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6화
거대한 동물의 울음소리를 닮은 그것은 길 중간쯤에 기다리고 있던 일꾼들의 감탄사였다.
희열에 찬 일꾼들이 주먹을 불끈 쥐고 머리 위로 휘두르며 탄성을 내뱉는다.
어린아이처럼 날뛰는 일꾼들을 바라보며 캄펜이 혀를 찼다. 바로 얼마 전, 용을 보고 잔뜩 흥분했던 자신을 완전히 잊은 모양이었다.
일꾼들이 교대로 움직이는 노력을 발판 삼아 운반은 꾸준하고 부지런하게 진행되었다.
기사들조차 눈으로 보기 전에는 절대 믿지 않았던 사실을, 듣기만 하고 이만큼이나 대인원을 파견한 것을 보아 가람은 왕이 얼마나 짐승 잡기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베르하르트에 가 본 적이 있소?”
“없어요.”
가람은 심드렁하게 대답하고 벌렁 누웠다. 막 저녁을 먹은 터라 눈이 가물가물하다.
그 예의 없는 몸놀림에 욱할 만도 하건만 캄펜은 싱그럽게 미소 지을 뿐이다. 아마 세상 모든 것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아마도 마음에 들 거요. 베르하르트에는 좋은 남자가 많지. 용을 팔면 거금이 생길 테니 호감을 보일 남자들도 많을 거요.”
캄펜은 내심 가람이 베르하르트에 정착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 속내를 훤히 들여다본 가람은 그저 콧방귀만 뀌었다.
“내 돈에 호감을 보일 남자들 말이군요.”
“뭐, 돈도 능력이 아닌가. 한바탕 휘둘러 보는 것도 즐거운 일이겠지.”
“별로예요.”
“저런.”
캄펜은 진심으로 애석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풍류를 모른다며 안타까워하는 그를 보며 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 웃긴 기사는 죽은 용을 본 후부터 짜증 날 정도로 친근하게 굴고 있었다.
“그래도 베르하르트는 멋진 도시지. 밤에 보면 더 아름다워. 아마 깨어 있는 편이 좋을 거요.”
캄펜의 조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가람은 졸린 눈을 붙였다. 충분히 잠을 청하지 못한 탓에 매우 피곤했다.
그러나 베르하르트에 거의 도착할 무렵 캄펜이 깨웠기 때문에 그녀는 몽롱한 상태로 멀리서 불타오르는 베르하르트를 보게 되었다.
화산과 같은 도시.
베르하르트의 가장 높은 곳에는 마치 건물 하나가 통째로 끓고 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거대한 용광로가 불을 밝히고 있었다.
이글거리는 그 빛은 마치 태양과 같이 뜨거워서 멀리서도 그 열기가 느껴지는 듯하다.
그리고 그 아래에 마치 용암이 흐르는 것처럼 도시 전체로 쇳물이 줄기줄기 뻗어 있다. 그 쇳물이 내는 빛으로 도시에는 등불이 필요가 없을 정도다.
베르하르트에 도착한 시간은 아주 깊은 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여든 시민들은 많았다.
아마도 용의 사체라는 세기에 다시없을 구경거리를 보기 위해서 밤잠을 마다하고 나온 듯싶었다.
아이나 어른이나 할 것 없이 모두 환호성을 질러 대어 귀가 따가울 지경이다.
전체적으로 활기가 넘치는 도시였다. 가람은 물먹는 것처럼 늘어지는 몸으로 턱을 괸 채 그 광경을 내려다보았다.
모든 것이 귀찮은 가람에게는 저토록 기운이 넘치는 모습들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었다.
용을 구경하러 온 사람들로 인해 거리는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으므로 베르하르트의 인부들은 단상을 높게 세워 용을 운반했다.
그 거대한 몸을 수용할 만한 공간이 없었기 때문에 급히 누군가의 집을 허물기도 했다.
광장의 분수를 부수고 용을 눕힌 뒤, 광장 주변으로 기사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나서야 용을 도시로 운반하는 작업은 마침내 끝이 났다.
그쯤 되니 가람도 계속 용의 위에 올라앉아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용의 배를 타고 미끄러지듯 내려와 착지하는 가람에게 누군가가 다가와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특이한 복장의 남자였는데, 엇비슷한 옷을 입은 사람이 드물지 않게 보이는 것으로 보아 아마 궁에서 지급하는 작업복의 일종인 듯싶었다.
“용을 잡은 분이십니까?”
시종의 얼굴에 떠오른 불신을 읽으며 가람은 덤덤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왕께서 쉬실 곳을 마련해 두셨습니다.”
가람은 어떻게 알아보았냐 따위의 멍청한 소리를 하는 대신 순순히 그를 따라나섰다.
아마도 캄펜이 자신에 대해 떠들어 댄 모양이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일이었지만, 별로 상관은 없다.
안내된 곳은 화려하기 짝이 없는 방이었다. 궁 내부로 들어가기에 설마 했는데, 향기가 나는 침대에 시녀까지 줄줄이 딸린 방이다.
여성분이라 들어 특별히 신경 썼다는 시종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치 후궁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다.
“저희가 아가씨를 모시게 될 사람들입니다. 왕께서 내일 조찬을 함께하자 하셨으니 오늘은 그냥 씻고 잠드셔도 된답니다.”
가람이 주르륵 늘어선 시녀들을 둘러보자 그중 머리를 틀어 올린 시녀 하나가 조용조용하게 말했다.
가람은 선심 쓰는 것 같은 그 말투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왕이 이 늦은 시간에 식사를 원한다면 아무리 피곤하더라도 응당 지시에 따라야 한다는 투다.
가람은 그저 고개를 끄덕여서 대답했다. 시녀의 눈에 옅은 경멸이 떠올랐다. 고약한 냄새를 풍기는 꼬질꼬질한 여자의 시중을 들어야 하는 것도 부아가 치미는데, 가람이 왕의 궁에서 고개를 빳빳하게 들고 있는 것이 매우 아니꼬운 모양이었다.
“옷과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공손한 척 말했지만 시녀들은 가람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움직였다. 몇몇은 못마땅한 감정을 숨기지 않고 가람에게 날 선 시선을 보냈다.
그 모습이 마치 머리를 잔뜩 세우고 위협하는 뱀처럼 보인다. 가람은 그저 어깨만 으쓱하고 순순히 지시에 따랐다.
생각해 보니 궁에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바랄라인의 궁처럼 아름다운 궁은 아니고, 마치 요새와 같은 느낌의 성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나 거대한 건물로 들어와 보는 것은 처음이다.
칼츠버그 공작의 저택도 이렇게나 거대하지는 않았다. 기념할 만한 일에 괜한 소란을 피우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시녀가 자신의 총에 손을 대기 전까지만 해도, 그럴 생각이었다.
“손대지 말아요.”
가람이 조용히 경고했다. 시녀는 가람의 경계를 시골뜨기 특유의 긴장이라 해석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그러나 가람은 그 미소 속에서 가소로워하는 감정을 놓치지 않았다. 눈치가 빨라진 것이 이럴 때면 조금 씁쓸하다. 예전처럼 그냥 모르고 지나갔다면 기분이 상할 일도 없을 텐데.
“걱정 마세요. 저희가 잘 보관해 드릴게요.”
타이르듯 말하며 시녀가 다시 손을 뻗자 가람은 조금 강하게 그 손을 쳐 내었다. 시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손대지 말라고 했어요.”
“훔치거나 하지 않을 테니 걱정 마세요. 아가씨, 왕께서 지시하신 일이랍니다.”
시녀가 다시 한 번 총으로 손을 뻗는 순간, 가람은 번개같이 총을 빼어 들어 시녀를 겨누었다.
가람이 순식간에 전투 상태로 돌입하자 갑자기 변한 흉흉한 분위기에 모두가 얼어붙었다.
가람이 자신에게 겨눈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무기로 보이는 쇠붙이를 들고 설치기 시작하는데 긴장하지 않으면 시녀가 아니라 전사라고 불리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걱정같이 들렸다니 안타깝군요. 확실하게 경고하는데, 내 물건에 손대지 말아요. 그게 왕의 지시든 뭐든.”
속삭이듯 부드럽게 시작한 가람의 말은 으르렁거림으로 끝났다. 긴장한 시녀들 중 하나가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 하지만 왕의 명을 따르지 않으면 저희가 경을 칩니다. 아가씨도 무사하진 못할 거예요. 저희 모두 목이 잘릴지도 모른다구요!”
은근슬쩍 협박을 끼워 넣는 시녀의 말에 가람은 가볍게 미소 지었다.
잔뜩 겁먹었으면서도 지지 않기 위해 바락바락하는 것이 제법 귀엽다. 목이 잘린다는 말을 대단히 흉악하고 끔찍한 것처럼 한다는 점도 귀여웠다.
그런 것은 이미 가람에게 일상과도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도 하나 날려 버리지 않았던가.
“저런, 가엾기도 해라. 하지만 걱정 말아요. 내가 다른 선택권을 줄게요. 머리가 터지는 거랑 잘리는 것 중에 어떤 게 좋을 것 같아요?”
시녀는 잠시 가람의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처럼 멍하니 서 있었다. 너무나 상냥한 어조였기 때문이다.
가람의 얼굴은 죽음을 입에 담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검고 어둡게 가라앉아 있는 가람의 눈에서는 피 냄새가 났다.
아니, 실제로도 피 냄새가 났다. 시녀들은 가람의 가죽옷에 말라붙어 있는 핏자국을 발견하고 눈에 보이게 떨기 시작했다. 개중 심약한 자는 눈물까지 맺히고 있었다.
“나가요.”
가람이 서늘하게 명령하자 시녀들은 더 거부하지 못하고 도망치듯 방을 떠났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람은 심심한 사과의 말을 중얼거렸다. 무장 해제를 지시한 건 왕일 텐데 괜히 시녀들을 겁줘 버렸네.
어쨌거나 시녀들이 물러가자 방 안은 순식간에 적막해졌다. 들리는 것은 멀리서 외치는 시민들의 환호 소리뿐이다.
그 옅은 소음을 무시하며 가람은 방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았다. 왕이 내어준 방은 제법 호화로운 것이라 방 안에 달린 문만 해도 일곱 개나 되었다.
금과 보석으로 장식된 아름다운 문이지만 닫힌 문에서 가람이 느끼는 것은 오직 불안뿐이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모든 문을 일일이 열어 안을 확인했다.
온갖 아름다운 색채들이 흔들리고 있는 꿈결 같은 방이지만 가람은 도저히 쉴 수 없었다.
가람을 위해 마련된 것이 분명한 꽃잎이 가득한 대욕조에서도 그저 몇 바가지의 물을 퍼내어 대충 더러움을 씻어 내는 정도에 그쳤을 정도다.
그나마도 거의 탈의하지 않고 얼굴과 손발을 닦아 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향기로운 향낭과 새끼 새의 깃털로 짠 침구 등 휴식을 위한 모든 것이 마련된 방 안에서 가람은 총구를 세우고 침대에 걸터앉아 문을 경계했다.
차라리 숲이 편안할 지경이다. 금방이라도 기사들이 들이닥칠 것 같아 긴장을 늦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런 긴장이 무색하게도 밤새 방을 방문하는 사람은 없었다.
* * *
다음 날 아침, 가람을 깨운 것은 조심스러운 노크 소리였다. 워낙 얕게 자고 있었던 덕분에 가람은 거의 잠들지 않았던 것처럼 일어났다.
문을 열자 떨떠름한 얼굴의 시녀가 머리를 깊이 숙였다. 그녀는 여전히 가죽옷 차림인 가람에게 무언가 말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 포기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왕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람이 앞장서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시녀가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걸어가는 중간중간 보초를 서는 기사들이 보였다.
부스스한 머리를 하고 지저분한 가죽옷 차림으로 소총을 어깨에 건 채 거침없이 활보하고 있는 가람의 정체가 궁금한 모양인지 연신 흘끔거리는 시선이 따갑다.
“도착했습니다.”
거대한 석조 회랑 특유의 울림을 타고 시녀의 목소리가 나직하게 울렸다.
창백한 빛깔의 기둥 사이로 기다란 양피지를 펼쳐 놓고 읽는 남자가 보인다. 가람은 어렵지 않게 그가 왕임을 알아보았다.
자신의 도착을 알리는 모양인지 기사 하나가 다가가 속삭이자 왕이 읽던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늙은 남자였다. 중년, 혹은 장년 정도의 나이를 예상했던 가람은 생각보다 그가 나이가 많아서 놀랐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다. 마흔이 넘은 트리거의 나이를 생각하면 왕이 벌써 늙어 죽었어도 이상할 것이 없다.
“오, 드디어 왔군.”
왕은 대단히 반가운 얼굴로 서둘러 자리를 권했다. 가람이 조금 어색하게 자리에 앉자 왕은 마치 손녀라도 보는 것처럼 흐뭇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무슨 꿍꿍이인가 의심스러웠지만 가람은 노련하게 속내를 감추고 인사했다. 왕에게 하는 것치고는 좀 조촐한 감이 있는 인사였다.
하지만 왕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오히려 울컥한 것은 왕의 주변에 시립해 있던 기사들이다.
“무례한!”
“괜찮네, 편히 앉아요. 이런, 정말로 작은 아가씨구만. 내 기사들에 대해선 대신 사과하겠네. 아직 혈기 왕성한 나이거든. 다 늙어 빠진 나와는 달리 말일세.”
제법 매력적인 청년들이지? 하고 찡긋 윙크해 보인 왕은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쪼글쪼글한 입술인데도 불구하고 흘러나오는 음성은 무척이나 중후해서 가람은 눈꺼풀 위를 얇게 가리고 있던 편견의 막이 떨어져 나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가람은 비로소 눈을 크게 뜨고 왕을 바라보았다.
주름 많은 얼굴 위에 자리한 호박색 눈동자는 현명하고 다정한 빛깔을 하고 있었다.
호감이 잔뜩 어린 그 시선은 호기심과 자랑스러움이 깃들어 있었다. 가람은 결국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를 왜 그런 시선으로 바라보시나요?”
“그런 시선이라니?”
“그러니까.”
“자랑스러워하느냐고?”
씨익 웃으며 대신 말한 왕이 너털웃음을 터뜨린다. 유쾌해서 견딜 수가 없다는 투다.
“당연히 자랑스럽지 않겠나. 내 눈 앞에 드래곤 슬레이어가 있는데.”
가람은 왕이 진심으로 그렇게 말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왕은 어떤 꾸밈과 계산도 없는 순수한 감탄과 호감으로 그녀를 대하고 있었다.
캄펜조차도 반신반의하던 사실을 직접 보지도 않은 왕이 이렇게나 쉽게 믿어 버리는 것이 얼떨떨할 따름이다.
“믿으시나요?”
“음? 당연히 믿지. 살아남은 사람들은 상인들과 아가씨뿐이라고 들었네. 상인들이 이구동성으로 아가씨가 잡았다고 한다면 당연히 아가씨가 잡았겠지. 정황상 그렇지 않나.”
“하지만…….”
가람은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어떤 말로도 왕을 시험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왕의 논리는 명료했다. 그래서 가람은 더욱 혼란스러웠다. 가람이 생각하던 베르하르트의 왕은, 이런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눈을 가늘게 떴다. 이자가 진짜 베르하르트의 왕일까?
“아무튼 사람들은 의심이 많아서 탈이야. 너무 마음 상하지 말게. 사람들은 원래 보이는 것보다 믿고 싶은 것을 믿는다네.”
내심 왕을 의심하고 있던 가람은 그 말에 뜨끔해졌다.
왕은 현명하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지만 가람은 그가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는 자애로운 시선으로 가람을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양피지를 말아 넣었다.
“그런 바보들이니 내가 아직 살아 있어야 하지 않겠나. 어쨌거나 일단 식사나 합세. 영웅을 앞에 두고 잔소리가 너무 길었군.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잔뜩 차렸다네. 캄펜 그 바보가, 아가씨 이름이나 나이 같은 쓸데없는 것은 잔뜩 적어 올렸으면서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는 전혀 적어 놓지 않았더군.
덕분에 요리사가 좀 힘들었어. 부디 많이 먹어서 요리사에게 뿌듯함을 안겨 주게.”
그 말대로 식탁 위에는 온갖 산해진미가 뜨거운 김을 피워 올리고 있었다.
거대한 식탁 중간중간에 위치한 화로가 음식을 식지 않게 데우고 있었는데, 아마도 아래에 흐르는 것은 쇳물인 듯싶었다. 쇳물이 마치 보일러처럼 도시 곳곳에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가람이 그것을 관찰하는 사이 시종 하나가 커다란 게의 앞다리를 잘라 내어 살을 발라 접시 위에 놓아두었다.
“그러니까 이름이, 가람이라고 보고받았는데. 내가 아가씨 정보를 먼저 알고 있는 점에 대해 기분 상하지 않았으면 좋겠군. 하지만 아가씨도 내 이름 정도는 알고 있지 않나? 아, 모르려나? 그래도 들은 이야기는 많겠지?”
왕은 그렇게 말하며 기대 어린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가람은 조금 어색하게 먹던 게를 내려놓았다.
“딱히 없습니다.”
“이런, 정말로? 아쉽군.”
왕이 대단히 실망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가람은 몹시 불편해졌다.
차라리 왕이 권위로 찍어 누르려고 들었다면 이처럼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이웃집 아저씨처럼 친근하게 구는 왕의 태도는 가람이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지 못하게 만들었다.
“하나 있긴 합니다.”
“오, 어떤?”
“야수들판의 지배자인 은호에 얽힌 이야기로.”
“아아, 그거. 유명한 이야기지. 아주 오래된 이야기야. 이것도 인연이니, 한번 들어 보겠나? 아마 세간에서 듣던 것과는 조금 다를 거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