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64화 (164/256)

54화

그것만은 안 돼. 최후의 보루이자 유일한 염원. 그렇게 큰 바람도 아니었는데 그것마저 안 된다고? 그럴 수는 없어.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나한테 이럴 수는 없다고!

실망과 자책, 후회, 그리고 배신감과 불합리함이라는 모든 감정이 소용돌이쳐 더러운 흙탕처럼 뒤섞였다.

세상이 무너진 것처럼 울고 싶기도 했고 공기가 다 떨리도록 웃고 싶기도 했다.

절망의 바늘은 언제나 희망이 부풀기를 기다린다. 가장 크게 부푼 그 순간을 터뜨리기 위해서.

“그러니까, 부모님을 되찾는다고 했던가? 가족을 되찾고 싶어 했었지 너? 너만을 위하는 가족. 그래, 알아, 이해해. 이계에서 홀로 떠도는 건 정말 외롭지. 내가 왜 모르겠어. 원할 법한 소원이야.”

완전히 넋이 나간 가람의 귓등으로 모르드레드의 목소리가 스친다.

그는 나무에 기대어 비스듬하게 서서 어느새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은 가람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위로하는 듯한 어조였지만 비틀린 입매는 미소 짓고 있었다.

가람은 그제야 깨달았다. 어째서 모르드레드가 그동안 시종일관 재미있다는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는지.

그것은 광대에게 보내는 조롱이었다. 한 치 앞도 보지 못하고 칼날 아래로 달려드는 맹목적인 멍청이를 향한 야유였다. 그는 그동안 자신을 관람하고 있었던 것이다.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단 두 명밖에 안 된다는 건 정말로 걸작이었어. 멀쩡한 척 혼자 다 하더니 그 많은 사람 중 단 두 명을 원한다고? 나보다 더하잖아.”

가람은 반응 없이 모르드레드가 떠드는 것을 바라보았다. 초점 없이 풀린 시야로 모든 것이 부옇게 흐려져 간다.

“아, 물론 의미를 가진다는 게 너와는 조금 다른 의미였어. 보다시피 나는 이런 놈이라, 너처럼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되찾겠어요.’ 같은 간지러운 목적은 없었거든. 나는 잔뜩 모은 힘으로 내게 굴욕을 주었던 놈들에게 지옥을 선사하고 싶었지. 잠깐, 이거 진짜 대단하잖아? 복수해 주고 싶은 만큼 미운 사람도 없었던 거야? 대체 어떻게 산 인생인 거야? 연인도 뭣도 없어?”

사실이었다. 취업이나 생활에 찌들어서, 아니, 이건 핑계다. 그래, 자신은 그런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게 뭐? 현대인들 중에 그렇지 않은 사람이 오히려 얼마나 있지? 그게 뭐가 나빠? 그래, 지금 그게 뭐가 중요해?

중요한 건 놈이 속였다는 거다. 마치 진짜 구입할 수 있을 것처럼 부추겨서 자신은 오직 그것만을 바라보고 달렸다.

“네가 처음에 말했잖아. 패스를 모아서 살 수 있을 것처럼 말했잖아. 그렇게 말했잖아. 네놈이, 그렇게 부추겼잖아!”

넋이 나간 가람은 기묘하게 꺾인 목을 추스르지도 않고 눈알만 굴려서 모르드레드를 바라보았다.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던 그녀는 이윽고 소리치며 그를 추궁했다.

그러지만 않았으면, 그렇게 하지만 않았으면 이곳에 자리 잡으려고 노력했을 텐데.

놈이 그 모든 기회를 날려 버리게 만들었다. 한 번 이방인에 자리매김한 이상 이쪽 차원에 붙박이가 되려면 많은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살 수 없는 건 아니지. 다만 아주 오래 걸릴 뿐이야. 하나씩 하나씩 사서 모으다 보면 언젠가 완성되지 않겠어?”

태연자약하게 어깨를 으쓱이는 모르드레드를 그대로 잡아 찢고 싶었다. 죽이고 싶었다.

어떻게 해서든 놈을 세상에서 가장 고통스럽고 불행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눈앞이 시뻘겋게 달아오른다.

가람은 분노로 불타는 것 같은 심장을 부여잡고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글이글 불타오르는 그녀의 시선을 마주 보면서 모르드레드는 끊임없이 떠들었다.

“멋대로 생각한 건 네 쪽이잖아? 사실 베이스캠프를 원래대로 되돌린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지. 베이스캠프는 원래 베이스캠프라고. 뭐가 더 될 수가 없단 말이야. 하지만 네가 그때 떠올린 형태대로 새로운 사물을 캠프 내에 생성해 낼 수는 있어. 아주 작은 공사를 하는 거지. 베이스캠프는 패스파인더들의 집이니까. 말하자면 가구를 구입하는 것 같은 거야.”

“가족을 생성한다고…….”

“그래. 두 생명을 만들어 내는 거지. 죽었던 생명을 새로 만들어 내는 것처럼. 되살리는 거야. 아, 조금 다른가? 거기에는 두 사람의 혼이 없을 테니까. 그래도 네가 원하는 이상적인 인간 둘을 배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었어.”

“그래, 당연하지. 하지만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어? 여기서 네가 선택해야 하는 길은 두 개야. 아예 그런 것은 포기하고 나와 함께 패스파인더로서 살아가던가, 아니면 다시 그 끝나지 않는 패스 수집을 계속하던가. 네가 원하는 만큼 가구를 구입하기 충분한 양을 모을 때까지.”

가람의 입매가 비틀렸다.

“너와?”

“그래, 함께.”

“꿈 깨.”

짧게 웃은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바로 앞에서 허리를 굽혀 눈을 맞추었다.

요요한 보라색 눈동자가 빨아들일 듯이 강렬하게 응시해 온다. 마력적으로 속삭여 오는 목소리는 뱀의 숨소리를 닮았다.

“우리가 잘 맞지 않는다는 건 알아. 하지만 그래도 말이야, 너는 그 고독이 어떤 것인지 알아 버렸잖아? 생각해 봐. 평생, 아니, 우리는 죽지 않으니까 영원히 그렇게 사는 거라고.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아?”

모르드레드의 유혹적인 눈동자와 가람의 이글거리는 검은 눈이 서로를 찌를 듯이 응시했다.

“내가 널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해?”

모르드레드는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악의가 있어서 그런 것도 아니잖아.’ 하고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넌 나를 좌절하게 하고, 나를 부수고, 바꾸어 놓았지.”

가람이 씹어뱉듯 말한다. 입 안의 말이 더러운 것이라도 되는 것 같다.

“맞아. 내가 널 바꾸어 놓았지. 봐, 여기 이 강철과도 같이 단단한 너를 말이야. 멋진 일이지.”

모르드레드는 뿌듯하다는 듯 미소 지었다. 가람은 그 미소가 참을 수 없었다.

“네 입맛대로 나를 바꾸어 놓은 거야.”

“하지만 좋은 방향이잖아? 연은 역풍에 가장 높이 나는 법. 널 봐. 누구도 너를 이용할 수 없어. 너의 불사, 너의 패스, 너의 시간, 너의 재물, 너의 육체까지. 이렇게나 가진 것이 많은데도 그 무엇 하나 너에게서 빼앗아 갈 수 없을 거야. 내가, 그렇게 만들었지. 너는 반드시 나에게 감사할 거다. 나는 그때까지 기다릴 수 있어. 우린 시간이 아주 많으니까.”

가람은 이를 악물었다. 분노조차 제대로 일지 않는 극심한 허탈감 속에서 헤매었다. 어디에라도 뛰어들어 죽고만 싶었다. 어느 선택도 끔찍한 것뿐이다.

하지만 가장 끔찍한 것은 모르드레드의 제안이 그럴듯하다고 생각되는 것이었다.

적어도 합리적인 선택인 것처럼 보였다. 놈이 제시한 선택 중에서는 그나마, ……잠깐.

마음속에 피어나는 그릇된 희망 속에서 불현듯 가람은 기묘함을 느꼈다.

어차피 자신의 앞에 놓인 선택지가 한정적이라면 이놈은 어째서 이렇게나 자신을 붙잡으려고 하는 걸까?

진실 따위 알려 주지 않고 그냥 내가 가족을 구입하도록 내버려 두었으면 더 좋았잖아?

이건 마치 자신에게 다른 선택지가 더 있다는 것처럼 느껴진다. 선택에 따라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 같은 태도. 어째서 이렇게나 아쉬운 태도를 취하는 거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자신은 어째서 모르드레드의 말을 믿는 것인가. 처음부터 속은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놈이 지금 하는 말을 또 신뢰하다니.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몸에 남은 기관이 심장뿐인 것만 같다. 식은 잿더미에서 다시 타오르기를 기대하는 불씨처럼 창백해진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다.

“내가 왜 네 말을 들어야 하지?”

“말했잖아. 우리에겐 이제 서로밖에 없어.”

모르드레드가 빙글거리며 대답했다. 즐거워 견딜 수 없다는 듯한 그 얼굴이 가람은 이해되지 않았다.

무엇이 그렇게 즐겁지? 아니, 지금까지 자신은 어째서 그 모든 헛소리들을 듣고 있었던 거지?

“내가 왜 네 말을 믿었을까.”

대답하려던 모르드레드는 가람이 단지 홀로 중얼거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가람은 실에 조종되는 마리오네트처럼 어색하게 움직였다.

한 손으로 입을 막은 그녀는 구역질을 참는 것처럼 보였다. 내용물이 이곳에 없는 사람처럼 비척거리며 중얼거린다.

이어지는 한마디에 모르드레드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운 듯이 사라졌다.

“처음부터 내가 직접 패스를 써서 알아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모르드레드는 밀랍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가람은 그 반응에 더욱 신이 나서 소리쳤다.

맞아,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이쯤 되자 어떤 것도 믿을 수가 없었다.

놈은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전달하는 것에 달인이다. 그에 넘어가 놀아난 것은 처음부터 실수였다.

“괜히 아까운 짓 하지 마. 내가 왜 그러겠어?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렇다고 진실을 알려 주지도 않지.”

단칼에 잘라 낸 가람은 손등을 들어 올렸다. 패스가 얼마 없으니 신중하게 지식을 구입해야 했다.

쉬운 일은 아니었다. 자신이 무엇을 알아야 할지 제대로 모르는 상태에서 질문하는 것은 원래부터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해야 했다.

“네가 패스를 쓸 리가 없어. 그걸 쓰면 아무것도 구입하지 못할 거야. 네 가족들을 구입하지 못할 거라고!”

가람은 차게 웃었다.

“그 레퍼토리는 이제 지겹지 않아?”

“잠깐……!”

마지막으로 만류하는 모르드레드의 말을 가람은 그대로 무시했다. 그리고 진실을 알고자 했다.

패스파인더에 대한 모든 것을 알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러기엔 패스가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것만 알아보았다.

자신이 가장 알고 싶은, 지금 가장 필요한 지식들. 다행히 패스는 모자라지 않았다.

700패스. 많다면 많고 적다면 적은 패스다. 다행히도 가진 패스가 850이었기에 더 찾으러 다닐 필요는 없었다.

가람은 망설이지 않고 사용했다. 더 이상 농락당하는 것은 사절이었다.

깨달음은 순식간에 찾아왔다. 갓 태어난 아이가 숨 쉬는 방법을 배우지 않듯 지식은 자연스럽게 가람에게 찾아왔다.

마침내 모든 수수께끼가 풀리고 남은 것은 허무함뿐이다. 가람은 진실 앞에서 소리 내어 웃었다.

질문은 단 하나.

이곳을 떠나, 모르드레드가 있는 이 지겨운 곳을 떠나서 염원하던 평범한 일상이 있는 곳으로 가려면 얼마의 패스가 필요한가.

대답은 간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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