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73화 (173/256)

7화

“네? 그런 적 없는데요.”

“아니, 싫어한다기보다, 꺼려하는 것 같더라고요. 제가 뭔가 나쁜 인상이라도 줬나요?”

“꺼린 적도 없어요.”

“흐음.”

딱 잡아떼는데도 정세원은 턱을 괴고 가람을 빤히 바라보기만 했다. 결국 가람은 그 무언의 응시를 이기지 못하고 다시 입을 열었다.

“꺼리는 건 아니고, 그냥 낯을 좀 가려서 그래요.”

“아, 그러시구나. 하긴, 붙임성 좋은 성격은 아니신 것 같아요. 앗, 욕은 아니고요. 그냥 성향이 그렇다는 거죠.”

“그렇게 변명하면 더 욕 같은데요.”

가람의 대꾸에 정세원은 그냥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으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졌고 이어지는 대화들도 나쁘지 않았다. 이렇게 도란도란 케이크나 먹으며 이야기하고 있을 때가 아닌데.

속으로 생각하면서도 가람은 부지런히 케이크를 입 안으로 나르고 있었다. 그가 자신한 대로 정말 맛있긴 했다.

“그런데, 커피 한 모금도 안 되는 거예요? 진짜 맛있거든요. 여기 시음 커피도 있는데.”

케이크가 무척 맛있으니 커피도 분명히 맛있겠지. 가람은 순간 아쉬워졌으나 정신과에서 처방받아 먹고 있는 약들을 상기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가람은 의사가 내리는 처방에 무척 성실하게 따르고 있었는데, 약물이 주는 안정 효과는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다.

“네.”

“으음, 알았어요. 그런데 어디가 아픈 거예요? 혹시 지금도 아픈데 제가 붙잡고 있는 건 아니죠?”

가람은 순간 그렇다고 할 뻔했으나 간신히 혀끝에 올라온 말을 삼켰다. 어차피 아닌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어떻게 둘러댈까 궁리하다 문득 오히려 사실대로 말하는 게 효과가 더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울증이 있어서요.”

사실 이 말을 듣고 찔끔해서, 자신이 선을 너무 넘고 있었다고 사과하길 바랐는데 정세원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한술 더 떠서 가람을 칭찬하기 시작했다.

“우울증이구나. 현대인의 정신적 감기 같은 거라고 하던데. 그래도 정신과에 가서 관리한다는 점이 훌륭하네요. 그러고 보니 저도 최근에 갑자기 기억력이 확 떨어져서. 막 깜빡깜빡한다니까요. 오늘도 집 밖으로 나왔다가 왜 나왔는지 기억이 안 나서 한참 문고리만 잡고 있었지 뭔가요. 하하핫, 그 병원 잘하면 저한테도 추천 좀 해 주세요.”

그 말에 찔리는 구석이 많은 가람이 입을 다물었다. 갑작스러운 기억력 감퇴라면, 정신 조작의 부작용일 가능성이 높았다.

이 화제로 더 이야기해 봐야 얻을 게 없었기 때문에 가람은 괜히 말을 돌렸다.

“피곤하신 거 아니에요? 피곤하면 그러기도 한다더라고요.”

“음, 피곤할 일이 좀 있긴 하죠.”

담담하게 긍정하며 정세원이 커피를 후루룩 들이켰다. 하긴, 골목길에서 목격했던 것 같은 이면의 삶을 살며 한편으론 자원봉사에 평범한 일상까지 유지하려면 보통 바쁜 게 아니겠지.

나름대로 결론을 내리던 가람은 문득 정세원이 무언가를 물어 주길 바라는 눈으로 쳐다보는 것을 발견했다.

솔직히, 정말로 묻고 싶지도 않고 궁금하지도 않았지만 이 흐름에서 관심 없다는 듯 행동하는 게 더 어색할지도 모른다. 결국 가람은 떠밀리듯 성의 없이 질문했다.

“봉사 활동도 꾸준히 가시는 것 같던데, 그러고 보니 직업이 어떻게 되세요?”

“아, 작은 사업 하고 있어요.”

“어려 보이는데 대단하네요.”

가람은 알맹이 없는 칭찬을 해 주고 접시를 부지런히 비웠다. 정세원은 어깨를 으쓱하더니 마찬가지로 케이크를 먹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그녀는 문득 의아해졌다. 그런데 케이크나 먹자고 붙잡은 건 아닐 테고, 대체 왜 불러 세운 거지?

처음에는 정신 조작에 대한 일을 눈치챈 건가 하고 긴장했는데 오가는 대화는 평범 그 자체였다.

“음, 이제 와서 묻긴 좀 늦은 것 같지만, 왜 저를 불러 세우신 거예요?”

지금까지 그가 보여 준 붙임성을 보면 그냥 길 가다가 보여서 붙잡았다고 해도 가람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다분히 대답을 예상한 질문이었는데 정세원이 잊고 있었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다급히 입 안의 케이크를 삼켰다.

“아, 그거. 맞다. 그거 말하려고 했던 건데. 원래 자원봉사 또 오시면 말해 주려고 했는데요, 그 후로 계속 안 오시더라고요.”

“일이 좀 바빠져서요.”

사실 정세원 때문에 안 간 거지만 가람은 대충 둘러대었다.

“바쁘셨구나. 아무튼 그래서 오늘 지나가는데 마침 보이길래 급하게 잡았어요.”

“저한테 뭔가 용무라도 있으셨나요?”

기껏해야 자원봉사 재방문 요청이나, 유기견 보호소에 일손이 부족한 날에 와 줄 수 있냐는 이야기나 예상했는데 정세원은 뜬금없는 이름을 꺼냈다.

“깜보요.”

“깜보가 왜요?”

“깜보 눈이 보이게 됐어요. 그리고 돌리도 조금씩 걸을 정도로 신경이 회복되고 있대요. 너무 놀랍죠? 그날 씻으면서 신경 많이 쓰시는 것 같길래, 이야기 들으면 기뻐할 것 같아서 말해 주고 싶었어요.”

“잘됐네요.”

동요를 감추기 위해 노력하며 가람은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그러나 그게 오히려 안 좋았던 모양인지 정세원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응시해 왔다.

“재미없게 반응이 왜 그래요. 그래도, 기쁘긴 한 거죠?”

“당연하죠.”

이번에는 의식적으로 조금 웃자 정세원은 그제야 만족스러운 얼굴로 끄덕였다. 그러더니 갑자기 목소리를 낮춰 은밀한 이야기라도 하는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있잖아요. 진짜 기적이라도 일어나지 않는 이상 깜보 눈이 보이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어요. 의사도 몇 명이나 만나 봤는데 모두 깜보 눈이 보이는 일은 없을 거라고 했죠.”

“현대 의학에서는 기적이 종종 일어나곤 하잖아요.”

뭔가 찜찜한 느낌에 애써 말을 돌리는데, 정세원이 말을 뚝 끊더니 묘한 얼굴로 가람을 응시했다.

적당히 지적받지 않을 정도의 시간 동안 가람을 관찰하던 그가 불쑥 물었다.

“혹시, 주변에 다친 사람 중 빨리 나았으면 하고 소망한 사람이 평소보다 빨리 상처가 아물거나, 병이 치유되거나 한 적 없어요?”

“네?”

금시초문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반문했지만 가람은 내심 몹시 긴장하고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묻는 걸까? 그의 기억을 다시 지우는 게 좋을까? 한 번 조작한 것만으로 이만큼이나 뇌에 데미지를 입었는데 또 그의 정신에 손을 대는 게 옳은 일일까?

그런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세원은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그렇잖아요. 너무 신기한 일이라. 혹시 가람 씨가 초능력이라도 가지고 있는 거 아닌가 싶었거든요.”

“설마요.”

“자각 없는 초능력자일 수도 있죠.”

“그런 것, 믿어요?”

갑자기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듯 그를 아래위로 훑어보자 정세원이 머쓱하게 얼굴을 긁적였다.

“너무 유치한가? 하핫. 만약 그런 게 있다면 누군가를 치유하는 능력은 정말 귀한 걸 거예요. 그렇죠? 세상 사람 다 달려들어서 치료해 달라고 할걸. 종교 하나 만들 수도 있겠다.”

“그러게요.”

가람은 이제야 정세원이 자신을 붙잡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을 치유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로 의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의심에 확신이 얼마나 섞여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리 떠봐도 가람은 계속 부정할 테고 증거도 없으니 그가 뭔가 더 할 수 있는 부분은 없을 것이다.

“어쨌든 한번 보러 오세요. 깜보가 기다려요.”

충분히 떠봤다고 생각했는지 정세원이 갑자기 분위기를 환기시키듯 입을 열었다.

어차피 그날 한 번 봤을 뿐인 낯선 사람을 깜보가 그리워할 이유가 있을까. 그냥 핑계려니 하고 가람은 적당히 대답했다.

“시간 나면요.”

“소윤 누나도 기다리고요.”

가람은 결국 남은 케이크 조각을 입 안에 밀어 넣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정세원은 언제 올 거냐며 아예 날짜를 확인받고 싶어 했지만 가람은 조만간 시간이 나면 가겠다는 말만 남겼다.

바로 다음 날 오길 원하는 눈치여서 그날은 일정이 있다고 거절했다. 핑계가 아니라 정말이었다. 주에 한 번 방문하는 정신과 상담일이 벌써 내일로 돌아왔던 것이다.

언제 와도 이 병원은 사람이 없다. 자신 외에 환자가 없는 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이렇게 사람이 없으면 굳이 시간을 정하지 않고 편할 때 아무렇게나 방문해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그리고 이렇게 소파에 앉아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 같고.

병원 대기실에 앉아 상담이 시작되는 시간을 기다리며 지루해진 가람은 가죽 소파를 매만졌다.

어차피 상담실 안에 느껴지는 인기척도 없는데 의사는 꼬박꼬박 예약 시간을 지켜 가람을 들여보내곤 했다.

오늘도 정확히 정각, 상담실 문이 달칵 열리고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들어오세요.”

열린 문으로 들어가자 괜히 바쁜 척 이것저것 책상 위를 정리하던 의사가 눈을 마주치고 의자를 권했다.

환자 차트도 몇 개 없고, 딱히 중요한 문서도 없다. 저 바쁜 척은 장사 안 되는 개업 의사의 자존심을 지키려는 마지막 몸부림이었다.

가람은 언제나처럼 적당히 어두운 상담실의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오늘 기분은 좀 어떠신가요?”

“괜찮아요.”

“잠은 좀 주무셨나요?”

“네. 주신 약도 꾸준히 먹고 있어요.”

“악몽 없이?”

“악몽 없이.”

“좋아요, 약을 조금씩 줄여 보는 게 좋겠군요.”

한 차례의 문답 후 의사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차트를 기록했다. 그 모습을 가만히 기다리던 가람은 문득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지난주에요.”

가람이 이런 식으로 근래에 있는 일에 대해 입을 여는 것은 무척 드문 일이라 의사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고개를 들었다.

“지난주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아뇨, 아니. 그러니까, 권해 주신 대로 자원봉사를 가 봤어요.”

“좋군요.”

의사는 무척 마음에 든 얼굴로 미소 지었다. 증상 자체는 크게 독특할 것 없는 망상증이었지만 약을 꼬박꼬박 잘 챙겨 먹고 조언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는 모습은 참 보기 좋은 것이었다.

의사와 환자라는 관계가 아니었더라도 누군가의 조언을 충실히 받아들이는 태도는 호감을 사기 좋다.

“어떤 자원봉사를 다녀오셨나요?”

“유기 동물 보호소요.”

“도움이 좀 된 것 같습니까?”

도움? 아, 베이스캠프에 갇히는 악몽 때문에 간 거였지. 가람은 잠시 생각했다. 지난주에는 그 자원봉사 덕분인지 약을 먹어도 계속되던 악몽이 전혀 찾아오지 않았다.

“그런 것 같아요.”

“그렇다면 꾸준히 해 보는 게 좋겠군요. 다음에 또 언제 방문할 건가요?”

“또 가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왜죠? 뭔가 안 좋은 경험을 했나요?”

“그건 아니고, 거기에서 아는 사람을 만났는데 별로 엮이고 싶지 않아서요.”

“과거에 안 좋게 끝난 사람인가요?”

“아뇨, 얼굴만 아는 사이예요.”

“낯선 사람이 부담스러우신가요?”

“그렇다기보다 저한테 보이는 과도한 관심이 부담스러운 거죠.”

의사는 흥미로운 얼굴로 가람에게 더 하라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지금까지의 상담 내용은 주로 가람의 망상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식으로 일상 경험에 대해 이야기하게 된 것은 좋은 방향의 변화다.

“왜 관심을 보였죠?”

“제가 거기 유기견들을 치료해 줬는데, 제가 치료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잠시 멈칫한 의사가 차트에 무언가를 기록했다. 그리고 말을 골랐다. 일단 그는 환자의 망상을 긍정해 주기로 했다.

어차피 환자는 자신의 망상을 망상이라 인지하지 못한다. 괜히 지금 망상을 부정하는 발언으로 신뢰를 깰 필요는 없었다.

“패스파인더로서의 능력을 썼군요.”

“네.”

“일상에서는 쓰지 않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게 규칙이긴 한데, 모르겠어요. 불쌍해서 그냥 그러고 싶더라고요. 눈먼 개 하나가 눈 뜬다고 큰일이 생길 것 같지도 않았고.”

“충동적인 것 또한 인간의 특성이죠. 원하시는 대로 인간적인 감각을 회복해 나가고 있다고 보시면 됩니다. 당황하지 마시고, 다른 사람을 돕고 싶다는 마음을 받아들이세요.”

가람은 고개를 끄덕였다. 평범한 삶을 위한 규칙을 강박에 가깝게 따르고 있지만 듣고 보니 가끔 충동적인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충동이 잘 일궈 가던 정원을 깨트릴 정도가 되면 안 되겠지. 그녀가 나름대로 납득하는 동안 의사가 다시 질문했다.

“그런데 왜 그 사람이 당신을 치료 능력이 있는 초능력자라고 생각하는 걸까요?”

망상은 대부분 근거가 없다. 있어도 논리적이지 않은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근거 또한 망상으로 지어내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거짓말은 하면 할수록 논리가 꼬이기 마련이니, 이렇게 환자 스스로 망상의 근거를 되짚게 하면서 망상을 자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가람은 망상증 따위를 앓고 있지 않으므로 의사의 질문에 상상력을 부풀리는 대신 짧은 고민에 빠졌다.

이 사실을 말해도 될까? 그 초능력자 간의 싸움이 병원 근처였던 점이 약간 신경 쓰였다.

이 의사도 그 능력자들과 아는 사이면 어떡하지? 망설이던 그녀는 의사의 머릿속을 읽고 나서 결심을 굳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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