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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158화 (158/256)

48화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가람은 단호하게 가죽에서 등을 돌렸다. 불태우는 것도, 빼앗는 것도 모두 트리거의 몫이다.

설령 가죽을 가져다준다고 하더라도 트리거가 정말로 그것을 바라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지금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자신은 없었지만, 그래도 이것이 옳은 일이라는 것에 대한 확신은 분명했다.

트리거와 한마디 대화도 없이 자신이 결정할 일은 아니다. 왕과의 대화로 얻은 교훈으로 봐서도 그러했다.

그대로 밖으로 몸을 날린 가람은 탄력적으로 몸을 사용해 왕궁의 다른 지붕 위로 내려앉았다.

보호 장비 하나, 끈 하나 없는 위험천만한 도약이었지만 가람의 얼굴에 공포는 없었다. 오히려 좀 더 빨리 서둘러야 한다는 촉박함이 있을 뿐이다.

느낌이 이상했다. 가죽을 찾기 위해 이쪽으로 곧장 올 줄 알았던 트리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요새처럼 뾰족한 첨탑이 많은 왕궁은 도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지어져 있다.

그리고 도시의 높은 곳에 있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밤에도 낮에도 열과 빛을 내뿜는 거대한 용광로가 바로 그것이다.

트리거는 그 용광로를 향해 맹목적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 무모한 돌진이 가람은 불안했던 것이다.

트리거의 이런 행동은 확실히 지금까지의 것과는 다른 패턴인 모양이었다. 매우 동요하는 것 같은 병사들의 행동은 가람에게 확신을 주었다.

평소와는 전혀 다른 루트로 도시를 습격했던 탓에 제대로 방비하지 못한 병사들이 줄줄이 쓰러져 나갔다.

지금까지는 트리거가 가죽을 노리니 당연히 가죽의 위치를 중심으로 방어진을 짰는데, 이번만큼은 그 방어진도 무용지물이나 마찬가지다.

“용광로를 노린다!”

우왕좌왕하던 병사들 중 누군가가 크게 외쳤다. 그러나 외치는 것으로 끝이었다. 전투 상태에서 전열을 바꾸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트리거가 지난 세월 동안 단 한 번이라도 가죽이 아닌 다른 것을 노렸다면 병사들도 만약을 대비했겠지만, 트리거는 오직 가죽만을 노렸고 그것은 고정 관념이 되어 병사들의 발을 묶어 버렸다.

병사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높다란 첨탑과 첨탑 사이를 트리거가 날듯이 달렸다.

가람은 조금 먼 곳에서 자신을 통과해 가는 트리거를 바라보고 이를 악물었다.

저쪽 세계로 가서 장비라도 좀 챙겨 오면 따라가기 수월할 텐데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는 시간이 완전히 충전되려면 아직 한참은 남아 있었다. 적어도 노을 지는 시간 정도는 되어야 돌아갈 수 있을 듯했다.

덕분에 가람이 간신히 용광로로 기어 올라왔을 때 사태는 어느 정도 소강상태에 접어들어 있었다.

후끈한 열기와 상공의 공기가 뒤엉켜 엉망으로 꼬인 바람이 방향도 없이 마구 불어닥쳤다. 강한 열풍에 뺨이 옅은 화상을 입은 것처럼 쓰라렸다.

그러한 강풍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은 대단히 맹목적이었다. 주변에 늘어 가는 시체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투지는 전혀 꺾이지 않았다.

병사들이 필사적인 것도 당연한 일이다. 병사들의 입장에서는 무도하기 짝이 없는 호랑이인 트리거가 오래도록 지켜 온 용광로에 저지를 짓이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막아야 한다는 결사의 외침이 뜨거운 공기를 더 뜨겁게 달구었다.

현기증 나는 뜨거움 속에서 가람은 잠시 멍하게 서 있었다. 짐승 울음소리와 사람들의 악다구니가 뒤섞여 멀리서 볼 때보다 더 엉망이었다. 아지랑이 사이에서 붉게 일그러지는 그 광경이 어쩐지 현실감이 없다.

뜨거운 땀이 뚝뚝 떨어져 눈 안으로 미끄러지자 가람이 손을 들어 뺨을 쓸었다. 내려다보자 손이 땀으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바로 앞에서 트리거가 싸우고 있었다. 겨우 열 걸음도 안 될 것 같은 거리다.

날뛰고 있는 그 모습을 지척에서 마주하자 가람은 문득 깨달았다. 트리거를 돕고 싶다고 해도 자신이 곁에 있어 도움이 될 것이 별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떡이며 달려온 이유는 무엇인가. 가람은 그 질문에 천천히 대답했다.

보고 싶어서.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터무니없이 감상적인 대답에 스스로도 실소가 나올 지경이었지만 그것이 진실이었다.

트리거를 보는 순간, 그가 사람을 물어 던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가까이 가고 싶었던 것이다.

돕겠다느니 뭐니 하는 것도 결국은 핑계에 불과했다.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그리움이 자각 없는 발걸음을 그에게로 이끌었던 것이다. 너무 오래 혼자 다녔나.

가람은 참혹한 풍경 속을 천천히 걸어 트리거에게로 다가섰다. 조심스러운 걸음이었다.

한창 전투 중인 장소라는 특성을 제외하고도 이곳은 위험한 곳이었다. 강한 바람에 떠밀려 중심을 잃으면 아차 하는 순간 아래로 곤두박질칠 수도 있다.

시뻘건 쇳물이 이글거리는 살벌한 풍경은 절로 사람을 긴장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러나 가람은 걸었다. 스스로도 헛웃음이 나오는 그 이유 하나만을 가지고서 걸었다. 어처구니없지만 대단히 분명하고, 확실하고, 중요한 이유였다.

트리거가 그리웠다. 모든 상황을 다 뒤로 미루고서라도 재회하고 싶을 만큼.

마침내 가람이 지척까지 다가가자 또 다른 병사인가 하고 사납게 고개를 들었던 트리거가 그대로 얼어붙었다.

피로 점철된 풍경 속에서 외따로 떨어진 것처럼 평온한 얼굴의 가람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네가 왜 여기에…….”

얼떨떨한 목소리도, 말을 할 때마다 들썩이는 그 입매도 모두 트리거다. 비록 입가에 피가 흥건하긴 했지만 가람은 반갑게 웃었다.

이성을 잃고 자신마저 몰라보면 어쩌나 했는데 생각보다 멀쩡한 상태인 모양이었다.

“어쩌다 보니 오게 됐는데, 트리거가 보이더라구요.”

“이런.”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낸 트리거가 길게 돋아난 눈썹을 꿈틀거렸다. 어색하고 곤란해하는 표정이었다.

상황을 감당하지 못하는 기색으로 곤란해하던 그는 문득 생각이 닿았다는 듯 질문했다.

“혹시 저 아래 광장에 용. 네 솜씨냐?”

“그렇죠 뭐.”

혹시나 해서 던진 질문인데 가람이 너무나 흔쾌히 대답하자 트리거는 얼떨떨해졌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구나.”

새삼스러운 눈으로 자신을 찬찬히 살피는 그에게 가람은 히죽 웃음으로써 대답했다. 이런 식으로 웃는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트리거한테도 많은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요. 뭘 하려고 하는 거예요?”

가람이 그렇게 묻는 순간 트리거는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것처럼 얼굴을 굳혔다.

그리고 흘러나오는 대답도 얼굴만큼이나 딱딱한 것이었다. 재회로 나긋나긋하게 풀려 있던 공기가 일시에 날카로워진다.

“알 것 없다. 어서 여기서 떠나라. 아니, 도대체 왜 여기까지 온 거냐?”

가람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트리거가 보이기에, 보고 싶어서요.”

가람의 아무렇지도 않은 대답에 트리거는 복잡한 표정으로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러나 곧 이를 악문 것 같은 음성으로 다그쳤다.

“있어 봐야 좋을 것 없다. 당장 떠나. 어서.”

“트리거를 두고요?”

“난 할 일이 있다.”

“할 일이요?”

“그래. 할 일.”

“그게 뭔데요?”

“알 것 없어.”

“듣기 전에는 절대로 떠나지 않을 거예요.”

가람이 단호하게 대답했다. 물론 들어도 트리거를 홀로 내버려 두고 이곳을 떠날 생각은 없었다.

그런 가람의 속마음을 모르는 트리거는 결국 내키지 않는 얼굴로 짧게 대답했다.

“이 용광로를 부술 거다.”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발아래에서 끓고 있는 용광로를 내려다보았다. 긴 설명은 없었지만 가람은 그의 의도를 순식간에 간파했다.

용광로의 아래에는 보라색으로 빛나는 마법 화로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거대한 마법 화로일 것이다.

그것을 폭파시켜 용광로의 외벽을 부수고 쇳물을 개방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삽시간에 흘러나온 쇳물이 도시를 집어삼키게 하는 것. 비록 화산의 폭발에는 미치지 못할 위용이지만 도시를 엉망으로 만들기에는 충분한 행위였다.

가람은 순간 아찔해져 믿을 수 없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냥 살아가고 있는 저 시민들에게 이 쇳물을 끼얹겠다고?

“나를 막을 거냐?”

막아선다면 가람마저 물어뜯을 듯이 흉흉한 기세였다. 야수들판을 잃은 트리거에게 이것은 정당한 복수였다.

가람은 그 얼굴을 바라보다가 힘없이 물러섰다. 그것으로도 대답은 충분하다 생각했는지 트리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주 잠깐, 죄책감 어린 표정이 떠올랐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들었으니 이제 그만…….”

트리거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검은 늑대가 날카로운 소리로 울었다. 단말마와도 같은 비명이었다. 동시에 등 뒤에서 검이 불쑥 솟아올라 트리거를 향해 똑바로 찔러 든다.

그러고 보면 이곳은 느긋하게 대화를 나누기엔 적절하지 못한 장소였다. 가람을 만난 것에 놀라 잊고 있었지만 지금은 한창 전투 중이다.

가람이 트리거에게 다가가자 잠시 지켜보려는 듯 물러났던 병사들이 다시 맹렬히 검을 휘둘렀다.

“짐승들과 한통속이다. 죽여!”

귀가 없는 것이 아니니 병사들도 가람과 트리거의 대화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낭패 어린 얼굴의 가람에게 병사 하나가 괴성을 지르며 살려들었다.

그러나 가람이 가볍게 몸을 돌려 회피하자 병사는 그대로 돌진해 쇳물 속으로 몸을 던졌다. 길게 늘어지던 비명이 뚝 끊어진다.

시체도 없이 그저 검은 그을음만이 남았다. 그것을 잠시 눈에 담은 가람이 본격적으로 난전에 뛰어들었다.

가람이 달려드는 병사를 차고, 쏘고, 베어 넘기는 동안 트리거는 다른 병사들을 살육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도시 한복판이니 병사들이 증원되는 속도도 빠르다. 달려드는 병사들은 끝이 없었다. 날개 달린 듯이 싸우고 있긴 하지만 한계는 분명했다.

검은 재규어 두 마리가 트리거의 옆에서 보조하고 있긴 했지만 눈에 띄게 움직임이 둔해지고 있었다.

애당초 기습이라는 작전은 장기적으로 가져갈 만한 것이 아니다.

처음에는 우왕좌왕하던 병사들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안정된 진을 짜서 상대해 오고 있었다.

“죽어―!”

마구 섞여 싸우던 가람은 순간 달려든 두 명의 병사에 균형을 잃었다.

휘청, 하는 순간 눈앞이 어찔했다. 그대로 곤두박질친 것은 순식간이었다. 반사적으로 뻗은 손에 무언가가 걸려 필사적으로 붙잡았으나 이미 살이 익을 정도로 뜨거운 곳까지 떨어져 버렸다.

가람은 놀란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며 자신이 움켜쥔 것이 무엇인지 확인했다.

용광로의 위쪽에서부터 늘어뜨려진 사슬이었다. 아마 솥 위에 놓여 있는 다리를 고정하는 용도로 사용되는 것 같았다.

원래는 다리 가장자리에 묶여 있던 것 같았지만 난전 중에 끊어졌는지 끝 쪽은 쇳물에 담겨 있었다. 그대로 잡고 주르륵 미끄러졌다면 쇳물 속에 빠질 뻔했다.

가슴을 쓸어내린 가람은 쇠사슬을 잡고 올라가려고 했다. 위에서 사슬을 끊어 버리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사슬은 위쪽에서 벌어지는 전투에 영향을 받아 위태롭게 출렁이고 있었다.

고온에 흘러나온 땀 때문에 미끈거리는 손으로 뜨거운 쇠사슬을 잡고 오르기가 쉬운 일은 아니었으나 마냥 손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굳이 누군가가 자르지 않더라도 금세 끊어질 수 있다.

조금씩 기어 올라가던 가람의 귀에 불길한 소리가 감지되었다.

원래 용도대로 사용되고 있지 않았던 탓에 쇠사슬의 시작 부분의 부품에 균열이 가고 있었던 것이다.

경첩을 반대로 꺾어 버린 것이나 다름이 없어서, 그 부담을 이기지 못하고 서서히 부서지고 있었다.

시간이 정말로 얼마 없다. 쳐다보면 눈이 아플 정도로 밝게 끓어오르는 쇳물의 고온이 정신을 흐리게 만들었지만 쥐어짜지는 수건처럼 땀을 쏟아 내면서도 가람은 필사적으로 사슬을 올랐다.

그러나 그 위태로운 움직임을 그냥 둘 병사는 없었다. 사슬을 오르고 있는 가람을 발견한 병사 하나가 사슬을 붙잡아 흔들어 댄 것이다.

“죽어, 떨어져 죽어 버려라!”

“그 말밖에 할 줄 몰라?!”

신경질적으로 외친 가람은 한 손으로 몸을 지탱하고 다른 손으로 허리춤의 권총을 꺼내어 쏴 버렸다.

이런 고온 속에서 총을 사용하는 것은 대단히 위험한 일이었지만 별수 없었다.

다행히 총은 폭발하지 않았고, 가람은 다시 재빨리 균형을 잡고 사슬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러나 병사가 흔들어 댄 덕분에 수명이 얼마 남지 않았던 연결부가 결국, 끊어졌다.

아주 잠깐의 부양감 후에 가람은 상황을 인식했다. 그대로 쇳물 속에 녹아든다고 생각하니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끊어져 출렁이며 떨어져 내리는 사슬의 끝이 느릿하게 보였다. ‘떨어진다.’라고 생각하는 순간, 사슬이 크게 출렁였다.

위쪽에서 트리거가 사슬에 발톱을 걸어 당기고 있는 것이 보였다.

“트리거!”

반사적으로 트리거를 외친 순간 반대편에서도 큰 울음소리가 들렸다. 고통에 찬 울음소리였다.

트리거가 빠진 사이 그 빈틈으로 병사들이 달려든 것이다. 울음소리는 검에 스친 자칼의 것이었다.

마치 시선이 당겨 가듯 그쪽을 바라본 트리거가 이를 악무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가람을 바라보며 짧게 사과했다.

미안,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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