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그 소리를 들으며 가람은 휴대폰을 꺼냈다. 몇 시인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아직 6시가 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저녁 시간에 크게 늦지는 않겠네.
이 모습을 오해했는지 왜소한 남자가 손을 들어 휴대폰을 휙 빼앗아 갔다. 정세원을 벽에 처박았던 그 염력이었다.
“경찰에 신고라도 하려고?”
오해한 모양이었지만 가람은 굳이 그 오해를 정정하지 않았다. 대신 남자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질문했다.
“이 주변에 당신들 외에 관련자가 더 있나?”
갑자기 돌변한 가람의 태도에 남자가 흥미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경악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제 입이 움직여 가람의 말에 대답한 것이다.
“현재는 우리 둘뿐. 하지만 더 올 예정이다.”
가람이 사용한 것은 가벼운 정신 조작 능력이었다. 패스를 모으러 다니다 보면 목격자의 기억을 지우거나 조작해야 할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녀가 거의 초반부터 갖추어 두었던 능력이다.
단, 능력을 사용할 때마다 페널티가 있다.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다면 무척 편리하겠지만 그건 너무 많은 패스를 치러야 했다.
무제한으로 무한한 사람들의 정신을 마음껏 조종할 수 있게 된다면 얼마나 강력하겠는가?
가히 신이나 다름없다. 아니, 신조차도 못 할 능력이었다.
가람이 가진 능력은 사용할 때마다 체력이 소모되는 형태였는데, 한 번 쓸 때마다 한 시간 정도 등산한 사람처럼 지쳤다.
가람이 가장 체력이 좋았던 시기에는 한 번에 열 번도 넘는 능력을 쓸 수 있었지만 지금은 다섯 번 사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횟수에 제한이 있다고 해도 충분히 엄청난 능력이었다. 가람은 그저 기억을 조작하는 용도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만 미국 대통령이 핵미사일 버튼을 누르게 만들 수도 있고, 세계 최고의 부자가 전 재산을 기부하게 만들 수도 있다.
그런 능력을, 오늘은 그저 두 사람이 자신을 못 본 것으로 하는 데에 사용할 뿐이다.
“방금 뭐야. 너 어떻게…….”
그의 말을 무시하고 가람은 벽에 쓰러져 있는 남자를 일으켜 세웠다. 직접 가서 한 것은 아니고, 염력을 사용한 것이었다.
가지고 있으면 이래저래 편리한 능력이라 염력도 예전부터 갖추어 둔 것이다.
누군가에게 목격당할까 봐 능력을 드러내는 것은 자제하려고 했지만 이들 둘뿐이라면 망설일 이유는 없다.
“너, 너도 자경단이었나?”
자경단?
능력을 본 남자가 놀라 말까지 더듬는데도 가람은 잠깐 흥미를 주었다가 곧 심드렁해졌다. 별로 관심도 없었다.
이런 이능력자들이 이 세계에 살고 있다는 건 상정 외의 일이었지만 자신의 삶에 영향만 끼치지 않는다면 가람은 상관하지 않을 생각이었다.
가람은 염력으로 두 남자를 가지런히 눈앞에 세워 놓았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정세원이라는 남자나, 자신이 힘을 아무리 써도 가람의 능력에서 벗어날 수 없는 데 혼란에 빠진 왜소한 남자나 이제 똑같은 입장이었다.
아직 허공에 떠 있던 휴대폰을 염력으로 당겨 와 손에 쥐며 가람은 두 사람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자, 지금부터 이렇게 생각하는 거예요. 당신은 도망쳤고, 너는 이 사람을 놓쳤고, 나는 본 적 없는 사람인 걸로. 이걸로 끝.”
처음에는 영문 모를 얼굴로 가람을 쳐다보던 두 사람이었지만 금세 눈을 깜빡이더니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치 가람이 보이지 않는 듯, 서로가 보이지 않는 듯 제각각 갈 길을 찾아 떠나 버렸다.
허무할 정도로 깔끔한 상황 종결이다. 기억이란 불안정한 부분이 있어서 이렇게 세뇌를 해도 언젠가 다시 이 일을 떠올릴지도 모르지만 현재로선 이게 최선이었다.
그리고 설령 떠올린다고 해도 가람의 얼굴은 매우 흐릿하게 기억나거나 전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기억할 테니 알아볼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시간은 5시 47분.
다행히 지금 뛰어가 버스를 탄다면 7시 전에는 저녁을 먹을 수 있을 만한 시간이다.
가람은 두 남자가 사라진 방향을 잠시 바라보다가 곧 버스 정류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뒷조사를 좀 해 볼까 하는 마음도 들었지만 어차피 또 마주칠 일은 없겠지.
괜히 비정상적인 일에 관심을 두다가 코 꿰이는 것은 사절이다. 가람은 그저, 이 세계에 저런 종류의 이능력자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 정도만 인지해 두기로 했다.
그리고 그날 저녁 메뉴는 꽃게탕이었다.
* * *
지구로 돌아온 뒤 가람이 느낀 변화 중 하나는 언어였다. 패스를 찾다 보면 세계를 누빌 수밖에 없는데 지구 어디를 가도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이다.
트리거와 모르드레드를 만났던 그 세계에서도 가람은 말을 배울 필요 없이 자연스럽게 그곳의 언어를 사용했다. 패스파인더들이 가지고 있는 능력 중 ‘동화’가 적용된 것이다.
차원 이동을 하면 패스파인더는 그곳에 동화된다.
그 전에 있던 세계와 대기가 전혀 다르더라도 숨 쉴 수 있고, 언어가 달라도 말할 수 있으며, 중력 등 그 어떤 환경적인 요인에도 견딜 수 있도록 변화한다. 어디든 갈 수 있도록. 그것이 패스파인더라는 종족이었다.
그런 맥락에서 가람은 지구의 언어도 공부할 필요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원래 쓰던 한국어는 물론이고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언어라도 마치 처음부터 알고 있던 것처럼 말할 수 있었다.
그건 원래 달려 있던 손발을 사용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일이라서 누군가가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 물어도 설명할 방법이 없을 정도다.
덕분에 누군가의 말을 통역해 주는 건 아주 쉬운 일이었고 자연스럽게 그쪽 계통의 일을 하게 되었다.
다만 법률이나 의학,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한 부분은 별도의 공부를 해야 했기 때문에 가람이 주로 맡는 건 여행 쪽이나 관광객을 가이드 하는 정도의 가벼운 일 위주였다.
그 정도만으로 부모님은 충분히 기뻐했다. 언제 그렇게 외국어를 공부했느냐며 놀라기도 했다.
회사에 소속되어 일하는 걸 원하는 것 같았지만 정신과 상담을 해야 하는 가람의 상태를 떠올리곤 욕심을 접는 모습이었다.
여행사나 일반 회사에서 요청이 들어올 때마다 통역을 해 주거나 또는 번역 아르바이트를 하는 일도 맡았는데, 번역도 가람에게는 어려울 것 없는 작업들이었다.
간혹 의미를 알 수 없는 단어가 나올 때는 사전을 찾아야 했지만 대체로 문장을 읽고 자신이 이해한 대로 언어를 바꾸어 옮겨 적으면 그만이었다.
하루에 길게는 여덟 시간 짧으면 두세 시간 일을 했고, 가끔 일이 전혀 없는 날도 있었다.
오늘도 그런 날이었다. 다른 때였다면 보통 친구를 만나거나 취미로 할 것을 찾아보곤 했겠지만 오늘은 할 일이 있었다.
“어머, 어서 오세요. 자원봉사 하러 오신 분 맞죠?”
벨을 누르자 나타난 사람은 오십 대쯤 되어 보이는 중년 여성이었다.
자신보다 한참 어려 보이는 가람인데도 싹싹한 태도다. 첫인상이 무척 좋아서 가람은 드물게 웃으며 마주 인사했다.
“전화로 연락드렸었는데……. 가람이라고 해요.”
“아. 그분이시구나! 어서 들어오세요!”
비켜 주는 대로 따라 들어가자 훅 하고 냄새가 끼쳐 왔다. 그리 달가운 냄새는 아니었다.
분류하자면 악취에 가까운 것이다. 게다가 아까부터 계속 들리던 개 짖는 소리가 더욱 커졌다.
이곳은 유기 동물 보호소였다.
의사의 조언에 따라 해 볼 만한 자원봉사를 찾아 나선 후 가장 먼저 눈에 띈 곳이었다.
장애인이나 노인을 대상으로 하는 자원봉사도 있었지만 이런 경험이 처음이라면 그나마 할 만하다는 평가에 선택한 곳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동물들이 밖으로 마구 나오지 못하도록 펜스가 쳐진 구역이 나타났다.
몇몇 개들은 케이지 같은 것에 격리되어 있기도 했는데 대부분 다치거나 주눅 든 상태였다.
가람이 유심히 보는 시선을 깨달았는지 앞서 걸어가던 여자가 설명했다.
“다치거나 약한 애들은 혼자 있을 공간이 필요해서요. 자기들끼리 싸우거나, 힘센 애들한테 괴롭힘당하기도 하거든요. 이쪽, 이쪽으로 오세요. 옷에 털이 묻거나 냄새가 배일 텐데, 작업복은 가져오셨나요?”
가람은 대답 대신 손에 든 가방을 들어 보였다. 전화로 문의할 때 이미 들은 사실이다.
자원봉사를 하며 묻은 개의 분비물이나 악취가 옷을 상하게 할 수 있으니 버려도 괜찮거나 마구 세탁해도 좋은 옷을 챙겨 오라는 조언이었다.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뒤늦게 생각났다는 듯 자신을 소개했다.
“이런 내 이름도 말을 안 했네. 이곳은 보다시피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요. 저는 김소윤이에요.”
그렇게 말하고 김소윤은 짧게 웃었다. 참 잘 웃는 사람이다.
그녀의 말대로 사방이 개 짖는 소리와 냄새, 날아다니는 털로 엉망이었기 때문에 가람은 정신없다는 말을 납득했다.
게다가 소윤 본인도 헝클어진 머리에 이물질이 묻은 옷차림이어서 그녀가 얼마나 바쁜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그래도 이렇게 봉사 와 주시는 분들이 계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라요. 오늘도 목욕시켜야 할 애기들이 잔뜩인데, 혼자였다면 하루 종일 하고도 부족했을 거예요. 일단 안에서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소윤이 안내한 곳은 작은 다용도실이었다. 안으로 들어가자 켜켜이 쌓인 개 사료와 애견용품들이 가득이었다.
가람은 챙겨 온 반팔 반바지로 옷을 갈아입었다. 벗은 옷은 다용도실에 두고 밖으로 나오자 그 잠깐 사이에도 소윤이 개들의 밥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 주변에 잔뜩 달라붙어 꼬리를 흔들어 대는 개가 거의 열 마리는 되는 것 같다.
“굉장히 많네요. 강아지가.”
가람이 다가서며 말을 걸자 사료 봉투를 자르던 소윤이 다시 웃었다.
“그렇죠? 82마리예요.”
그 숫자에 가람은 조금 놀랐다. 이곳은 김소윤이 혼자 관리하는 작은 보호소였다.
혼자서 감당하기에는 너무 많은 숫자다. 가람의 표정을 보고 소윤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 너무 놀라셨네! 그래도 이 중에 다섯 마리는 다음 주에 입양 의사가 있는 분이 오셔서 보기로 했어요. 입양 가기도 하고, 새 아이들이 오기도 하는데 들락날락하다 보니 이만큼 되었네요.”
“입양 가면 아쉬우시겠어요.”
소윤이 잠시 눈을 굴리더니 다시 배시시 웃는다.
“아쉽다고 하면 안 되는데, 솔직히 조금 아쉽긴 해요. 보고 싶을 것 같아요. 하지만 새 가족 찾아서 사랑받고 살면 그게 더 좋죠. 여기에는 부족한 게 너무 많거든요 사람 손길도, 맛있는 간식이나 장난감도. 마음 같아서는 제가 계속 돌보고 싶지만, 다 욕심이죠. 좋은 환경에서 살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제 욕심 때문에 그걸 놓치게 하면 안 되는 거니까요.”
가람은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 서 있었다. 사료 그릇에 차례대로 밥을 채우며 소윤은 푸념처럼 덧붙였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건 있으니까요. 사람이 한계라는 게 있더라고요. 마음처럼만 되면 참 좋겠는데…….”
그간 떠나보낸 개들을 떠올리는지 잠시 침울해지던 그녀는 제 옆에 가람이 서 있다는 걸 자각하곤 흠칫 정신을 차렸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읏차, 밥은 다 줬고……. 이리 오세요. 도와주실 일을 알려 드릴게요.”
쏟아 낸 사료 봉투를 접으며 소윤은 가람을 돌아보았다. 담담하게 서 있는 모습이 참 차분한 사람 같았다.
하지만 곧 진땀을 빼게 되겠지. 앞으로 일어날 일은 보통 난리가 아닐 테니까. 속으로 장난스럽게 웃으며 그녀가 질문을 던졌다.
“가람 씨라고 했던가요? 강아지 목욕시켜 본 적 있어요?”
“아니요. 한 번도…….”
“키워 본 적은요?”
“그것도 한 번도 없어요.”
“그럼 애 좀 먹으시겠어요. 그래도 천천히 알려 드릴게요. 일단 욕실로 가요.”
말을 마친 소윤이 안내한 욕실은 중형 차 두 대 정도가 들어갈 것 같은 널찍한 장소였다.
넓긴 하지만 잡다한 물건과 세탁물이 쌓여 있어 꽤 너저분한 상태다. 가람이 쌓인 빨랫감을 쳐다보는 모습에 소윤이 얼른 입을 열었다.
“빨래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다른 분이 하시기로 했거든요. 늘 오시는 남자분인데, 힘이 좋으셔서.”
한 차례 호호 웃은 소윤이 시계를 확인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곧 오실 것 같네요. 일단 한 마리 씻기고 있어야겠어요. 할 일이 많아서.”
그렇게 말하며 소윤은 문밖에서 가만히 서 있던 웰시코기 한 마리를 휙 안아 들었다.
짧은 다리를 잠시 바동거리던 개는 욕실에 내려놓자 다시 얌전히 서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얘는 바게트예요. 웰시코기치고는 색이 조금 연한 편인데, 꼭 바게트 색 같죠? 제일 얌전하니까 씻기기 편할 거예요. 개를 씻기는 건 처음이라고 하셨으니 이 애로 시작하죠.”
소윤이 말한 대로 바게트는 정말로 얌전한 웰시코기였다. 소윤이 쓰다듬을 때마다 입을 쩝쩝거리면서 처음 보는 가람에게도 약하게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짧은 꼬리가 가볍게 달랑거리는 것이 무척 귀여웠다.
한번 쓰다듬어 보라는 소윤의 권유에 가람이 손을 뻗자 먼저 콧등을 내밀기도 했다.
“사람을 되게 좋아하는데, 벌써 세 번이나 파양되어서 돌아왔어요. 처음에는 털이 너무 많이 빠진다고, 두 번째는 해외로 이사 가게 되어서, 세 번째는 생각과는 좀 다르다는 이유로 파양됐어요. 처음에는 밥도 안 먹고 사람도 거부했는데, 요즘은 그래도 마음의 상처가 좀 아물었는지 괜찮아진 편이에요. 그래도 이젠 안 보내려고요.”
가람은 바게트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으며 소윤의 말을 들었다. 그사이 큰 통에 온수가 채워지고 있었다.
간간이 물의 온도를 확인하며 소윤은 목욕용품으로 보이는 것들을 이것저것 꺼내 놓았다.
“이 샴푸를 쓰면 돼요. 귀에 물이 안 들어가게 해 주시고. 자.”
가람은 소윤이 시키는 대로 온수 통에서 뜨거운 물을 떠 개에게 끼얹었다. 털을 살살 적시며 샴푸 칠을 하는데, 영 서툴러 손가락으로 개의 귀를 찌를 뻔하거나 얼굴 위로 물이 흐르게 하는 등 실수가 꽤 많았다.
바게트가 되도록 참아 주고 있었지만, 종종 온몸을 털며 물벼락을 맞게 하거나, 짖지는 않아도 불편한 표정을 짓는 통에 여간 고역스러운 게 아니었다. 소윤이 말한 대로 가람은 정말 애를 먹고 있었다.
패스파인더의 모든 능력을 자각한 후부터 가람에게 어려운 일이라는 건 없었다. 좀 힘들다 싶으면 능력을 사면 그만이었으니까.
하지만 패스로 개 씻기는 능력 따위를 살 생각은 해 본 적도 없고, 이런 작업을 할 일도 없었으니 이와 같은 고생을 하는 건 처음이었다.
그렇게 한바탕 목욕을 끝내고 나자 가람은 완전히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되었다.
바게트가 털어 버린 물을 뒤집어써서 옷은 흠뻑 젖었고, 머리카락도 부스스해져 물방울을 머금고 있다.
완전히 부랑자 같은 몰골이 되어 멍하니 일어선 가람에게 소윤은 진지하게 칭찬했다.
“정말 잘하셨어요. 꼼꼼하고 신중하신데요.”
아주 잠깐 가람은 그 말이 자신을 놀리는 것인지 가늠했다. 솔직히 빈말로라도 잘했다곤 할 수 없었다.
씻기는 내내 바게트는 불편한 기색으로 몸을 꿈틀거렸고 비누칠도 엉망으로 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소윤은 진심으로 칭찬하는 표정이었다. 결국 가람은 조금 떨떠름한 기분으로 수긍하는 수밖에 없었다.
“칭찬, 고맙습니다.”
가람이 대답하는 순간 욕실 밖에 누군가가 들어온 기척이 느껴졌다. 소윤도 그걸 느꼈는지 수건 하나를 꺼내 바게트를 감쌌다.
“누가 왔나 보네. 아마 늘 오시던 분일 거예요. 저기 저 빨래 해 주실 분. 나가서 같이 인사할까요?”
말투는 권유였지만 가람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수건에 감싸인 바게트를 들고 소윤이 욕실을 나가 버리자 가람은 어쩔 수 없이 그 뒤를 따라나섰다. 욕실 안에 어정쩡하게 서 있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빨래를 할 사람이라면 앞으로 자신이 개를 씻기는 동안 옆에 같이 있을 텐데 인사 정도는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으, 무거워. 이거 여기 일단 좀 둘게요.”
사료 포대 같은 것을 잔뜩 내려놓으며 남자가 앓는 소리를 냈다. 자주 온다던 그 사람이 맞는지 소윤은 그러려니 하는 얼굴로 다가서고 있었다.
그녀를 따라 걷던 가람은 남자가 짐을 내려놓고 허리를 펴는 순간 굳어졌다.
“이번에는 또 뭘 이렇게 많이 가져왔대. 세원 씨 덕분에 우리 애들 살찌겠다.”
“저 혼자 산 건 아니고요. 다른 사람들도 같이 보태 준 거예요. 이 녀석들은 살 좀 쪄야 돼요. 오, 바게트. 씻었네?”
수건에 싸인 바게트가 안겨 있는 자세 그대로 헥헥대며 엉덩이를 꿈틀거렸다.
익숙한 듯 바게트와 눈을 마주치고 인사하던 그는 문득 뒤에서 굳은 채 자신을 보고 있는 가람을 발견하고 어색한 얼굴로 소윤을 돌아보았다.
“험, 그런데 이분은?”
“아, 서로 인사하시라고 해야 하는데 깜빡했네. 여기 이쪽은 한가람 씨예요. 오늘 강아지 목욕 봉사 오신 분. 가람 씨, 이쪽은 정세원 씨예요. 제가 아까 말했던 늘 와서 도와주는 청년. 욕실에서 씻기다가 힘들면 여기 세원 씨한테 도와 달라고 하시면 될 거예요.”
“아. 자원봉사자시구나. 만나서 반갑습니다. 정세원입니다.”
서글서글하게 웃으며 정세원이 손을 내밀었지만 가람은 가만히 남자의 얼굴을 관찰하고 있었다.
그 상태로 잠시 시간이 지나자 머쓱해진 세원이 손을 물리려 했다.
“악수를 별로 안 좋아하시나 봐요.”
“아, 방금 개를 씻기고 와서 손이 젖어 있어서 그러신가 봐.”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소윤이 얼른 입을 열어 얼버무렸다.
그사이에도 가람은 세원의 얼굴을 꼼꼼히 뜯어보고 있었다. 잘못 본 줄 알았는데 아니다.
이 남자가 맞았다. 그 날, 정신과에서 나와 귀가하던 길에서 만났던 이상한 능력자들 중 하나. 가람을 지켜 주겠다고 나섰던 남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