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66화 (2부 에필로그) (166/256)

56화

에필로그

차원의 문에 들어선 가람은 문을 지나자마자 곧바로 별이 쏟아질 것 같은 밤하늘을 마주하게 되었다.

도시에서는 절대로 볼 수 없고, 시골로 간다고 해도 요즘은 보기 드문 별 많은 하늘이었다.

거의 별 반 밤하늘 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별이 많았는데, 그 와중에 커다랗게 뜬 세 개의 만월이 대단한 장관이었다.

세 개의 달이라니. 게다가 어지간한 조명에 버금가는 커다란 만월 덕분인지 밤인데도 그리 어둡지 않아서 밤눈이 밝지 않은 가람도 주변을 쉽게 둘러볼 수 있었다. 가람이 서 있는 장소는 숲과 평야를 반쯤 섞어 둔 것 같은 장소였다.

경사가 없는 너른 평지에 발목 정도까지밖에 오지 않는 키 작은 풀이 촘촘히 나 있었는데, 드문드문 자란 나무들이 불규칙하게 뿌리를 박고 있었다.

숲이라고 하기에는 나무가 너무 없고, 평야라고 하기에도 나무들의 키가 너무 컸다.

가람은 우두커니 서서 말도 안 되게 아름다운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별이 어찌나 많은지 손을 뻗어 휘저으면 한 움큼 잡힐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모두 빛깔이 다른 별들은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자란 가람에게 말로 표현하기 힘든 감동을 주었다. 거대한 우주가 그대로 느껴졌다.

그 하늘 아래 서 있으니 자신이 먼지보다 못한 작은 존재처럼 느껴졌지만 이렇게 아름다운 하늘 아래 살고 있다면 그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때 묻지 않은 대자연을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것이었다.

“엣취!”

한참 하늘을 올려다보던 가람은 터져 나온 재채기에 정신을 차렸다. 코가 살짝 맹맹한 것이 감기에 걸리려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을 반쯤 빼 놓고 그 문으로 들어선 탓에 외투 하나 걸치지 않은 짧은 반팔 차림이었다. 바지가 길어 맨다리가 풀에 쓸리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가람은 그제야 자신이 너무 충동적으로 그 구멍에 뛰어들었음을 깨달았다. 마치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무의식적으로 휴대폰을 꺼내 데리러 올 친구를 부르려던 가람은, 곧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깨닫고 실소를 터뜨렸다.

달이 세 개나 떠 있는 이곳을 설명할 방법도 없을뿐더러, 당연히 전화 신호도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마법사가 되기만 하면 되나?’

가람은 얼마 전 읽었던 소설을 떠올렸다. 늘 부모님의 기대를 따라가느라 바빠 가람은 판타지 소설이나 제대로 된 만화책 하나 접하지 못했었다.

가람이 접한 공상의 세계는 어릴 적 인성 교육을 위해 읽은 동화나 영화가 전부였다.

그런 가람에게 같이 아르바이트하던 친구가 스트레스가 심할 때 가볍게 읽으면 머리 비우기 좋다며 권한 판타지 소설은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읽은 유일한 판타지 소설이었다.

그 소설의 주인공은 여고생이었는데, 고3의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그녀는 우연히 드래곤에게 소환되어 강대한 마법을 배워 세계를 주유하며 행복하고 아쉬울 것 없는 성공적인 삶을 살았었다.

아주 잠깐 그것이 부럽긴 했지만, 가람은 자신이라면 그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부모님은, 자신의 친구나 그간 커 오며 보았던 사람들은 어떡하고? 소설이니 그렇게 쉽게 남 잊어버리듯 잊었겠지만, 가족이란 원래 그리 쉬운 것이 아니다.

싸웠음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엄마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래, 내가 말이 심했어. 돌아가면 사과하자.

‘그런데, 어떻게 돌아가지?’

소설의 주인공은 드래곤이 소환했다 치지만, 가람은 자신이 대체 왜 여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바람이 휭 하니 불어 가람의 머리칼을 마구 흩뜨려 놓았다. 얼어붙을 정도로 차가운 기온은 아니었지만, 가람의 팔에 소름이 돋도록 하기에는 충분한 바람이었다.

가람은 소름 돋은 팔을 문지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단 바람을 피할 곳을 찾은 후 나중 일을 생각하기 위해서였다.

최고로 좋은 건 이 상황이 그냥 한여름 밤의 멋진 꿈이라서 자고 일어나면 아침인 거고, 그다음으로 좋은 건 갑자기 누군가 나타나서 앗 얘가 아니었네 하고 자신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내는 것이었다.

최악은 바로 돌아갈 수 없는 것이었지만, 현실감이 없도록 별이 많은 하늘 탓인지, 아니면 이런 동화 같은 상황을 믿기엔 동심을 너무 잃어버린 탓인지 그리 심각하게 고민이 되지는 않았다.

‘정 안 되면 나중에 구두라도 부딪히지 뭐.’

오즈의 마법사의 도로시는 은구두를 부딪쳐 ‘우리 집이 최고야.’라고 주문을 외워 집으로 돌아갔다.

가람은 방에서 나오느라 구두는커녕 양말만 신은 상태였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것도 진심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논리적으로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현실감이 없었기에, 그리고 할 수 있는 것도 없었기에 가람은 이게 꿈이든 뭐든 빨리 바람을 피할 곳이나 찾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키 작은 풀들이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허리를 휘며 달빛에 반사되었다.

마치 물결이 치는 것처럼 아름다운 광경이었지만, 가람은 별다른 감흥 없이 그저 막막한 기분으로 끝없이 펼쳐진 들판을 바라보았다.

인가의 흔적 하나 없고, 불빛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망망대해에 뚝 떨어진다고 해도 이만큼 암담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데다, 휴대폰의 지도 기능도 소용이 없었다.

그렇다고 찬 바람을 맞으며 마냥 서 있을 수도 없었기 때문에 가람은 일단 되는대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그리고 바로 그때 바람의 방향이 바뀌었다.

앞쪽에서 불어오던 바람이 등 뒤를 할퀴며 머리카락을 엉망으로 흐트러뜨린다.

시야를 가리고 얼굴을 찌르는 머리카락을 정리하며 한껏 인상을 찌푸리던 가람은 문득 이유 없이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지는 것을 느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소름과 함께 순식간에 땀이 줄줄 쏟아지기 시작했다. 영문 모를 일에 놀란 가람이 반사적으로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어둠에 젖은 풀과 듬성듬성한 나무와 바위밖에 없었다.

갑자기 찬 바람을 맞아서 감기라도 오려는 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던 가람은 돌아서는 순간 노랗게 빛나는 주먹만 한 눈동자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거의 두 걸음, 세 걸음도 되지 않는 지척에서 낮게 웅크린 거대한 짐승이 가람을 노리고 있었다.

이렇게나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몰랐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거대한 짐승이었다.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움직이는 순간 잡아먹힐 것이다. 가람의 뇌리에는 죽음이라는 글자가 강력한 필체로 새겨지고 있었다.

입가에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짐승은 거대한 백호였다. 머리의 크기가 가람의 상체만 한 거대한 백호.

포악하기 짝이 없는 기세를 줄기줄기 흘리며 가람에 대한 식욕을 여과 없이 드러내고 있다.

인적 하나 없는 들판,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거대한 짐승을 마주치는 것은 꿈이라고 해도 진저리 칠 만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이다. 스치는 바람이, 풍겨 오는 짐승의 노린내가, 양말 아래를 찔러 오는 풀의 감촉까지 모두 선명한 현실이었다.

대치는 길어지지 않았다. 백호가 먼저 가람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렇게나 만만한 먹잇감을 앞에 두고 굳이 참을 이유를 찾지 못했던 것이리라.

반사적으로 한 걸음 물러났던 가람은 자신이 물러난 거리가 백호가 접근한 거리의 절반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깨달음과 동시에 자신이 할 수 있는 가장 멍청한 최선의 방법도 떠올랐다.

가람은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짐승에게 등 뒤를 보이면 안 된다던가, 자신의 걸음보다 호랑이가 더 빠르다거나 하는 것은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생각이었거니와 그보다 더 좋은 방법이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침내 육중한 무게에 덮쳐져 나뒹굴며 거대한 이빨이 어깨를 그대로 뜯어내는 와중에도 가람은 비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그저 아연했다.

이런 일을 당하려고 이곳에 온 건가. 결국 겨우 이 호랑이의 밥이 되려고 온 거란 말인가.

마침내 조각난 몸으로 피 흘리며 가람은 죽음에 이를 때까지 호랑이가 자신의 몸을 먹는 것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보았다.

그것은 생각보다 더 참혹하고 비참한 일이었다. 죽어 가고 있는데 누구도 자신의 죽음을 모른다.

사고도 아니고, 거창한 이유도 없이 그저 저 짐승의 한 끼 식사를 위해 무려 차원을 넘어온 자신이 죽는 것이다.

태연하게 자신의 피를 핥고 뼈를 씹는 호랑이는 죽어 가는 가람에게 시선도 주지 않고 있다.

홀린 듯이 먹어 치워지는 자신의 사지가 방금까지 제 몸에 붙어 있던 것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세 개의 만월 덕분에 밤인데도 그 잔인한 모습이 너무나 잘 보였다.

끔찍한 무력감과 고통, 공포와 슬픔, 절망만이 남은 죽음 앞에서 가람은 이름 모를 호랑이에게 복수조차 다짐할 수 없었다.

그저 간절하게 부모님이 보고 싶었다. 집을 떠나온 것이 지독하게 후회가 되었다.

그리고 두려움 속에서 마침내 가람이 죽음을 맞이했을 때, 이 이야기의 또 다른 갈래가 시작되었다.

― 2부 終

<패스파인더>

에필로그 - 여정 이후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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