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Chapter 23
가람의 말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남자 하나가 나섰다. 그의 안내를 따라가자 가람의 뒤로 세렌과 세렌과 다투었던 남자, 그리고 이름 모를 사람들이 줄줄이 따라붙었다.
가람은 그 틈에서 커다란 도끼를 가지고 있던 남자를 찾아보았으나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죽었거나 그에 준한 처지가 된 듯하다. 혹은 아주 멀리 도망가서 돌아오지 않거나.
도망갔다면, 그가 누군가를 불러올 가능성은 없을까. 하긴, 불러와도 올 사람이 있을 리가 없다. 용에게 맞서 싸우기 위해 달려오다니.
확실한 사실은, 제정신인 사람 중에는 없을 것이다. 가람은 생각을 접고 눈앞의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산적들은 마치 묶음 판매 상품처럼 한 보따리로 묶여 있었다. 차마 가람과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리는 모습이 몹시 처량하다.
사람들은 그들을 둘러싸고 저마다 제 의견을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가람은 그 중심에 서서 조용히 그것들을 경청했다.
“일단은 도시로 이송해야 하지 않을까?”
누군가가 슬쩍 말하자 모두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의견에 다른 상인 하나가 살을 붙였다.
“현상금이 걸려 있을지도 모르지.”
대단히 상인다운 생각이었다. 그는 용에게서 입은 피해를 만회하고 싶은지 의욕적으로 눈을 빛냈다.
“욕심부리지 마. 현상금이 걸려 있다면 이분의 것이야.”
경고하듯 말한 남자가 가람의 비위를 맞추듯이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유순하게 눈초리를 내린 얼굴로 가람에게 호감을 사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가람은 방관자 같은 태도를 고수하며 다른 의견을 더 내어 보라는 듯 시선을 던졌다.
“현상금이 걸려 있을 만한 가까운 도시는 베르하르트뿐이야.”
“하지만 베르하르트의 기사들이 산적이었잖아.”
“그래? 그럼 이 사람들 데리고 베르하르트로 가면 오히려 우리가 곤란해지는 거 아닌가.”
누군가가 꺼낸 말에 다들 잊고 있던 사실을 기억해 냈다. 용이 나타나는 바람에 묻히고 말았지만, 호위를 맡았던 베르하르트의 기사들은 상인들을 배신했었다.
그런 마당이니 이들을 베르하르트로 데려가는 것은 산적 소굴에 산적을 데리고 들어가는 것과 다름없었다.
낙관적으로 전망한다고 해도 이 산적들을 데리고 베르하르트로 입성하는 순간 입막음을 위해 죽임당할 것이다. 용의 앞에서도 지켜 낸 질긴 목숨을 그런 식으로 잃고 싶은 자는 없었다. 사람들은 한층 신중해졌다.
“간다면 다른 도시로 가야 해.”
“그렇다고 수레도 부족한데 산적까지 싣고 가자고?”
“굳이 싣고 갈 필요 있어? 여기 버리고 가면 되지. 묶은 상태로 말이야.”
매력적인 제안이다. 가람은 그 의견을 지지하고 싶었다. 그러나 선량한 얼굴의 남자 하나가 눈살을 찌푸렸다.
“굶어 죽을지도 모르는데? 짐승의 밥이 될지도 모르지.”
“산적 놈들 죽든 말든 알 게 뭐야!”
남자 하나가 갑자기 격정에 휩싸여 소리쳤다. 그에 동조하듯 두어 명이 더 나섰다. 가람 또한 그 의견에 동의하는 편이었다.
애초에 극악무도하고 남의 피 보기를 좋아하는 놈들인데 굳이 수고스럽게 살려 둘 필요가 있나. 현상금 때문에? 돈이라면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놈들이 타릭을 죽였어! 이놈들도 죽여 버려야 해!”
“그래, 죽여 버리자!”
두 사람이 선동하자 분위기가 점점 과열되기 시작했다. 이대로 내버려 두면 상인들이 나서서 산적들의 목을 날려 줄 것 같은 기세였다.
가람은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했다. 가만히 기다리기만 해도 일이 알아서 해결될 것 같으니 굳이 자신이 나설 것까지는 없지 않을까. 가람이 느긋하게 생각하는 순간 누군가가 찬물을 끼얹었다.
“모두들 진정해. 결정하는 건 이분이야.”
이런. 속으로 혀를 찬 가람은 고민에 빠져들었다. 그녀가 진지하게 고민에 빠져들자 상인들은 순식간에 얌전해져서 가람의 처분을 기다렸다. 산적들마저 숨을 죽이고 자비를 간청하는 표정을 짓는다.
그 얼굴들을 돌아보며 가람은 짐짓 심각한 낯을 만들어 내었다. 그러나 실제로 가람이 하고 있는 고민은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다.
사실 가람은 어떤 방법이 가장 뒤탈이 없을지 고민하고 있었다. 제일 좋은 것은 이 자리의 모두를 죽여 입을 막는 것이다. 그게 가장 뒤탈이 없는 방법이다.
하지만 용을 피해 도망간 사람들이 돌아오고 있을지도 모르고, 혹여 돌아오다가 가람의 살인을 목격하기라도 하면 일이 대단히 복잡해진다. 게다가 지금 가람에게는 무기도 없었다.
등에 멘 소총에 총탄이 몇 발 장전되어 있긴 하지만 그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다.
물론 총이 아닌 방법을 사용할 수도 있었지만 가람에게는 자신할 만한 칼 솜씨가 없었다.
칼에는 하나를 상대하는 사이 나머지 하나가 도망갈지도 모른다는 단점도 있다. 간단하게, 그리고 깔끔하게 처리하기에는 총만큼 좋은 수단이 없다.
무기의 보충은 이틀 뒤에나 가능하니 적어도 이틀 동안은 그 방법을 고려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방법은 두 개로 좁혀진다. 이 자리에서 산적들을 죽이거나, 혹은 도시로 끌고 가서 경비대에 넘기거나. 용이 죽은 마당에 지나치게 잔인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상인들을 모두 공포로 굴복시키기 위한 의도가 아니라면. 그리고 가람은 그럴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일단은 산적들에게 물어보도록 하죠.”
가람이 무언의 시선으로 산적들에게 발언을 허락하자 하나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다른 산적들의 긴장 어린 시선이 순식간에 그에게로 모여든다.
“저기, 아까 전에 말입니다. 그, 타릭이라는 분을 죽인 사람은 벌써 죽었는데요.”
“그래서요?”
가람이 심드렁하게 반문했다. 산적은 초조한 듯 혀를 내어 입술에 침을 발랐다.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땅만 바라보며 변명하듯 말을 잇는다.
“저희는 아무도 죽이지 않았습니다. 그, 그러니까. 그렇게 나쁜 놈들은 아니라는 말입죠.”
필사적으로 용기를 짜낸 산적의 자기변호는 가람에게 별 감흥을 주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었다.
산적 본인들도 그 사실을 깨달았는지 절망적인 표정을 지었다. 더러는 눈을 감아 버리는 자도 있었다.
그런 절망이 가람은 새삼스러웠다. 산적 일을 시작하면서 참수를 각오하지 않다니. 영원히 잡히지 않기라도 할 줄 알았던 걸까.
다른 사람을 털어먹으면서 장밋빛 미래를 기대하다니. 어지간히 순진한 사람도 하지 않을 생각이다.
아니, 어쩌면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산적들은 의외로 꽤 순진한 구석이 있는 것 같았으니까.
그러나 가람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다른 이에게 절망을 심어 준 주제에 자신은 자비를 바란다는 것이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당신들 정말로 베르하르트의 기사?”
일단 베르하르트에서 처분할 수 있을지 확인하기 위해 가람이 질문했다. 산적들은 입을 꾹 다물고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어떻게 대답해야 자신들에게 유리할지, 잔머리를 굴리는 소리가 들릴 정도다. 이해를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목숨이 걸린 일이니까.
그러나 그 눈에 빤히 보이는 수작질을 지켜봐 주기엔 가람은 좀 피곤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방금 용을 잡지 않았던가.
그런 이유로, 서로 시선을 교환하며 무언의 작전을 짜고 있는 산적들에게 가람은 상냥하게 조언했다.
“거짓말을 하시는 건 상관없는데, 말에 허점이 있으면 죽을 거예요. 지금 상황에서 지어내는 말이 얼마나 논리적일지는 모르겠네요. 저라면 그냥 사실대로 말하겠어요.”
그 조근조근한 말에 담긴 진심에 산적들은 얼어붙었다. 가람의 말은 그냥 겁주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다. 만약 정말로 산적들이 다시 머리를 굴린다면 본보기로 하나를 죽여서 잡생각이 가득한 그 머릿속을 좀 깨끗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었다.
바짝 묶여 있으니 바로 옆의 동료 머리가 날아가면 흘러내리는 뇌수까지 볼 수 있겠지. 코앞에서 그걸 보고 있으면 아마 좀 솔직해지고 싶을 것이다.
“베, 베르하르트의 기사가 아닙니다. 저희는 여기 산자락에서 산적 짓을 하는 산적일 뿐입니다.”
시간에 제 목숨이 달리기라도 한 것처럼 산적 하나가 다급하게 대답했다. 다행히 눈치까지 없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로 이어지는 가람의 질문에도 산적들은 감히 거짓으로 답하지 못했다. 바들바들 떨며, 필사적으로 믿어 달라고 간청하며 산적들이 털어놓은 일의 전모는 대략 이렇다.
이들은 베르하르트의 기사가 아니다. 이 산적단은 사실 실력이 정말로 대단해서, 자신들을 추적하던 베르하르트 기사단을 역으로 사로잡는 데 성공했다.
기사단의 갑옷은 그때 얻은 전리품이었다. 그 갑옷은 매우 유용했다. 자신들을 베르하르트의 기사로 찰떡같이 믿고 있던 상인들은 갑작스러운 배신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모조리 죽어 나갔다.
그렇게 쏠쏠한 재미를 보고 있던 때에 갑자기 용과 가람이 나타나서 모든 것이 변하고 만 것이다.
“진짜 기사들은 본거지에 묶여 있습니다.”
산적들은 자신들이 기사들을 죽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부각시켜 점수를 좀 따 보려는 속셈인 듯했지만 가람은 그 말을 듣는 순간 산적들을 바로 죽여 버리지 않은 것을 후회했다.
산적들의 고백을 들은 상인들이 크게 술렁였던 것이다. 누군가는 동정심으로, 누군가는 정의감으로 떠들어 대고 있긴 했지만 그 의견은 모두 하나로 귀결된다.
기사를 구하러 가야 한다.
가람은 조금 난감해졌다. 정말 베르하르트 기사들이 살아 있을 거라고는 전혀 생각지 않았던 터라 이런 상황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실 그렇지 않은가. 산적들이 저를 쫓으며 칼을 갈던 기사들을 잡아다가 멀쩡히 살려 놓는다니. 인질로서의 가치도 없는 자들이다.
기사들의 나라가 고작 산적을 상대로 돈을 지불할 리도 없고, 굳이 무언가 조치를 취한다면 더 강력한 토벌대 정도일 것이다.
게다가 운 나쁘게 기사 하나가 도망치기라도 하면 은거지의 위치가 발각되어 버린다.
그런 몰살의 위험을 감수하면서 베르하르트의 기사들을 살려 둔 이유를 가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저기, 구하러 가시지 않을 겁니까?”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베르하르트의 기사들이건만 상인들은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었다. 산적들에게 몹쓸 짓을 당한 처지라는 점이 그 동정심의 정체였다.
그야말로 딱하다는 표정의 상인들을 주욱 둘러본 가람은 자신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점을 깨달았다.
구하러 가지 않으면 천하의 나쁜 사람이 되는 것은 물론이고, 대단히 수상한 인물로 여겨질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이들을 살려 두기로 결정한 이상 사태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지켜보고 마무리한 뒤 자리를 뜨는 것이 좋았다.
도망치듯 자리를 떴다가 상인들이 괜히 귀찮아지도록 입을 놀리면 곤란하다. 차라리 남아서 적당히 둘러대어 입단속을 시키는 편이 좋을 것이다.
“안내해요.”
가람이 말이나 소라도 다루는 듯 묶인 산적을 발로 툭 찼다. 별로 세게 치지도 않았는데 가람의 발이 다가오는 것만으로도 지레 겁먹고 호들갑 떨며 놀라던 산적들은 꼴사나운 모습으로 넘어져 한참 동안 허우적거렸다. 한데 묶여 있던 탓에 버둥거리는 다리가 마치 문어의 그것과 같았다.
도저히 자력으로는 못 일어날 것 같았기 때문에 상인 몇몇이 달려들어 일으켜 세워 준 후에야 가람은 안내를 받을 수 있었다.
등을 마주 대고 묶인 채로 이동한 덕분에 산적들은 옆 걸음으로 걷기도 하고 뒷걸음질을 치기도 했다.
덕분에 이동 속도가 느려졌지만 아무도 그 사실에 대해 불평하지 않았다. 모두들 지쳐 있었기 때문이다.
가람의 등 뒤에서 그나마 성한 물건들을 말 등에 싣고 따라오는 상인들은 아마 산적들의 산채에서 하루 묵을 생각인 것 같았다.
하긴, 그곳에 도착하면 이미 해가 져 버린다. 야영지를 꾸리기엔 너무 어두워져 있을 것이다.
해가 지는 숲은 시시각각 어두워져만 간다. 그러나 손등의 숫자는 그 어둠 속에서도 이질적으로 떠올랐다.
검은 글씨라면 어두컴컴한 숲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이 당연하건만, 문양 속에서 떠오른 숫자는 선명했다.
850패스.
이번에 얻은 패스가 100 정도 되었던 모양이다. 이제는 정말로 얼마 남지 않았다.
바라 마지않던 순간이 이만큼이나 가까워졌는데도 벅차오르는 감격이 없다는 점은 조금 의외였다. 아마도 완전히 모으지 못해서 그런 걸까.
하지만 이제 곧이다. 길어야 두 달, 혹은 세 달. 그 정도 기간이면 목표했던 패스를 다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이곳에 온 지 벌써 3년이 지났다. 베이스캠프의 기억은 이제 거의 흐릿해져서 듬성듬성 구멍이 나 있었다. 가람은 그 빈 구멍을 상상으로 채워 넣었다.
그리하여 환하게 웃는 부모님의 얼굴이 상상으로 만든 것인지, 아니면 실제로 있었던 장면인지 헷갈릴 지경이다.
음성에 대한 기억은 아주 옅은 자취로만 남아 있다. 그동안 의식적으로 떠올리지 않으려고 한 덕분에 망각이 더욱 빨랐던 것이다.
그동안 제 삶을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소망 하나만을 가슴에 품은 채 가람은 그 외의 것들을 잊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움이 사무치는 원래 세계에서의 기억들과 까마득하게 모아야 하는 패스는 확인하고 떠올릴수록 괴롭기만 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베이스캠프를 되찾는 데 필요한 패스를 확인했었다.
숫자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고, 패스가 모이는 속도도 전혀 빨라지지 않았다. 단지 그리움이 주는 고통만이 강해질 뿐이었다.
현실과 바라 마지않는 미래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어서 가람의 힘으로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 괴리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것이다.
결국 가람은 결정을 내렸다. 아니, 내릴 수밖에 없었다. 우울함에 젖어 너덜거리는 마음으로는 제대로 걸을 수 없었기에.
가람은 패스를 확인하거나, 저쪽에서의 기억을 억지로 떠올려 보거나 하는 짓을 차차 그만두었다.
오히려 저쪽에서의 기억이 떠오르면 애써 다른 주제로 머릿속을 채우려고 노력했다.
처음에는 참기 힘들었지만, 천천히 익숙해져서 마침내 저쪽과 이쪽을 전혀 구분 지어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베이스캠프를 찾는 데 필요한 패스도 확인하지 않았다. 어차피 1,000패스. 그 숫자가 변할 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을 수십, 수천 번 확인했으니까.
이렇게나 덤덤한 감정은 아마도 그 결과일 것이다.
“저깁니다.”
손이 묶여 있던 탓에 산적들은 턱으로 방향을 알렸다. 말 한 마리가 간신히 지나갈 수 있을 것 같은 입구를 커다란 나무로 교묘하게 가려 둔 덕분에 눈에 잘 띄지 않을 것 같은 장소였다.
횃불도 없는데 어떻게 이런 곳을 알아보고 들락거리나 감탄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감탄하는 사람은 없었다.
가파른 산을 느린 걸음으로 올라야 했던 탓에 산적들의 소굴에 도착한 시간은 해가 지고도 한참 뒤인 야심한 때였다.
하늘은 저녁이라기보다 밤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빛깔을 하고 있어서 모두들 졸음을 참는 기색이 역력했다.
가람 또한 피로했으나 등 뒤에 메고 있던 소총을 다시 꺼내 들었다. 가방이 폭발해 버린 탓에 손전등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가람이 신중하게 동굴로 다가서는 것을 보고 몇몇이 고개를 흔들어 잠을 떨쳐 낸 뒤 검을 꺼내었다.
벌레 우는 소리 사이에 검날이 검집을 스치는 서늘한 소리가 끼어든다. 산적들은 안에 아무도 없으니 걱정하지 말라는 소리를 했지만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무방비하게 저 어두운 산적 소굴로 뛰어드는 것은 자살행위였다. 그러나 정말로 굴 속에는 아무도 없었다. 굴 안은 맥 빠질 정도로 고요했다. 산적들은 의외로 정직한 놈들이었다.
몇몇이 수레를 부수어 횃불을 만들어 밝히자 그제야 사람들은 산적 소굴을 제대로 둘러볼 수 있었다.
한쪽에 약탈해 온 물건들이 너저분하게 쌓여 있긴 했지만, 모닥불을 피울 만한 장소도 있고 몸을 누일 만한 곳도 마련되어 있었다.
아마도 지금은 고인이 되었을 산적들도 함께 썼을 생필품들도 보인다. 제법 널찍하니 괜찮은 장소였다. 서른 명 정도는 넉넉하게 누울 수 있을 정도다.
“여기, 찾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