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61화 (161/256)

51화

* * *

“이 숲, 원래 이렇게 안개가 많소?”

바탄이 떨떠름한 얼굴로 질문했다. 같은 테이블에서 함께 권유받았다는 이유만으로 대열에서 그의 옆에 서게 된 가람은 아까부터 이런 종류의 질문을 계속해서 받고 있었다.

필요 이상으로 겁을 집어먹고 있는 털투성이 얼굴이 우스꽝스러울 정도였지만 가람은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겁을 먹고 있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으니까.

“저도 이 숲은 처음이지만, 새벽에는 대부분의 숲에 안개가 많아요.”

“그, 그렇군.”

마지막까지 한 번만 더 생각해 보라며 붙잡는 고딕을 위풍당당하게 떨쳐 내던 그 호기로움은 완전히 사라지고 여기에 남은 것은 애처로울 정도로 식은땀에 젖은 털보 한 명뿐이다.

그러나 바탄뿐만이 아니라 대열의 대부분이 잔뜩 긴장한 얼굴이었다.

“저, 저기 뭔가 지나갔소!”

“다람쥐예요.”

여기 있는 남자들 중 정말로 유령을 만나고 싶어 이 숲에 들어온 사람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저 술자리에서, 혹은 고향에서 제 용기를 자랑할 무용담이 필요했을 뿐인 것 같다.

아니면 막상 들어와 보니 어두침침하고 습기로 가득한 숲에서 유령을 만난다는 것이 별로 아름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거나.

어느 쪽이든 대부분은 자신의 결정을 조금씩 후회하고 있는 얼굴이었다.

“저기서부터 유령이 나오는 지점이오.”

대열의 선두에서 걷고 있던 남자가 손가락으로 어느 지점을 가리키자 모두 자리에 멈춰 그곳을 바라보았다.

각오를 다지기도 하고, 진저리를 치기도 하는 사람들을 주욱 둘러본 그가 마지막으로 권하듯이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돌아가도 좋소. 아무도 강요는 하지 않으니까.”

그 말은 겁에 질린 남자들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드는 효과를 불러일으켰다.

남자들은 자신들이 지나치게 겁을 먹었음을, 그리고 지금까지 정말로 아무 일도 없었음을 깨달았다.

스스로의 얼간이 같은 모습을 자각한 그들은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어 있던 어깨를 풀고 두 눈 가득 오기를 담았다.

“계속 가겠소!”

오줌 싸기 전에 그만두는 게 좋지 않으려나. 가람은 한가롭게 생각했지만 입 밖으로 내는 대신 다시 걸음을 옮겼다.

걸을수록 안개는 점점 끈끈하고 질척하게 변해 갔다. 기분 탓인지 뭉글거리는 것 같기도 하다. 바짝 긴장한 사람들은 이제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간 걸었을 때, 대열 앞에서 누군가가 손을 치켜들었다. 신호였다.

“저기 있소.”

목이 졸린 것 같은 목소리로 누군가가 속삭였다. 무엇이 있는지는 물을 필요도 없는 것이다.

그의 두 눈이 고정된 지점에는 희끄무레한 무언가가 너울너울 움직이고 있었다.

안개 사이에서 확연하게 밀도를 가지고 있는 그것은 마치 치맛자락을 잔뜩 부풀린 귀부인처럼 보였다.

“진짜로 유령이야.”

“맙소사.”

아연해하던 남자 하나가 커다란 손으로 제 입을 막으며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입을 막은 보람도 없이 나뭇가지를 밟고 말았다.

와지끈하는 소리는 경악으로 적막한 숲 안에서 종을 친 것만큼이나 크게 들렸다.

순간 남자들의 어깨가 치솟듯이 얼어붙는다. 그러나 유령 귀부인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듣던 대로 이쪽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그것에 용기를 얻은 몇몇이 점점 목소리를 크게 키워 떠들기 시작했다.

돌을 던지기도 하고, 호기롭게 유령을 불러 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령이 정말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자 마침내 완전히 안심했다.

“진짜로 전혀 이쪽에 관심이 없네.”

“정말이군.”

“아, 저기 유령이 엄청나게 많아!”

“가 보자!”

공포가 완전히 사라진 남자들은 거칠 것이 없었다. 거의 숨결이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가 유령을 관찰하기까지 하니 할 말 다 한 셈이다.

그들이 유령을 한껏 즐기는 것을 바라보던 가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유령을 보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하지만 이렇게나 많은 유령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특히 이만큼이나 와글거리는 유령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로 처음이다.

제법 신기한 경험이라 생각하며 천천히 유령을 둘러보던 가람은 문득, 유령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물론 유령들은 이쪽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흐느적거리며 걸어 다닐 뿐이니 눈이 마주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유령은 똑바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마도 그 유령이 넋을 놓은 시선의 방향과 자신이 있는 곳이 우연히 일치했던 모양이다.

특이한 일이라고 생각하며 찬찬히 유령을 관찰하던 가람은 어쩐지 주변이 매우 조용해졌음을 깨달았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유령들 사이에서 돌아다니며 즐거워하던 남자들은 모두 백지장처럼 하얗게 질려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의아해진 가람이 제 뒤를 돌아보았지만 지겹도록 많은 유령들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조금 이상한 점이 있었다. 제멋대로 방향 없이 걸어 다니던 유령들이 모두 똑바로 이쪽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동시에 따닥따닥, 하는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달달 떠는 바탄이 이를 부딪치는 소리였다.

“이, 이쪽을 보고 있어.”

“아냐. 저 여자를 보고 있어. 우리가 아니라고!”

“으아, 으…….”

안개처럼 일렁이는 수많은 시선들 앞에서 남자들은 차라리 졸도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때마침 유령들이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며 날아오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와아악 비명을 지르며 도망쳤다.

악귀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몰려오는 유령 떼는 한동안 악몽을 꽤나 꾸게 할 만한 광경이었다.

혼비백산해서 도망치는 그들을 잠시 바라보던 가람은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유령들을 발견했다. 침을 뚝뚝 흘리면서 금방이라도 잡아먹을 듯이 흉흉한 기세다.

잠시 그 상태로 대치하던 그녀는 짧게 코웃음 친 뒤 유령의 얼굴에 손을 푹 박아 넣고 가볍게 휘저었다. 유령은 순식간에 형태를 잃고 흩어져 버렸다.

“허깨비 주제에.”

솔직히 말해서, 가람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설령 이들이 허깨비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정말로 전혀 상관이 없었다.

만약 악귀라서 자신을 다치게 하거나, 혹은 죽인다고 하더라도 두 번 죽으나 세 번 죽으나 별로 아까울 것도 없는 목숨 죽으면 그만이다. 고작해야 죽음. 별것 아닌 죽음. 그래, 겨우 그 정도다.

가람의 담담한 반응에 유령들은 동요하듯 잠시 일렁였다.

그 모습에 가람은 그들이 본능에 휘둘리는 악귀가 아닌 어느 정도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지성체라고 추측했다.

그러나 곧 정신이 나간 것처럼 다시 달려드는 것을 보니 그 지성이 딱히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허옇고 형체가 불확실한 무언가가 군집해서 스멀스멀 접근하는 모습은 등골이 곤두서기 충분한 광경이다.

하지만 가람은 초연한 눈으로 그들을 바라볼 뿐이다. 제 몸을 다 던져 달려드는 유령을 피할 생각도 없이 내버려 두는 그 모습은 완전히 해탈한 사람과도 같아 보였다.

유령들이 아우성치는 광경을 보며 가람은 소름 끼치고 무서운 감정을 느끼기보다 그저 이쪽 세계에서 일어나는 조금 특이한 현상을 감상하는 정도의 감흥밖에 받지 못했다.

물론 남자들이 갑자기 등 돌려 뛰어갈 때 함께 도주할까 싶은 생각이 없던 것도 아니지만 그런 뜀박질을 할 가치조차 느끼기 힘들었다.

가람은 되살아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덕분에 신체는 이곳 차원으로 처음 넘어올 때의 말랑함을 유지하고 있었다.

단련되지 못한 몸으로 숲을 달리는 짓은 퍽 부담되는 일이라 귀찮은 마음에 얼떨결에 이곳에 남고 말았던 것이다.

물론 마을로 돌아갔을 때 그들의 추궁을 피하고자 하는 의도도 있었다.

그러고 보니 마을로는 돌아가지 못하게 되었다. 먼저 도망친 남자들이 무슨 소문을 만들어 놓았을지 모르는 것이다.

어차피 이렇게 된 것, 유령의 숲을 관통해서 다른 마을로 향하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가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에도 유령들은 소리 없이 헛된 공격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 애처롭기까지 한 광경을 방관자처럼 지켜보고 있던 가람은 문득 몰려든 유령들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아는 얼굴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기대가 무색하게도 모두 생소한 얼굴이었다.

아니, 설령 아는 얼굴이 있다고 하더라도 저렇게 일렁이는 형상에서 알아보는 것은 힘들겠지.

가람은 허탈감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에 꿰뚫린 유령 하나가 구멍이 뚫려 사라졌다. 가람의 얼굴 근처에서 얼쩡거린 것이 그 사고의 원인이었다.

서글플 정도로 약한 그 모습에 가람은 자신도 모르게 웃어 버렸다. 웃음은 메마르게 흘러나와 버석하게 흩어져서 사라졌다.

자신은 도대체 무엇을 기대하고 이곳까지 왔는가.

뮐러와 웨이크가, 뽀삐가, 죽은 사람들이 이곳에서 자신을 반겨 주기라도 할 것 같았던 걸까? 그런 것에라도 기대고 싶었던 건가? 그래, 기댈 곳이 필요했나?

“하…….”

폐부 가장 깊숙한 곳부터 올라온 한숨이 마른 웃음과 함께 내뱉어진다. 스스로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 기댈 곳을 찾을 수도 있지. 무의식적으로라도 그럴 수는 있었다. 하지만 가람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이 정말로 기댈 만한 버팀목이 된다는 건가?

그런 것에 기댈 수 있을 리가 없지.

가람은 차갑게 부정했다. 곧 패스를 모으면 자신은 이쪽 세계를 떠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죽을 때까지 다시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설령 죽는다고 해도 올 일은 없다. 1천 패스를 모으면 이곳은 그저 한낮에 꾼 꿈처럼 흐려져 그녀의 삶에서 사라져 버릴 테니까.

아니, 사실 벌써부터 조금씩 흐려지고 있었다. 만남은 있되 관계는 없고 웃음은 있지만 감정은 없다.

생살을 가르는 고통도, 몸을 부수는 용암도, 자신을 에워싼 수천의 유령도 그저 흐릿하게 번져 마음으로 선명하게 닿아 오는 것이 없었다.

그러나 단 하나, 시리도록 선연하게 열망하는 단 하나가 있다.

1천 패스를 모아 베이스캠프를 되돌리는 것.

주문처럼, 자기 세뇌처럼 끊임없이 되뇐 그 소망은 이제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될 것이 되었다.

처음 저 소망을 품었을 때의 자신이 어떤 사람이었는지조차도 가물가물해진 마당이지만 그래도 저 문장 하나에 기대어 그 기억은 살아 있었다.

따듯한 방 안, 언제나 같은 분위기 속에서 두 사람과 자신이 웃고 있는 풍경.

가장 행복했던 그 풍경은 기억인지 스스로가 상상해 낸 허구인지조차 알 수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분명한 것은 자신이 그것을 바란다는 것이다.

완벽한 테두리. 스스로가 속할 완벽한 자신의 세상.

이곳은 너무나 고독하다. 이곳에 자신의 것은 없었다. 자신은 영원한 이방인이었다.

아무리 이곳에 익숙해진다고 해도 결코 달라지지 않을 사실이었다. 사람들은 여행자에게 친절하지만 친절이 고독을 지워 주지는 않는다.

물론 가람 자신이 손을 내밀었다면 이곳에서 자리를 잡는 방법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가 아니라 가람이 무엇을 원하느냐는 것이다.

가람이 원하는 것은 지금까지 늘 하나뿐이었고, 그 바람은 맹목적인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모든 열망과 지금까지 바친 기회를 보상받을 권리가 있었다.

많은 것도 아닌, 겨우 단 하나의 소원.

그 정도면 소박하기까지 하지 않은가? 이루어지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그 달성이 바로 코앞에 있는 지금 이쪽 세상 사람, 그것도 죽은 사람에게 의지할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설령 그 사람이 한때나마 웃음을 나누었던 동료라고 하더라도.

여전히 달려드는 유령들을 한 번 스윽 둘러본 가람은 빠른 걸음으로 걷기 시작했다. 유령들에게 볼일이 없어졌으니 숲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람의 등 뒤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유령들이 따라붙었다. 새하얗게 이어지는 유령 떼는 마치 길게 이어지는 면사포처럼 보인다.

숲을 가르는 유령의 행렬을 등에 두른 채로 가람은 홀로 숲을 걷기 시작했다.

얼마 걷지 않아 가람은 물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모여든 유령들로 시야가 부옇게 흐려져 길을 찾기 쉽지 않았지만 가람은 근처에서 막대기를 하나 주워 휘두르며 소리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근처에 물이 있는 모양이니 그 물을 따라 걸어가다 보면 마을이 나타날 것이다.

소문이 퍼지는 속도를 보니 아마 이 근처에는 작은 마을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양이었다.

유령들을 헤집으며 소리를 따라간 보람이 있었다. 가람은 물살이 빠른 강을 발견할 수 있었는데 아마 이곳이 상류인 모양이다. 꽤 오래 걸은 덕분인지 시원하게 흐르는 강을 보자 갈증이 일었다.

마침 가지고 있는 컵이 있으니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계속 걷는 것이 좋을 것 같았다.

결론을 내린 가람은 강가로 조심스럽게 접근했다. 얕은 부분이 없이 깊게 파인 물길을 따라 흐르는 모양새였으므로 몸을 지탱하기 위해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물안개와 유령들로 자욱해서 시야를 확보하기 어렵다는 점도 가람의 조심성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그렇게 한 발, 한 발 더듬듯이 앞으로 나간 가람은 강 바로 앞까지 도착했다. 물은 바로 앞에 있었다. 미리 준비한 컵을 내밀어 뜨기만 하면 되는 순간이었다.

팔을 길게 뻗는 순간, 세상이 반전했다. 균형을 잃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현기증이라도 느낀 걸까. 아님 물기에 젖은 돌을 디디고 있던 발이 미끄러지기라도 한 걸까.

어쨌든 정신을 차렸을 때 가람은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차가운 물에 놀란 심장이 뛰쳐나갈 것처럼 헐떡였다. 입 안으로 마구 밀려드는 물을 저도 모르게 벌컥벌컥 삼키던 가람은 자신이 헉헉대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코와 기도로 흘러든 물이 기침을 유발하게 했다.

밖에서 볼 때도 빨라 보였던 물살은 뛰어들고 나니 그냥 빠른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리 허우적거려도 가람의 노력은 그녀보다 훨씬 작은 개미가 허우적거려 얻는 성과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한 가지 다행스러운 점은 예전에 패스로 구입한 능력 덕분에 숨이 막혀 익사할 일은 없다는 것이었지만, 떠내려가며 불규칙하게 솟는 돌과 바위에 부딪히던 가람은 이대로라면 돌에 맞아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이대로라면 저체온증으로 죽을지도.

엄습하는 위기감 속에서도 가람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할 수 있는 것이 팔로 몸을 보호하고 똑바로 서거나 엎드리는 등의 안정된 자세를 잡는 것이었지만 그조차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강한 물살은 마치 수도꼭지 앞에 콧구멍을 대고 있는 것처럼 콧속으로 물을 마구 밀어 넣었고 눈을 뜨기 힘들게 만들었다.

물살이 휘도는 지점에서는 가람의 몸도 마구 굴려져 휘돌았고, 감은 눈 대신 귀로 소란한 물소리가 들이닥쳤다. 아니, 소리뿐만이 아니라 물도 들이닥쳤다.

한참 동안 돌부리에 긁히고 부딪히며 익사자의 바람직한 수순을 밟아 나가던 가람은 문득 물살이 안정된 형태로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마구 얽히고설켜 제 몸을 잡아 뜯을 것처럼 제멋대로 흐르던 물들이 어느 정도 일관성을 가진 것이다. 그제야 가람은 몸을 가누었다.

가누었다고 해도 물살의 힘에 빼앗겼던 팔다리의 조작권을 다시 되찾아온 것 정도에 불과했지만 가람은 충분히 기뻤다.

이 정도면 적당히 수영해서 비스듬한 각도로 강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이다.

떠내려온 덕분에 걸어서 내려오는 것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내려올 수 있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려고 노력하며 그녀는 수영하기 시작했다.

빨리 나가서 귀의 물도 빼고 싶었다. 귀에 물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머리가 물 밖에 나와 있는데도 물속에 있는 느낌이었다. 제대로 된 소리를 거의 인식할 수 없을 지경이다.

덕분에 자신이 폭포를 향해 흘러가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다.

맹렬하게 아래로 떨어지고 있는 물살을 본 가람은 얼어붙었고, 지친 팔다리로 물살을 이기고 강에서 빠져나갈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체념했다.

그리고 흐름에 순응하여 곤두박질친 뒤 당연하게도 정신을 잃었다. 수면에 머리부터 입수해서 밑바닥까지 처박힌 것치고는 매우 양호한 상태로, 가벼운 뇌진탕이었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가람은 자신이 아직도 떠내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절머리 쳤다.

다행히 그동안 제법 하류로 내려온 모양인지 물살이 그렇게 빠르진 않았다. 그러나 물에 마구 굴려진 팔다리가 마치 죽은 사람의 것처럼 뻣뻣하다.

어디 부러지기라도 한 걸까 걱정스러울 정도였다. 그러나 가장 걱정스러운 것은 지금 가장 시급한 문제를 자력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가람은 엎드린 채 떠내려가고 있었다. 당연히 얼굴은 수면 아래에 있었고, 보통은 숨을 쉬기 힘들다.

가람이 구입한 능력은 한 번 호흡에 물속에서 견딜 수 있는 시간을 늘리는 것이었지 물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능력이 아니었다.

당연하게도 이대로라면 질식하게 되는 것이다.

여기까지 와서 죽을 수는 없다. 가람이 그렇게 결심하고 힘을 짜 모으는 순간, 갑자기 몸이 덜렁 들어 올려졌다.

물에 떠내려오는 가람을 발견한 누군가가 그녀를 끌어 올린 것이다.

“괜찮습니까?”

목소리로 봐서는 남자였다. 하긴, 남자가 아니라면 물에 푹 젖은 사람을 그렇게나 단숨에 들어 올리기 힘들 것이다.

갑자기 뭍으로 끌어 올려진 덕분에 가람은 바닥에 손을 짚고 쿨럭이며 물을 토해 내었다.

머리카락에서 뚝뚝 떨어지는 물을 쓸어 올린 가람은 어느 정도 시야가 확보되자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을 확인하기 위해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얼어붙었다.

상대방도 자신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기억 속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은 그 얼굴이 눈앞에 있는 것이 믿어지지 않아서 가람이 저도 모르게 확인하듯 이름을 불렀다.

“웨이크, 뮐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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