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57화 (157/256)

47화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왕은 주석잔에 담긴 술로 목을 축였다. 그가 기억을 되짚는 동안 가람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수십 명이 사용하고도 남아 보이는 거대한 테이블에 오직 왕과 자신만이 앉아 있다.

그 광경은 석재 건물 특유의 푸르스름한 색채를 입어 가람으로 하여금 마치 낡은 이야기책 속에 들어와 있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했다.

화려하고 웅장한 장식물들은 하나같이 무기들과 관련되어 있다. 천장을 떠받치는 거대한 기둥들은 모조리 망치나 도끼 같은 둔기의 형상이었다.

천장에서는 바닥을 향해 고함치는 전사들이 그려져 있다. 그 아래에서 비스듬히 햇살을 받으며 도열한 기사들은 마치 진열장에 잘 정돈된 장식물처럼 보인다.

“베르하르트의 역사는 투쟁의 역사라네.”

왕의 이야기는 조금 뜬금없이 시작되었다. 가람은 근처에서 커다란 포도를 한 알 집어 입 안으로 던져 넣었다. 입 안 가득 퍼지는 달콤함과 함께 늙은 남자가 이야기를 이어 간다.

“이 나라에는 숲도 바다도 없고 제대로 된 광산도 없지. 있는 건 오직 사람뿐이야. 아가씨도 알다시피 가진 것 없는 자들이 살아가는 것은 언제나 힘이 든다네.

아가씨는 타 대륙 사람이라서 잘 모르겠지만, 이 땅은 바로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였지. 당시 나는 크페타인과의 친교를 위한 사절로 보내지게 되었다네.

혹시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사절로서 제1후계인 왕자가 간다는 것은 외교적으로 굉장히 절박한 행동이라네.”

왕은 다시 음료로 목을 축였다. 드문드문 음식을 집어 먹기도 했다.

“혹시 크페타인에 가 본 적이 있나? 정말로 추운 땅이야. 그곳에서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을 처음에는 믿지 못했다네. 그 땅에 비해서 베르하르트는 축복받은 땅이나 다름없었어.

나는 그 혹한의 땅에서 살아가는 주민들과 그들을 버리지 못하고 일일이 돌보고 있는 크페타인 공작에게서 깊은 감명을 받았네.

당시 공작은 그 강인함으로 수없이 많은 공을 세운 남자였어. 그런 혹한의 영지가 아닌 남부의 알곡이 가득한 땅을 받아도 모자랄 지경이었지. 그 땅을 받은 것은 오직 크페타인 공작의 청 때문이었다네.”

“청이요?”

“그래, 크페타인 공작이 그 땅을 달라 하지 않았다면 그 땅의 병사들은 모두 철수했을 걸세. 밀 한 톨 나지 않는 그 불모의 땅이 중앙에 어떤 매력이 있었겠나?

전혀 없지. 황제는 그 땅을 봉인하고 싶어 했어. 심심하면 짐승들이 사람들을 물어 가는 탓에 괜히 파병 요청만 쇄도하는 그런 골칫덩이 땅.

딱 그 정도였다네. 병사들이 철수한 후에 영지민들은 고향을 버리고 떠나거나, 혹은 짐승들에게 먹혔겠지.

그걸 막은 것이 크페타인 공작이라네. 대단하지 않나? 크페타인 주민들은 황제의 명도 듣지 않아. 오직 크페타인 공작에게만 충성한다네.

그리고 지금은 많이 자랐을 크페타인 공녀에게 그 충성이 이어지고 있지. 대를 이어 바치는 충성, 그게 왕이 아니면 뭔가?”

트라키아 크페타인. 가람은 아주 오랜만에 그 이름을 떠올렸다. 붉은 머리카락의 사나운 공주님.

사람들이 그녀를 공작 영애라고 부르지 않고 공주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이미 그녀가 오롯하게 공주로서 행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페타인 영지의 주민들은 영주가 바뀌어도, 황제가 바뀌어도 오직 크페타인 핏줄만을 따를 것이다.

“크페타인 공작이 남아 준 덕분에 다행히 사람들은 짐승 먹이가 되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지. 그리고 그 작은 마을이 도시가 되고, 마법 열차로 이제 멀리서도 사람들이 찾아온다지? 이런. 이야기가 너무 새 버렸군. 어쨌든, 당시 나는 애송이였다네.”

왕은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가람은 어느새 자신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있었음을 깨닫고 무안해졌다.

서서히 피어오르는 연기처럼, 왕의 이야기는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었다.

“크페타인에서는 정말로 온갖 것들이 사람을 물어 가지. 당시에 내 시중을 들던 작은 아이가 있었는데, 딱 내 허리 정도 오는 키였다네. 밥이나 굶지 말라고 거둔 아이였지.

그 애를 내가 보고 있는 바로 앞에서 왕독수리가 채어 갔어. 어마어마하게 큰 놈이라 나는 용이 나타난 줄 알았다네. 뒤늦게 합류한 공작에게 수색을 청해 봤지만 이미 죽었을 거라고 하더군.

그 정도였어. 곰이며, 호랑이며 사람을 물어 가기 바빴지. 그중에서도 최고는 회색 공포라고 불리던 두 마리 은호였다네.”

드디어 아는 이야기였다. 멈칫한 가람이 먹고 있던 고기를 내려놓았다.

“표정을 보니 아는 모양이로군. 그 두 마리 호랑이는 거의 하루에 한 명씩 사람을 물어 갔다네. 무장한 병사도 보란 듯이 물어 갔지. 짐승과 사람이 서로 어금니와 창을 겨누고 으르렁거리는 땅이니 당연한 일이었겠지만.

어쨌거나 나는 크페타인 공작에게 무언가 깊은 인상을 주고 싶었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인 데다 나도 당시엔 피가 끓는 젊은이였거든.”

“잡았군요.”

“그렇지. 여기서부터는 잘 알려진 이야기라네. 자화자찬을 하는 것 같아 부끄럽지만, 나는 사실 태어나서 처음으로 사냥을 해 보는 거였다네. 첫 사냥치고는 대단한 성공이었지.

하지만 생각보다, 그리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네. 말했지 않나? 나는 애송이였다고. 새하얗고 아름답던 눈밭이 온통 붉어진 그 광경을 직접 마주하고 나니 어쩐지 서글펐어.

그 강하던 맹수는 상처를 입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순식간에 얼어 죽어 버렸지. 시시할 정도로 쉽게 죽어 버렸어.”

왕은 그때를 더듬듯 씁쓸하게 몇 번 같은 말을 되뇌었다. 잠시 술로 입을 헹군 그는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 갔다. 좀 더 빨라진 어조였다.

“발톱에 다쳤다면 네가 저 꼴이 되었을 거다. 하고 크페타인 공작이 말하더군. 그제야 나는 좀 깨달은 기분이었다네. 왜 아버지가 나를 이곳으로 보냈는지 말이야. 아가씨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알겠나?”

가람은 전혀 감이 오지 않아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왕은 가볍게 미소 지은 얼굴로 말했다.

“영웅은 없었어. 내 생각에 나는 영웅이 아니었지. 그냥, 불쌍한 호랑이 하나를 죽였을 뿐이었어. 살아남은 새끼도 가엾어 데려오고 말았지.

워낙 똑똑한 놈이라 제 부모의 원수를 알아보고 나를 따르지는 않았지만, 나는 그래도 녀석을 죽이고 싶지 않았다네.

하지만 이 베르하르트에서는 나를 영웅처럼 대접하고 있다네. 알겠나? 우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이런 거라도 필요한 거야. 아가씨처럼 실리주의적인 눈을 하고 있는 사람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는 말이겠지만.”

아주 어렴풋하게 왕이 하고 싶은 말을 알 것 같았다. 왕은 사실 가람이 진짜 용을 잡았는지 잡지 않았는지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왕이 관심 있는 것은 오직 이야기였다. 시민들에게 용기를 주고, 긍지를 줄 자랑스러운 이야기.

가슴을 펴고 살아가게 해 줄 이야기 말이다. 왕은 용이 아니라 이야기를 사고 싶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에게, 베르하르트인이 되어 주기를 청하시는 거군요.”

그들의 영웅이 되어서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 주기를 바라는 것. 그것이 왕이 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토록이나 친절한 것이었나. 가람이 굳어진 얼굴로 바라보자 왕은 어깨를 으쓱였다.

“보아하니 그건 거절할 것 같군. 그렇다면 다른 방법도 있지. 우리에게 영웅을 줄 수도 있지 않나?”

“영웅?”

“캄펜은 좋은 기사이지. 영웅이 되기에도 좋은 나이야. 아가씨가 해 줄 것은 아무것도 없다네. 그저 조용히 대가를 받고 용에 대해서는 어디에도 말하지 않으면 돼.”

“그걸로 캄펜이 대신 드래곤 슬레이어가 되는 거군요.”

“아이들에겐 꿈과 희망이 필요하니까. 베르하르트엔 아이들이 많거든.”

“야수들판을 불태운 사람이 할 만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은데요.”

가람이 반사적으로 대답하자 왕은 눈을 둥그렇게 떴다.

“그게 잘못한 건가?”

분명 잘못했다 해야 했지만 왕이 너무나 당당하게 되묻자 가람은 조금 당황했다.

그는 진심으로 의아한 듯 가람의 대답을 기다리다가 천천히 제 생각을 말했다.

“인간들은 인간들을 지키고, 짐승들은 짐승들을 지키지. 알고 있나? 베르하르트에서 야수들판으로 쳐들어가는 것이 아니야. 늘 먼저 덮쳐 오는 것은 야수들이라네. 나는 내 시민을 지키기 위해 할 일을 하고 있을 뿐이지.”

“트리거는 왕께서 가죽을 내어주면 더 이상 쳐들어오지 않을 거예요.”

왕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그리고 천천히 제가 앉은 의자의 새하얀 가죽을 쓰다듬었다.

“아가씨, 이건 단순한 가죽이 아니라네. 이건 이 도시에서만큼은 전설이야. 그 전설을 그렇게나 쉽게 내어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그 호랑이는, 아마도 원하는 대로 언젠가 복수할 수 있을 거야. 하지만 그건 내 사람들이 모르는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네.”

가람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떠오르는 말은 많았지만 그중 어떤 것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짐승들이 계속해서 쳐들어오도록 방관해서 결과적으로 도시의 무력을 키우기 위한 명분을 만들고 있지 않느냐는 말도, 야수들판의 동물들을 이용하고 있지 않느냐는 비난도 할 수 없었다. 왕은 그저 자신의 의무를 충실히 지키고 있을 뿐이었다.

눈앞의 남자는 언젠가 트리거의 습격이 필요 없어질 무렵, 자신의 목숨을 거래 도구 삼아 모든 것을 끝낼 생각이었다. 자신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늙고 노쇠하여 쪼글쪼글하게 말라붙은 노인이었지만, 눈앞의 이 늙은이는 아직 왕이라네. 내 시민들의 보다 나은 삶을 위해 노력할 의무가 있어. 크페타인 공작에게 그걸 배웠지. 그래, 이제 이런 잔소리는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전설의 대가에 대해 말해 볼까?”

가람은 처음의 요구 사항, 그러니까, 트리거 부모의 가죽을 요구하려던 말 대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어졌다.

트리거는 자신에게 부탁하지 않았다. 가죽을 되찾아 달라고 하지도 않았고, 대신 복수해 달라고 하지도 않았다. 실패하지도 않았다.

심지어 성공이 약속되어 있기까지 했다. 이것은 오직 왕과 트리거 사이에서 해결할 일이다. 자신이 끼어들 틈은 없었다.

“대가는…….”

가람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앞의 왕은 아마도 용이 카마르혼이라고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다라즈녹을 보지 못했으니 용의 객관적인 크기에 대한 감도 없을 테고, 알려진 용 중 화룡은 단 한 마리뿐이니 카마르혼이라 확신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가람은 이쯤 되자 용을 여기까지 가져온 것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눈앞의 왕은 지나치게 훌륭한 인물이었다.

역시 말을 하자. 넌지시 운이라도 띄워 보자. 가람이 그렇게 결심하는 순간, 평화로운 식사 시간을 박살 낼 듯이 다급한 경종이 울렸다.

보통 심각한 경보가 아닌 듯 주변이 일시에 소란스러워진다. 훈련받은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순간 가람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끔찍할 만큼 거대한 체구를 가진 분노한 붉은 용이었다.

설마 겨우 하루 만에 베르하르트를 찾아온 것인가.

가람이 아연해하는 순간 빗발치는 경종 사이로 병사가 난입해 소리쳤다.

“트리거가 나타났습니다!”

왕은 별로 놀라지도 않고 그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 호랑이는 역시 명줄이 질기구만.’ 하고 감탄하듯 짧게 말했을 뿐이다. 애가 닳은 것은 병사뿐인 듯했다.

그가 발을 동동 구르며 피해야 한다고 외치자 왕은 그제야 마지못한 듯 느릿느릿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하는 것을 보니 아가씨는 아마도 저 호랑이와 안면이 있는 모양이군.”

가람이 멈칫해서 왕을 바라보았다. 그를 따라 어정쩡하게 일어난 자세로 멍하게 서 있던 그녀는 문득 스스로의 상태를 자각하고 자세를 가다듬었다.

왕의 곁에 선 기사들은 지시만 떨어지면 가람에게 달려들 듯이 몸을 긴장시키고 있다. 가람도 여차하면 방아쇠를 당길 각오로 이를 악물었다.

방금까지만 해도 제법 훈훈한 분위기가 감돌던 테이블은 순식간에 살기등등하게 날이 섰다.

이 자리에서 긴장하지 않는 것은 왕뿐이다. 그는 나른하기까지 한 어조로 태연하게 가람을 격려하기까지 했다.

“잘해 보게.”

진의를 알기 힘든 말만 남긴 채 왕은 닦달하는 기사들에 휩싸여 자리를 떠났다. 홀가분하리만치 빠른 퇴장이었다.

홀로 덩그러니 남겨진 가람은 대단히 황당해졌다. 왕이 떠나고 나자 성을 오가는 누구도 그녀에게 신경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의도적인 무시라기보다, 모두 제각각 자기 역할에 충실한 나머지 가람의 존재를 잠시 잊은 듯했다. 그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는 것은 자신뿐인 듯싶었다.

당황하던 가람은 일단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여기저기서 신호로 보이는 화살들이 각양각색의 천을 매달고 날아오르고 있다.

우왕좌왕하는 와중에 누군가가 ‘방벽이 뚫렸다―’ 하고 길게 외쳤다. 그 말을 복창하며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화살을 장전한다. 화살이 향한 곳은 당연하게도, 트리거였다.

멀리 보이는 트리거는 지금까지 가람이 알고 있던 그 호랑이가 아닌 것만 같았다.

가람은 이렇게나 살벌한 트리거를 본 적이 없었다. 가람이 그를 발견했을 때, 트리거는 두툼한 앞발로 병사 하나를 날려 버리고 있었다.

그 직후 날아드는 화살을 꼬리로 걷어 낸 그는 검을 휘두르는 병사를 꼬리로 잡아채 그대로 목을 물어뜯었다.

으득, 하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반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물린 병사는 그대로 절명했다. 입가를 피로 적신 거대한 호랑이는 그대로 근처 지붕으로 도약했다.

거주인의 새된 비명과 병사들의 분에 찬 외침이 마구 뒤섞여 터져 나온다. 지붕을 활보하는 트리거를 따라 병사들의 활이 기울어졌다.

그러나 시위를 당기기도 전에 또 다른 습격이 시작되었다.

무시무시하게 큰 독수리와 까마귀, 이름을 알 수 없는 온갖 새들이 날아들어 병사들의 얼굴을 노린다.

덕분에 화살이 조금 뜸해진 틈을 타서 한쪽에서는 코뿔소나 하마 따위의 짐승들이 돌격했다.

갑옷을 걸쳐 입고 기세 좋게 달려들던 병사들은 그 서슬에 질려 혼비백산했다.

경종 소리와 비명, 외침, 동물의 울음소리 따위가 소란하게 뒤섞인다. 그 사이에서 트리거는 첨탑을 오르고 있었다. 발톱을 박을 때마다 돌이 파편을 튀기며 부서져 나간다.

트리거가 목표하는 곳은 분명했다. 그는 왕궁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가람은 정신을 차렸다. 자신은 이곳에 있으면 안 된다.

모두가 내버려 두고 떠나 버린 덕분에 테이블 위에는 아직도 산해진미가 즐비했다.

이곳에서 트리거를 맞닥뜨렸을 때 트리거의 눈에 비칠 그림은 영 좋은 모양새가 아닐 것이다.

척 보기에도 제법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내고 있음직한 공간이니 오해하고도 남는다.

트리거라면 자신의 해명을 믿어 줄 거라고 생각하지만, 저 맹렬하게 달려오는 모습을 보니 쉽게 확신이 서지 않았다.

밖은 인간과 동물의 편으로 대립하고 있었지만 가람이 설 곳은 분명했다.

나가서 트리거를 도와야 한다. 생사를 도외시한 것 같은 저 질주는 정상이 아니었다.

비록 트리거를 도와 함께 인간들을 도륙해 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트리거를 지키는 정도는 해 주고 싶었다.

그가 자신에게 해 주었듯이.

그대로 창문을 통해 밖으로 뛰쳐나가려던 가람은 순간 멈칫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방을 떠나기 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왕이 아무렇게나 내버려 두고 떠난 새하얀 털가죽이 자신을 시험하듯 빛나고 있었다.

마치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성스럽게 보이는 광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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