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71화 (171/256)

5화

하는 행동을 보니 세뇌는 순조롭게 먹힌 것 같다. 자신을 전혀 알아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딱히 걱정할 필요가 없겠지.

“손에 아직 비눗기가 남아 있어서.”

가람은 무성의하게 소윤 말에 동의했다.

“아, 그렇군요. 뭐 괜찮아요. 제 손도 더러운데요.”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정세원은 다시 악수를 청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대신 바게트가 추운 듯 몸을 떨기 시작했기 때문에 소윤은 얼른 두 사람을 욕실로 밀어 넣었다.

“한 마리씩 보낼 테니 씻기고 나면 저를 불러 주세요. 가람 씨가 씻기고, 제가 말리고. 이렇게 분업해요. 괜찮죠?”

“네.”

가람의 대답에 여전히 어색한 분위기의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소윤은 영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뭔가 껄끄러워하는 기색인데 둘이 둬도 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품에서 떨고 있는 바게트가 감기에 걸리기 전에 털을 말려야 했다.

그리고 가람에게 두 번째로 씻길 개도 데려와야 한다. 그 외에도 할 일이 태산이었다.

바게트에 이어 가람이 맡게 된 개는 깜보라는 이름의 검은 푸들이었다. 개를 맡기며 아주 얌전하고 겁이 많은 성격이니 살살 조심해서 씻겨 달라 소윤이 당부했는데, 그 말대로 욕실로 들어온 후 문가 자리에 가만히 서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씻기려면 이리 데려와야 하는데, 불러야 하나? 처음으로 혼자 개를 씻겨 보는 경험에 가람은 약간 긴장했다.

욕실 한쪽에서 빨랫감을 분류하며 이쪽을 흘끔거리는 정세원이라는 남자도 무척 신경을 곤두서게 했다.

“깜보.”

살짝 불러 봤지만 개는 귀만 쫑긋 세울 뿐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부르는 걸로는 안 되나? 개들은 ‘이리 와.’라는 말 정도는 알아듣는다던데.

“깜보, 이리 와.”

몇 번 ‘이리 와.’, ‘이리 오렴.’, ‘여기로 와.’ 이렇듯 단어를 바꿔 불러 봤지만 검은 개는 요지부동이었다.

정세원이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것이 느껴져 가람은 점점 초조해졌다.

결국 깜보에게 손을 뻗어 개를 들어 올리려는 순간, 정세원이 입을 열었다.

“깜보는 눈이 안 보여요.”

가람이 돌아보자 정세원은 빨래를 통에 담던 자세 그대로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백내장이라 양 눈이 다 실명인 할머니거든요. 구조했을 때는 이미 악화된 상태로 뭘 어떻게 할 수가 없었어요. 집에서 키우던 개 같다고 하던데. 하긴, 푸들이니까 당연하죠?”

가람은 묵묵히 정세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었다.

가람이 지금까지 패스파인더의 능력을 사용한 대상은 모두 패스를 찾으며 잠깐 스치고 말 대상들이었다. 정신 조작을 한 후 그 사람을 다시 본 적은 없었다.

이 남자와 재회한 건 정말로 뜻밖의 일이었다. 게다가 그때와 분위기도 행동도 무척 다르다.

가람이 ‘평범’을 가장하고 있는 것처럼 이 사람 또한 이면의 자신을 숨기고 있었다.

“손을 내밀어서 냄새를 맡게 해 주고 천천히 쓰다듬어 줘요. 갑자기 잡으면 놀라서 무서워하니까요.”

정세원의 조언대로 가람은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개는 잠시 헤매다가 가람의 손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았다.

차갑고 축축한 코가 킁킁거리며 손바닥에 닿는 감촉을 느끼면서 가람은 유심히 깜보의 얼굴을 살펴보았다.

과연, 정세원이 말한 대로 깜보의 두 눈은 부옇게 흐려진 상태다. 이렇게나 병든 채로는 아무것도 볼 수 없을 것이다.

“이제 괜찮아진 것 같네요. 살짝 들어서 천천히 씻겨 줘요. 정말로 얌전하니까, 별로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한 정세원은 더 볼일이 없다는 듯 분주하게 빨래들을 분류하며 작업에 돌입했다.

문득 가람은 골목길에서 그가 끌어 올리려던 염력을 떠올렸다. 그 힘을 사용하면 이런 빨랫감 따위에 허리 숙이고 끙끙거리지 않아도 될 텐데. 하긴, 자신이 할 말은 아닌가.

깜보에게 따듯한 물을 끼얹으며 가람은 문득 이 상황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둘 다 이면의 모습을 숨기고 평범한 척 개를 씻기고 빨래를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저쪽은 가람을 처음 본다고 생각하겠지만.

그러고 보니 그때 꽤 많이 다친 것 같은데, 저렇게 움직여도 되는 건가?

골목길의 그 사건 이후로 며칠 지나지도 않았다. 베인 상처가 아물기는커녕 멍 하나가 빠지기에도 충분치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걷어 올린 팔이나 다리는 흉터 하나 없이 깨끗했다. 자가 치유 능력이 뛰어나거나 치유 능력자에게 도움을 받은 것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정세원을 간간이 흘긋거리며 깜보를 쓰다듬던 가람이었지만 본격적으로 개를 씻기기 시작하자 그런 여유는 금세 사라져 버렸다.

자칫 잘못하면 개의 귀에 물이 들어가거나 눈에 물을 끼얹거나 할 수도 있었다. 깜보는 정말로 얌전하게 목욕을 참아 주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조심해야 했다.

악전 끝에 마침내 거품을 모두 헹궈 낸 뒤 뿌듯한 기분으로 고개를 든 가람은 문득 언젠가부터 정세원이 자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중간중간 그의 시선을 느꼈지만 대꾸할 여유가 없었다. 한 손으로는 샤워기를, 한 손으로는 샴푸 칠을 하고, 눈으로는 깜보가 불편하지 않은지 살피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왜 그러시죠?”

그냥 무시할까 했는데 시선이 너무 집요했다. 깜보의 물기를 닦으며 묻는 가람의 말에 정세원은 잠시 망설이다가 어렵게 입을 열었다.

“저기,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났던가요?”

“네?”

“그게, 어쩐지 낯익은 느낌이 들어서요. 그러고 보니 아까 제 얼굴 빤히 보셨죠? 그쪽도 느낀 것 아닌가요?”

가람은 대답 대신 침묵했다. 정신 조작은 확실하게 했는데, 자신을 만나 얼굴을 본 것이 지워진 기억을 불러내는 촉매처럼 작용한 모양이었다.

완전히 기억해 내지는 못한 것 같지만 저렇게 떠올리려고 계속 노력하다 보면 진짜 기억해 낼지도 모른다. 그건 정말로 사양이었다.

한 번 더 기억을 조작할까?

사실 그게 마땅한 일이었지만 가람은 쉽사리 행동할 수 없었다. 기억을 조작하는 것은 머릿속을 휘저어 놓는 짓이다.

아무리 정교하게 해도 데미지가 남았다. 게다가 이렇게 짧은 기간 동안 여러 번 정신을 조작당하면 심한 부작용이 남을 수도 있었다.

약하게는 단기 기억 상실증부터 최악의 경우에는 정신 붕괴까지.

그를 몇 번 보진 않았지만 좋은 사람 같았다. 골목길에서 가람을 지켜 주려고 했던 것도 그렇고, 이런 곳에서 유기견들을 돌보는 것만 봐도 그렇다. 좋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결국 가람은 정신 조작의 선택지를 접어 버렸다. 대신, 정세원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저 남자 친구 만들 생각 없어요.”

“예?”

“그쪽, 제 타입도 아니에요.”

멍청하게 가람을 쳐다보던 정세원이 뒤늦게 시뻘겋게 얼굴을 붉혔다. 할 말을 못 찾고 몇 차례 입을 뻐끔거리던 그는 깜짝 놀랄 만큼 큰 목소리로 변명했다.

“그런 말 아니거든요! 그, 그리고 그쪽도 제 취향 아니고요!”

가람은 어깨만 으쓱했다. 덕분에 정세원은 영락없이 추파를 던지다 거절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그가 정말로 그런 의도로 말을 건 것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이런 식으로 대충 넘길 수 있다면 잘된 일이었다.

가람에게도, 정신 조작을 두 번 당하지 않게 된 정세원에게도.

다 씻긴 깜보를 밖에 내어놓자 곧바로 다음 개가 들어왔다. 정확히는 들여보내졌다. 뒷다리를 전혀 쓰지 못하는 듯 앞다리로만 기어서 움직였는데, 겁이 무척 많은 성격인지 가람을 보자마자 덜덜 떨며 눈을 피했다.

정세원을 발견하고 약간 안정되긴 했지만, 씻기려고 가람이 뻗은 손에 비명처럼 짖었다.

깨갱! 하고 짖는 소리가 얼마나 크던지, 소리만 듣는다면 가람이 개를 때렸다고 해도 믿을 정도였다.

닿은 것도 아니고 손만 뻗었는데 이렇게나 크게 울자 가람도 조금 놀랐다. 그리고 짖은 개 자신도 놀란 것 같았다.

너무 큰 소리를 냈다고 생각했는지 눈치를 보며 움직이지도 않는 다리로 몸을 끌어 구석으로 도망치려는 모습이 무척 안쓰러웠다.

“돌리야. 착하지?”

보다 못한 정세원이 끼어들어 가람의 앞을 막아섰다. 개의 이름이 돌리인 모양이었다. 돌리는 정세원의 손에 약간 진정하는 것 같았지만 가람을 보자 다시 겁을 먹었다.

시간이 좀 필요하다고 판단했는지 정세원은 천천히 돌리에 대해 이야기했다.

“전 주인이 묶어 두고 술만 마시면 때렸다나 봐요. 그때 허리를 다쳐서 뒷다리를 못 쓰게 되었는데, 밥도 안 줘서 동네 사람들이 지나가며 주는 먹을 것으로 연명했죠. 동네 꼬마들이 먹을 걸 가져와서 약 올리거나 돌 던지고 괴롭히기도 하고 그래서 어린아이를 무서워해요. 애견 입양은 보통 아이가 있는 집에서 많이 하는데, 애를 무서워하니 입양 가긴 글렀죠.”

“계속 떨고 있어서 만지기가 좀 미안하네요.”

“그래도 시간이 좀 지나면 괜찮아지니까……. 봐요. 좀 나아졌죠?”

그 말대로 진동 모드처럼 떨던 돌리의 몸에서 떨림이 한결 잦아들었다. 가람이 손을 뻗으면 이를 드러내며 떨다가 짧고 높게 짖긴 했지만 그래도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정세원은 잠시 둘 사이를 중재해 주다가 가람이 만져도 돌리가 짖지 않게 되자 물러났다.

“다친 개들이 많네요.”

가람의 말에 정세원이 슬픈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쁜 사람이 많아서 그렇죠.”

“혼내 주고 싶다는 생각, 들지 않아요?”

이 질문은 다분히 충동적인 것이었다.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정세원이 곧 의미심장하게 미소 지었다.

“글쎄요.”

얼버무리는 말이었지만 가람은 대답을 들은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이 개를 괴롭혔던 사람들은 저마다 대가를 치렀을 것이다. 그다지 합법적이지는 않은 형태로.

그러나 그들이 치른 대가가 다친 개들에게 보상으로 돌아오는 일은 없다. 깜보는 여전히 눈이 멀었고, 돌리는 뛰지 못한다.

그들의 전 주인이 아무리 매 맞고 혼이 나도,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이 개들은 이렇게 살다가 짧은 생을 마감할 것이다.

돌리 이후로도 가람은 몇 마리의 다친 개들을 더 씻겼다. 그렇게 한바탕 일을 끝내고 나자 어느새 저녁이 다 되어, 가람의 자원봉사가 끝나는 시간도 다가왔다.

고생했다며 소윤이 내어준 차를 앞에 두고 앉아 잠시 쉬고 있는데, 발치에 무언가가 다가왔다.

깜보였다.

눈도 보이지 않으면서 가람을 어떻게 찾았는지, 다 젖은 가람의 다리에 잘 마른 검은 털을 부비적거리고 있었다.

가람의 냄새를 맡는 듯 킁킁대며 초점 없는 흰 눈이 이리저리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문득, 가람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이 치밀어 올랐다.

깜보의 눈이 낫고 돌리의 다리가 낫는 것은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지만, 가람에게는 무척 손쉬운 일이었다.

가람은 이 개들에게 기적을 선물하고 싶었다. 딱 한 번, 이번만 자신의 규칙을 벗어나서.

이 개를 좀 치료해 준다고 해서 자신이 평범한 삶에 대한 감각을 잊어버리고 능력을 마구 남발하며 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 개가 치료받아 회복된 몸으로 사람을 마구 죽이고 돌아다니는 희대의 살인마가 되지도 않을 것이고, 전쟁을 일으키거나 가람이 스스로를 자책할 만한 일을 벌이지도 못할 것이다.

그저 살아 있는 동안 함께 머무는 개들을 좀 더 보고, 돌봐 주는 소윤의 얼굴을 좀 더 보고, 하늘과 구름, 밖에서 날아다니는 새도 보고, 걷고, 달리고, 개껌을 향해 뛰고 까부는 정도가 다겠지.

가람은 다시 깜보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시선을 느끼지 못하는 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 엉뚱한 곳을 쳐다보고 있다.

가람은 배운 대로 깜보에게 손을 내밀어 냄새를 맡게 한 뒤 개를 쓰다듬었다.

이어서 돌리의 다리도, 다른 다친 개들도 몇 차례 쓰다듬었다.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은은하게 치유의 힘을 두른 손으로.

기적은 아주 천천히 찾아올 것이다. 약간씩 차도를 보이다가 결국 자연 치유된 것처럼.

* * *

밤보다 새벽이 더 가까운 심야에 가람은 조용히 눈을 떴다.

기척 하나 없이 눈을 떴는데도 가람은 아무런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느낄 수 있었다. 패스를 찾으러 갈 때가 왔다.

어느 순간부터 손등을 보지 않아도 패스가 모두 충전되었음을 알 수 있었다. 바늘을 보지 않아도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마치 본능 같은 감각이었다. 걷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걷게 되듯.

지금 다른 패스파인더를 만나게 된다면 그 사람이 패스파인더라는 걸 바로 알아챌 수 있을 것 같았다. 모르드레드가 자신의 기운을 느끼고 동족임을 알아본 것처럼.

자고 있는 자신의 환영을 침대 위에 불러낸 뒤 가람은 몸을 투명하게 만들었다. 원한다면 이 상태로 벽이든 물이든 어느 곳이나 지나갈 수 있다.

처음에는 모든 단단한 물질을 통과할 수 있는 능력을 원했는데, 능력을 발휘하자마자 갑자기 발 아래로 쑥 빨려 들어가서 기겁하기도 했다. 바닥의 흙조차 통과해 버렸던 것이다.

뒤늦게 능력을 통제할 수 있게 조정하지 않았다면 아마 내핵까지 끌려갔을지도 모른다.

시간은 오전 2시를 좀 넘은 상태였다. 가람은 부모님이 자고 있는 것을 확인하고 조용히 집을 나와 패스가 있는 방향으로 순간 이동 했다.

위치를 신경 쓰지 않고 방향만 가늠하며 이동하다 보니 누군가의 집 안으로, 어느 건물 안으로, 바다 한복판으로 이동하기도 했지만 가람은 조용히 순간 이동을 계속했다.

순간 이동은 가람이 가진 능력 중 횟수 제한 없이 사용 가능한 몇 안 되는 능력이었다.

처음에는 월 1회 순간 이동 능력이었지만, 패스를 더 써 가며 이만큼까지 업그레이드했다. 무척 많은 패스를 지불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

한 번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는 제한이 있지만 어차피 이동 횟수에 제한이 없으니 없는 거나 마찬가지인 제약이었다.

원하기만 한다면 순간 이동을 거듭해 지구 밖까지 갈 수도 있고, 그곳에 누군가를 버리고 올 수도 있었다. 물론 그런 일에 능력을 써 본 적은 없지만.

덕분에 패스 찾기가 무척 쉬워졌다. 마치 편의점에 잠시 들렀다 오는 것처럼 간단하게 다녀올 수 있는 것이다.

이동을 거듭하다 보니 어느새 낯선 땅이었다. 이국적인 문자들이 늘어선 간판들을 지나고, 본 적 없는 풀이 자란 들판을 지나, 가람은 외딴곳에 덩그러니 있는 작은 건물 앞에 도착했다.

주변에 사람이 사는 것 같지도 않고,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데다, 건물의 겉에는 말라붙은 담쟁이덩굴이 잔뜩 자라 있었다. 한눈에 봐도 버려진 건물이다.

안으로 들어가니 의외로 실내는 깨끗하게 관리되어 있었다. 사람은 없는데 어둠 속에서 빛나는 비상구 표시등만 가람을 반긴다.

감각을 확장하자 여기저기서 숨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아주 빈 건물은 아닌 모양이다.

밖에서 보기에는 작은 편의점 정도 크기라 패스를 찾는 데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대신 아래쪽으로 최소 다섯 층의 지하 공간이 있었다.

이 정도 깊이면, 핵 방공호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고 가람은 추측했다.

그러나 건물 안을 돌아다니며 가람은 자신의 추측을 철회했다. 이런 건물이 방공호일 리가 없었다.

마치 미궁의 함정 같은 위험한 시설이 건물 곳곳에 도사리고 있었던 것이다.

은행 금고를 연상시키는 거대한 철문을 여러 개 통과하며 가람은 혀를 내둘렀다.

일반적인 건물 보안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수법이 잔인한 것이 무척 많았다.

강제로 문을 뜯어내면 안에서 황산이 쏟아져 나오게 장치된 것도 있고, 기름과 불이 준비되어 있거나 정체불명의 가스통이 완비된 문도 있다.

어느 단체의 비밀 창고 같은 것에 들어온 걸까? 아니면 마피아의 무기 창고?

후자의 가설에 힘을 더 실어 주며 가람은 꾸준히 패스와의 거리를 좁혀 갔다.

그리고 마침내 거대한 강철 문 하나를 앞에 두고 섰다. 이 건너편에 패스가 있다.

한 번의 순간 이동이면 패스를 얻을 수 있었지만 가람은 잠시 망설였다. 문 건너편에서 최소 백 명 이상의 인기척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낮게 우는 소리와 흐느끼는 숨소리 같은 것도 들렸다. 대부분 아주 앳되고 가느다란 목소리다. 어린아이의 것 같은.

‘으음.’

안으로 들어가면 보게 될 것이 예상되어서 가람은 꺼림칙한 기분으로 잠시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리고 마침내 철문 안으로 이동했다.

눈앞에 펼쳐진 것은 마치 교도소를 방불케 하는 광경이었다.

건물의 세 면을 따라 다섯 명이 누울 만한 작은 감옥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는데, 가람이 들은 울음소리는 그 안에 있는 어린아이들의 것이었다.

무척 지친 얼굴의 그들은 하나같이 겁에 질려 중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중앙에는 여섯 명의 남녀가 의자에 앉아 지루한 얼굴로 턱을 긁고 있었다.

앞에 놓인 테이블에는 다 식은 음식도 놓여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패스도 놓여 있었다.

안의 상황이야 어떻든 가람에게 중요한 것은 패스였다.

어차피 자신을 알아챌 수 있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가람은 서슴없이 테이블로 다가가 패스를 손에 넣었다. 50패스. 나쁘지 않은 양이다.

패스를 찾았으니 이제 여기에 볼일은 없다.

막 떠나려는 순간, 테이블에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갑자기 손을 뻗었다. 정확히 가람이 서 있는 위치였다.

그의 주먹은 가람을 통과해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했지만, 가람은 깜짝 놀랐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무언가를 찾는 듯 두리번거렸기 때문이다.

“왜 그러십니까? 보스.”

“흠.”

남자는 대답도 하지 않고 집중해서 침입자를 찾으려고 들었다. 이곳에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확신하는 태도였다.

2미터에 가까운 라틴계 남성으로, 격투기를 하는지 몸이 대단히 우람했지만 가람의 은신은 무술 좀 한다고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어서 떠나야겠다고 생각하는 순간, 남자의 손에서 전기가 튀더니 가람의 옷을 잡아챘다.

그리고 그가 잡은 옷깃부터 물감이 번지듯 은신이 풀려 버렸다. 가람은 믿을 수 없는 일에 경악했다.

“어떻게 들어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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