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동시에 가람은 자신이 매달려 있던 줄이 급격하게 아래로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모든 것은 찰나의 시간 동안 일어난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믿기지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사슬을 잡아채었던 트리거가 다시 자신을 놓아 버린 것.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모르고 싶었다.
천천히 뒤도는 궤적을 그리는 저 하얀 꼬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정말로 모르고 싶었다.
트리거가 자신을 쇳물 속으로 곤두박질치게 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에 어떤 이유를 붙이고 싶지도 않았다.
그렇게 정당화하기엔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쇳물에 몸이 녹아 가는 고통 속에서 배신감을 느끼지 않는 것은 정말로 힘겨운 일이다.
가람은 그을음을 남기고 배신감을 안은 채 그렇게 다시 한 번 죽었다.
트리거에게는 가람보다 자신의 짐승들이 더욱 소중했기 때문에.
* * *
“헉!”
텅 빈 방 안에서 가람이 튕기듯 몸을 일으켰다. 크게 뜨인 초점 없는 눈동자에 눈물이 고이고, 마치 물을 흠뻑 머금고 있었던 것마냥 온몸이 미끈거릴 정도로 식은땀에 젖었다.
육체가 멀쩡함에도 불구하고 고통은 남아 있었다. 정확히는, 고통의 기억이 남아 있었다. 가람은 죽음의 잔재 속에서 몸을 떨었다.
온몸이 불타고 녹는 고통은 쐐기처럼 정신에 박혀 들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이렇게나 오랜 시간 동안, 터무니없을 정도로 고통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아픔에 대한 기준이 모조리 새로 쓰였다.
감각이 존재하는 것이 원망스러울 정도로 강렬한 고통에는 시간의 흐름도 없었다.
가람은 쇳물에 빠져 죽는 데 걸리는 시간이 그렇게나 오래 걸린다는 것이 믿을 수가 없었다.
객관적으로 측정했을 때 죽음에 이르기까지 걸린 시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찰나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짧았다.
그러나 고통은 체감 시간의 길이를 끔찍할 정도로 늘리기 마련이다. 가람은 거의 즉사했음에도 불구하고 더 빨리 죽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했다.
살이 쇳물에 익고, 녹아서 너덜너덜해진 피부로 쇳물이 스며 와 장기를 익히고, 마침내 완전히 녹여 버린다.
머리가 가장 늦게 빠졌으므로 가람의 두뇌는 몸에서 보내오는 신호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팔이, 손가락이 익어 형태를 잃고 무너지는 감각. 오로지 고통뿐인데도 그런 것을 감지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다.
모르드레드에게 머리가 잘려 죽은 것은 오히려 깔끔하고 인도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가 그런 식으로 자신을 죽여 준 것이 고마울 정도였다.
타 죽는 고통이 너무나 심해 미치지 않은 것이 신기할 정도다. 눈을 뜨고 나서도 기억에 남은 고통의 잔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육체는 멀쩡했지만 그 기억 자체가 뇌를 속여 고통을 불러오고 있었던 것이다.
아늑한 방 안에서 가람은 한참 동안 꼴사납게 고통에 몸부림쳤다. 몸을 감싸 안은 손이 살을 파고들고, 다리는 죽기 직전의 벌레마냥 의미 없이 바르작거린다.
전신의 근육이 쇼크로 가늘게 경련했다. 그 쇼크 속에서 가람은 스스로가 보고 있는 것을 끊임없이 언어로 자신에게 되뇌었다.
본능적으로 그것이 쇼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방, 침대, 책상, 이불보 등 눈에 보이는 것들의 이름을 닥치는 대로 중얼거린다.
미친 사람처럼 입으로, 속으로 같은 말을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각인시키던 가람이 순간 신경질적으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히스테릭한 비명이 터져 나와 다시 가람의 귓속으로 들어가 정신을 각성시켰다. 효과가 있었다.
아주 약간이지만 가람은 강력하게 자신을 사로잡고 있던 그 고통의 환각에서 조금 벗어날 수 있었다.
일단 효과가 있다는 생각이 들자 가람은 그 짓을 몇 번 더 반복했다. 그냥 악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크게 욕설을 내뱉기도 했다.
마침내 고통이 잦아들기 시작했다. 가람은 격렬한 숨을 몰아쉬며 천천히 사방을 둘러보았다. 뛰쳐나갈 것처럼 버둥거리던 눈동자가 비교적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녀는 한참 동안 침묵 속에 앉아 있었다. 그리고 천천히 자신이 외로운 적막 속에 있다는 것을 자각했다.
베이스캠프.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는 세상.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지금만큼 이 사실이 싫은 때는 없었다. 진저리가 쳐질 지경이다.
그러나 울 곳이 필요했기 때문에 그녀는 무릎을 모아 그 사이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팔을 둘러 스스로를 감싸 안았다.
이곳에는 자신을 안고 다독여 줄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아니, 굳이 이곳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흐으…….”
한숨 같기도 하고 울음 같기도 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람은 한참 동안 그 상태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눈물도 흘리지 않고, 흐느끼지도 않은 채로 그저 그렇게 가만히 앉아 있었다.
배신.
흔히 배신을 당한 인물들은 분노에 떨며 복수를 다짐하곤 하지만, 가람이 느끼는 것은 오로지 서글픔이었다.
그녀는 트리거를 믿었다. 정말로 믿어 의심치 않았다. 자신을 구해 줄 거라고, 힘들겠지만 그래도 그런 끔찍한 용광로 속으로 처박히게 하지는 않을 거라고 믿었다.
그러나 기대는 처참할 정도로 단호하게 부정당했다.
그저 그것뿐이었다면, 가람은 오히려 트리거를 걱정했을 것이다. 고통을 이겨 내고 일어나 그를 구하러 달려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다. 자신을 구해 주지 않아 배신감을 느낀 것이 아니었다. 그가 너무나 단호하게, 일말의 고민조차 없이 자신의 목숨을 놓아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울타리 속에서 그리 높은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 않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도, 아주 조금은 그 울타리 속에 포함되어 있다고 생각했는데. 트리거에게 자신은 결국 이방인일 뿐이었다.
마치 확인 사살을 당한 것처럼 어찔하게 머리가 아파 왔다. 단단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암담했다.
그 꼬리.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뒤돌던 꼬리. 그는 자신이 되살아날 수 있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니 죽으면 그것으로 끝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것을 유추하는 심정은 서늘한 온도였기 때문에 가람의 머리는 달아오르는 대신 차갑게 식었다. 그래, 딱 그 정도였던 것이다.
그래, 솔직히 사실이 아닌가. 자신은 이방인이었다. 그리고 스스로도 제자리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하지 않았던가.
트리거의 삶에 본격적으로 끼어들지 않은 것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방관자처럼 맴돌며 제 목적만 채우면 미련 없이 이 차원을 떠날 생각이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원하던 그 삶에 녹아드는 것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트리거는 멍청한 호랑이가 아니니 자신의 시선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자신에게 울타리를 열어 줄 수는 없었겠지. 그래, 딱히 서글플 것은 없다.
애써 그렇게 생각해도 가람은 자꾸만 가라앉는 기분을 떨쳐 내기 힘들었다.
감정과 이성이 방향을 함께했다면 굳이 명칭을 나누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감정을 멍청한 이성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잠시 우울함에 빠져 있던 가람은 기운을 차리기 위해 애써 긍정적인 생각을 끌어 올렸다.
그래, 자신이 향하는 곳이 달라서 트리거의 울타리에 들어갈 수 없었다면, 아니, 트리거뿐만이 아니라 누구의 울타리에도 들어갈 수 없었다면 그것으로 되었다.
그렇게나 바라보던 것을 이제 곧 손에 넣을 수 있으니까. 자신에게는 가족이 있지 않던가.
밝게 웃는 양친의 얼굴을 떠올린 가람은 아주 약간 기운을 되찾았다. 몇 년간 보지 못해 기억이 좀 흐릿하긴 하지만 그래도 상관없다.
가람은 손등을 들어 베이스캠프를 원래대로 되돌리는 것을 조회했다. 패스는 여전히 1천의 숫자를 보여 주었다.
좋았어.
벌떡 몸을 일으킨 가람은 재빠르게 마트와 경찰서로 달려가 무장을 갖추었다.
몇 년 동안이나 해 오던 일이니 준비는 순식간에 끝났다. 곧이어 차원 문이 열리고 가람을 집어삼켰다.
차원 문은 마지막으로 가람이 열었던 곳, 그러니까 산적들을 만나기 전 무장을 보충하기 위해 베이스캠프로 돌아왔던 위치에서 열렸다. 당연하게도 숲이었고, 곤란하게도 밤이었다.
죽은 지 얼마나 지난 걸까. 트리거는 아직 싸우고 있을까? 저도 모르게 잠시 생각하던 가람은 곧 고개를 흔들어 그 사실을 지워 버렸다.
그리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베르하르트와 정반대 방향으로 향한 것은 의식적인 움직임이었다.
트리거를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 원망이나 악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를 보았을 때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것은 아마 트리거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죽은 줄 알았던 자신을 만나면 굉장히 곤란해하겠지. 서로 곤란할 만남은 필요 없었다.
그가 죽은 것으로 알고 있다면 그저 그러도록 내버려 둘 것이었다. 어차피 자신은 이곳에 오래 있지도 않을 테니까.
잠시 걷던 가람은 주변의 적당한 공터에 자리를 잡고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피웠다. 불에 취해 황홀감에 젖은 나방들이 모닥불에 달려들어 제 몸을 태웠다.
자그마하던 모닥불은 천천히 주변의 장작을 집어삼키며 덩치를 불리기 시작했다.
가람은 그사이에 우연히 야생 감자를 발견해 불 속에 던져 넣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감자가 익고 타는 고소한 냄새가 피어올랐다.
야수들판에서도 이렇게 늘 무언가를 구워 먹곤 했지.
짧은 회상은 가람 스스로가 자각하기도 전에 사그라졌다.
그사이에 가람은 불을 보고 접근하는 라쿠카 몇 마리를 싱거운 동작으로 쏴 죽였다. 마치 일상생활처럼 평온한 모습이었다.
사방에 라쿠카의 시체가 즐비해질 무렵이 되자 문득 지겨워진 가람이 나뭇가지로 감자를 쿡 찔렀다. 쑥 들어갔다.
그대로 감자를 꿰어 꺼낸 뒤 반으로 쪼개자 잘 익은 속이 모락모락 김을 피워 올렸다. 두어 번 후후 풀어 식힌 가람은 아주 작게 한 입 베어 물었다.
그리고 다시 말없이 한 입을 베어 물었다. 그리고 또 한 입, 삼키지도 않은 채로 서너 번 베어 물자 감자로 볼이 불룩해질 지경이 되어 버렸다.
입 안에 퍼지는 감자의 따듯한 기운에 갑자기 마음이 녹은 듯이 물을 줄줄 쏟아 내었다.
가람은 자각 없이 눈물을 흘리다가 눈물이 입 안에 스며들어 간이 맞추어지는 것 같아 헛웃음을 흘렀다.
방금 죽고, 버려졌는데도 감자가 보인다고 캐서 구워 먹고 있는 자신은 대체 어떻게 된 사람이란 말인가. 웃음이 나왔지만 그래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가람이 기묘하게 울고 웃는 동안 다행스럽게도 그 작은 모닥불을 방문한 사람은 없었다. 덕분에 가람은 조용히 고인 눈물을 모두 쏟아 내 버릴 수 있었다.
Chapter 24
가람이 베르하르트 서북쪽의 작은 마을 로젠에 도착한 것은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후의 일이었다.
오며 가며 만난 여행자들에게서 베르하르트의 근황도 듣게 되었다. 트리거의 습격으로 비상이 걸린 베르하르트에 화룡 카마르혼이 날아들어 모든 것을 불태웠다는 것이다.
가람은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로 담담하게 그 소식들을 받아넘겼다. 트리거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하지만 여행자들은 친절하게도 완전히 패배해 사로잡혀 있던 트리거와 야수들판의 짐승들이 그 틈에 탈출해 행방이 묘연해졌다는 이야기까지 해 주었다.
예전이었다면 야수들판이 불타 버려 보금자리를 잃은 그들이 어디로 떠났을지 무척 걱정했겠지만 가람은 그저 당장 자신에게 닥친 문제에 집중했다.
그녀가 붙잡은 사슬을 트리거가 놓은 그 순간부터 사실상 그들과의 연은 완전히 끊겼기 때문이다.
원래 마을을 찾아다니며 머물거나 하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되살아난 후의 육체는 야숙에 그리 적합하지 못했다.
마치 병이라도 걸린 것처럼 평소보다 몇 배는 빨리 체력이 떨어졌고, 아침에 일어날 때면 땅바닥에 눌어붙은 것처럼 몸을 일으키기 힘들었다.
혀에 먼지라도 낀 것처럼 입맛이 없는 데다, 근육통은 혹여 아쉬운 신체 부위가 있을까 걱정이라도 하듯 전신에 고루고루 찾아왔다.
지난번에는 완전히 정신이 나가 버린 덕분에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인데, 닥치고 보니 곤혹스럽기 짝이 없는 것들이다.
단련도 좋지만 그대로 계속 야숙을 했다가는 골병이 들겠다 싶었던 가람은 급히 마을을 찾기 시작했다.
지도도 없는 상황에서 해내기 쉬운 일은 아니었지만, 가까스로 주변 길에서 수레바퀴 자국을 발견하고 따라온 결과 마침내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노을을 배경으로 집집마다 굴뚝에서 빵 굽는 연기를 길게 뽑아 올린다. 고소한 냄새에 몸이 나른하게 풀리는 것 같았다.
새벽부터 내내 걸어오느라 매우 피곤했지만, 가람은 마지막 힘을 짜내어 다시 걷기 시작했다. 따듯한 잠자리와, 휴식이 몹시도 절실했다.
“잠깐, 멈추시오.”
교차된 창이 가람의 들뜬 걸음을 막아섰다. 마을 입구에 서 있던 경비병이었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가람을 주시하고 있었다.
하얀 면 티셔츠, 주머니가 많이 달린 카고 바지, 배낭 등 가람의 차림새가 신기한 기색이다.
“어디서 오는 길이오?”
잠시 가람을 관찰하던 경비병이 제법 정중하게 질문했다. 귀찮은 일은 사양이었기 때문에 가람은 마찬가지로 예의 바른 태도로 대답했다.
“칼츠버그에서 베록으로 가려다가 길을 잘못 들었어요. 너무 남하하는 바람에 다시 올라오던 중이었죠.”
“저쪽은 베르하르트인데, 아주 많이 잘못 든 모양이군.”
고개를 끄덕이는 한 명과는 달리 다른 한 명은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헤맸다는 사람이 왜 그렇게 멀끔한 차림이지?”
사흘 동안 걸었다. 그 말은 사흘 동안 노숙을 했다는 의미와 동일했다.
그러나 가람의 옷차림에 그런 흔적은 묻어나지 않는다. 오늘 아침에 바로 베이스캠프에서 샤워를 끝마치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기 때문이다.
물론 베이스캠프를 이용해서 이틀에 한 번은 노숙을 하지 않을 수도 있었지만 아무도 없는 세상보다는 딱딱하고 한기가 올라오더라도 새 우는 소리라도 들리는 이쪽이 나았다.
“그래도 마을에 오는 거니까, 오늘 아침에 새 옷으로 갈아입었거든요. 제가 부랑자 같은 차림으로 왔으면 들여보내 주지도 않았을 거 아니에요?”
가람이 능청스럽게 받아치자 옆에 서 있던 경비병이 소리 내어 웃었다. 옷차림을 지적했던 경비병도 멋쩍게 뒤통수를 긁적인다.
아마도 정말로 가람을 수상하게 여겨 막아선 것은 아닐 것이다. 한눈에 보기에도 이방인이니 괜히 말이나 붙여 보려던 의도였으리라. 경비를 서는 일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지루함이니까.
“내내 걸어왔으면 많이 피곤하겠군. 우리 마을엔 우연히 온 건가?”
“우연이에요. 길을 잃었다니까요.”
지나치게 허술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약간의 허점을 내보이는 것은 상대를 방심하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런 아저씨들은 조금 어리바리한 성격의 젊은이들을 챙겨 주는 것을 좋아했다. 괜히 냉기를 풀풀 흘리며 새침하게 대해 봐야 반감만 살 뿐이다.
설령 사람을 죽이게 되더라도 ‘이런 허술한 아가씨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어,’ 하고 넘어갈 수 있으니까. 손쉽게 피해자로 둔갑할 수 있는 것이다.
가람이 몸에 배인 것 같은 약삭빠름으로 가면을 꾸며 내는 동안 경비병은 나름대로 가람에 대해 정의를 내렸다. 그리고 한결 경계가 누그러진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소문은 듣지 못했겠군.”
“소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