”

뇌를 움켜쥐는 충격 속에서 제 귀를 의심하는 가람을 내버려 두고 피단이 덧붙였다. 불타 죽은 동물로는 술을 못 담그니까.

“불타요?”

이상한 일이었다. 분명 잘 알고 있는 단어인데 도저히 무슨 뜻인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불탔다. 불탔다고? 불타다니? 불타? 그게 무슨? 왜? 그 사실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깨달을 수도 없고 깨닫고 싶지도 않았다.

둔하고 공허한 부정 속에서 헤엄치는 가람의 애매한 표정은 설명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피단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렇지. 아무리 온갖 것들로 술을 담근다고 해도 불타서 숯이 된 것으로는 술을 담글 수가 없잖나.”

술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 가람은 고개를 저어 말을 끊었다.

“그게 아니라, 동물들이 다 죽었다고요?”

“도망갔는지, 죽었는지는 모르지. 몇 마리 살아남긴 했겠지만 아마도 다 죽었을 거야. 그 넓은 들판이 다 새카맣게 타서 잿더미가 되었으니까.”

“대체 언제…….”

“글쎄, 한 2주쯤 되었나. 대단한 사건이었는데 몰랐나 보군. 하긴, 아직 크게 알려지지 않았을 만하지.”

2주 전이면 가람이 한창 칼츠버그의 패스를 찾는 데 열을 올리고 있을 때였다. 칼츠버그의 신문에 그런 소식은 없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칼츠버그의 신문이 베록의 소식을 실을 이유는 없으니까.

“범인이 누군지는, 아니. 아니에요.”

충격으로 하얗게 바래는 머릿속을 양분하며 선명하게 한 얼굴이 떠오른다. 모르드레드. 그놈이다. 그놈 외에는 이런 짓을 할 놈이 없다.

그 미친 개자식이! 가람의 어금니가 단단히 맞물린다. 분노로 굳은 턱은 바위처럼 단단하다.

차갑게 타오르는 눈이 분노를 줄기줄기 쏟아 내자 영문을 모르는 피단은 그저 당황했다.

그로서는 눈앞의 이 아가씨가 갑자기 돌변한 이유를 알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가람이 딱딱한 어조로 부탁했다. ‘좀 더 말해 주세요.’

“범인이야, 베르하르트지. 예전부터 야수들판의 지배자와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했으니까.”

베르하르트? 갑자기 등장한 낯선 이름에 분노로 끓어오르던 가람이 조금 차분해졌다.

모르드레드가 아닌 건가? 아니, 장담할 수는 없다. 직접적인 방법이 아니더라도 놈이 수작을 부렸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으니까.

“베르하르트요?”

“어? 모르나? 야수들판의 왕과 베르하르트는 사이가 나쁘기로 유명하잖나.”

가람은 금시초문인 이야기다. 트리거는 그녀에게 그런 이야기를 해 준 적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케르타가 비슷한 이야기를 해 준 것 같기도 한데, 그 이유는 들은 적이 없다.

사실 트리거로서는 가람에게 미주알고주알 이야기할 이유가 없었다. 게다가 그런 원한 관계는 그리 유쾌한 대화 소재도 못 된다.

더욱이 그런 이야기를 떠들어 댈 성격도 아닌 트리거이니 가람이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가람이 그렇게 대답하자 피단은 조금 신이 난 기색으로 말을 이었다. 자고로 듣는 사람이 그 화제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다면 이야기꾼은 흥이 나는 법이다. 게다가 가람이 몹시 집중하는 태도였기 때문에 절로 말할 맛이 났다.

“오래된 이야기야.”

길고 오래된 이야기였다. 아주 옛날, 베르하르트의 왕이 아직 왕자이던 시절 그는 사신의 자격으로 크페타인을 방문했다. 친선의 목적이었다.

북공은 매우 환대했고, 군사 국가의 지도자로 교육받고 자란 왕자는 크페타인의 사납다는 짐승을 상대로 제 혈기를 시험해 보고자 했다.

그리고 병사들과 함께 나아가 잡은 것이 바로 트리거, 그리고 그의 부모인 두 마리 은호였다.

트리거의 부모는 회색 공포라고 불리는 이름 있는 호랑이였는데, 왕자는 그들을 사로잡으려고 했지만 너무나 사나웠던 탓에 결국 죽이는 방법으로 간신히 제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새하얀 눈을 적시는 붉은 호랑이의 피 속에서 왕자는 두 호랑이가 그렇게나 사나웠던 이유를 깨달았다.

죽은 어미가 몸으로 막고 지키던 굴 안에서 작디작은 새끼 호랑이 한 마리가 기어 나왔기 때문이다.

은호는 새끼를 많이 낳지 않는 짐승이다. 두 호랑이는 유일한 새끼를 지키기 위해 창칼에 몸을 날렸다.

어미의 피를 밟으며 달려 나온 새끼 호랑이는 제 원수를 향해 사납게 달려들었지만 조그마한 발톱은 무력하기 짝이 없어 왕자의 신발에 작은 흠집을 내는 것에 그쳤다.

트리거는 목덜미를 잡혀 달랑 들리는 형태로 왕자에게 포획되었다.

왕자는 애완동물로 그 호랑이를 기르기로 마음먹었고, 짐승답게 교육시키기 위해 엄한 벌도 마다하지 않았다. 원수에게 길들임을 당하는 작은 호랑이는 매일매일 이를 갈았다.

굴욕적인 나날이었다. 그리고 그 호랑이는 기회를 틈타 탈출했고 혹독한 세상에서 반쯤 굶어 죽어 가는 호랑이를 당시 야수들판의 지배자이던 흑마가 구했다.

그 후로는 다 아는 이야기다. 호랑이는 흑마의 뒤를 이어 야수들판의 지배자가 되었다. 그러나 트리거의 부모는 가죽이 되어 베르하르트 왕 왕좌의 깔개가 되었다.

그 소식은 트리거를 분노케 하기 충분한 것이었다. 흑마 케르타의 타이름으로 사그라지고 있던 복수심에 불이 붙었다. 그리고 복수는 트리거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호랑이는 매일같이 강한 야수들을 이끌고 베르하르트로 가 사람을 물어 죽였다.

그에 베르하르트는 호환에 골머리를 썩기 시작했고, 그것이 야수들판과 베르하르트의 깊은 골의 정체였다.

“호환 때문에 야수들판에 불을 질렀다는 건가요.”

“사실 베르하르트에서도 매년 호환이 발생하니 얼마나 죽이고 싶었겠어. 한 번 올 때마다 야수들판 야수들을 다 끌고 오니, 게다가 매년 규모도 커지고 있어서 이대로 가다간 왕국이 흔들리겠다 싶었나 보지. 안 그래도 작은 도시 국가인데.”

가람은 침묵했다. 야수들판이 불타 사라진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녀는 잊고 있던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

삶은 모두에게 공평하다. 가람이 볼 수 있는 것은 자신의 시간뿐이고 자신의 상황뿐이다.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가람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자신에게 일어난 것만큼이나 많은 일들이 일어날 수 있음을 간과하고 있었다.

가람은 마치 그들의 시간이 고정된 것처럼 기억 속에 박제되어 있어 그곳으로 돌아가면 언제나와 같은 얼굴을 볼 수 있을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아직도 야수들판의 바람 소리가 귓가에 생생한데 그곳은 이제 검은 재가 되었고, 함께 떠들었던 이들이 숯덩이가 되었음을 받아들이기란 정말로 쉬운 일이 아니다.

가람의 시간은 언제나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오직 가람의 시간만이 처음으로 되돌아간다.

다른 것들의 시간은 늘 흐르고, 곁에 있던 소중한 것들은 빠르게 스러질 것이다.

간혹 견딜 수 없어 패스로 잡아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흘러내리는 물결에서 한 방울의 물을 찍어 내는 짓만큼이나 의미가 없다.

아름다운 순간은 너무나 빠르게 사라지고 자신은 결코 그것을 붙들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 사실을 적나라하게 마주하는 순간이 올 때마다 견뎌 내는 것은 너무나 힘들었다.

그래서 가람은 야수들판으로 발 돌리지 못했다. 이런 소식을 듣고도 달려갈 수 없었다.

귀로 듣는 것도 이렇게나 괴로운데 만약 가서 눈으로 확인한다면 그 얼마나 괴로울까. 그리고 눈으로 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래, 무슨 의미가 있을까. 트리거에게 앞으로 닥칠 모든 시련을 저가 막아 줄 것도 아니고, 자신은 떠날 사람이다.

괴로운 것은 괴로운 것이고, 이곳을 떠나는 것은 떠나는 것이다. 이제 오래 있을 것도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가기 위한 패스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가람은 이곳이 아니라 다른 장소를 선택했기 때문에 향해야 할 곳은 명확했다.

“이봐, 괜찮아?”

가람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피단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저를 들여다보고 있음을 깨닫고 뒤늦게 반응했다.

“괜찮아요, 피단. 그냥, 처음 왔을 때 아름다운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다 불타 버렸다니 충격적이라서.”

“뭐, 그럴 만도 하지. 하지만 걱정 마. 곧 밀이 빼곡하게 자라날 테니까. 거기 잡목이나 풀이 다 불탔으니 그 재에 얼마나 양분이 많겠어? 아주 좋은 경작지가 될 거야. 베록에서는 신이 났을걸? 그 넓은 땅이 다 개간되어 밀밭이 되면 정말로 장관일 거야.”

피단은 바로 앞에 끝없는 황금빛 밀밭이 펼쳐져 있는 것처럼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야수들판이 불탄 것을 가람은 비극이라 생각했지만 피단은 양분이 넘치는 좋은 땅이 만들어졌다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런가요.”

가람이 영혼 없이 대답했다. 위로에도 불구하고 시무룩한 그녀의 태도에 피단은 조금 당황하다가 곧 다른 이와 어울려 놀기 시작했다. 어쨌거나 이곳은 술판이었던 것이다.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노래 부르며 떠들썩한 그 속에서 가람은 홀로 유리되어 앉아 있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몸에 스며들던 즐거움이 다른 세계의 일인 듯이 멀다.

모닥불과 그림자, 술 취한 남자들의 군무 속에서 가람은 한참 동안 홀로 앉아 있었다. 넋이 어딘가로 증발한 것처럼 시간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도 자각하지 못했다.

그렇게 덩그러니 놓여 있던 가람이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술자리가 한풀 꺾여 술꾼의 절반이 잠에 빠지고, 남은 이들이 그럭저럭 진지한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을 때였다.

“술이 좋은 값을 받아야 할 텐데.”

남자 하나가 눈썹을 늘어뜨리고 걱정스레 말했다.

“난 팔리기나 했으면 좋겠어. 상단에서 맛을 보고 안 사겠다고 하면 어쩌지?”

잠시 적막이 내려앉는다. 나무가 타는 냄새를 맡으며 가람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괜찮을 거예요. 다들. 저는 술맛을 잘 모르지만 그래도 좋은 술인 걸 알겠던걸요.”

“그, 그래?”

“그래!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네.”

“아가씨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어허, 아가씨가 뭐냐. 가람이지. 이름도 몰라?”

가람은 감정 없이 미소 지었다. 미소가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분할 능력이 없는 술꾼들은 그것만으로도 훈훈한 기분에 빠져들어 곧 우울함을 벗어던졌다.

여기저기서 근거 없는 자신감이 터져 나온다. 순식간에 왁자지껄해진 그 틈에서 누군가가 슬쩍 가람에게 말을 붙였다.

“그런데 가람은 이제 어디로 갈 거야?”

“글쎄요.”

야수들판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간들 무슨 소용 있을까. 마음은 야수들판으로 가고 싶어 하지만 이성은 그 고삐를 단단히 죈다.

가람은 알았다. 만약 야수들판으로 가서 정말로 눈으로 그 참상을 목격한다면, 그리고 트리거의 죽음을 확인한다면 그때 자신이 집으로 돌아갈 패스를 모두 사용해서 그를 살려 내지 않을 수 있을까.

그리고 그 후의 자신은 어떻게 될까. 다시 패스를 모으는 동안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그 마음이 여전히 남아 있어 줄까.

집으로 돌아간다.

그것은 가람의 등대였다. 등대의 불빛은 시시각각 흐려져 간다. 만약 등대를 잃을 경우 가람은 자신이 어떤 상태로 이곳을 떠돌게 될지 가늠할 수 없었다.

어떤 가치관도 없이 그저 패스를 찾아 떠돌며 먼지처럼 의미 없이 살게 될지도.

모르드레드가 말했던 것처럼 오직 패스를 찾는 것 자체를 염원으로 여기며 관성적으로 살게 될지도 모른다. 그런 삶은 싫었다.

그리고 야수들판의 소행이 모르드레드가 아니라 베르하르트의 짓이라면 이 일은 트리거의 운명이었다.

그가 맞서 싸워야 할 일이다. 그가 죽었다면 그뿐이다. 트리거는 가람에게 도와 달라고, 복수해 달라고 한 적이 없다. 오히려 가람에게서 그 이야기를 감추었다.

그것은 트리거의 긍지이자 그의 삶이었다. 죽은 그를 가람이 저승에서 불러내는 것은 자신의 운명을 당당하게 살다 간 그에 대한 모욕이나 다름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슬픈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트리거를 살려 내는 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가람은 더욱 서글펐다. 그가 정말로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아도 그 사실만으로 축 처져 늘어지는 기분이었다.

“걱정되어 말하는 건데, 내일 술을 사러 상인들이 오면 그들과 함께 가는 건 어때?”

갑자기 조금 우울해진 가람에게 남자가 조심스럽게 제안하자 몇몇 이들이 떠들썩하게 동조한다.

“그거 좋은 생각이군!”

“혼자 다니는 건 위험하다고!”

“맞아. 방향이 다르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수레에 태워 달라고 하면 태워 줄 거야! 게다가 요즘 심심찮게 산적이 출몰한다고 하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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