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68화 (168/256)

2화

그러나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지난번에는 도착하자마자 원래 그 세계에 살던 ‘가람’이 패스파인더로 각성해 떠나 주었는데 이번 세상은 아무리 기다려도 각성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어차피 세계의 숫자야 별보다 많으니, 가람은 다시 차원 이동을 했다. 자신이 원하는 형태의 세상이 있는 곳으로.

수십 번의 차원 이동을 하며 가람은 자신의 첫 번째 차원 이동이 무척 운이 좋았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형편에 딱 맞는 세상을 찾아내기가 생각보다 힘들었던 것이다.

기껏 찾아내면 떠날 생각 없는 그 차원의 자신이 있었고, 또는 아예 부모님에게 자식이 없었다. 아니면 자신과 성격이 너무 다르거나.

패스로 얻어 낸 지식과 경험에 따르면 패스파인더는 같은 패스파인더를 차원 검색으로 찾을 수 없고, 그에 관련된 소원도 빌 수 없다.

그러니 ‘패스파인더로 각성해 떠날 가람이 있는 세상’을 찾을 수 없었다. ‘패스파인더로 각성’이라는 부분이 무시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냥 가람이 있는 세상을 찾게 될 뿐.

모르드레드와 자신이 만난 것을 보면 한 세계에 패스파인더가 있다고 해서 그 세계를 방문할 수 없는 것은 아니었다.

우연히 방문하게 되는 것은 가능하지만, 의도적으로 찾을 수는 없다는 건가.

그래도 덕분에 안심할 수는 있었다. 모르드레드가 자신을 쫓아올 일을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니까. 그건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인내심을 가지고 가람은 차원 이동을 계속했다. 시간은 썩을 만큼 많았으니. 그리고 마침내 찾아낸 두 번째 세계에서 가람은 제법 잘 해 나갔다.

패스도 차근차근 모이고 있었고, 그만큼 가람의 암행은 더욱 은밀해졌다. 그러나 그런 나날은 어느 날 갑자기 어처구니없이 끝나 버렸다.

운석 충돌에 의한 지구 멸망.

다시 생각해도 너무나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었다. 가람이 인지하지 못한 우주 저편 어딘가에서 운석 하나가 지구로 돌진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가람은 다시 차원을 돌아다니며 세계를 찾기 시작했다. 이번에는 인류가 멸망하지 않는 세상으로.

세 번째 세상에 도착할 때쯤 가람은 약간의 노하우를 터득했다. 차원 검색의 요령 같은 것이었다.

패스파인더가 된 가람이 있는 세상은 찾을 수 없지만 ‘자신이 떠올리는 풍경에서 살던 가람이 실종된 세상’을 찾아내면 되는 거였다.

아쉽게도, 터득한 보람도 없이 세 번째 세상에 살고 있던 가람이 사흘 만에 패스파인더로 각성해 떠나 주었기 때문에 그 방법을 쓸 일은 없었다.

그러나 세 번째 세상에 도착하고 5년 뒤, 기묘한 질병이 도는가 싶더니 세상은 며칠 만에 지옥도로 돌변했다.

흔히 말하는, 좀비 사태 같은 것이 터진 것이다.

베이스캠프에서 물자를 끌어오고 패스를 사용해 백신을 만드는 등 각고의 노력 끝에 간신히 세상을 정상화시켰지만 역시 이것 또한 가람이 원하던 삶은 아니었다. 그리고 또다시 차원 이동.

그동안 터득한 차원 검색의 노하우에 따라 가람이 존재하다가 실종된 평범한 세상을 찾아 떠나온 곳이 바로 여기였다.

가람이 여기에 방문한 것은 원래 여기에 살던 가람이 실종되고 딱 2년이 되던 날이었다. 어색하게 문으로 걸어 들어오는 가람을 보며 부모님은 오열하며 달려들었고 쥐어뜯듯 껴안았다.

부모님은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가람이 입을 다물어 버리면 그것으로 물러났다. 돌아와 준 것만으로 감사하다는 표정이었다.

가람은 그렇게 이 세계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원래 여기 있던 가람이 진짜로 실종되었는지, 아니면 패스파인더로 각성한 뒤 떠나 버리고 다른 가람이 찾아오지 않았는지는 모른다.

다만 이 차원의 가람이 살아 있는 형태로 여기에 있지 않다는 것은 분명했다.

이곳은 지금까지 찾아다닌 차원 중 가장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죽은 줄 알았던 딸이 살아 돌아온 덕분인지 부모님이 퍼붓는 애정은 극진한 수준이었고, 여러 세상을 거친 덕분에 가람이 지닌 패스도 무척 풍족했다.

지난 세상의 좀비 사태 때 전투에 관련된 능력을 많이 갖춰 놓은 덕분에 어떤 거친 환경에 있는 패스라도 금세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모든 면에서 완벽에 가까운 세상이었다.

가람 자신의 정신 상태만 제외하면.

원래도 그렇게 건강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지난 수십 년은 가람의 정신을 빠르게 갉아먹었다.

특히 이곳 바로 전에 있었던 좀비가 우글거리는 세상은 그중에서도 독보적이었다.

쓰레기처럼 죽어 나가는 사람들과 통제 불능으로 퍼져 나가는 질병.

패스로 백신을 구해도 질병의 돌연변이가 발생해 버렸고, 궁극적으로 모든 질병을 정화하는 능력을 사기 전까지 부모님을 지키느라 하루하루 신경 줄을 갉아먹는 나날이었던 것이다.

결국 모든 질병을 정화하는 능력을 사서 마치 구세주처럼 사람들을 치료하고 다녔지만 가람은 겨우 한 명이었고 정화 속도에는 한계가 있었다.

거기에다 그렇게 멸망 직전으로 달려가는 세상에서도 권력을 잡은 사람들은 가람을 이용하고자 했다. 그 아귀다툼과 추악한 면모들에 가람은 아주 질려 버렸다.

그 세상만큼 손에 피를 많이 묻힌 세상은 없었다. 나중에는 사람을 죽여도 별다른 감흥도 느끼지 못했다.

그 전에는 패스의 획득에 방해가 될 때만 사람을 죽였고, 평범한 삶을 살기로 한 이후에는 사람을 죽이지 않았던 가람이지만 그 세상은 가람의 규칙을 모조리 파괴해 버렸다.

사람이 사람으로 보이지 않는다.

뒤늦게 자신의 상태를 파악했지만 가람은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바로잡기에는 너무 빠르고 거칠게 변해 온 것이다.

이대로라면 마치 모르드레드 같은 괴물이 되어 버릴지도 모른다. 초조함에 명상이나 종교 등 무엇이든 찾아 나섰지만 도움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나마 이 상담이 도움이 되는 편이었다.

“으음, 여기가 네 번째 세상이라고 하셨죠.”

의사는 차트에 가람의 망상증이 차도가 없음을 기록했다. 실종된 지난 2년간 어떤 삶을 보냈는지 알아내야 하는데 그 부분에 접근해 질문하면 망상을 늘어놓곤 했다.

생물적 검사는 깨끗했으니 결국 정신적인 부분이 문제라는 거다.

실종된 후 보낸 지난 2년이 몹시 끔찍한 기억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너무나 고통스러운 기억은 뇌 스스로 조작하거나 편집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자기방어 기제가 발동하는 것이다.

가람이 늘어놓는 이야기 중 모르드레드라는 인물은 몹시 주목할 만한 점이 많았다.

사실 의사는 그가 가람의 실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을까 유추하고 있었다.

아마 모르드레드라는 이름은 실제 이름이 아니고 환자 본인에게 고통을 준 누군가에게 망상을 겹겹이 입힌 상태겠지만, 그래도 환자가 하는 말을 잘 분석하면 그가 누구인지 환자의 주변 인물 중 하나는 아닌지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의사의 이런 분석은 완전히 헛다리를 짚은 것이었다.

가람 또한 의사가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분석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무슨 생각을 하든 신경 쓸 바가 아니었기 때문에 내버려 두었다.

의사는 모를 것이다. 겉으로는 의사가 가람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정반대다.

상담에 악영향을 주니까 최대한 자제하고 있긴 하지만 가람은 가끔 자신도 모르게 의사의 머릿속을 읽어 버리곤 했다.

그래도 차트에 뭐라고 적는지는 읽지 않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궁금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상대방의 머릿속에 흐르는 보잘것없는 생각들을 확인하고 나면 이 상담 자체가 시시해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상담은 가람에게 무척 유용한 것이다. 그러니 최대한 오랫동안 효과가 있는 상태로 유지하고 싶었다.

“여전히 잠을 잘 못 주무시나요? 수면제를 조금 더 처방해 드릴까요?”

차트의 지난 상담 기록을 훑어보던 의사가 한 대목을 짚으며 질문했다. 메모를 좀 대충 한 모양이었다. 가람은 고개를 저어 질문을 부정했다.

“지금 약으로도 잠이 드는 것 자체는 문제가 없어요. 꿈이 문제지.”

“으음, 혼자 남는 악몽이었던가요?”

“비슷해요. 베이스캠프에서 나갈 수 없는 꿈이죠. 아무도 없는 그 세상에 저 혼자서 영원히 남는 꿈.”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꿈의 잔상을 가람은 의식적으로 흩어 버렸다. 어두운 밤거리, 유령조차 없는 그 세계에 어느 순간부터 차원 문을 열지 못하게 된 자신이 덩그러니 앉아 있는 꿈이다.

몇 번이나 반복적으로 꾸는 그 꿈이 마치 예지몽처럼 불길해서 어느 순간부터 베이스캠프를 방문하는 것도 그만두고 말았다.

“누구나 혼자가 되는 것에 두려움을 느끼곤 하죠.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니까요. 사회에서 고립된 경험이 있다면 그런 두려움이 더욱 심화될 겁니다. 으음, 어디 모임 같은 것에 나가 보는 건 어떤가요? 아니면 자원봉사도 좋습니다. 이런 건 누군가에게 자신이 도움 되는 경험을 쌓으면 조금씩 나아지거든요.”

“고려해 볼게요.”

가람의 말은 진심이었다. 의사의 분석은 기반 자체가 엇나간 것이었지만 그래도 결론 자체는 쓸 만한 것이 많았다.

가람은 자신의 정신 건강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의향이 있었고, 시간도 넘칠 만큼 많았다.

“좋습니다. 아, 시간이 다 됐군요. 그럼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 하지요. 다음 상담 시간도 오늘과 같은 요일, 같은 시간으로 잡아 드릴까요?”

시계를 확인한 의사의 말에 가람은 흔쾌히 대답했다.

“네. 좋아요.”

남아 있는 식은 차를 마저 비우고 가람은 의사의 배웅을 받으며 병원을 나섰다.

오늘의 상담도 꽤 좋았다. 혼자서 생각할 거리도 꽤 있었고, 말하고 나니 후련한 부분도 있었다.

여기 외에 다른 병원을 다닌 적은 없지만 그래도 이 의사의 직업 정신이 뛰어난 편이라는 점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병원에는 환자가 적은 편이었는데, 주위에 주차장도 없고 대중교통을 이용하려면 좁은 골목을 한참 돌아 나가야 하는 점이 큰 영향을 끼친 것 같았다.

게다가 거리에선 그 흔한 CCTV도 몇 개 찾아볼 수 없었다. 인적도 몹시 드문 편이었다.

몸을 숨기고 다니는 게 마음이 더 편한 가람에게는 딱 맞는 장소였지만 일반적으로는 선호되지 않는 위치다.

덕분에 버스를 타려면 골목을 좀 지나 대로변으로 걸어 나가야 한다. 버스 시간을 확인하려고 휴대폰을 꺼내자 엄마에게서 온 문자가 도착해 있었다.

[저녁 전에 오면 대파 무 두부 꽃게 사 와. 꽃게 없으면 동태∼ 조심해서 와∼]

아무래도 저녁 메뉴는 꽃게탕이나 동태탕이 될 예정인 모양이었다. 가람은 엄마가 해 주는 해물탕을 무척 좋아하지만 아빠는 비린 맛이 싫다며 꺼려했다.

그 덕분에 상에 자주 오르는 메뉴는 아니었는데 가람이 실종에서 돌아온 뒤 저녁 식탁에는 가람이 좋아하는 것만 올랐다.

예전 세상과 달라진 것이 정말 많았다. 좋은 방향으로.

전에는 집에 가기가 무섭게 다른 집 자식들과 비교하며 채찍질하기 바쁘던 부모님이었지만 지금은 그저 외출 후 돌아오기만 해도 감지덕지라는 태도였다.

실종에서 돌아온 후 몇 달간은 집에 가둬 놓다시피 할 정도였다.

사실 자식 취직에 열을 올리는 집안의 경제 사정이라는 건 빤한 것이라 일하지 않는 가람을 부모님이 돌보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집에서 놀고먹기만 하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고 가람은 결국 일을 하러 가겠다며 나설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극렬하게 반대하던 부모님이었지만 평생 이럴 수는 없지 않겠냐는 말에 차츰 기가 꺾였다.

가람이 외출할 때면 아직도 불안한 표정을 짓긴 하지만 그래도 이 상황을 어쩔 수 없이 수긍하는 것 같았다.

가람은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고 비교적 그럴듯한 일을 구했다.

그럴듯한 일이라고 해도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되었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웃긴 일이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을 살고 범상치 않은 인물이 된 가람에게도 대기업의 문턱은 넘기 힘들었다.

어쩌면 패스파인더가 된 후 감돌게 된 기묘한 분위기 때문에 면접에서 더 떨어졌는지도 모른다.

능력을 사용해 면접관의 정신을 조작하면 손쉬운 일이겠지만 가람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

취업에 실패해 집에 돌아오면 부모님이 등을 두드리며 위로했고 가람은 미안한 시늉을 하며 다음에는 잘해 보겠다고 말했다.

저녁 메뉴는 그날 가람이 장 봐 온 것들. 부모님과 친척들의 대소사를 떠들다가 식사를 마치면 방에 들어가 개인적인 시간을 보낸다.

이상적인 평범한 삶.

이런 것이야말로 가람이 원하는 것이었다. 면접에서 떨어지고 고배를 마시는 것까지 완벽했다.

붙었더라도 좋았겠지만, 어쨌든 패스파인더의 능력과 동떨어져 있을수록 평범에 가까운 것이고 정상적인 것이었다. 그래서 가람은 패스를 찾을 때 외에는 가급적 능력을 사용하지 않았다.

시간은 5시 30분.

버스 도착 시간에 따라서 저녁을 좀 늦게 먹을 수도 있겠다.

순간 남의 눈을 피해 집 근처로 공간 이동을 하고 싶은 충동이 치솟았지만 가람은 얌전히 버스 정류장을 향해 걷기로 했다.

인적이 드문 곳이라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공간 이동을 하면 괜찮을지도 모르나 스스로가 정한 규칙을 어기고 싶지 않았다.

어디선가 솔솔 불어오는 닭 튀기는 냄새를 맡자 잊고 있던 허기가 몰려왔다.

가람은 족발집 옆 골목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좁은 골목을 500미터 정도 걸어야 버스 정류장이 나온다.

차를 운전할 줄도 알고, 지난 세상에서는 면허도 땄지만 지금 세상에선 가람은 아직 차를 가질 형편이 못 되었다. 종종 아쉽긴 하지만, 크게 의미를 두지는 않았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의 골목은 매우 조용했다. 여기저기서 밥 짓는 냄새나 음식 냄새, 간간이 대화 소리 같은 것이 담장 너머로 들리기도 했다.

적막하기만 한 베이스캠프와 달리 사람이 사는 느낌이 물씬 난다. 아무도 없는 골목인데도 소란스러운 느낌이 들었다.

그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가람은 오늘 상담을 반추했다.

상담을 진행할수록 모르드레드가 자신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는 걸 부정할 수가 없다. 그 때로부터 거의 100년이 훌쩍 넘는 삶을 살아왔다.

사실 이제 뮐러나 웨이크, 트리거 같은 이들에 대한 기억도 흐릿해지고 있었다.

그러나 모르드레드만은 늘 선명하게 기억난다. 아직도 무언가를 죽이기 전에는 모르드레드가 떠올라 멈칫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의 얼굴은 어떻게 생겼는지 생각도 거의 안 나는데, 우스운 일이지.

아니, 다른 이들만이라도 망각할 수 있어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가람은 짧게 자조했다.

그의 광기를 목격하지 않았더라도 자신이 평범한 삶을 지키려고 했을까? 패스파인더로서의 삶을 거부하고 능력을 쓰는 것을 거부하며 살아가려고 했을까?

아니, 아니었겠지. 모르드레드는 가람의 제동 장치였다.

그를 만나지 않았다면 흘러가는 대로 패스를 모으고, 거리낌 없이 능력을 사며, 사람을 조종하고 해치며 살아갔을 것이다.

그것이 잘못이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자연스럽게.

몇 번의 차원 이동을 하고 죽음을 겪으며 가람은 모르드레드가 미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조금씩 이해해 가고 있었다. 패스파인더로 살며 망가져 버린 인간성.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랜만에 나타난 동족에게 서슴없이 다가설 만큼 깊이 새겨진 고독.

그러나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기엔 너무나 망가져 버린 영혼.

모르드레드를 이해할수록 가람은 자신이 그처럼 변해 갈 것 같다는 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 사실 벌써 변해 가고 있는 것 같았다. 모든 것들이 패스파인더가 되기 전과는 달랐다.

애써 아니라고 부정해 봐도 죽음, 삶, 시간, 공간, 물건에 대한 가치관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강박적으로 평범한 삶을 추구하는 것도 결국 그런 이유에서였다. 인간성의 상실은 그 끔찍한 미래로 가는 첫 단추였으니까.

의사가 말한 자원봉사로 그걸 막을 수 있다면 한 번쯤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아니, 오히려 좋은 제안 같았다.

곰곰이 생각할수록 끌리는 부분이 꽤 많았다. 자원봉사도 종류가 많으니 이권 다툼에 휘말리지 않는 종류로 찾아본다면 괜찮겠지.

“……?”

흐뭇한 기분으로 걷던 가람이 순간 멈칫했다. 무언가 이질적인, 어떤 경계 안으로 들어온 것 같은 느낌에 감각이 날카롭게 일어섰다.

방금 전까지 맡아지던 냄새와 들리던 소리들이 완전히 사라졌다. 공간 자체가 닫힌 듯 정체되어 있었다.

의아함을 느낄 새도 없이 갑자기 무언가가 날아와 눈앞의 벽에 퍽 하고 처박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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