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50화 (150/256)

40화

“여기서 밥을 먹고 가겠소!”

오직 그 말만을 기다렸다는 듯 여기저기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어지간히 배가 고팠는지 말에서 내리지도 않고 짐 가방에서 빵부터 꺼내 드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가람은 다른 사실에 주목했다. 상인들이 멈춰 선 이 야영지에는 선객이 있었던 것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들이었다.

열 명 정도로 보이는 기사들은 갑옷도 벗지 않고 야영지에 앉아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아마도 금방 떠날 것으로 보였다.

그들 중 한 명이 상인에게 접근해 몇 마디 이야기를 건네자 상인의 표정이 대단히 심각해졌다. 상인 주변에 서 있던 사람들도 갑자기 눈에 띄게 불안해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봐도 심상치 않은 흐름이라 가람이 슬쩍 다가서자 투구도 벗지 않은 기사 하나가 경고했다.

“근처에 산적이 출몰하고 있으니 조심하시오.”

투구의 눈구멍 틈으로 보이는 눈동자는 핏발이 서 있었다. 기사들은 산적을 수색하는 수색대인 듯, 문자 그대로 눈에 핏발이 서도록 산적들을 찾고 있는 모양이었다.

기사들이 산적들의 규모가 꽤 크니 조심하라고 거듭 주의를 주자 그 말을 전해 들은 상인들 사이로 불안감이 물결처럼 퍼져 나갔다.

그 말을 들으니 가람도 거의 다 떨어진 총탄에 생각이 미쳤다. 산적과 마주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슬슬 베이스캠프에서 화력을 보충할 필요가 있었다.

도보로 이동하는 생활을 하며 가람이 평소 소지하던 총탄의 수는 확 줄어들었다.

등짐을 메는 것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감당 못 할 무게의 총탄을 욕심내어 챙길 수 없었던 것이다.

대신 줄어든 화력을 보충하기 위해 가람은 총탄을 줄이고 휴대하기 편하고 부피가 작은 수류탄이나 폭발물을 주로 챙겼다.

아직 수류탄은 좀 남아 있었지만 그래도 보충할 수 있을 때 더 보충해 두는 것이 좋겠지.

사실 산적들에게 수류탄까지 사용하는 것은 과한 감이 없지 않지만, 그래도 총탄 몇 발보다 수류탄 한 발로 강한 파괴력을 보여 주는 쪽이 무력시위에는 더 좋다.

솔직히 수류탄의 용도는 정말로 사람에게 사용하기 위한 것보다는 무력시위 쪽에 가까웠다.

경찰서에서 무기를 보충하고 돌아가는 길에 가람은 잠시 마트에 들러 먹을 것도 챙겼다.

생각해 보니 남자들과 술판을 벌이며 비축했던 식량을 다 풀어 버린 덕분에 가방에 먹을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통조림 따위를 챙긴 가람은 그 옆에 놓인 주전부리도 몇 개 집었다.

“어디에 갔었어요?”

베이스캠프로 갔던 가람이 수레로 돌아오자 세렌이 내내 찾았다며 잽싸게 달라붙었다.

예상대로 상인들은 가람이 돌아오고 얼마 뒤 다시 길을 나섰다. 야영지에서 만난 기사들이 동행한 것은 물론이다.

가져온 물건을 가방에 넣던 가람은 세렌의 얼굴을 보고 마트에서 챙겨 온 것을 꺼내 놓았다.

사탕이나 과자, 젤리 같은 단것들이다. 세렌 정도의 아이들이 딱 좋아할 만한 불량 식품이었다.

통을 열어 사탕이 가득 든 것을 보여 주자 세렌의 눈빛이 황홀해졌다. 마치 보석이라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아마도 세렌에게 설탕 가루를 뒤집어쓴 과즙 사탕들은 보석보다도 영롱하게 보이는 모양이었다.

“우와, 우와! 이거 사탕이에요?”

“네. 먹어요.”

“저, 정말요? 저 먹어도 돼요?”

“그럼요.”

가람이 흔쾌히 수락하자 세렌의 떨리는 손이 사탕 통으로 향했다. 좀처럼 사탕을 집지 못하고 망설이는 기색이 역력하기에 가람이 슬쩍 질문했다.

“왜 그래요?”

“그게, 다 예뻐서 어느 색을 먹어야 할지 모르겠어요.”

제법 심각한 고민처럼 내어놓는 그 말이 귀여워 가람은 저도 모르게 미소 지었다.

“마음에 드는 것으로 먹어요. 다른 것도 더 먹으면 되죠.”

대수롭지 않은 투로 가람이 말하자 세렌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놀랐다.

“정말요? 여러 개 먹어도 되나요?”

“물론이죠. 다른 사람에게도 나눠 줘요.”

인심 좋게 가람이 수락하자 세렌은 기뻐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냉큼 사탕 몇 개를 집었다.

하나는 수레 한쪽에 앉아 있던 커다란 남자에게 건네고 하나는 제 강아지에게 주더니, 매우 머뭇거리는 얼굴로 자신과 싸웠던 남자에게도 사탕을 내밀었다.

거절할 줄 알았던 남자는 매우 어색한 얼굴로 세렌이 내미는 사탕을 받아 들고 잠시 망설이다가 입 안에 털어 넣었다.

아이고 어른이고 할 것 없이 모두 사탕을 한쪽 볼에 불룩하게 넣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며 가람은 흐뭇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그런 가람에게 세렌이 아차 하고 대단히 중요한 것을 잊었다는 듯이 고백했다.

“저 동양인이 주는 사탕은 처음 먹어 봐요.”

못 말리는 아가씨다. 이것도 새로운 경험이라고 챙기다니. 가람은 결국 짧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세렌은 가람이 웃는 이유를 몰라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을 뿐이다.

잠시 웃다가 다시 짐을 정리하던 가람은 문득 자신의 손등을 발견했다. 어느새 충전이 끝나 바늘은 하나가 되어 있다.

반갑게도 충전이 다 된 것이다. 가람은 챙기던 짐을 일단 내버려 두고 방향을 가늠했다.

다행히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은 수레가 향하는 방향과 일치했다. 이곳의 지도란 측량을 무시하고 그려지는 것이 대부분이라 정확한 위치는 파악할 수 없었다.

바랄라인에서 구입한 지도는 바랄라인이 비현실적으로 크고 자세하게 그려져 있고, 다른 지역의 지도들도 그와 같은 유형이라 객관적인 땅의 넓이를 구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워서 측량을 위한 가람의 노력 대부분을 헛수고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방향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뭐 하세요?”

가람이 가만히 앉아 제 손등만 바라보고 있자 그것이 의아했던 세렌이 불쑥 질문했다. 그리고 그 순간, 바늘이 천천히 북서쪽으로 기울었다.

가람은 침묵한 상태로 바늘이 서쪽에서 다시 동쪽으로 천천히 위치를 변경하는 것을 바라보았다.

패스의 위치가 변하고 있었다.

불길한 기시감 속에서 가람은 예전의 경험을 떠올리고 있었다. 이렇게 패스가 움직인 경우가 하나 있었다.

찌는 듯이 더웠던 베녹사스의 정글에서 독룡 다라즈녹의 배 속에 있었던 패스가 그것이었다.

설마하니 이번에도 용의 배 속에 있을까 싶었지만, 상상이 그쪽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설마, 이 세계에 용이 있어 봐야 몇 마리나 있다고 이번에도 용일까. 기껏해야 다람쥐나 산짐승이겠지.

혹은, 산적 중 누군가가 갖고 있지 않을까.

가람의 희망과는 상관없이 바늘은 계속해서 방향을 바꾸었다. 확실한 것은, 패스가 가람이 있는 쪽으로 가까워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마도 가람이 찾아가지 않아도 금세 마주치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적극적인 접근이었다.

그토록 적극적인 접근을 마주하는 사람에게는 서리가 내릴 만큼 차갑고 냉철한 마음이 어울릴 것이다.

반쯤 풀어져 미소 짓고 있던 가람의 눈이 단단히 굳어졌다. 굳게 다물린 입매에는 단 한 치의 사교적인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순간적인 변모에 세렌이 흠칫해서 괜히 눈치를 살폈다.

왈가닥인 본인의 성격을 자각하고 있긴 한 모양인지 자신의 언행 중 가람의 심기를 상하게 할 만한 것이 있었던가 고민하는 듯했다.

끙끙거리는 모습이 몹시도 불쌍한 꼴이라 보는 이의 동정심을 자아내기 충분한데도 불구하고 가람은 짐을 정비하는 손놀림을 야무지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가람의 신경은 손등의 작은 바늘에 온통 쏠려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가늠하건대 패스가 위치한 곳은 도보로 약 이틀이 걸리지 않는 듯했다. 계속해서 접근하고 있으니 이 거리는 더욱 줄어들리라.

찾아갈 필요가 없는 점은 좋은 점이지만 그 정체가 미지수로 남아 있는 한 불안을 떨치기는 힘들었다.

그것이 가까워지는 속도나 방향에는 어떤 정해진 규칙도 없어서 가람은 섣불리 정체를 단정 짓지 않기로 했다.

수많은 변수는 가람을 신중하게 만들었다. 앞날이 어찌 될지 모를 때는 적보다 동료가 필요한 법이다.

비록 보잘것없는 구성의 사람들이지만 척을 지는 것보다는 친해지는 것이 도움이 될 터였다.

여차하면 적당히 이용할 수 있을 정도의 친분. 그것이 가람이 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일단은, 정보가 필요하다.

“산적이 출몰한다는데, 혹시 들은 이야기 없어요?”

정보 수집을 위해 가람은 일단 사근사근한 태도를 회복했다. 날카롭게 벼려졌던 가람이 일단 칼집에 다시 들어가자 세렌이 눈에 띄게 안도한 얼굴로 다가왔다.

사탕이 들어 있어 불룩한 한쪽 뺨은 가람에 대한 호감으로 조금 발그레하게 변해 있었다. 가람과 가람이 준 사탕이 아주 마음에 드는 기색이었다.

먹을 것으로 환심을 사는 것은 고전적인 방법이다. 가람이 마트에서 주전부리를 집어 온 것은 그런 전략적인 의도가 아니었지만 결과적으로 이렇게 사용되고 있으니.

“어, 자세한 이야기는 못 들었지만, 상인분들이 부탁해서 기사님들이 산적 출몰지를 벗어날 때까지만 동행해 주기로 하셨어요.”

세렌이 슬쩍 귀동냥한 정보를 흘린다. 다른 사람들은 별달리 할 말이 없는 듯했다.

세렌과 다투었던 남자는 사탕을 받아 든 뒤로 조금 누그러진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단것을 먹으니 기분이 나아진 모양이다.

찬 바람이 쌩쌩 불던 등을 치우고 조금 어색하게 앉아 있는 모습이 짧은 웃음을 자아낼 법도 했지만 가람의 얼굴에는 아무런 표정도 나타나지 않았다.

사실 가람은 이제 그런 것에는 관심이 없었다. 세렌과 그가 그럭저럭 화해한 것은 잘된 일이지만 솔직히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

“얼마나 동행한대요?”

“어, 글쎄요, 그것까지는.”

뒷머리를 긁적이는 세렌 대신 세렌과 다투었던 남자가 불쑥 끼어들었다. 스스로도 말문을 연 것이 어색한지 어조는 뻣뻣하고 억양에는 높낮이가 없었다.

“아마도 베르하르트까지 갈 거요. 거기까지 가면 베르하르트 관도를 따라 경비병이 다닐 테니까.”

“그렇군요……. 일단 베르하르트까지만 가면…….”

세렌이 제 손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불안해하는 것이 뻔히 보였지만 감추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이었다.

현명한 태도다. 불안은 자신을 알아보는 자를 집어삼킨다.

세렌뿐만이 아니라 모두들 빤히 보이는 그 시커먼 것에서 억지로 눈을 돌리기 위해 딴청을 피우고 있었다.

그 모습이 심히 애처로울 정도였지만 가람은 홀로 다른 것을 떠올리고 있었다.

베르하르트. 낯설지 않은 이름이다. 가람은 그 이름을 지금 듣게 된 것보다 자신이 베르하르트 인근까지 남하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베르하르트는 베녹사스의 아래쪽, 아하른의 위쪽에 위치하는 아주 작은 도시다.

대충 그려진 지도들 탓에 보통은 찾아가기 제법 힘든 지역이었다. 워낙 땅덩이가 작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도시 국가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창칼로 세워진 도시인 베르하르트는 같은 단위 면적과 인구를 가진 도시 중 가장 강력한 무력을 지닌 도시였다.

도시 중앙에 위치한 거대한 용광로인 철의 심장은 거의 2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베르하르트 사람들에게 쇳물을 공급했다.

피처럼 붉은 쇳물이 도시 전체에 퍼져 나가 장인들의 공방으로 흘러드는 모습은 용광로가 가진 이름의 적절함에 대해서 누구도 불만을 토로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전사들의 손에서 검으로 피어난 쇳물의 날카로움 앞에서 감히 농담으로라도 그 이름을 조롱하는 멍청이는 없다.

그들이 빚어내는 강력하고 아름다운 무기들은 그 이름 높은 용들조차 사냥할 수 있을 정도이니 인간들이 그 이름에 안전을 느끼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나 정작 가람은 그 이름에서 폭군들이나 무뢰배에게 느낄 법한 인상을 받았다.

아마도 트리거와의 개인적 친분으로 인해 베르하르트와 트리거의 적대적 관계가 그런 부정적인 감정을 불러일으켰을 가능성이 높았다.

“맞아요. 저 기사분들도 베르하르트의 기사들이니까 사실상 여긴 베르하르트의 치안 구역이나 다름없어요. 딱히 위험할 것도 없는걸요!”

중얼거리던 세렌이 갑자기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의 말을 거듭 긍정했다.

불안에 빠진 사람이 불안을 부정하기 위해 주로 보이는 행동이다. 가람은 그것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숲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차피 베르하르트까지는 금방이니까.”

세렌이 불안을 떨치기 위해 억지로 떠들어 대는 소리를 가람은 한 귀로 흘렸다.

빛을 집어삼키는 숲은 유난히 어둡고 빽빽하다. 어느 도시도 이 길목과는 인접해 있지 않은 탓에 벌목을 제대로 하지 않은 듯했다.

베르하르트와 가깝다고 하더라도 나무꾼이 당일치기로 나무를 하러 올 만한 거리는 아니니까.

그러면 커다란 짐승이 제법 살지도 모르겠는데. 그렇다면 그 짐승이 패스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사실 가람은 산적에 대해서는 거의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무엇이 패스를 움직이게 하고 있는가에 대한 것이 유일하게 중요한 것이었다.

그깟 산적 따위는 선량한 노파나 귀여운 아이들에 비해 훨씬 쉬운 상대였다. 설득할 필요도 없이 죽이면 그만이니까.

차라리 산적이 패스를 갖고 있다면 일이 훨씬 쉬워질 텐데.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것이 산적일 가능성을 점쳐 보던 가람은 문득 사방이 매우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방금까지 그렇게나 소란스레 떠들어 댄 것이 거짓말인 것처럼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런저런 쓸데없는 이야기를 하던 세렌도, 이따금씩 맞장구를 치던 까칠한 남자도, 그들을 중재했던 덩치 큰 남자도 모두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고 숲을 바라보고 있었다.

모두들 어느 순간 자신들을 둘러싼 기묘한 위화감을 깨달은 것이다. 긴장으로 경직된 분위기가 아교처럼 끈끈하게 입술에 엉겨 붙는다.

그 사이에서 세렌이 간신히 입을 달싹였다. 말을 한다기보다 긴장으로 무거워진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고 뱉어 내는 것에 가까웠다.

“숲이…….”

조용해졌다. 세렌은 말을 끝맺지 않았지만 모두 같은 생각을 떠올리고 있는 표정이었다.

공기를 타고 긴장한 땀내가 피어오른다. 그들은 가람의 시선을 따라 뚫어져라 숲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정작 가람은 숲을 향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이들을 내버려 두고 다른 곳에 주목했다.

이 일행에서 유일하게 산적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 않은 사람이기에 가능한 행동이었다.

너무나 느긋하고 사무적으로 보이는 기사들. 전투와는 전혀 연관이 없는 평범한 소녀인 세렌조차도 느낄 만한 위화감인데 기사들 중 행렬을 멈춰 세우고 사방을 경계하는 이가 아무도 없다.

그저 상인들만이 불안하게 눈알을 굴리고 있을 뿐이었다.

물론 기사 본인들이 자신들에게 행렬을 세울 만한 권리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딱히 경계에 대한 지시를 내리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그렇다고 보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었다.

가람은 억측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조용히 상황을 지켜보았다. 피로 앞에서는 가장 뜨거운 열정마저 식어 내리곤 한다.

며칠간의 추적으로 지친 탓에 적극적으로 산적을 잡으려는 마음이 사라진 걸까? 뭐 그래도 상관은 없었다.

사실 굳이 기사들이 끼어들지 않아도 이 상단은 산적들이 쉽게 짓밟을 만한 규모가 아니었다.

약 여섯 대의 마차와 스무 명의 상인, 그 외의 인원이 자신을 포함해 여덟 정도에 열 명의 기사도 있다. 그들 모두가 검을 들 수 있을 만한 성인인 덕분에 상단의 전력은 상당한 편이었다.

이 정도면 작은 산적 떼 정도는 알아서 처리할 수 있는 규모다. 지금까지 가람이 보아 온 상단 중에서도 그럭저럭 큰 편에 속했다.

가람은 지금까지 많은 상단을 만나 보았다. 상단을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이곳에도 저 먼 지역에서 나는 물건에 대한 수요는 많다.

물류의 흐름을 담당하는 직업이 상단만 있는 건 아니지만 보통 대부분은 상단이다. 나머지는 배달업이고, 어쩔 수 없이 타지로 가게 된 사람이 적당한 물건을 사서 되팔며 임시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그런 상단은 길을 걷다 보면 하루에도 몇 차례씩 마주칠 수 있었다. 필요로 하는 것을 가져다주기 위해 일개미처럼 움직이는 그들은 늘 길 위에 있다.

그리고 위험 또한 늘 길 위에 있다. 그래서 상인들은 무리 지어 상단을 꾸리는 것이다.

주변의 긴장한 공기와는 별개로 가람은 손등을 살피고 있었다. 바늘은 여전히 제법 길이가 있다.

바늘이 줄어드는 속도는 불규칙했다. 매우 빠르게 줄어들다가도 갑자기 덜컥 멈추기도 했다. 어쩌면 이번 패스는 바람결을 타고 흐르는 낙엽일지도 모른다.

가람이 낙천적인 생각에 젖어 들려는 찰나, 누군가가 손을 들어 행렬을 멈췄다.

“잠깐.”

가장 앞쪽에서 말을 몰던 상인이었다. 딱히 지시를 내릴 만한 자리에 있는 사람은 아닌 것 같았지만 모두는 침묵을 깨지 앉은 채 그 자리에 정지했다. 말은 없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감돌기 시작한 긴장감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 날 선 분위기 사이에서 가람은 수레에 기대어 앉은 자세 그대로 귀를 기울였다.

멀리서 적당히 무게 있는 무언가가 빠르고 강하게 땅을 딛는 소리가 났다. 그래, 말을 타고 달려온다면 딱 저런 소리가 날 법하다.

이제 슬슬 나타날 때도 되었지. 가람은 태연하게 생각하며 숲 사이로 산적들이 모습을 얼비치는 것을 바라보았다. 말발굽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면 애초부터 그리 먼 거리에 있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빠르게 시선을 교환한 상인들이 결연하게 검을 뽑아 드는 순간, 사방에서 산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살고 싶으면 수레를 넘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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