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화
의사의 머릿속에는 그저 단순히 환자에 대한 흥미밖에 없었다. 초능력이라는 단어에도 별 반응이 없고, 떠올리는 상념들이 모두 깨끗하다.
개를 좋아하는 모양인지 유기견 보호소에 반응해 인터넷에서 본 귀여운 강아지 동영상을 잠깐씩 상기했을 뿐이다.
“그 사람도 초능력자거든요.”
단정 짓는 발언에 의사는 침묵했지만 가람은 그 머릿속으로 선명하게 떠오르는 생각을 읽었다.
‘이 증세는 나아지지 않는군.’
그 생각은 곧 이런 미친 소리를 들으며 돈을 벌어야 하는 자신의 신세 한탄으로 이어졌지만 덕분에 가람은 더없이 말끔하게 의사에 대한 의혹을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잠시간의 한탄을 끝낸 의사는 곧 감정을 정리하고 사무적인 태도로 돌아왔다.
“그가 초능력자라고요?”
질문이 오늘따라 유난히 한 자 한 자 끊어 말하는 것처럼 무거웠다. 그는 한숨을 참고 있었다.
“네.”
“그걸 어떻게 아시죠?”
“저번 주에 여기서 상담받고 집에 가는 길에 그 사람이 다른 초능력자들과 싸우는 걸 봤거든요. 휘말려서, 결과적으로 그를 도와준 셈이 됐죠.”
아마 가람이 그 자리를 피했다면 당시 부상 상태로 봤을 때 정세원은 꽤 참혹한 꼴을 당했을 가능성이 높다.
문득 왜 거기서 싸우고 있었는지 궁금했지만 가람은 애써 치솟는 흥미를 내리눌렀다. 관심 없고, 관심이 없을 것이고, 관심이 없어야 했다.
“그래서 저쪽에서는 당신을 알고 관심을 보이는 거군요.”
“그건 아닐 거예요.”
“왜죠?”
“제가 기억을 지워서 저쪽은 저를 몰라요.”
“그렇군요. 기억을…….”
의사는 갑자기 매우 피곤한 얼굴로 손깍지를 낀 후 책상 위에 턱을 괴었다.
무언가를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는데, 가람이 떠들어 대고 있는 망상의 실체가 어디까지인지 유추하고 있는 것이었다.
잠시 추리하던 그는 자신의 환자가 자원봉사에 가서 새로운 사람을 만났고, 그 사람과의 관계를 완전히 망상으로 꾸며 냈다고 결론지었다.
초능력자 간의 다툼이나 기억 조작이나 치유력 같은 말들 전부 다.
“음, 그 사람이 남성입니까?”
“네.”
“혹시, 이성적인 관심일 가능성은 없을까요?”
“아닐 거예요. 물어봤는데 부정했거든요.”
“……물어보셨군요.”
다시 적막이 이어졌다. 한동안 침묵하며 말을 고르던 의사는 적당한 소재를 골라냈다.
“그렇군요. 그 남자가 가람 씨의 치료 능력을 탐내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죠?”
“네. 기억을 지웠으니 확신은 없을 테지만, 뭔가 촉이 오나 봐요.”
“흥미롭군요. 그, 개를 치료했다는 치료 능력에 대해 더 말해 주시죠. 이전에도 그 능력으로 사람을 치료한 적이 있습니까?”
가람은 좀비 사태가 발발했던 세계와 그 이전에 살았던 수많은 세상을 떠올렸다. 다치는 사람은 늘 있었다. 수도 없이 치료하기도 했다.
“네. 많이요.”
“지금 여기서 보여 주실 수 있습니까?”
약간 놀라운 질문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의사는 가람의 망상을 증명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긍정해 왔을 뿐이다.
속으로 무슨 생각을 하든 가람의 말이 얼마나 허무맹랑하든 그저 믿어 주었다.
지금 이 말은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상담 태도 중 가장 공격적인 것이었다.
“아니요. 그러고 싶지 않네요.”
고개를 가로젓는 가람을 응시하며 의사의 머릿속으로 충동적인 한마디가 간신히 삼켜졌다.
「망상이니까?」
“어째서인가요?”
“경험상, 별로 좋은 행동이 아니었거든요. 지난번 세상 이야기 기억하시죠?”
“그, 좀비 세상 말입니까?”
“네. 그거요. 의사 선생님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사람이라는 건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까요. 막상 힘을 보면 저를 이용하시고 싶을지도 모르잖아요?”
「만약 정말로 그런 게 가능했다면 현대 의학이 발칵 뒤집어졌겠지.」
조소하는 속내와 달리 의사는 짐짓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겠군요. 신중한 태도는 좋은 것이죠. 그런데, 그 치료의 힘이라는 건 얼마나 강력한 건가요? 예전에 모든 질병을 다 치료할 수 있다고 했던 것 같던데…….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는 수준인가요? 하핫, 물론 그쯤 되면 능력이 아니라 기적…….”
“가능해요.”
“예?”
“실제로 해 본 적도 있고요. 패스가 좀 많이 들긴 하지만요.”
단 한 번, 너무나 어처구니없이 부모님이 사고로 사망한 적이 있었다. 즉사였다.
수중에 마침 딱 1천 패스가 있었고 가람은 그걸 다 털어서 부모님을 되살렸다.
사고 목격자의 기억을 조작하고 문서를 조작하는 등 많은 사후 처리를 해야 했지만 결과적으로 죽었던 부모님은 다시 살아왔고, 평범한 일상 또한 되돌려받았다.
하지만 가람은 그 이후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하지 않기로 맹세했다.
사고를 인지하고 두 사람의 부활을 결정하기까지 흘러가던 자신의 생각이 너무나 역겨웠고, 그 이후로 느낀 감정들도 끔찍했기 때문이다.
사실 일상에 패스를 사용하지 않기로 강력하게 결심한 것도 그것이 원인이었다.
생명은 사람의 삶에서 가장 근본적인 것이다. 이것을 쥐락펴락한다는 것은 더 이상 인간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죽어도 얼마든지 살려서 볼 수 있는 사람을 그리워할 이유가 없고, 그가 잘못되거나 아파하더라도 슬퍼할 이유가 없고, 잘되더라도 기뻐할 이유가 없으며, 무언가를 소망할 필요도, 절실하게 여길 이유도 모조리 사라진다.
살아가며 느끼는 모든 감정과 노력, 갈망, 성취들이 모두 의미를 잃게 되고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린다.
이처럼 빨리 인간성을 상실할 수 있는 수단도 없을 것이다.
게다가 가람은 그 찰나간에도 부모님의 부활에 드는 천 패스를 아까워했던 스스로가 역겨웠다.
죽음을 제 잇속대로 좌지우지하려 들면서도 동시에 다시 차원 이동을 해 새로운 가람으로 살아가면 천 패스를 아낄 수 있지 않을까 저울질했던 것이다. 이 모든 계산들이 끔찍했다.
죽은 사람을 되살릴 수 있는데 천 패스가 아깝다는 감정이 들다니. 그렇게 생명이 하찮아지다니.
“음, 그렇군요.”
가라앉은 가람의 기분을 느꼈는지 의사는 더 깊게 질문하지 않았다. 대신 분위기를 좀 바꿔야겠다고 생각했는지 바로 화제를 돌렸다.
“친구는 어떻습니까? 실종됐다 돌아오고 나서 좀 서먹해졌다고 했던 것 같은데, 다시 관계를 회복했나요?”
가람은 어깨만 으쓱했다.
“애초에 서로한테 간절한 사이도 아니었는걸요.”
“뭐 그런 사람은 흔하니까요.”
“가족 외엔 한순간에 틀어지면 남남이 되는 것 같아요.”
“가족도 틀어지면 남남입니다.”
의사의 대답에 가람은 그의 가정 환경이 꽤 복잡할 것 같은 냄새를 맡았다.
잠시 무언가를 회상하는 듯 가만히 눈을 굴리던 의사는 문득 시계를 확인했다.
“오늘도 상담 시간이 거의 다 됐군요. 약은 좀 줄여 드릴 테니 먹어 보시고, 자원봉사는 다른 곳에라도 좀 더 가 보는 게 좋겠습니다. 효과가 있었다고 하니 더 해 보는 게 좋겠군요.”
“그럴까요.”
“그러는 게 좋겠습니다.”
정세원을 생각하면 유기견 보호소에 다시 방문할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봉사라는 행위 자체는 나쁘지 않았다. 집에 돌아가는 대로 다른 자원봉사 단체를 찾아볼까.
“오늘 상담은 여기까지입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세요.”
의사의 선언을 들으며 가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상담실에 남은 의사를 잠시 돌아보다가 문을 닫은 가람은 텅 빈 환자 대기실을 뒤로하고 수납처에서 처방전을 받아 병원을 나왔다.
인터넷을 하던 수납처 직원이 떠나는 가람의 등 뒤로 잠시 시선을 던지다가 곧 관심을 놓았다.
병원을 나오자 벌써 하늘이 어둑해지고 있었다. 바람이 차가워지는 만큼 해가 짧아지고 있었다.
습관처럼 버스 정류장으로 이어지는 골목길로 접어들던 가람은 문득 찜찜한 느낌에 걸음을 돌렸다.
이 골목을 지나다가 쓸데없는 싸움에 말려든 지 얼마 되지도 않았다.
그 사람들도 매일같이 치고받고 싸우진 않을 테니 지나친 염려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만일을 대비하는 건 언제나 옳은 일이다.
정세원이 괜히 접근하는 것도 부담스러운 마당에 이 이상 초능력자들의 싸움을 평범한 일상에 끌고 오는 것은 사양하고 싶었다.
오늘도 싸우고 있을지도 모르니까 저기를 지나가는 건 당분간 피하는 게 좋겠어.
가람은 오래 고민하지도 않고 바로 인적 없는 곳을 찾아 몸을 투명화한 뒤, 집 근처로 순간 이동 했다.
* * *
버스를 타지 않은 덕분에 저녁 식사 때까지 시간이 남아서 가람은 근처에서 장도 보았다.
너무 일찍 들어가면 병원에 가지 않았느냐며 부모님이 걱정하실 테니 일부러 주변에서 시간을 때우기까지 했다.
그런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으니 가람의 귀갓길은 당연히 평화로워야 했으나.
“오늘이야말로, 정세원 네 제삿날이다!”
갑작스럽게 외친 것은 불타는 것 같은 붉은 머리에 새파란 눈을 가진 외국인이었다.
그 토속적인 내용에 가람은 친근감을 느끼면서 자신도 모르게 반문했다. 저 사람의 나라에도 제사가 있나?
“조심해, 세원아!”
그 말에 답하듯 주의를 준 것은 아무래도 정세원의 아군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귓불에 닿지도 않는 짧은 단발머리에 작은 체구. 그리고 초능력으로 보이는 푸르스름한 기운을 정세원에게 퍼붓는다.
기운은 정세원에게 닿는 동시에 마치 보호막 같은 형태로 변했다.
“고마워. 그런데, 나 오늘 몸 상태 좋거든!”
그렇게 외치는 것치고 정세원은 머리부터 배꼽까지 피 칠갑이었다.
설득력 없는 자신감을 내보이며 그가 토속적인 외국인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고 다시 맞붙어 싸우기 시작한다.
정세원의 부상 상태를 보아하니 가람이 여기에 도착하기 한참 전부터 이렇게 싸우고 있었던 것 같다.
이쯤 되면 가람은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신이 이들의 싸움에 뛰어드는 걸까, 아니면 이들이 자신이 지나갈 길목만 골라 싸움질을 해 대고 있는 것일까.
뭐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저들끼리 싸우느라 바빠 보이니 가람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몸을 빼기로 했다.
그러나 한번 목격한 이상 그렇게 호락호락하게 빠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싸움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고 있던 주변인들, 그러니까 대충 조무래기처럼 보이는 이들이 낯선 이의 존재를 눈치챘던 것이다.
안면 있는 얼굴이 아니라 바로 적이라고 판단했는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공격이 들어왔다.
빤히 보이는 하찮은 위협 앞에 가람은 갈등했다. 여기서 평범한 반응은 아마 비명을 지르는 것 정도겠지.
그러면 정세원의 주의를 끌게 되고, 이곳을 벗어날 수 없게 된다. 그렇다고 이렇게 눈이 많은데 이들을 처리할 수도 없었다.
만약 처리한다면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람을 기절시키고 기억을 지워야겠지. 하지만 얼핏 보기에도 스무 명은 넘는 인원이다.
체력을 한계까지 긁어서 정신 조작을 한다고 해도 서로 말을 맞추면 기억이 지워졌다는 걸 알게 될 것이다.
다행히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언제 왔는지 정세원이 몸을 날려 가람에게 쏟아지는 무기들을 대신 막아 주었던 것이다.
대부분 칼이라서 정세원의 몸 여기저기에 다시 피가 터졌다.
“어, 어떻게 여기에 있어요?”
깜짝 놀란 정세원의 말에 가람은 오히려 이쪽이 묻고 싶은 말이라 대꾸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지나치게 태연한 모습은 어울리지 않겠지.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가람은 애써 겁먹은 얼굴을 꾸며 냈다.
“이쪽이 집에 가는 길이에요.”
“아니,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젠장, 나중에 다시 말해요.”
간격 없이 퍼붓는 공격에 정세원은 급히 몸을 움직였다. 확실히 느긋하게 이야기나 나눌 상황이 아니긴 했다.
사람들은 갑작스럽게 난입한 가람이 신경 쓰이는 듯했지만 대충 정세원의 편이라고 정리되었는지 다시 침착하게 하던 싸움을 계속했다.
정세원의 지킴을 받으며 가람은 겁먹은 척 손바닥 아래에 얼굴을 감추고 싸움의 양상을 구경했다.
한 가지 놀란 것은 정세원이 생각보다 무척 잘 싸운다는 것이었다. 염력은 확실히 약한 수준이었지만 그걸 응용해 싸우는 기술이 무척 뛰어났다.
게다가 재생 능력도 강한 모양인지 가람을 지키며 다친 상처는 벌써 거의 아물고 있었다.
처음에 반피떡이 된 상태로 만나 일방적으로 당하는 모습만 봐서 그런지 꽤 신선하다.
뒤에서 찔러 오는 칼을 피하고 반격하는 동작이 무척 깔끔했다. 게다가 빠르다. 대부분은 정세원의 공격을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 당하고 있었다.
그래도 워낙 많은 숫자가 정세원을 공격했기 때문에 간간이 칼에 베이고 있긴 했다. 그러나 몇 번 무기를 막는 사이 금세 나아 버린다.
정세원은 최대한 가람을 지키려고 노력하는 듯했지만 워낙 난전이라 가람도 완전히 싸움에 휘말리지 않을 수는 없었다.
그래도 몇 번 나뒹굴며 찰과상을 입거나 급히 떠밀려 칼을 피하느라 손바닥이 까지고 무릎이 좀 쓸린 정도였다. 집에 가면 이 상처를 어떻게 변명하나.
가람은 한숨을 삼키며 장 봐 온 두부가 누군가에게 밟혀 찌그러지는 것을 허망하게 쳐다보았다.
“이 괴물 새끼!”
누군가가 외치자 여기저기서 욕설이 터져 나온다. 험악한 기세에 피비린내가 진동하는데, 의외로 사망자는 거의 없는 수준이었다. 초능력자들의 싸움이라 그런가.
싸움의 양상은 정세원 쪽이 좀 더 우세했는데, 그 때문인지 공격을 해도 상대가 죽겠다 싶은 공격은 하지 않았고 적이 전투 불능이 되면 숨통을 끊는 대신 다른 사람을 제압하러 나섰다.
무르다면 무르고 자비롭다면 자비로운 행동이지만 뒤통수 맞기도 좋은 행동이다.
하긴, 재생력이 있으니 칼에 한두 번 정도는 찔려도 괜찮다는 건가. 저러다가 언젠가 크게 다칠 텐데.
가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쓰러져 있던 사람 중 하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검은빛으로 반질거리는 권총이었다. 총구는 정확히 정세원을 겨누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