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62화 (162/256)

52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두 남자는 뒤늦게 한 목소리로 ‘가람.’ 하고 마주 대답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가람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사람은 한참 동안 황망한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그 대치를 깨고 먼저 입을 연 것은 가람이었다.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그 질문에 정신을 차린 듯 뮐러가 갑자기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등의 짐에서 마른 천을 꺼내어 아직도 물이 뚝뚝 떨어지는 가람의 머리카락과 젖은 몸에 둘러 주었던 것이다. 웨이크는 어쩐지 긴장한 얼굴로 서 있었다.

“세상에, 온몸이 멍이군요. 대체 어디서부터 떠내려온 겁니까? 웨이크, 가서 불 피워요. 이렇게나 떨고 있다니.”

그 말에 가람은 자신이 가늘게 떨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그러나 추위 때문은 아니었다.

두 손을 들어 올려 떨리는 손가락을 멍하게 바라보던 가람은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다시 질문했다.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던 길에 웨이크와 방향이 겹치는 곳까지만 같이 가기로 했습니다.”

대답한 뮐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이 반쯤 넋을 놓은 눈으로 자신을 응시하는 것을 보고 조금 더 떠들기로 했다.

“가람은 대체 어떻게 여기 있습니까? 못 본 사이에 분위기가 정말 많이 바뀌었군요. 좀 더 젊어진 것 같기도 하고.”

“저는…….”

“아, 어떻게 여기 있는지는 눈으로 봤으니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물에 떠내려오는 거 다 봤거든요. 설마하니 가람이라곤 생각 못 했지만. 대체 그동안 어디에 가 있었던 겁니까?”

대답하려던 가람은 마치 말을 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목이 먹먹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았지만 어째서 그런 느낌이 드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자신을 이끌어 주었던 이성을 따르기로 했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기대지 않는다.’ 뇌까린 주제에 눈앞에 있으니 눈물을 쏟아 내려고 하는 자신을 인정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너무나도 수상하지 않은가. 기쁨보다 수상함이 더 강했다. 가람의 떨림은 어느새 멎어 있었다.

그래, 수상하다. 가람은 차분한 얼굴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았다. 그리고 나직하게 질문했다.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네? 아까 대답했지 않습니까? 웨이크와 집에 가는 방향이…….”

젖은 수건을 짜며 대답하던 뮐러가 하던 말을 삼키고 뒤로 반 발자국 물러났다.

가람이 어느새 뽑아낸 양손의 권총으로 두 사람을 각각 겨누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당신들, 다 죽었었잖아요.”

두 개의 총구 뒤에서 가람이 서늘하게 덧붙였다. 무슨 수작이지?

“죽다니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뮐러가 되묻는다. 가람은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응시했다. 정체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거짓을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해도 죽었던 사람이, 그것도 눈앞에서 갈기갈기 찢겨 죽는 것을 직접 목격하기까지 한 사람이 살아 돌아왔는데 의심하지 않는 것도 힘들었다.

“가람,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질문하고 싶은 건 오히려 이쪽입니다. 지난 몇 달간의 기억이 전부 사라져서 당황하던 참이었단 말입니다. 느닷없이 낯선 숲에서 눈을 뜬 것도 황당한 일인데 계절은 바뀌어 있고 가람도 없어서 얼마나 놀랐는데요.”

아무리 호소해도 가람의 눈매가 누그러지지 않자 뮐러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웨이크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웨이크는 아예 이 상황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 건지 조개처럼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 있었다. 절대로 끼어들지 않겠다는 의지가 확고해 보여 뮐러는 난감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런 문제에서 웨이크가 도움이 될 리 없지. 한숨에는 그런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지나치게 익숙한, 그리운 구도에 가람의 얼굴이 저도 모르게 풀렸다. 그 후로도 두 사람은 마치 만담 같은 대화를 이어 나갔다.

과거의 어느 순간을 그대로 잘라 와 이곳에 붙여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마치 세 명이서 여행하던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라 저도 모르게 그 감각에 빠져 버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늘 가람이 뮐러를 돕곤 했기 때문에 가람은 일말의 의무감까지 느끼며 뮐러를 도우려고 했다.

그가 왜 곤란해하는지조차 잊고 단편적인 그리웠던 상황에 녹아든 것이다.

그러나 입을 떼기 직전 가까스로 권총을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수작을 부린 놈의 목적이 바로 이런 것이겠지.

예전의 향수에 빠져 제 손가락 아래에서 팔랑팔랑 춤추는 것. 확실히 두 사람은 여전히 가람의 역린과도 같은 존재였다.

분명 그리워했던 사람들이지만 지금 같은 상황은 망자를 모욕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만나서 반가웠고, 잠깐이나마 옛 기억에 젖을 수 있어서 좋았지만 끊어 내야 하는 것이다. 이런 환각 따위에 놀아날 생각은 없다.

잠시나마 풀려 있던 가람의 분위기가 금세 날카롭게 다듬어지자 제일 먼저 반응한 것은 웨이크였다.

순식간에 검을 뽑아 든 웨이크가 바짝 날을 세웠다. 사냥꾼으로서의 본능이 상황의 심상찮음을 경고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총 앞에서 칼이 의미를 가지려면 총을 쏘기 전에 상대를 베어 버리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웨이크는 차마 가람을 베지 못하고 엉거주춤하게 서서 몸을 굳혔다. 그 어색한 대치 사이로 매끄러운 목소리가 파고든다.

“옛 동료를 향해 무기를 겨누다니. 이런 나쁜 사람을 보았나.”

그러면 그렇지. 가람은 코웃음 치며 총구의 방향을 바꾸었다. 대치하고 있던 상황에 끼어든 사람은 모르드레드였다.

공기 중에서 녹아나듯 나타난 모르드레드는 희극적인 말투로 말하며 뮐러와 웨이크의 뒤로 다가와 어깨를 감싸 안았다.

친근한 행동이었지만 정작 받는 두 사람은 쩡하고 얼어붙어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는 것 같았다.

비로소 죽었던 웨이크와 뮐러가 어떻게 살아 이곳에 있는지 설명되어졌다. 이번에도 모르드레드가 벌인 짓이었던 것이다.

“반갑지 않아? 내가 준비한 선물이.”

모르드레드가 싱긋 웃었다. 반듯하게 웃는 그 얼굴을 가람의 총탄이 그대로 꿰뚫는다.

순식간에 눈알 하나가 터져 나갔다. 퍽 하고 튄 핏물이 뮐러와 웨이크의 한쪽 뺨을 적시며 흘러내린다.

졸지에 뜨끈한 핏물을 뒤집어쓴 두 사람이 그 감각에 경련하듯 바르르 떨었다.

“인사가 너무 과격하군.”

정작 눈알이 터진 모르드레드는 어깨를 으쓱할 뿐 별로 신경 쓰지도 않는 표정이었다.

익히 예상했던 반응이기 때문에 가람은 신경질적으로 총을 내리고 그를 응시했다.

해볼 테면 어디 해보라는 가람의 태도에 모르드레드가 다시 미소 지었다.

잘생긴 얼굴로 짓는 미소는 대단히 근사했지만 늘 그렇듯 가람이 그 미소에서 느끼는 것은 뱀과도 같은 섬뜩한 사악함이다.

놈이 기분이 좋아 보일수록 가람은 기분이 더러워졌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었는지 모를 시커먼 악의가 울컥울컥 터져 나와 억누르기 힘겨울 정도다.

당장이라도 그 얼굴 가죽을 벗겨 버리고 싶은 잔혹한 충동을 내리누르며 가람이 이를 악물었다.

“말수가 엄청 줄었네. 예전에는 종알거리기도 잘 했던 것 같은데. 내가 반갑지 않나?”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말한 모르드레드가 짧게 혀를 찼다. 그리고 양팔로 휘어잡고 있던 두 사람을 밀듯이 풀어 준 뒤 가람의 앞으로 성큼성큼 다가섰다.

그제야 헉하고 숨을 몰아쉬는 두 남자에게 짧게 시선을 주었던 가람은 곧바로 앞까지 다가온 모르드레드를 노려보았다.

“무슨 수작이야.”

“수작이라니. 섭섭하군. 나의 이 순수한 호의를.”

상처받았다는 듯 여상스럽게 말하는 그 말에 가람은 조롱당하고 있는 기분을 느꼈다.

아니, 이건 실제로도 조롱이었다. 잊을 만하면 이따금씩 나타나 이렇게 속을 긁어 놓곤 한다. 놈이 나타나서 좋은 일은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가람의 적대적인 반응에도 불구하고 모르드레드는 시종일관 미소 짓곤 했다.

그 도발에 넘어가 분통을 터뜨리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그저 싸늘하게 응시할 뿐이다.

“두 사람의 환상으로 날 어떻게 해보겠다는 생각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 가장 그럴듯한 가설이라 가람이 으르렁거리며 경고했다. 두 사람이 진짜일 가능성은 전혀 염두에 두고 있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 저 모르드레드가 두 사람을 살렸다고? 왜?

“환상이라니? 진짜인데.”

모르드레드가 천진난만한 척 눈을 둥그렇게 뜨며 즉답한다. 가람이 가소로운 얼굴로 응시하자 정말이라며 반복적으로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믿을 수 없었지만 가람은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아니, 믿을 수 없어서 오히려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진짜로 되살렸다고? 네가? 그 말을 믿으라고 하는 거야?”

어처구니없어하면서도 가람은 반사적으로 멀뚱멀뚱 서 있는 두 남자를 곁눈질했다.

그럴 리는 없지만 혹시라도 정말로 되살아났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지금까지의 폭언과 거친 행동들이 신경 쓰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가람의 초조한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고 모르드레드가 태연하게 어깨를 으쓱이며 대답했다.

“왜 그게 못 믿을 일이지?”

“네놈이 두 사람을 살려 낼 이유가 없잖아.”

씹어뱉듯 말한 가람이 모르드레드를 노려본다. 경멸, 짜증, 불쾌감이 따갑도록 묻어나는 시선인데도 모르드레드는 태연하기만 했다.

“일이 있긴 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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