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화
“누구냐!”
가람을 잡아챈 남자는 아무 말도 없는데 다른 이들이 깜짝 놀라 소란을 떨었다.
너무나 놀라 반사적으로 순간 이동을 하려던 가람은 머릿속을 후려치는 충격에 휘청거렸다. 능력을 쓰려고 했는데 힘을 쓰는 순간 무언가가 간섭을 했다.
워낙 창졸지간에 당한 일이라 어질어질한 정신을 회복하지 못하고 가람이 잠시 공황 상태에 빠져 있는데, 남자가 여유작작한 태도로 지시했다.
“은신, 순간 이동 능력자다. 전투 능력은 미미해 보이…….”
그는 말을 마치지 못했다. 놀란 나머지 가람이 미친 망아지처럼 전력으로 염력을 뿜어내 그를 포함한 여섯 명을 바닥에 내리꽂았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능력이 무산된 것은 처음이라 너무나 당황해 힘 조절도 하지 못했다.
단 한 방에 여섯 명이 나가떨어지자 온 방이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설마 죽어 버렸나 싶어 다가가니 다행히 죽지는 않은 것 같았다. 그냥 정신을 잃은 것뿐인 듯하다.
가람은 얼른 몸을 다시 은신했다. 여기에는 이들 말고도 사람이 많다.
다행히 감옥을 등지고 있을 때 모습이 드러난 덕분에 감옥 안에서 그녀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널브러진 여섯 명을 두고 가람의 머릿속은 복잡해졌다. 또 이능력자다.
정세원과 관련이 있는 녀석들일까? 그를 쫓던 왜소한 남자와 같은 편일지도 모른다.
상대의 머릿속을 읽고 싶었지만 이렇게 정신을 잃은 상태면 그것도 불가능하다.
가람은 입맛을 다시며 이들의 기억에서 자신을 본 부분만 잘라 내고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누군가, 외치지만 않았다면 그랬을 것이다.
“도와주세요!”
감옥에 갇혀 있던 사람 중 하나가 절박한 목소리로 도움을 요청했다. 가람이 멈칫하자 자신들의 목소리를 들어 줬다고 판단했는지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하소연이 터져 나왔다.
어린아이, 어른,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입을 모아 호소하는 것은 한 가지였다.
이들은 테러를 일삼는 무력 단체고 자신들은 납치당했다. 날이 밝으면 세뇌당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테러에 동원되게 될 것이다.
가람이 어느 편에 서 있는 초능력자인지는 모르겠지만 자신들을 구해 달라는 것이 주요 골자였다.
대부분의 경우 가람은 패스가 핵무기 창고에 있든, 아니면 범죄 단체의 창고에 있든 신경 쓰지 않고 패스만 찾아서 돌아가는 편이었다.
하지만 이미 은신해 버려 모습도 보이지 않는 자신을 향해 필사적으로 외치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그냥 떠나면 뒤가 찜찜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들을 풀어 주면 그 뒷감당까지 모두 책임져 줘야 한다.
딱 봐도 여기 감옥에 갇힌 사람 중 자력으로 추격을 벗어날 능력을 가진 사람은 없어 보였다.
이들이 다시 잡히면, 그래서 자신이 꼬리라도 밟히게 된다면 굉장히 귀찮아질 것 같다.
돕자니 뒷일이 복잡해질 것 같고 외면하자니 마음이 무겁다. 갈등하던 가람은 문득 감옥 사람들이 하나같이 외치는 말에서 실마리를 챙겼다.
세뇌.
정신 조작은 가람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이 아니던가. 지금까지는 기억을 지우고 새로운 기억을 주입하는 정도로 사용했지만, 사실 이 능력의 잠재력은 그 정도가 아니었다.
이번 기회에, 대규모 공사를 한번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정신은 워낙 섬세한 것이라서 마구 주물렀다가는 폐인이 될 수도 있다.
그간의 경험에 따르면 아주 짧은 시간의 기억 조작도 가벼운 건망증이나 인지 능력을 저하시키는데 정신에 대공사가 일어나면 어떻게 되겠는가.
거의 돌고래만도 못한 지능을 가지게 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가람이 신경 쓸 바는 아니었다. 느껴지는 기운이나 감옥 사람들의 말을 종합해 봐도 눈앞의 여섯 명은 악당이다.
뼛속까지 검을 것 같은, 양심도 감정도 없을 것 같은 악인. 그런 이들이 금붕어 수준으로 지능이 떨어진들 알 게 뭔가.
그리고 이자들도 죽는 것보다는, 새 삶을 사는 것을 더 원할 것이다.
가람은 남아 있던 체력을 바닥까지 긁어다가 이들에게 새 정신을 부여해 주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정신을 잃고 있는 덕분에 저항이 없어 비교적 수월했다. 잠시 후, 기절해 있는 여섯 사람은 새사람으로 거듭났다.
뿌리부터 순박하고 남을 돕는 것이 일생일대의 소원인 이타심의 결정체 같은 성격으로. 기억 같은 것은 아예 지워 버렸다.
말 정도는 구사할 수 있겠지만 이들은 자신이 누군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도 기억할 수 없을 것이다.
감옥 안의 사람들이 도망치고자 하면 그걸 도울 테고, 공격받으면 지키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모든 일이 끝나면 자신이 가진 초능력으로 기아와 전쟁이 휩쓰는 지역에서 몸 바쳐 일하겠지.
새 인생 선물받았다고 생각하라고. 착하게 살면 좋잖아?
은신을 유지한 상태로 가람은 여섯 명을 깨우고 돌아가는 상황을 잠시 지켜보았다.
기대한 대로 모두 어리둥절한 얼굴로 당황하다가 감옥에 갇혀 울고 있는 사람을 발견하더니 무언가 이야기를 나누고 문을 열어 주었다.
갇혀 있던 사람들은 처음에는 무슨 일인지 몰라 겁에 질려 있었지만 여섯 사람이 제 이름을 물어보거나, 여기가 어디냐고 묻자 어떻게 돌아가는 상황인지 파악한 모양이었다. 가람은 그쯤에서 그곳을 떠났다.
잠깐이지만 싸우기도 했고, 정신 조작을 하는 등 귀찮은 일이 많았으니 시간이 좀 지나지 않았을까 했는데 막상 돌아와서 보니 한국은 아직 동도 트지 않은 시간이었다.
집 앞 편의점에 잠깐 다녀온 정도의 시간만 지나 있었다.
예전이라면 이런 식으로 패스를 찾는 건 생각도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
아무도 모르게 집으로 돌아온 가람은 그대로 이부자리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차피 패스를 사용해 인간의 한계를 벗어난 이 육체는 잠을 잘 필요가 없지만, 그래도 자기 방에서 아침 냄새를 맡으며 눈뜨는 것은 그녀가 늘 그리워하던 것이었으니까.
* * *
다음 날 아침, 눈을 뜨고 아침을 먹은 뒤 가람의 여느 때와 같은 평범한 일상이 시작되었다.
일은 주로 집에서 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오늘처럼 드물게 업무 관련으로 밖에서 사람을 만나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부분 대수롭지 않은 만남이라 거의 두세 시간이면 끝나는 게 보통이었다.
오늘도 점심시간이 좀 지날 무렵 미팅이 끝났다. 모처럼 오후 시간이 많이 남았으니 친구라도 보면 좋겠는데, 이 시간이라면 다들 회사에 있기 마련이다.
결국 홀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생각에 집으로 가는 길을 터덜터덜 걸었다. 그런데 갑자기 누군가가 어깨를 잡아챘다.
“와, 이 동네 살았어요?”
갑작스럽게 말을 건 사람은 최근 자주 마주치는 정세원이었다. 그는 어깨가 잡힌 가람만큼이나 놀란 표정이었다.
가람이 말없이 정세원의 손을 털어 내는 동안 그는 혼자서 무언가를 납득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그래서 얼굴이 낯익었던 건가? 오며 가며 봤을지도 모르겠네요. 집이 어느 쪽이에요? 저는 저쪽, 아파트 넘어서 있는 주택 단지에 사는데.”
얼굴이 낯익었던 이유는 아마 그게 아닐 가능성이 높지만 가람은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이렇게 자꾸 엮이는 건 인위적인 요인인가, 아니면 정말 우연인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관찰하던 그녀는 너무 오랫동안 대꾸 없이 서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깜짝 놀랐잖아요.”
“네? 아, 어깨. 그런데 별로 놀란 표정이 아니던데요.”
사실 맞는 말이었다.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래도 겉으로는 제법 놀란 표정을 지었을 텐데 정세원은 마냥 유들유들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가람은 이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건 이유를 유추할 수 없어서 약간 곤란한 기분으로 그를 마주했다.
골목길에서 정신 조작당한 일을 기억해 낸 것이 아니라면 자신에게 딱히 흥미가 없을 텐데 왜?
“그런데 어디 가시던 길이에요? 딱히 바빠 보이지는 않는데, 저랑 차나 한잔하실래요? 할 말도 좀 있고. 제가 살게요.”
“바쁜데요.”
“정말요? 어디 가시는 길인데요?”
“그, 약속도 있고.”
“거짓말 엄청 못 하는 거 알아요?”
가람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성격이었나? 첫인상과는 너무 다른데. 그에게 여러 가지 면이 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가람은 경고 등이 켜지는 느낌이었다. 평범한 삶을 위해서는 이런 사람과 엮이면 안 된다.
그 사람의 다양한 면을 알게 된다는 건 그와의 인연이 점점 강해진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타인이 아니게 된다. 초능력자와 타인이 아니게 되는 순간 평범한 삶은 물 건너가는 거다.
“저기, 전에 말했다시피 제 타입 아니세요. 지금 남자 친구 사귈 생각도 없고요.”
“누가 사귀재요? 이야기하면서 커피나 한잔하자는 건데. 동네 주민끼리 왜 그래요?”
전에 썼던 카드를 꺼내 봤지만 두 번 먹히는 수단은 아니었나 보다. 아무렇지도 않게 정세원이 받아치자 가람은 더 할 말이 없어졌다.
남은 건 완전히 낯을 바꾸어 언성을 높이는 방법밖에 없는데, 길에서 그런 소란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지금도 벌써 길 한복판에 서서 오랫동안 말을 주고받은 덕분에 행인들이 호기심 어린 시선을 던지는 중이었다. 그 시선의 존재를 정세원도 알고 있는지 최후의 통첩처럼 다시 제안했다.
“차 마시러 갈래요, 아니면 여기서 계속 구경거리가 될래요?”
가람은 선택지가 없음을 깨닫고 결국 항복했다.
“가죠.”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씨익 웃는 정세원이 그렇게 얄미울 수가 없다.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앞장서며 가람을 돌아보았다.
“따라오세요, 케이크가 끝내주는 카페를 알고 있으니까.”
자신만만하게 말한 대로 정세원이 가람을 데려온 카페는 케이크가 무척 많은 곳이었다.
온갖 과일 당절임과 초콜릿, 치즈 등을 올린 각양각색의 케이크들이 쇼케이스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동네에 이런 곳이 있었던가? 지나다니면서 왜 몰랐지? 저번 세상에서는 없었던 것 같은데. 아니, 있었는데 자신이 몰랐던 걸지도 모른다.
정세원은 이 가게에 무척 자주 오는 모양인지 그가 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사장이 눈인사를 건넨다.
뭔가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가람을 의식해서 입을 다무는 느낌이었다.
“예전에 여기서 알바했었거든요.”
묻지도 않은 말을 툭 던지고 정세원이 가람을 쇼케이스 앞으로 이끌었다.
배가 고픈 건 아니었는데 먹음직스러운 케이크들을 보자 입에 침이 고이는 느낌이었다. 과일은 전부 싱싱하고 빵도 무척 촉촉해 보인다.
가람이 고른 것은 크림치즈 딸기 쇼트케이크였다. 정세원은 청포도 초코케이크를 골랐다.
고르고 보니 마실 것까지 하면 가격이 꽤 될 것 같다. 그냥 얻어먹기엔 좀 부담스러운 가격이었다.
괜히 정세원에게 빚을 남기기 싫어서 급히 계산을 하려 하자 그가 계산대 앞을 가로막았다.
“아, 제가 살게요. 제가 산다고 했잖아요.”
“굳이 안 그래도…….”
“제가 한 입으로 두말하게 하실 겁니까? 마실 건 뭐로 하실래요?”
기어코 차를 사겠다고 나서는 걸 보니 괜히 실랑이를 하는 것보다 빨리 원하는 대로 해 주는 게 나을 것 같다. 가람은 메뉴판을 잠시 훑어보다가 마실 것을 골랐다.
“주스요. 생과일주스 아무거나.”
“커피가 맛있는데.”
“커피는 좀.”
“왜요? 커피 싫어해요?”
“그건 아니지만, 지금 약을 먹고 있어서 카페인은 피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네.”
정세원은 무척 아쉬워하긴 했지만 더 권하지 않았다. 애매한 시간이라 그런지 카페에 있는 손님은 정세원과 가람 외 두 테이블 정도였다.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고 앉자 곧 정세원이 음료와 케이크를 가져와 내려놓았다.
여기서 일했다는 말이 사실인지 서빙하는 자세가 무척 자연스러웠다.
“케이크 나왔습니다.”
“잘 먹을게요.”
인사치레를 하며 가람은 약간 긴장한 상태로 포크를 들었다.
정세원이 대체 무슨 이유로 자신을 붙잡았는지 알 수가 없었던 것이다. 아니, 오히려 짚이는 게 있어서 더 불안했다.
그런 속마음을 감추고 케이크만 한 입, 두 입 떠서 먹는데 마주 앉아 케이크를 축내던 정세원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평일 이 시간에 돌아다니시는 걸 보니, 학생이에요?”
“아뇨, 그건 아니고.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어요.”
“아, 그래서 시간이 자유로운 거구나.”
그에 이어 정세원은 계속해서 가람의 신상 정보를 묻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음식, 형제자매 등 누가 봤다면 소개팅이나 맞선이라고 착각할 법한 화제였다.
가람이 최소한의 대답으로 그 질문을 피해 가며 슬슬 어떻게 하면 자연스럽게 이 카페를 벗어날 수 있을까 고민하는데 그가 돌연 예상치 못한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저 왜 싫어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