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러나 발사는 되지 않았다. 애초에 염력을 쓸 수 있는 사람을 상대로 총을 가져오는 건 바보짓이다.
내부의 작은 부품 하나, 스프링 하나라도 비틀어 버리면 고물이 되어 버린다.
다들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여기 있는 사람 모두가 칼을 들고 싸우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아마 신입인 모양이었다.
총은 당연히 발사되지 않았다.
“자라.”
쓰러진 사람의 턱을 차서 그대로 의식을 날려 버린 정세원은 다시 싸울 상대를 찾아 몸을 날렸다. 무슨 액션 영화라도 보고 있는 것같이 가벼운 몸동작이다.
순수하게 근력만으로 움직이는 게 아니라 염력으로 스스로의 몸을 떠받치기도 하고 힘을 더하기도 하면서 상식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형태로 신체를 사용했다.
여기 있는 사람 중 이능력 자체는 크게 강한 편이 아니지만 응용하는 센스나 전투 감각이 발군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전투 불가 상태로 나뒹구는 사람이 많아지고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그나마 멀쩡한 몇몇이 승산이 없음을 직감했는지 도망치기 위해 몸을 돌린다.
그들을 쫓아 정세원의 동료들이 떠나자 이곳에는 정세원과 그가 만든 반시체들, 두어 명 정도 남은 정세원의 동료, 그리고 겁먹은 연기를 하느라 지친 가람이 남았다.
“아, 힘들다.”
무릎을 짚고 거친 숨을 고르며 정세원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그 말에 몇몇이 동조하며 푸념을 쏟아 냈다.
그들과 한두 마디씩 농담을 주고받던 정세원이 잊고 있던 무언가를 기억해 낸 듯 가람을 돌아보았다.
“많이 놀랐죠?”
얼굴 절반이 선지피에 물든 데다 옷은 이미 누구의 피인지 모를 것으로 시뻘겋다. 바닥에는 그가 때려눕혀 의식 불명인 사람이 즐비한데 여기서는 놀라야 정상이겠지.
가람은 무서워서 입을 못 떼겠다는 얼굴로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저, 이제 가, 가도 될까요?”
눈물이라도 좀 나오면 좋을 텐데 아무래도 그건 무리다. 대신 울상을 지으며 가람이 사정하자 그건 안 된다며 정세원이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놀라신 건 알겠지만, 우리 해야 할 이야기가 있어요.”
“저랑요?”
“네.”
“경찰에 말 안 할 테니 그냥 보내 주시면 안 될까요? 저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요. 아무것도 못 봤다고 할게요. 네?”
아마 이 정도가 평범한 사람의 반응이 아닐까. 초저녁부터 길 한복판에서 유혈 난투를 하는 무리. 아무리 봐도 조폭이다.
난데없는 조폭들의 싸움에 휘말려 겁에 질린 일반인을 열심히 연기하며 가람은 발을 빼기 위해 노력했다.
“경찰? 아니, 저기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그냥 보내 주세요.”
“그런 게 아니고요. 우리 정말로 이야기를 좀 해야 할…….”
정세원이 쩔쩔매며 다가오려 하자 가람은 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
피 칠갑을 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정세원이 곤란하게 머리를 긁는다. 상황이 정리될 기미가 없자 보다 못했는지 그의 동료가 난입했다.
“세원아, 이 사람 누구야?”
“아, 전에 말했던 힐러.”
힐러.
그 단어를 듣는 순간 가람은 속으로 욕설을 내뱉었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정세원은 자신을 치유 능력자로 생각하고 있다.
추측 수준이 아니라 완전히 확신하는 모습이었다. 이전 카페에서 떠본 이후로 딱히 접촉이 없어서 포기한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나?
하지만 그가 그렇게 말한다고 ‘아이고 그렇습니다.’ 하고 긍정할 수는 없다. 가람은 최대한 잡아떼기로 했다.
뭐, 실제로 저 단체나 이능력자들에 대해 전혀 모른 채 살았으니 아주 거짓말도 아니고.
“무슨 말씀 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런 거 모른다고 했잖아요. 그런 거 아니라고요.”
작은 목소리로 부정했지만 두 사람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괜히 다른 동료 하나가 정세원의 말에 깜짝 놀라 합류했을 뿐이다.
“정말? 이분이 그 힐러라고?”
정세원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피 칠갑을 한 남자였다. 차이점은, 정세원은 상처가 거의 아물었지만 그는 온몸이 상처투성이라는 것 정도일까. 아마 정세원 수준의 자가 치유력은 없는 모양이었다.
“드디어 우리한테도 힐러가 생기는구나!”
“진짜로? 흐흑, 네가 웬일로 쓸모 있는 일도 하는구나. 이제 아픈 몸으로 전투에 안 나와도 되는 거지?”
귀도 밝은지 꽤 먼 곳에서까지 환호성이 터졌다. 몇몇은 우는 시늉까지 하며 기뻐하고 있다.
가람은 정말로 이해가 안 되었다. 정세원의 짐작 외에는 어떤 확신도 없을 텐데 이들은 가람이 이능력자임을 단정 짓는 태도였다.
정세원의 눈앞에서 단 한 번도 치유 능력을 사용한 적이 없는데도.
내버려 두면 조촐한 잔칫상이라도 차려 축하할 것 같은 분위기에 가람은 다시 떨어지지 않는 입을 열어 끼어들었다.
솔직히 이들에게 말을 걸고 싶지 않았다. 생각 같아서는 그냥 등을 돌려 제 갈 길을 가고 싶었지만, 뒷일을 생각하면 여기서 어느 정도의 수습은 해 두어야 한다.
“저기, 정세원 씨. 저는 정말로…….”
“알아요.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거.”
정세원이 피딱지가 덕지덕지 마른 얼굴로 씨익 웃는다. 말문이 막힌 가람에게 그는 웃는 얼굴 그대로 덧붙였다.
“그래도 상관없어요. 가람 씨가 힐러라는 건 확실하니까.”
“저는 살면서 그런 능력을 가져 본 적도, 써 본 적도 없어요. 왜 그렇게 확신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아까부터 내내 자신의 말을 무시하는 태도에 가람은 약간 울컥했다. 연기를 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쏘아붙이자 정세원은 태연자약하게 대답했다.
“여기 들어왔잖아요. 일반인들은 인식하지 못할 이 공간에 결계를 뚫고 들어왔잖아요.”
가람은 그제야 정황이 이해가 갔다. 빌어먹을 결계. 너무 약해서 통과하는 느낌도 받지 못했는데 그 결계가 이능력자와 일반인을 가르는 경계가 될 줄이야.
확실히 능력을 가진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 조금 다른 힘을 품고 있다.
가람이 능력자들의 기억을 읽는 데 난항을 겪는 것도 그 탓이다. 정신을 조작하는 것도 비능력자보다 조금 더 힘이 들고.
그게 아니었다면 아까 같은 초능력 싸움에서 괜히 무기 들고 휘두를 것 없이 서로의 뇌혈관을 먼저 염력으로 터뜨리는 쪽이 압승이었겠지.
하지만 자기 보호 능력을 뚫고 몸 내부에 직접 염력을 사용하는 것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상대를 제압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상대의 모든 힘을 뚫고, 날뛰며 저항하는 생존 본능을 짓밟으며, 어떤 정신적인 능력도 사용할 수 없도록 철저히 굴복시켰을 때나 가능하다.
같은 인간끼리는 거의 불가능하거나 힘의 차이가 엄청나게 커야 할 수 있는 재주였다.
물론, 가람과 이들의 힘의 차이는 비교할 수도 없는 수준이다.
덕분에 가람은 이 종잇장만도 못한 결계를 거의 느끼지도 못했지만 능력이 없는 일반인이었다면 단숨에 걸려들어 현혹되었을 거라는 이야기다.
이 결계가 정확히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충 이 공간을 인식하지 못하게 하는 종류임이 분명했다.
물론 그걸 알게 되었다고 ‘그렇군요. 사실 제가 치유력을 가지고 있긴 해요.’라고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정말 정세원 씨가 기대하는 능력이 전혀 없어요. 다른 분들에게도 미안하지만…….”
“아직 각성하지 않았더라도 괜찮아요. 어차피 시간문제니까. 그리고 거의 반각성 상태인 것 같기도 하고요.”
거절의 말을 단칼에 끊으며 정세원이 싱긋 웃었다. 온몸이 피투성이라 찝찝할 텐데 상쾌하게도 웃는다. 가람은 도저히 마주 웃을 수 없는 기분이라 떨떠름하게 눈을 피했다.
“시간을 좀 주시면 설명해 드릴 수 있어요. 가람 씨가 생각하시는 그런 불법적인 사람들 아니고요, 일종의 초능력 자경단이라고 할까요?”
“초능력, 자경단…….”
가람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름이 엄청 구리잖아. 그 표정을 알아보지 못했는지 정세원은 자랑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은 아니지만, 그 비슷한 겁니다. 정부에서 지원받고 있는 정식 단체고요. 돈도 많이 받아요. 예전에는 정말로 뜻 맞는 사람들끼리 모인 자경단이었는데, 이제 인가받아서 정식 단체예요. 수사대라고 소개해야 하는데, 입에 잘 안 붙네. 하핫.”
“휴가도 많고 근무 시간도 조정해 드릴 수 있어요. 힐러라면 전투에도 참가하지 않으셔도 되고, 급할 때나 상주로 출근해서 치료해 주시기만 해도…….”
정세원의 동료도 뭔가 열심히 장점을 소개하고 있었지만 가람은 모조리 흘려들었다.
정부에서 지원받는다고? 비밀 단체 같은 것 아니었나? 아니, 물론 결계를 치고 싸우고 있는 상태이니 민간인에게는 비밀인 것 같지만.
이러다가 여기서 뜨거운 차라도 내오는 게 아닌가 싶어 가람은 급히 말을 끊었다.
“그러니까 저는 그런 능력이 없다고요. 없다니까요?”
“그건, 저희 본부로 가서 테스트를 해 보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만약 미각성 상태면 각성할 수 있도록 훈련 프로그램도 준비되어 있고요.”
어디서 꺼냈는지 물수건으로 얼굴이나 몸의 핏자국을 닦으며 정세원이 실실 웃는다. 능구렁이처럼 슬쩍 넘어가며 끈질기게 달라붙는 태도에 가람은 얼굴을 굳혔다.
이런, 완전히 말려들었다. ‘몰라요, 싫어요, 안 돼요.’라는 말로 돌려보낼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 같았다.
애초에 가람이 이 결계 안에 들어온 순간부터 정세원은 완전히 확신을 얻은 상태였다.
“아, 왔어?”
정세원이 갑자기 손을 번쩍 들어 가람의 어깨 너머로 알은척을 했다.
돌아보자 아까 도망친 자들을 잡으러 갔던 정세원의 아군이 제각각 한두 명을 들쳐 업고 귀환하는 중이었다.
“몇 명 놓쳤어.”
가람보다 머리 세 개는 커 보이는 거한이 퉁명스럽게 대답하며 잡아 온 사람들을 발치에 던져 놓았다. 이미 기절했는지 미동도 없는 모습이다.
“다 잡은 거야?”
정세원이 슬쩍 묻자 남자는 수갑을 꺼내며 대충 대꾸했다.
“아니, 반 이상 놓쳤어.”
“숫자가 많긴 했지. 우리가 다 가도 어차피 놓쳤을 거야. 좀 놓쳐도 돼. 이만큼이나 잡았으니까 이 중에 몇 명이라도 쓸 만한 정보를 가지고 있겠지.”
정세원은 태평했지만 가람은 몹시 찜찜했다. 도망친 사람 중 몇 명이 가람에 대해 언급이라도 하면 점점 더 이 세계에 가람에 대한 정보들이 알려지고 만다.
‘초능력 자경단이라는 단체에 가람이라는 능력자가 신규로 합류했다.’라든가 하는 정보 말이다.
평범한 삶을 위해 정세원의 기억력을 희생하며 정신 조작을 걸었던 수고가 모조리 헛되게 된다.
거기에 정신 조작을 해야 할 대상이 말도 안 되게 불어나니 사실상 사람들에게서 자신에 대한 기억을 지워 평범한 삶을 사는 방식은 더 이상 사용할 수 없는 것이다.
아니.
어쩌면 아직 늦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들이 겪을 후유증 따위는 저 뒤로 밀어 놓고 지금 당장 이 자리에 있는 사람들의 머릿속을 샅샅이 뒤지면 어떨까.
도망간 자들을 모조리 잡아 와 죽여 버리고 자신을 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의 기억을 말소, 또는 제거한다면?
흉포한 만큼 매력적인 방법이었다. 그러나 너무나 비인간적이고 잔인한 방식이다. 지금까지 지켜 온 모든 규칙을 무너뜨리는 행동이다.
가람은 선택의 경계에서 고요하게 눈앞의 사람들을 응시했다.
가람의 그런 마음을 알 리가 없는 정세원은 갑자기 조용해진 가람을 돌아보고 멋쩍게 웃었다.
너무 방치했나? 놀라긴 놀랐나 봐. 완전히 굳어 있네. 뭔가 말 좀 걸어 봐야겠다.
외줄에서 흔들거리는 갈등에 정세원의 멍청한 웃음이 난입했다. 자신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무해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 가람은 맥이 탁 풀리는 기분이었다.
독하게 마음먹었던 모든 상상이 그대로 흩어진다. 빈자리를 채운 것은 울화였다.
대체 이 사람들은 왜 늘 자신이 가는 길목에서 싸우고 있는 걸까? 매일 하는 일이 싸우는 것밖에 없나? 이쯤 되면 기억이 지워지더라도 스스로 자초한 수준이 아닐까?
정세원이 알았다면 기겁했을 만한 소리였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그는 천진난만하게 다가와 가람의 안부를 걱정해 주었다.
“괜찮아요?”
“뭐가요?”
“다리.”
그 말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언제 다쳤는지 무릎이며 종아리가 다 까져서 벌건 피가 흐르고 있었다. 난리 통에 휩쓸려 몇 번 넘어졌는데 그때 다친 상처 같았다.
이 상황을 어떻게 해야 할지 골몰하느라 다친 줄도 모르고 있었는데, 가람은 새삼 아픈 척을 해야 할지 고민했다.
“본부로 돌아가면 치료할 수 있는데, 같이 갈래요?”
슬쩍 떠보는 솜씨가 보통이 아니다. 여기서 넋 빠진 상태로 고개를 끄덕였다간 정체불명의 본부로 끌려가서 며칠 동안 돌아오지 못할지도.
가람은 최대한 단호하게 보이길 바라며 짧게 도리질 쳤다.
“아뇨. 집에 가야 해요.”
혹시 붙잡을까 장 봐 온 물건까지 슬쩍 들어 보였는데, 어디서 베였는지 비닐 봉투 중앙이 툭 찢어져 있었다.
와르르 쏟아져 나오는 감자 몇 알을 정세원이 얼른 주워 내밀며 싱긋 웃는다.
“그래요, 그럼. 오늘은 많이 놀랐을 테니까, 집에 가서 푹 쉬어요. 상처는 꼭 소독하고…….”
질척하게 매달릴 줄 알았는데 그는 예상외로 산뜻하게 물러났다. 그러나 가람은 ‘오늘은’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즉, 내일이나 다른 날에 또 찾아오겠다는 뜻이다. 미간이 저절로 찌푸려졌지만 필사적으로 표정 관리를 한 덕분에 정세원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주변에 잔당이 남아 있을지도 모르니까, 혼자 가는 건 위험할 거예요. 거기. 다헌아. 신다헌!”
기절한 사람을 포박하고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부름에 반응했다. 아까 추적을 하다 돌아와 반 이상 놓쳤다며 대꾸한 남자였다.
무척 무뚝뚝한 성격인지 말도 없이 고개만 들어 이쪽을 쳐다본다. 그 시선을 받은 정세원이 가람을 눈짓했다.
“이분 좀 집에 데려다줘. 근처는 아직 위험하니까.”
“누구?”
“힐러야. 우리 팀에 스카우트하고 있는 중이니까 안전하게 모셔다 드려.”
“힐러라고?”
가람의 얼굴에 못 박힌 시선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빠르게 훑었다. 무척 무례한 행동이었지만 워낙 무감정한 눈길이라 그런지 화는 나지 않았다.
가람을 찬찬히 살피던 시선은 피 흘리는 다리에 가서 멈췄다.
“힐러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