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65화 (165/256)

55화

패스파인더는 차원의 이동에 패스가 필요하지 않다.

베이스캠프와 달리 차원을 넘어가는 데는 시간의 제약도 없었다. 애초에, 차원을 넘어올 때 그러했듯이.

처음부터 이렇게 했어야 했다. 이렇게 직접 알아봤어야 했다. 모르드레드가 선심 쓰듯 지식을 알려 주겠노라 나선 것도 모두 이것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가람이 접하는 정보를 통제하고, 자신의 의도대로, 틀에 맞춰 생각하고 움직이도록. 그것에 놀아나 너무 먼 길을 돌아왔다.

그나저나 겨우 이 정도 짧은 대답에 700패스나 필요하다니, 정말 비싸긴 비싸다.

“넌 불쌍한 놈이야.”

한참 웃던 가람이 나직하게 말한다. 모르드레드는 표정 없는 얼굴로 가람을 응시하고 있었다. 가람이 어디까지 알고 있나 염탐하는 듯한 시선이었다.

뜨겁게 달아오르던 모든 것들이 일시에 식어 내린다. 비가 오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나를 그렇게나 잡아 두고 싶었던 거야?”

모르드레드는 반사적으로 반걸음 뒤로 물러섰다. 마치 가람에게 위협이라도 당하고 있는 것 같은 모양새다.

그녀의 입을 막고 싶은 것처럼 보였지만 가람은 그 모습이 마치 애원하는 것처럼 보였다.

“사랑받는 데 재능이 없으니 증오로라도 옭아매고 싶었겠지. 무엇이든, 네게 의미를 가지도록 해서 나를 잡아 두고 싶었던 거야. 하지만 그걸로는 역시 부족해. 그렇지?”

“닥쳐.”

모르드레드와 만난 후 처음으로 들어 보는 거친 말이었다. 가람은 세상에서 그렇게 연약한 욕설은 처음 들어 보았다.

“역시 내가 널 좋아했으면 했던 거지? 하지만 잘 되지 않았잖아. 불쌍하게도.”

조금이라도 자신을 이해해 주었으면 해서 그렇게나 심한 짓을 저지르고, 그러면서도 뜻대로 되지 않으니 괴로웠겠지.

아니,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조차 제대로 몰랐을 확률이 높았다. 그러니 그토록이나 혼란스러운 행동을 했겠지.

그는 미쳐 있었다. 그 말이 일반인들과 다름을 의미한다면 그는 확실히 미쳐 있었다.

“사실은 패스를 찾으러 다닐 필요 같은 건 없었는데 말이야.”

마침내 모르드레드는 무릎을 꿇었다. 애원하고 싶은 것처럼 보였으나 오래도록 살아오며 단단해진 자존심이 그것을 허락하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부에서 일어나는 치열한 다툼에 스스로도 곤혹스러운 표정이다. 그렇게나 생생한 얼굴은 처음 보았다. 가람은 천천히 그에게 작별 인사를 건네었다.

“너는 강력하지. 그리고 고독하지. 유한한 삶의 의미를 절대로 공감하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네 주위엔 온통 너와 다른 것들뿐이야. 어떤 것도 네 마음과는 짝 맞추지 못해. 그래서 나를 너처럼 만들려고 했겠지. 쓸데없는 사실을 교묘하게 왜곡해서 알려 주면서 말이야. 하지만 실패했지.”

“제발…….”

고개를 옅게 가로저으며 모르드레드는 애원하기 시작했다. 그토록이나 바라던 일인데도 전혀 홀가분해지거나 속이 시원하지 않았다.

오히려 서글펐다. 어째서 그동안 한 번도 의심해 보지 않았던 걸까.

사실은 다른 세계로 가는 것에 패스 같은 것은 전혀 필요가 없었다. 이곳에 올 때도 패스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것은 각성의 시기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원래부터 차원을 이동하는 것에는 패스가 필요치 않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패스파인더니까.

패스파인더로 각성하는 순간 세계는 두 개로 갈라진다. 베이스캠프가 된 세상과 베이스캠프가 되지 않은 본래 세상.

후자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대로 흘러가고, 전자는 패스파인더에게 귀속되어 떨어져 나간다. 차원 전체가 복제되는 것이다. 그 순간에 한하여.

원래 차원에 있던 사람들 전체가 죽은 것이 아니라 패스파인더가 된 가람 홀로 베이스캠프에 남게 되고 그들은 본래 세상을 살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베이스캠프는 원래부터가 베이스캠프. 되돌릴 이유도, 방법도 없는 세상이다.

베이스캠프는 처음부터 베이스캠프니까. 사진을 되돌릴 수 없는 것과도 비슷하다.

살아 있는 생물은 변화하기 마련이고 차원의 생명은 시간이었다. 베이스캠프는 죽은 차원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죽은 차원은 시간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결코 변화하지 않는다. 베이스캠프가 고정되어 있는 이유는 이런 이유였다.

그러니 처음부터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었다면 갔으면 되었던 것이다.

그 이동은 시간도 공간도 초월해서 가람이 원하는 세상이 실제로 존재하고 있다면 그곳으로 가는 길을 열어 준다.

그러나 ‘다른 세상으로 가고 싶어.’라는 짧은 생각만으로 패스파인더가 된 가람은 이제껏 그 생각을 감히 다시 하지 못했다.

거기에 모르드레드의 암시와 거짓말이 완벽한 눈가리개가 되어 준 것이다.

“모르드레드. 난 네가 정말 싫어. 난 여기서 떠날 거야. 넌 영원히 홀로 떠돌도록 해. 그렇게 미쳐서 완전히 무너져 버렸으면 좋겠다.”

가람은 담담하게 저주했다. 그는 절대로 자신을 따라오지 못한다. 패스파인더에 관련된 소원은 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필사적으로 자신을 잡아 두려고 한 것이다. 잡아 두려 한 것치고는 치밀하지 못한 면이 있었으나, 광증 환자의 변덕은 원래 그런 것이다. 모든 것을 망치게 되는 것. 그러나 자제할 수 없는 것.

“그럼.”

가람은 미련 없이 뒤돌아 차원 문을 열었다. 베이스캠프로 가는 차원 문이 아니었다. 원하는 길은 분명하다.

자신이 아직 패스파인더가 아니었던 시절의 세상. 그곳으로 가는 문이었다. 이 문만 넘어가면 정말로 바라 마지않던 그 세상이 있다.

이 문을 넘어서는 그 순간부터 이제 이 세계와 이어지는 끈은 잃어버리게 된다.

나중에 이곳을 떠올리고 문을 열어도 이곳에 한없이 가깝지만 어딘가 다른 세상에 도착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

모르드레드가 언젠가 말했던, 패스파인더는 하나의 차원만 소유할 수 있다는 말은 그런 뜻이었다.

자신은 그것을 오해해서 이 차원 외에 다른 곳으로는 갈 수 없다고 생각해 버렸다.

거짓말은 아니지만, 진실도 아닌 이야기.

등 뒤로 모르드레드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으나 이미 가람은 차원 문 안으로 들어선 후였다. 귓가에 들려오던 소리는 찰나에 사라지고 정적이 그 공백을 메웠다.

“아.”

가람은 반사적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다시 소리가 들려온다. 밤늦게 멀리서 자동차가 달리는 소리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모른다. 자신은 어느 골목 안에 서 있었다.

낯익은 길이다. 모퉁이를 세 번 돌아 꺾으면 담이 낮은 주택이 나온다. 가람은 그 집을 아주 잘 알았다. 분명 자신이 아는 대로일 것이다. 가람이 찾았던 세상이 바로 그런 곳이니까.

눈시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행인 몇몇이 가람의 옷차림에 시선을 주었지만 그런 것은 신경도 쓰이지 않을 정도로 이 순간에 도취되어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가람은 어느새 익숙한 길을 따라 걷고 있었다. 낮은 담장을 넘는 것은 일도 아니다. 가람은 마침내 자신의 방 창문 아래에 몸을 숨겼다.

창문으로 바라본 방 안에는 또 다른 자신이 침대에 엎드려 있었다. 갑자기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아르바이트를 다녀오면 피곤해서 늘 저렇게 엎드려 있곤 했다.

그러나 감상에 빠지기엔 아직 이르다. 날이 밝으면 일을 나가는 그녀를 미행해서 적당히 제거해야 했다.

잔혹해도 어쩔 수 없다. 하나의 세상에 두 사람이 존재할 수는 없으니까.

그러나 다음 순간 침대 위에 누워 있던 가람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분주하게 방을 뒤지기 시작했다. 휴대폰을 들어 보기도 하고 갑자기 창가로 다가오기도 했다.

급히 몸을 숨긴 가람은 다음 순간 깨달았다. 그녀가 찾아온 세상은 또 다른 자신이 각성하는 순간이었다.

“이게, 뭐야. 내가 깜빡 졸았나?”

그래. 그런 말을 했었다. 창문 뒤에서 가람은 숨을 죽이고 또 다른 자신을 바라보았다. 이 차원 전체가 숨을 죽이고 멈춰 있는 것이 느껴졌다.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방 안의 또 다른 가람이 어딘가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 차원 문이다.

가람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차원 문이 기점이다. 저곳을 넘어가는 순간 방 안의 가람은 패스파인더로 완전히 각성하게 된다.

동시에 이 정지한 차원은 허물 벗듯 베이스캠프를 넘겨주고 자신의 시간 흐름으로 돌아올 것이다.

차원 문을 넘어가지 않은 지금은 그녀가 동족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방 안의 가람은 한없이 자신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지만 완전히 별개의 존재였다. 자신의 과거 모습도 아니고, 미래는 더욱 아니다.

자신이 있던 곳과 아주 미세하게 다른 줄기의 차원, 그 어딘가에 살고 있던 타인.

가람은 그녀의 선택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또 다른 가람이 떠난 후 빈 자리를 넘겨받으려면 그녀가 떠나 주는 것이 좋았지만, 동시에 가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저 가람은 자신의 과거가 아니고 그녀가 떠나지 않은 채 패스파인더가 되지 않는 삶을 선택한다 해도 이미 패스파인더가 된 가람의 현실이 바뀌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과거의 모습과 매우 닮은 탓인지 자신이 내내 후회한 선택을 번복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던 것이다.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지난 후, 그녀는 방 안에서 사라졌다. 차원 문을 넘어서 떠나간 것이다.

그녀가 귀환하는 곳은 그녀의 베이스캠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자신은 그녀가 남겨 두고 떠난 베이스캠프가 되지 않은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녀 홀로 떨어져 나갔기 때문에 살아가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가람은 창문을 열고 방 안으로 들어섰다. 모든 것이 기억과 완전히 똑같았다.

아니, 자신의 베이스캠프와 완전히 똑같다. 그러나 베이스캠프에는 이런 기척이 없었다. 방 밖에서 나는 사람의 소리가 없었다.

모든 것이 자신의 베이스캠프와 똑같은데도 각별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가람은 천천히 침대에 앉았다. 침대의 푹신함조차도 특별한 것만 같다. 더 안락하고 달콤했다.

눈앞이 부옇게 흐려진다 했더니 어느새 눈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모든 고통스러운 시간을 지나 가람은 마침내 염원했던 순간에 닿았다. 그리고 듣는 사람도 없는 귀환 인사를 중얼거림으로써 홀로 하던 여행에 마침표를 찍었다.

“다녀왔습니다.”

가람의 눈이 그리웠던 방을 훑는 사이 그녀의 눈을 피해 손등의 바늘이 줄어들었다.

가람이 그것을 발견하고 또다시 패스를 찾기 시작하는 것은 오랜 후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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