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일?”
“얼마 전에 이 근처에서 봉인의 궤가 해방됐거든. 네 덕분이지. 거기서 쏟아져 나온 신성 제국의 유령들을 보고 사람들이 꽤 좋아하더라고. 나는 이해하기 힘들지만, 죽은 사람을 다시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야. 그걸 보고 있으니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말이야.”
봉인의 궤.
그게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 서드라는 이름의 남자가 찾고 있다고 했던 물건이었다.
광신도라며 뮐러에게 쫓겨나듯 떠나갔던 그 남자는 자신을 몇 차례 도와주기도 했었다. 무엇이든 봉인할 수 있는 물건이라 했던가.
그는 악마를 봉인하기 위해 그것을 찾아다닌다고 했었다. 아주 오래전, 스치듯 지나갔던 일인데도 기억하고 있는 자신이 신기했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내 덕분이라고?”
“그래. 네가 봉인의 열쇠를 쇳물에 녹여 없애 준 덕분에 상자와 열쇠가 짝으로 세상에 있을 때만 유효하던 봉인이 깨져 버렸거든. 그리고 가두어 두었던 신성 제국의 유령들이 상자 속에서 퍼엉 하고 터져 나온 거지.”
가람은 그제야 아주 예전에 케르타를 만난 숲에서 우연히 손에 넣었던 열쇠를 떠올릴 수 있었다.
범상치 않은 외형을 하고 있기에 최근까지도 목에 걸고 다니던 물건이었는데 안타깝게도 얼마 전 용광로에 떨어지면서 함께 녹아 버렸다.
봉인의 열쇠라는 것은 아마도 그것을 이야기하는 모양이다.
“……그러면 그 유령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가두어 두었다면 가두어 둔 이유가 있을 터였다. 허깨비처럼 흩어지는 것을 보아 별다른 힘은 없는 모양이었지만 신경이 쓰이긴 했기 때문에 가람이 중얼거리듯 질문했다.
어느 날 갑자기 악귀로 돌변해 마을을 덮치러 다니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본의 아니게 궤를 해방해 버린 가람으로서는 일말의 책임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뭐 적당히 돌아다니다가 사라지거나 하겠지. 아니면 제 후손의 손에 성불하거나. 아마 성불은 힘들 거야. 후손이라고 해도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얼마 전까지만 해도 궤를 찾아서 해방시키려고 돌아다니는 녀석들이 있는 것 같았지만 최근에는 보지 못했거든.
마지막에 본 녀석 이름이 서드였나? 꽤 야심만만했지. 신성 제국의 유령을 해방시키고 대신 나를 잡아넣으려고 했으니까.”
길게 떠들어 댄 모르드레드가 히죽 웃었다. 서드가 찾는다던 악마는 역시 모르드레드였나. 그렇다면 서드는 목표 달성에 실패한 것이리라.
아마도 죽었을 그의 명목을 빌어 준 가람은 어째서 서드가 궤를 해방시켜 유령들을 내보내려고 했던 것인가는 이해되지 않았다.
“해방시킨다고?”
가람이 질문하는 순간 하늘이 붉어졌다. 반사적으로 하늘을 올려다본 가람은 단순히 노을이 지고 있을 뿐임을 깨달았다. 떠내려온 시간이 꽤 길었던지 벌써 밤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
“어째서?”
“그야 내가 신성 제국의 신관들을 잔뜩 죽여서 가두었거든.”
가람은 왜 그랬느냐고 묻지 않았다. 어차피 들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그리고 별로 중요한 사실도 아니었다.
다만, 아무 반응이 없던 유령들이 왜 자신에게만 이를 드러냈는지는 알 것 같았다.
자신을 모르드레드라고 착각했거나, 아니면 그와 동족인 자신에게서 비슷한 영혼의 기운을 느낀 것 같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이것이었다. 숲을 배회하던 유령들은 악귀가 아닌 신성 제국의 유령들이고, 웨이크와 뮐러는 그것과 무관하다는 것.
즉, 두 사람이 정말로 살아 숨 쉬는 상태로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 사실에 가람은 짧게 전율했다. 그리고 그 순간 웨이크의 위장이 우렁차게 울었다. 잠시간의 적막 후 슬쩍 눈치를 본 웨이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미안한데, 밥은 안 먹습니까?”
하늘은 어느새 옅은 남빛, 저녁을 먹기 적절한 시간이었다.
뮐러와 가람조차도 어처구니없어하던 그 말에 깔끔하게 동의한 것은 모르드레드였다.
손가락을 튕겨 나무 없는 모닥불을 만들어 낸 그는 그 위에 어디에서 가져왔는지 모를 고깃덩이 하나를 올려놓았다.
처음 이곳에 와 트리거를 만났을 때와 흡사한 장면이라 가람은 마음 한편이 아려 왔으나 잠시간일 뿐이었다.
회상은 지나치게 짧았다. 무엇보다, 이곳에 있는 건 트리거가 아닌 모르드레드였으니까.
모닥불 위에서 고기가 익어 가기 시작하자 엉거주춤 서 있던 나머지 사람들도 어색하게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러나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아 껄끄러운 침묵은 계속되었다.
“전에 잡은 다라즈녹의 고기야. 아까워서 좀 챙겨 두었지.”
쓸데없는 친절을 발휘한 모르드레드는 손도 쓰지 않고 고기를 뒤집었다.
가람은 허공에서 스스로 몸을 뒤집는 고깃덩이를 잠시 바라보다가 뮐러와 웨이크를 응시했다.
대단히 현실감이 없었다. 그러니까, 자신과 두 사람과 모르드레드가 한자리에 앉아 식사를 하고 있는 풍경 말이다.
그런 기분을 느끼는 것은 자신뿐만이 아닌 모양이었다. 뮐러는 도무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안절부절못하며 익어 가는 고기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뺨에는 아직도 모르드레드의 눈알이 터지면서 튄 피가 묻어 있다. 반면에 웨이크는 차분한 모습이었다. 물론, 그는 늘 차분한 모습이었지만.
두 사람과 마주 앉아 있다. 그제야 가람은 조금씩 실감이 나기 시작했다. 죽었던 사람이 정말로 되살아난 것이다.
그것은 정말로 묘한 기분이었다. 어렴풋이 살릴 수 있다는 사실만을 알고 있는 것과 정말로 살아 돌아온 것을 체감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였다.
가람은 생각보다 자신이 기쁘지 않다는 사실에 당황했다.
두 사람이 살아 돌아오면 뛸 듯이 기뻐 끌어안고 춤이라도 출 줄 알았다. 그러나 지금 그런 감정은 어디에도 없었다.
물론 기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좋긴 했다. 당연히 좋지. 그러나 그 모든 기쁨을 내리누르며 의식을 지배하는 불가사의한 감정이 있었다.
예를 들자면 ‘정말로 살릴 수 있구나.’ 같은 것이다. 그 모든 상실의 고통과 그로 인해 모르드레드에게 느꼈던 뿌리 깊은 미움마저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러니까 정말로 그 일은 아무 일도 아니었던 거다. 언제든지 이런 식으로 살릴 수 있으니까.
그 허무감과 슬픔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허탈감에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이렇게나 아무것도 아닌 일인데.
“저기, 뭣 좀 물어봐도 됩니까?”
아까부터 질문하고 싶었던 모양인지 뮐러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모르드레드의 눈치를 보는 기색이 역력하다.
그도 그럴 것이, 모르드레드는 두 사람 앞에서 다라즈녹의 목을 단숨에 잘라 내기도 했고 방금 전에는 가람의 총탄에 눈알이 터져 나갔는데도 멀쩡하게 재생하기도 했다.
하나같이 범상한 모습이 아니니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하세요.”
가람이 말을 받자 뮐러는 마치 낯선 사람을 바라보듯 그녀를 응시했다. 그리고 내키지 않는 어조로 질문했다.
“아까부터 이상한 말을 계속 듣고 있는데 말입니다.”
“네?”
“가만히 듣고 있으니 마치 저희가 한 번 죽기라도 했던 것 같은 느낌인데요.”
“네, 맞아요.”
“역시 그럴 리가…… 네?”
뮐러의 목소리가 높게 올라가 갈라졌다. 가람은 그에게 담담하게 지금까지의 일을 짧게 설명했다.
어떻게, 왜 죽었는지 등을.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러나 뮐러의 넋을 빼앗기에는 충분한 일이었다.
그는 몇 번이나 그 말이 사실이냐며 확인하려 들었다. ‘정말요?’, ‘네.’, ‘진짜입니까?’, ‘네.’, ‘그러니까, 진짜로 말이죠?’, ‘네.’ 등의 반복되는 대화를 끊은 것은 모르드레드의 차가운 일갈이었다.
“그렇게 못 믿겠으면 다시 한 번 해 볼까?”
뮐러는 순식간에 침묵했다. 평생 말을 해 본 적이 없는 사람처럼 입을 꾹 다물고 이제 거의 다 익어 가는 고기를 응시했다.
대신 입을 연 것은 웨이크였다. 돌아가는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던 그는 나름대로 결론을 정리한 모양이었다.
“우리는 이 사람에게 죽었다가, 이 사람에 의해 되살아난 거군요.”
“맞아요.”
“어째서입니까?”
“뭐가요?”
“왜 굳이 죽였다가 다시 살린 건지 이해가 가지 않는군요.”
마치 남의 이야기라도 하듯 웨이크는 진심으로 그것이 궁금한 얼굴이었다. 그 의문에 답한 것은 모르드레드였다.
“선물이라니까.”
“선물?”
가람과 웨이크가 동시에 되묻는다. 모르드레드는 고기를 잘라 허공에 띄워 둔 채 미소 지었다.
“죽지 않으면 살아 돌아왔을 때의 기쁨도 없잖아.”
보아하니 그렇게 기쁘지도 않은 모양이지만. 실망이야. 하고 홀로 중얼거린 모르드레드는 어처구니없는 표정의 두 사람을 내버려 두고 다시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그러나 집요하게도 웨이크가 모르드레드에게 계속해서 질문했다. 그 대범함에는 가람조차도 질릴 지경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괴물이 되거나 하지는 않겠지요?”
“그럴 일 없어.”
“갑자기 광기를 부린다거나, 혹은 어느 날 신벌이 내리거나 하지는 않습니까?”
“안 내려.”
“정말로 완벽하게 죽지 않았던 것처럼 살 수 있는 겁니까?”
“그렇지.”
“한 번 죽었다가 되살아났으니 영원히 죽을 수 없다거나 그런 일은 없겠지요?”
“그래. 평범하게 죽을 수 있어.”
모르드레드는 고기를 잘라 나누어 주며 웨이크의 대답에 일일이 대답해 주었다.
언제 웨이크를 반으로 쪼개 놓을지 몰라 전전긍긍하던 가람의 걱정이 무색할 정도로 친절한 태도였다. 그렇다. 친절했다.
가람은 그제야 이상함을 느꼈다. 아까부터 모르드레드는 지나치게 친절했다. 자신의 질문에도 꼬박꼬박 성실하게 답해 주지 않았던가. 대체 무슨 꿍꿍이지?
가람이 가느다란 눈으로 응시하자 모르드레드는 오히려 마주 웃어 주기까지 했다.
“자, 이제 궁금한 것 없으면 먹자고. 다 익었으니까.”
적당한 크기로 잘려 모닥불 위 허공을 부유하고 있던 고기는 어디선가 나타난 고급스러운 접시에 담겨 각자의 앞으로 배분되었다.
새하얀 도자기에 금으로 세공을 한 고급스러운 접시였다. 그 위의 고기도 먹음직스러운 냄새를 풍기고 있었지만 가람은 접시를 내던지고 싶었다.
그러나 괜히 그런 짓을 해서 분위기를 험악하게 만들 필요는 없었기에 얌전히 받아 들었다.
모르드레드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두 사람을 보낸 후다. 자칫 분위기가 험악해져 어렵게 살아온 두 사람이 다시 죽도록 할 수는 없었다.
결론을 내린 가람은 굳히고 있던 얼굴을 풀었다. 그것으로도 충분했다.
내내 가람과 모르드레드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던 모양인지 뮐러는 재빨리 그 변화를 알아채고 조금 숨통이 트인 표정을 지었다.
“저기, 그런데 혹시 가람도 죽었었습니까?”
뮐러가 두 손으로 접시를 든 자세로 질문한다. 고기를 입에 넣을 생각은 없어 보였다.
하긴, 식욕이 도는 것이 이상한 일이다. 하지만 웨이크는 역시나 아주 잘 먹고 있었다.
“네. 하지만 다시 살아났어요.”
“저 사람이 살린 겁니까?”
“아뇨, 전 죽어도 제 차원에서 다시 살아나거든요.”
뮐러는 또다시 할 말이 없어진 표정이었다. 사실 지금까지 나온 이야기만으로도 정신을 추스르기 힘들 것이다.
여행하던 아가씨는 불사신인 이계인이고, 자신은 죽었다가 되살아나지 않았던가.
검사인 웨이크는 자신이 이해할 수 있는 부분까지만 이해하고 넘어간 덕분에 충격이 심하지 않은 모양이었지만 마법사인 뮐러에게는 이런 일들이 조금 다르게 느껴질 것이다.
“혹시 기억하는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제가 이런 질문을 한 적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쪽 차원을 정복하거나 멸망시킬 생각이 있느냐고. 가람은 분명 아니라고 대답했는데, 혹시 그 대답이 지금도 유효합니까?”
뮐러는 긴장하고 있었다. 다시 만난 가람은 얼굴만 비슷한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분위기가 바뀌어 있었다. 그러니 의심할 법도 한 것이다.
솔직히, 완전히 괴물이 아닌가? 물론 가람이 괴물이라는 뜻은 아니지만 옆의 남자는 충분히 괴물 같은 작자였다.
“왜 그러고 싶겠어요? 게다가 그럴 힘도 능력도 없는걸요.”
“맞아. 한 번 해 봤는데 별로 재미가 없더라고.”
가람의 말에 조금 안심하던 뮐러는 뒤이어진 모르드레드의 말에 쩡하고 얼어붙었다.
너무나 놀란 나머지 숨 쉬는 것도 잊어버려 얼굴이 파리하게 질린 그의 등을 웨이크가 두드려 주어야 할 정도다.
잠깐 사이에 가엾을 정도로 늙어 버린 뮐러는 식은땀에 젖은 초췌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렇군요.”
그 말을 끝으로 뮐러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더 말할 기력이 없는 모양이었다. 그사이 식사를 마친 웨이크가 대신 입을 열었다.
이 중에서 멀쩡하게 고기를 씹고 있는 것은 그와 모르드레드뿐이었다.
“가람은 이제 어디로 갈 생각입니까?”
“돌아가야죠.”
웨이크는 더 묻지 않았다. 잠시 침묵한 후 슬쩍 권했을 뿐이다.
“함께 다녀 줄까요?”
어떤 계약도 없이 동료로서 함께 다니기를 권하는 것이다. 가람은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그를 위해서도, 자신을 위해서도 헤어지는 편이 좋았다. 의식적으로 무시하고 있었지만 이 자리에는 모르드레드도 있다. 두 사람과는 빨리 헤어질수록 좋을 것이다.
“괜찮아요. 어서 돌아가 봐야죠. 여동생도 걱정하고 있을 텐데.”
“그렇군요.”
다시 침묵이 이어진다. 모닥불의 그림자가 얼굴 위로 흔들렸다. 말없이 앉아 있던 뮐러가 충격을 수습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우리야 그렇다 치더라도, 가람은 어떻게 지냈습니까? 사람이 완전히 달라져서 처음 봤을 때는 얼마나 놀랐는지…….”
“일이 많긴 했죠. 동대륙도 가고, 칼츠버그에도 가고. 아, 동대륙에서는 하늘 운화도 만났어요. 그 집에 가서 그 남매가 무사히 돌아온 것도 확인했고. 야수들판이 불타기도 했고, 여러 가지 일이 있었죠.”
“하늘 운화 말입니까? 아, 그 아가씨.”
잠시 기억을 더듬던 뮐러가 탄성을 내지른다. 웨이크도 뒤늦게 떠오른 모양이었다.
다시 두런두런 이야기가 이어진다. 옛일, 미래의 일, 지금의 일 등 두서없이 화제가 오가며 감정을 나누었다.
이야깃거리는 끊임없이 샘솟아서 밤이 깊어지고 동이 터 올 때까지 계속해서 이어졌다.
이 밤이 마지막이라는 것을 모두가 예감하고 있었기 때문에 누구도 대화를 끊지 않았다. 그 속에서 모르드레드는 시종일관 침묵하며 존재감을 지우고 있었다.
목이 아플 정도로 수다를 떨었기 때문에 날이 밝아 올 무렵 가람은 후련하게 작별을 말할 수 있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등을 떠미는 가람에게 뮐러가 아쉬운 얼굴로 말을 붙였지만 가람은 단호했다.
“잘 가요.”
두 사람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가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쉬움, 걱정, 온갖 것들이 묻어난다.
밤새도록 나눈 이야기 덕분에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벌어진 거리는 완전히 사라져 있었다.
가람도 아쉽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가람, 잠깐 근처 마을에 가서 그게 충전이 될 때까지만이라도 함께 있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뮐러는 제안했고 웨이크는 모르드레드와 가람 둘만 남겨 두고 떠나는 것이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다. 그러나 가람은 그 제안을 내리누르듯 미소 지었다.
“우리 그냥 여기서 안녕 해요.”
뮐러가 다시 무언가 말하려고 한다. 그러나 가람은 정중하게 고개 숙여 인사함으로써 모든 제의를 차단했다.
“지금까지 정말로 고마웠어요.”
진심이었다. 상관도 없는 다른 세계 사람의 삶에 휩쓸려 싫은 소리도 없이 입에 못 담을 일을 당해 가면서도 함께해 주겠다고 해 줘서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서 더욱 여기서 끝내야 했다.
“가요.”
“하지만…….”
“지난날 동안 내가 얼마나 이렇게 작별 인사 하고 싶었는지 절대 모를걸요”
미소 지은 가람의 입꼬리가 옅게 떨렸다. 계속해서 거절하는 것은 가람에게도 힘겨운 일이었다.
뮐러는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닫고 몸을 돌렸다. 그러나 바로 직전 짧게 속삭이는 것을 잊지 않았다.
“나중에 갈 곳이 없어지면 우리 집으로 와요. 가람이 잘 곳 하나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으니까.”
“와우, 뮐러, 반하겠는데요?”
가람이 너스레를 떨자 뮐러는 피식 웃고 그대로 떠나갔다. 웨이크는 말없이 목례했을 뿐이다.
가람은 가만히 서서 두 사람이 몇 번이나 뒤돌아보다가 언덕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그날 하지 못했던 작별을 지금에야 완성하는 것이다.
마침내 두 사람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자 조용히 앉아 있던 모르드레드가 말문을 열었다.
“정말로 돌아갈 수 있다고 생각해?”
가람은 수면처럼 고요하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모르드레드를 응시했다. 믿기지 않지만 그는 조금 서글퍼 보였다.
“안 될 이유가 뭐가 있지? 이제 곧이야.”
“이봐, 굳이 그렇게 집착할 이유가 있나? 대체 뭐가 좋은 게 있다고. 그냥 여기에서…….”
“난 집으로 돌아갈 거야.”
집착 어린 어조였다. 모르드레드가 짧게 한숨을 내쉰다.
“내가 이런 말은 하고 싶지 않았지만, 베이스캠프를 되찾는 데에는 얼마나 들지? 얼마나 들기에 그런 무모한 짓을 하려는 거야?”
“1천 패스.”
아주 예전에는 이 숫자가 무시무시하게 커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모으려면 못 모을 것도 없는 숫자라 생각되었다.
그러나 가람의 대답을 들은 모르드레드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1천 패스? 걸작이군. 좋아, 여기서 내가 문제를 하나 내지. 사람을 살리는 데 드는 패스는 얼마지?”
500패스. 가람은 굳이 소리 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불안을 동력 삼아 맹렬하게 회전하는 머리가 모르드레드의 다음 말을 저절로 유추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말이 소리가 되어 가람에게 향했다.
“혹시 네 원래 세상에서 너에게 의미가 있는 사람이 두 명밖에 안 돼?”
웃음기가 가득한 목소리가 자신을 조롱하고 있었지만 항변 없이 입을 다물었다.
아니야. 가람이 짧게 부정한다. 그럴 리가 없어. 다시 부정, 말도 안 돼. 힘없는 부정은 계속되었다.
마침내 가람은 모르드레드의 말을 긍정함으로써 부정했다.
“이럴 수는 없어. 이럴 수는 없다고…….”
고개를 저으며 뒷걸음질 치는 가람의 얼굴은 완전히 겁에 질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