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화
“네.”
“아니, 왜…….”
그야 용을 잡아 봐야 1패스도 얻을 수 없을 텐데 왜 그런 위험한 짓을 사서 하겠는가.
몹시 당황하는 산적을 무시하며 가람은 정면을 응시했다. 나무 사이로 용의 사체가 보이고 있었다.
선두에서 말을 몰고 있던 상인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고삐를 쥔 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죽었다는 것을 알고 있어도 막상 보니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래도 그들의 반응은 기사들보다 훨씬 양호한 편이었다. 기사들은 완전히 넋이 나가서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사실이었다니!”
“이럴 수가.”
경악성을 발하는 기사는 그래도 담이 큰 편이었다. 몇몇은 덩치가 아까울 정도로 몸을 떨며 나무 뒤에 숨어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나 숨는데도 워낙 체구가 큰 탓에 전혀 가려지지 않는 것이 우습다.
가까이 다가가서 용의 사망을 확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실제로 어제 용이 죽는 것을 목격한 상인들도 감히 용에게 다가서지 못하고 있으니 기사들이야 어련할까.
가람은 결국 수레에서 뛰어내려 기사 하나의 손을 덥석 잡고 질질 끌었다. 캄펜이었다.
하얗게 얼어 있던 그는 무언가가 갑자기 자신의 손을 움켜잡자 반사적으로 후려치려는 듯 팔을 휘둘렀다.
가볍게 그 손을 피해 낸 가람은 진저리 치는 그를 용에게로 인도했다.
힘으로는 도저히 당할 수 없었기 때문에 ‘죽은 용인데도 겁이 나나 보죠?’ 따위의 말로 도발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마침내 곤죽이 된 용의 머리를 확인하고 나서야 캄펜의 얼굴에 혈색이 조금 돌아왔다.
가람에게 손이 잡혀 용에게로 다가서는 그 잠시 잠깐 동안 이 젊은 기사는 정말로 죽음을 맛보았다. 가람이 알았다면 엄살이 심하다고 놀려 주었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럴 기회는 없었다.
“정말이었군.”
경이로운 얼굴로 죽은 용을 바라보던 캄펜은 가람을 바라보며 얼떨떨하게 말했다. 가람은 어깨만 으쓱여 주었다.
용에게 다가간 자신들의 단장과 가람이 한입에 먹히거나 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므로 다른 사람들도 용기를 내어 다가오기 시작했다.
모두가 이 커다란 짐승의 죽음을 실감하는 동안, 가람은 적당히 근처 바위에 앉아 동물원에 처음 놀러 온 세 살배기마냥 용 앞에서 꺅꺅거리는 사내들을 구경했다.
“정말로, 어떻게 잡은 것인지 알려 줄 수 없소?”
어느새 다가온 캄펜이 진지하게 질문했다. 그는 처음보다 훨씬 고분고분해진 상태였다.
그래도 여전히 제 몸의 반도 되지 않는 작은 여자가 용을 잡았다는 사실을 믿기 힘들어하는 것 같았다. 하긴, 직접 보지 않았다면 받아들이기 쉽지 않을 일이다.
“아마 말해 줘도 이해할 수 없을 거예요.”
“……그렇군. 신기한 상처더군. 칼도, 활도 아니었어. 당신 나라의 무기요?”
“뭐, 그렇죠.”
“당신의 나라에는 그런 것이 흔하오?”
“딱히 흔하지는 않죠.”
가람이 오직 단답으로만 대화를 이어 가자 캄펜이 머쓱하게 입을 다물었다. 사실 기사라는 직업은 말재주가 좋은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무언가 말을 붙이고 싶어서 똥 마려운 강아지마냥 끙끙거리는 그에게 다른 기사 하나가 슬쩍 다가섰다.
“생각보다 피해가 적습니다. 죽은 사람도 얼마 없는 것 같고. 아마도 이미 거의 죽은 용을 가지고 사기를 치는 게 아닐까요?”
기사는 캄펜에게 귓속말로 이야기했지만 가람은 그 말을 고스란히 다 들었다. 확실히 주변에는 부서진 화물 몇 개만 뒹굴고 있을 뿐 시체는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덕분에 당시의 급박함과 참혹함이 전달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체가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용이 다 먹었으니까.
“시체 찾아요?”
“예?”
설마 제 말을 가람이 들었을 줄은 몰랐는지 기사가 당황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가람은 용을 턱짓하며 덤덤하게 말했다.
“저기 안에 다 있을걸요.”
“다 있다니?”
“배 갈라 보면 안에 사람들 있을 거라고요.”
잠시 어리둥절하게 서 있던 기사는 가람이 한 말의 의미를 깨닫고 하얗게 질렸다.
그는 급히 거수경례를 올리고는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캄펜은 그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가람에게 질문했다.
“용은 어떻게 할 거요?”
그 질문 속에서 가람은 탐욕을 읽었다. 눈앞의 기사는 용을 탐내고 있었다. 용의 비늘은 방패를 만들기 아주 좋은 재료다. 그만큼 가볍고 단단한 방패는 용의 비늘 외에 어떤 재료로도 불가능하다.
심지어 화룡의 비늘은 자체적으로 화염을 막아 주는 힘을 갖고 있어서 꼬리 쪽의 촘촘한 비늘로 갑주를 만들어 입으면 불 속에서도 쉽게 타 죽지 않는다. 탐내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글쎄요.”
“괜찮다면 베르하르트에서 처분하지 않겠소? 값은 섭섭지 않게 쳐 줄 것이오.”
“뭐, 좋아요.”
“정말이오?”
가람이 너무나 쉽게 수락하자 캄펜이 얼떨떨한 얼굴로 반문했다.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었다. 하지만 가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곳에서 가장 가까운 도시는 베르하르트이고, 또 용을 운반하는 것도 큰일이다. 가람으로서는 어차피 버릴 용의 사체였다.
이왕 버릴 용이라면 베르하르트에서 극진한 대접을 약속받고 팔아 버리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리고 한 번쯤 방문하고 싶긴 했다. 여러 가지 이유로 말이다.
“고맙소. 도시로 즉시 파발마를 보내겠소!”
캄펜은 기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무뚝뚝하던 그 얼굴이 처음으로 환하게 웃었다. 가람도 환하게 마주 웃어 주었다.
그는 내친김에 다 해치워 버리자고 생각했는지 지난 무례에 대해서도 사과했다.
매우 정중한 사과였기 때문에 가람은 똑같이 예의 바른 태도로 그의 사과를 받아 주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훈훈한 광경이었기 때문에 상인들도 앞다투어 잘되었다며 박수를 쳐 주었다.
사실 가람과 기사들이 신경전을 벌이는 동안 가장 조마조마해했던 것은 바로 상인들인 것이다. 어쨌거나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든 가람과 캄펜은 화해했다.
용의 사체를 손에 넣은 공으로 승진을 기대하며 설레어하는 캄펜을 바라보며 가람은 흥미롭게 눈을 빛냈다.
아마 저 용은 화룡 카마르혼이 아닐 것이다. 독룡 다라즈녹보다 훨씬 작고 약한 저 용이 다라즈녹을 패퇴시켰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저 용의 정체는 하나뿐이다.
카마르혼의 새끼.
가람은 트리거 부모님의 가죽을 왕좌에 걸어 놓기를 즐겨 했던 왕이 용의 사체를 어떻게 과시할지 매우 궁금했다. 그리고 카마르혼이 얼마 만에 베르하르트를 방문할지도.
그런 흥미와는 별개로 사실 가람은 베르하르트에 그렇게 깊은 유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새끼의 죽음에 분노한 카마르혼의 앞에서 베르하르트의 시민들이 모조리 죽어 나가는 것을 반길 정도로 베르하르트에 적의를 가지지는 않았다는 뜻이다.
가람이 베르하르트에 가진 것은 약간의 부정적인 편견 정도였다.
누군가가 ‘베르하르트 놈들은 말이야―’ 하고 소소하게 불평을 토하면 그에 동조하여 ‘그렇고말고요.’ 하고 함께 떠들어 댈 정도가 가람이 가진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예견된 비극을 방조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그저, 상황이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카마르혼이 베르하르트를 방문하지 않을지도 모르고, 아니면 베르하르트가 카마르혼마저 사냥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대단한 구경거리가 생길 것이다.
하지만 카마르혼이 방문 전에 예의 바른 서신이라도 보내고 올 리가 없으니 용의 방문은 기습적일 것이다.
그리고 그 기습으로 베르하르트는 어마어마한 피해를 입겠지. 설령 정말로 그렇게 된다고 해도 가람은 눈곱만큼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을 것이었다.
가람은 스스로가 죄책감을 느껴야 할 타당한 이유를 전혀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억지로 베르하르트에 죽은 용을 강매한 것도 아니고, 용을 몰래 가져다 놓지도 않았다.
재앙을 불러들이는 것은 오직 베르하르트 왕의 탐욕과 과시욕이었다.
사그라져 가는 왕국의 시대에도 왕의 호칭을 반납하지 않고 스스로를 공작이 아닌 공왕이라 칭하고 있을 정도로 허영심 많은 지배자의 최후란 정말로 지켜볼 만한 것이다.
물론 그 이유만으로 베르하르트를 방문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람은 왕에게 원하는 것이 있었다.
바로 왕좌에 깔려 있는 트리거 양친의 가죽이다.
트리거가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마도 그라면 제 부모님의 털가죽이 냄새나는 왕의 엉덩이 아래에 있는 것보다는 화장되어 바람에 떠돌기를 바라리라. 가람은 기꺼이 그렇게 해 줄 생각이었다.
출세욕에 들뜬 캄펜은 서둘러 용을 운반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람은 한쪽에 느긋하게 앉아 그가 기사들을 통솔하는 것을 감상했다.
소리치기도 하고, 공을 나눠 먹게 될 거라며 달콤한 말로 구슬리는 솜씨가 제법이었다. 기사들은 곧 단꿈에 젖은 표정이 되어 시키는 것은 무엇이라도 할 것 같은 의욕을 보여 주었다.
욕망에 물든 인간의 행동력이란 정말로 대단한 것이라, 캄펜이 떠나보낸 기사들은 그날 정오쯤 수십 마리의 말과 함께 돌아왔다. 벌거벗은 기사들이 입을 만한 갑옷도 함께였다.
기사들이 갑옷을 갖추어 입는 동안 일꾼들은 반신반의하는 얼굴로 도착해 용의 사체 앞에서 경악했다.
제 눈을 의심하는 그들 뒤로 수레와 중장비들이 줄줄이 도착한다. 도르래와 나무통, 이름을 알 수 없는 도구들이 엄청나게 많았다.
경악과 희열에 젖어 있던 일꾼들은 곧 캄펜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용의 목과 날개를 줄로 묶고 아래에 아령처럼 생긴 거대한 통나무를 넣어 고정시켰다.
고생 끝에 용은 몸 아래에 수십 개의 바퀴를 단 모습이 되었다. 엉성하긴 해도 어쨌거나 굴릴 수 있게 된 그것을 말들이 끌기 시작했다.
가람은 중간쯤부터 용의 등에 걸터앉아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었다. 용의 몸을 기어오르는 가람에게 몇몇이 무슨 짓이냐 소리쳤지만 ‘수레가 없으니 어쩔 수 없지 않으냐?’ 하는 가람의 대꾸에 입을 다물었다.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걸어서 행렬을 따라가고 있었지만 차마 가람에게 걸으라는 소리는 하지 못하는 듯했다.
기묘한 대치에 빠진 기사와 가람 사이로 캄펜이 끼어들어 중재했다. 왕은 아직 값을 치르지 않았으니 용은 가람의 것이고, 가람이 어떻게 하든 그건 그녀의 자유라는 제법 마음에 드는 소리를 하면서.
그리고 은근슬쩍 자신도 용의 몸을 깔고 앉았다. 아마도 본래 목적은 그것이었던 모양이다.
거대한 용의 아래에 작은 인간들이 새카맣게 모여 있는 모습이 커다란 과자 조각을 옮기는 개미를 연상하게 한다.
“재미있소?”
“별로.”
일꾼을 바라보고 있던 자세 그대로 가람이 캄펜의 질문에 무심히 대답했다.
가람이 용의 위로 올라가 앉는 것을 보고 뒤따라 올라온 그는 아까부터 내내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식으로 간간이 말을 걸었다.
“재미없다면서 왜 계속 보고 있는 거요?”
“별로 재미는 없는데, 뭘 닮아서요.”
“닮아?”
“개미를 닮았네요.”
“개미?”
의아한 표정의 캄펜을 똑바로 바라보며 가람이 분명한 어조로 말했다.
“잔뜩 모여서 사체를 뜯어 먹으려고 옮기는 모습이.”
이러면 더 이상 성가시게 굴지 않겠지 싶어서 한 말이었지만 캄펜은 어색하게 웃는 것으로 적당히 가람의 말을 받아넘겼다. 그리고 곧 붙임성 좋은 태도로 다시 말을 걸었다.
“내 생각과는 좀 다르군. 난 세상에서 가장 대단한 마차를 타고 있는 것 같은데. 용을 타고 가다니. 누구도 해 보지 못한 경험이지 않소.”
아마도 캄펜의 머릿속 자신은 용마차를 타고 금의환향하는 용사쯤으로 그려지고 있는 모양이었다. 왕이 내릴 포상에 들떠 다른 방향으로의 생각이 불가능한 것 같았다.
어쨌거나 짐승 가죽을 엉덩이 아래에 깔기 좋아하는 왕을 가진 기사에게 꽤 어울리는 사고방식이다.
“상인들은 왜 전부 쫓아 버렸죠?”
용을 운반하기 전에 캄펜은 상인들에게 기사 몇을 붙여 주고 쫓아내듯 떠나보냈다.
상인들은 내심 베르하르트로 함께 가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캄펜의 반응이 영 떨떠름하자 울며 겨자 먹기로 다른 방향으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세렌과 싸웠던 남자 또한 그들과 함께 짐을 챙겨 떠나고, 남은 건 기사단과 묶여서 끌려가는 산적들, 그리고 가람뿐이었다.
“다른 도시로 가서 베르하르트에서 용을 갖고 있다는 소문 좀 퍼뜨려 달라고 했지. 그리고 계속 남아 있을 필요도 없지 않소? 우리를 구해 준 사례는 이미 충분히 해서 보냈으니 그들도 만족할 거요.”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베르하르트에 도착해서 상인들이 뒤늦게 숟가락을 얹으려고 들까 두려워서이겠지만. 가람은 어깨를 으쓱이고 다시 질문했다.
“뭐, 아무래도 좋지만. 언제쯤 도착하죠?”
“오늘 안에.”
호언장담하는 캄펜의 말에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말들이 지칠 텐데요.”
거대한 용을 끌고 있는 말들은 이미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많이 지쳐 있었다.
최대한 휴식을 줄이며 간다고 해도 이틀은 걸릴 것이다. 그러나 캄펜은 씨익 웃음으로써 대답을 대신했다.
그리고 그 순간, 가람은 기묘한 소리를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