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67화 (167/256)

1화

방은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오는 햇빛에 의지해 등을 켜지 않은 상태였다.

그늘진 골목길 같은 적당한 어두움은 심리적으로 안정감을 느끼게 한다고 한다. 안정감은 잘 모르겠지만 차분한 기분이 되는 것은 사실인 듯하다.

가람은 방 안에 놓인 화분과 책장에 꽂힌 책들을 둘러보며 소파에 비스듬하게 앉아 있었다. 말문을 먼저 연 것은 남자였다.

“그러니까, 저번에 이야기했던 그 남자에 대해 계속 들어 볼까요? 이름이…….”

블라인드 사이로 쪼개져 들어오는 빛살을 등에 두르고 남자가 안경을 추켜올렸다.

가람은 그 앞에 놓인 명패를 속으로 읽으며 대충 대꾸해 주었다. 정신과 전문의 박준.

“모르드레드.”

“아, 모르드레드. 맞아요. 그런 이름이었죠. 영 낯선 이름이라.”

의사는 짧게 헛기침을 했다. 목을 가다듬은 그가 진지하게 묻는다.

“현재 본인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그라고 생각하십니까?”

질문은 무척 가벼웠다.

가람이 정말로 모르드레드에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다면 결코 그러지 못했겠지만, 눈앞의 정신과 전문의에게 자신은 그저 심한 망상증을 앓고 있는 환자에 불과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가람은 어떤 불만도 없었다. 전부 믿어 주면 오히려 그게 더 문제였다.

이런 터무니없는 말들을 그대로 다 믿어 준다니, 의사 본인부터 정신 상담을 받아 봐야 할 노릇이겠지.

가람은 잠시 의사를 응시했다. 담담한 얼굴 아래로 다양한 감정들이 스쳤다.

그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냐고? 대답할 가치도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가장 큰’ 영향을 끼쳤는지는 생각할 필요가 좀 있는 단어다.

모르드레드를 접하고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시절은 아주 짧은 기간이었다. 영생을 살아갈 패스파인더의 삶에서 찰나에 가까울 만큼 짧은 기간.

그러나 삶의 어떤 순간들은 그 기간보다 시기가 더 중요한 때도 있다. 신생아가 하루 몇 번 포옹을 받았는가 하는 대수롭지 않은 사실조차, 이후의 삶에 큰 영향을 끼친다.

모르드레드를 겪던 시절의 가람은 패스파인더로 막 태어난 신생아나 다름없었다. 그 시절 겪은 일들은 가람이 앞으로 살아가게 될 영원한 삶에 그림자처럼 달라붙을 것이다.

가치관, 성격, 성향, 끝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고통.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영원히 고독하다는 뜻이었다. 첫 수십 년간은 이것을 깨닫지 못했지만 가람은 서서히 고독에 잠식당하고 있음을 느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언제나 혼자만 통과할 수 있는 차원 문, 주변인이 모두 죽더라도 마지막까지 남아 있는 자신,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없는 패스파인더의 숙명.

패스파인더로서 가람의 삶은 누구에게도 말하기 힘든 비밀이었고, 그로 인해 파생되는 많은 문제들은 모조리 가람 혼자서 감당해야 하는 것들이었다.

대수롭지 않은 고민 상담부터 스스로의 본질에 대한 심도 있는 고뇌까지.

처음에는 그래도 버틸 만했지만, 꾸준하게 떨어지는 한 방울의 물방울이 쇠를 뚫기도 한다. 시간은 무서운 것이었다.

싸울 수도 없고 이길 수도 없는 고독감은 가람을 서서히 갉아먹어 갔다.

도무지 손쓸 수 없는 무방비한 상태로 그녀는 스스로가 닳아 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번에 새로이 시작한 삶에서 가람은 아주 가느다란 숨구멍 하나를 발견했다.

미친 사람이 되어도 되는 장소에서 스스로를 털어놓는 것.

사실 눈앞에 있는 정신과 의사는 가람의 아이디어가 아니었다. 여러 번의 평범한 삶을 실패로 끝내고 다시 시작한 이 새로운 차원에서 이곳에 원래 살고 있던 가람은 이미 2년가량 실종된 상태였다.

부모님은 돌아온 자식을 환대했지만, 범죄로 인한 트라우마를 우려했다. 그리고 이렇게 병원을 추천한 것이다.

부모님의 권유에 가람은 시늉만 할 생각으로 이 병원에 방문했다. 그러나 지금은 나름대로 이 상담을 즐기고 있었다.

처음에는 적당히 평범한 일상을 꾸며 내어 시간만 때울 심산이었는데, 이 의사는 드물게 열정적인 타입이었다. 그 열기에 감화되었는지, 정신 차리니 어느새 진짜 속내를 조금씩 털어놓게 되었다.

고민을 누군가에게 털어놓는 것과 그럴 수 없는 것에는 엄청나게 큰 차이가 난다.

설령 실질적으로 아무런 도움을 받을 수 없더라도 누군가가 들어 준다는 것 자체만으로 한결 나은 것이다. 이런 당연한 사실도 가람은 상담을 해 보고 나서야 깨달았다.

한두 번 농담처럼 패스파인더의 삶을 지나가듯 이야기해도 의사는 조롱하거나 코웃음 치지 않았다.

그가 듣기에는 완전히 헛소리였는데도 진지한 태도로 가람의 말을 듣고, 때때로 메모도 하고 있었다.

물론 그가 가람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가람에게 필요한 건 실질적인 도움보다 정서적인 도움이었으니까.

그가 정말로 가람의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든 아니든, 겉으로나마 자신의 고민에 귀 기울여 주는 사람이 있다는 것 자체가 정신 건강에 상당한 도움이 되었다.

그래도 마음 한쪽에는 ‘무슨 개소리를 해도 돈만 내면 진지한 척 들어 주다니, 참 좋은 세상이야.’라고 냉소하는 구석이 있었지만, 그럼에도 의사에게 기대 이상의 도움을 받고 있다는 것에는 이견이 없었다.

게다가 의사는 단지 들어 주는 것뿐만이 아니라 방금처럼 가람이 생각지도 못했던 사색거리를 던져 주곤 했다.

가람은 그것만으로 이곳에 발걸음할 가치를 충분히 느꼈다.

“글쎄요. 그럴 수도 있겠지만, 요즘은 아닐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가람의 대답에 의사는 약간 불만족스럽게 신음했다. 그의 예상에 어긋나는 대답인 모양이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차트에 짧게 무언가를 기록하고 가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좀 더 태생적인 문제인 것 같거든요.”

“좀 더 말해 주시겠습니까?”

“모르드레드와 엮인 탓에 제가 이런 성격이 된 게 아니라, 패스파인더라는 생물의 특성이 아닐까 싶어서요. 그저, 그의 존재는 그걸 조금 앞당겼을 뿐이죠.”

“계속하시죠.”

“전에 말했다시피 다쳐도 죽지 않고, 수명도 없고, 지침 하나에만 의지해서 삶을 꾸려 나가면 자연스럽게 이렇게 삭막한 성격이 될 것 같거든요. 예전에 어떤 괴짜 박사에게 제 종족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는데…….”

“저 말고 다른 사람에게도 당신의 비밀을 말한 적이 있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헛소리를 늘어놓았다는 사실 때문인지 의사가 드물게 깜짝 놀랐다.

“그냥, 만약이라는 가설을 붙여서 이야기했을 뿐이에요. 어디 가서 하면 미친 사람 취급받을 테니까. 여기에서나 하죠.”

가람은 짧게 웃으며 의사의 명패를 손가락으로 가볍게 쳤다. 플라스틱 명패가 가볍게 달각거린다.

애매한 얼굴로 코를 긁는 의사를 바라보며 가람은 말을 이었다.

“어쨌든, 그 사람은 꽤 재밌어하면서 이것저것 물어보더라고요. 패스파인더는 어떻게 되는 거냐. 패스파인더 사이에서 자식을 낳으면 패스파인더가 되느냐 같은 질문들이었죠.”

“재미있는 질문이군요. 저도 조금 궁금한걸요.”

의사의 흥미 어린 얼굴에 가람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애석하게도 저는 모르드레드 외의 패스파인더를 만난 적이 없어서 대답할 수 있는 내용 자체는 별로 없었어요. 저희 부모님은 평범한 분이었으니 아마 유전적인 특성은 아닐 거예요. 어쨌든, 그걸 다 듣더니 그가 말하길.”

“말하길?”

“종을 구분하는 기준은 보통 육체에 국한되지만 그건 인간의 기준일 뿐이니, 그것을 초월해 진화하는 생물이 있을 수도 있다고요. 흔히 말하는, 영혼도 진화를 한다면 아마 그게 패스파인더가 아닐까 하고 말하더군요. 생물이 특정 환경에서 진화하듯이, 그러니까 물고기나 지렁이가 물과 흙에서 살도록 진화하듯 패스파인더도 어떤 시공간과 에너지, 인류가 아직 밝혀내지 못한 영역의 환경에 의해 진화한 개체가 아닐까 하더라고요.”

“그럴듯하네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어쨌든, 재미있는 말이긴 했어요. 저렇게 생물학적인 관점에서 접근한 적은 없었거든요. 스스로에 대해 고찰할 생각도 거의 못 했죠. 그래서 그때부터 고민을 좀 해 봤는데요.”

의사는 조용히 가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가끔 조언을 하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환자가 혼자 떠드는 편이었다.

그는 주의 깊게 듣는 표정을 꾸며 내면서 속으로는 저녁 메뉴를 고민했다.

“패스파인더가 생물이라면 아마 실패한 생물일 거예요. 영원히 사는 주제에 그걸 견딜 만한 정신은 없죠. 모르드레드가 이상한 놈이라서 미쳐 버린 게 아니라, 아니, 그놈이 특히 좀 이상한 쓰레기이긴 하지만 결국 각자 어느 방향으로든 정신이 조금씩 망가질 수밖에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자각했죠. 저도 정신이 좀 망가진 상태라는 걸.”

“그래서 여기를 찾아오신 겁니까?”

“네.”

“정말 잘하셨습니다. 이게……. 그러니까, 일곱 번째 상담인데요. 어떻습니까? 도움은 좀 되시나요?”

의사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가람은 희미하게 웃었다.

“기대 이상으로요. 좀 더 빨리 올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 정도예요.”

“다행이군요. 그렇게 말해 주시니 뿌듯한데요. 그래도 빨리 오신 편…….”

“이곳이 벌써 네 번째로 옮겨 온 세상이란 건 이야기했죠? 네 번이나 실패하기 전에 왔다면 어땠을까 하고 말한 거예요.”

아무래도 ‘빨리’의 의미가 서로 달랐던 모양이다. 의사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의 눈이 차트에 적힌 가람의 상담 일지를 향했다.

― 현실 부정형 망상증. 지난 2년간 실종된 이력 있음. 실종 기간 동안 발생한 일이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으로 추정. 본인이 패스파인더라는 외계 종족이며 다른 세상을 오갈 수 있다고 주장.

가람은 의사에게 거의 모든 것을 이야기해 준 상태였다. 자신이 패스파인더라는 것, 지난 나날 동안 겪었던 일, 이곳이 네 번째로 찾아낸 다른 세상이라는 사실까지.

상담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많은 것을 이야기하지는 못했지만, 대충 큰 흐름과 중요한 사실은 다 알려 준 상태였다.

의사는 그 모든 것을 망상증으로 분류했지만 그래도 꼬박꼬박 들어 주었다.

가람이 늘어놓는 미친 소리 사이에서 무언가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지 않을까, 심리학적으로 분석할 수 있지 않을까 골몰하는 자세가 무척 기특했다.

하지만 그가 얻을 수 있는 실마리는 아마 없을 것이다. 가람이 하는 말들은 망상이 아니라 담백한 사실이었으니까.

모르드레드를 버려두고 떠나온 뒤 가람은 자신이 원래의 세계로 돌아왔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바라던 이상적인 세계를 찾아냈다고 말이다.

놀라운 우연으로 그 세계의 자신이 패스파인더로 각성해 사라지는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고, 자연스럽게 그 자리를 꿰어 찼다. 그리고 가람은 원하던 삶을 손에 넣었다.

그렇다고, 생각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평범한 삶을 살아가려고 했지만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번 각성해 버린 패스파인더의 본능은 바늘이 어딘가를 가리킬 때마다 초조하게 몸부림 쳤다.

패스를 외면하려고 해도 정신 차리면 자신도 모르게 바늘을 따라 걷고 있었다. 패스를 흡수하고, 그것이 주는 충족감이 없으면 살아갈 수가 없었다.

가람은 타협하기로 했다. 패스를 모으면서도 얼마든지 평범한 삶을 살 수 있지 않은가.

조금 남아 있던 패스로 30일에 한 번 순간 이동 할 수 있는 능력을 얻고 나자 패스를 찾아다니는 건 별로 어려울 게 없어졌다.

심해나 화산 속, 북극 빙하 아래 같은 곳은 좀 곤란했지만 모아 온 패스로 그때그때 능력을 사서 해결하면 그만이었다.

패스를 찾는 것이 전처럼 고생스럽지 않아졌고, 가람은 여행을 떠나는 느낌으로 한 번씩 훌쩍 떠났다가 돌아오곤 했다.

평범하게 살면서도 약간의 은밀한 비밀을 가진 사람. 그 정도를 원했다. 어차피 비밀이야 남들도 다 있는 것이니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삶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부모 특유의 예민한 촉이었을까. 아니면 가람이 허술했던 걸까.

가람이 어디론가 한 번씩 훌쩍 떠난다는 것을 감지한 부모님이 그녀의 뒤를 밟기 시작했다.

몇 번은 속일 수 있었지만 금세 의심을 샀고, 수습을 위해서 거짓말을 했지만 결국 작은 균열로 시작한 의심은 가람이 원했던 평범한 삶을 박살 내 버렸다.

사실 그건 전적으로 가람의 탓이었다. 부모님이 자신의 패스파인더 활동을 목격한 기억을 지우는 것이 ‘평범’의 테두리에 해당하는 것인지, 자신의 룰을 어기는 것은 아닌지 고민하면서 되돌릴 수 있는 기회를 몇 번이나 놓쳤던 것이다.

우유부단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너무 단호했기 때문이다.

자신을 제재할 수 있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 가람은 얼마든지 원하는 만큼 괴물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모르드레드라는 훌륭한 반면교사를 둔 그녀는 언제나 심연 너머를 경계했다.

자신처럼 아무도 통제해 줄 수 없는 사람에게는 스스로가 세운 명확한 기준이 필요하다. 자신만의 규칙이 절실하다.

그것이 가람의 ‘평범’이었다. 그녀를 괴물이 아니라 사람으로 살게 해 주는 것.

그래서 가람은 능력을 사용해 부모님의 기억을 지울 수 없었다. 능력으로 주변 사람을 조종해 가며 사는 것은 그녀가 원하는 ‘평범’이 아니었다.

사실, 가람도 자신이 정확히 무엇을 원하는지 몰랐다.

그저, 패스를 찾아다니며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얼마든지 세뇌와 암시를 걸어 가며 활동했어도 주변 친지들에게는 그럴 수 없었다.

일종의 성역이었다.

그리고 첫 번째 세계에서의 평범한 삶은 그렇게 끝장이 났다.

이름도 모를 어느 세계로 도망 와 가람은 실패 요인을 가만히 분석했다.

결국 패스파인더로서의 삶을 들킨 것이 원인이었던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패스의 부족이었다.

월 1회 순간 이동 능력을 얻고 패스가 모일 때마다 투명화와 암시 능력을 손에 넣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함이 많았다. 패스를 더 모아야 했다.

가람은 다시 차원 이동을 했다. 자신이 염원하던 그 풍경을 떠올리며.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