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76화 (176/256)

10화

“아직 미각성자야. 소질 확인은 했어. 내가.”

그는 아직 미심쩍은 듯한 표정이었지만 정세원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순순히 수긍했다.

다른 사람들은 가람이 힐러라는 말을 듣고 뛸 듯이 기뻐한 것을 생각하면 무척 담담한 반응이었다.

그는 주변을 스윽 둘러보며 작업 상황을 확인하더니 말없이 가람의 옆에 와서 섰다. 그리고 짧게.

“가시죠.”

좋게 말해 무뚝뚝한 인상이지 체구도 크고 인상도 험악한 편이라 그렇게 말하니 가람은 마치 조직폭력배에게 연행되는 기분이 들었다.

떨떠름하게 그를 바라보던 가람은 부디 많이 늦지 않았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그냥 혼자 가도 돼요. 바로 근처가 집이니까.”

배려하는 척 가람의 집을 알아 두려는 정세원의 술책을 피하려는 것이다. 워낙 얄팍한 수법이라 간파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쨌든 집을 알려 주기 싫은 찜찜함이 드러났는지 정세원은 다 안다는 듯 빙긋 웃었다.

“아마 안 괜찮을걸요. 가까우면 그냥 배웅받으세요. 납치되면 더 골치 아프니까.”

그 말에도 가람이 여전히 불안한 얼굴로 가만히 서 있자 정세원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옷 안쪽을 뒤져서 지갑을 꺼냈다. 그리고 마치 자격증 같은 것을 꺼내 보여 주며 폭탄 터트리듯 자기소개를 했다.

“음, 사실 이건 민간인에게 보여 주면 안 되지만……. 저희 공무원이에요. 정부 소속이고.”

믿을 수 없게도 그가 보여 준 종이에는 ‘이능 수사대 서울 지부장 정세원’이라는 직함이 적혀 있었다.

이렇게 그럴듯한 이름을 두고 왜 초능력 자경단 같은 구린 이름을 쓰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쨌든 지금 중요한 건 이름이 아니다. 저 말이 진실이라는 것이다.

정세원같이 특수한 능력을 가진 사람의 생각을 읽는 건 힘든 일이지만 그래도 어렴풋이 그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거짓을 말하는지를 간파할 정도로 읽어 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다.

정세원은 지금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진짜 공무원인 것이다.

자경단이라고 해서 특정 소속 단체 없이 움직이는 작은 조직인 줄 알았는데 국가에 정식 인가를 받았다면 스케일부터가 달라진다.

만약 처음 가람이 느낀 충동대로 보이는 족족 기억을 지워 버렸다면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일이 커졌을 것이다.

많아야 백 명 정도 되는 특수 능력자들이 물밑에서 자신들끼리 싸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문제가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정세원과 그 동료들, 그리고 그들과 싸우는 몇몇 무리 정도의 숫자라면 기억을 조작해 가며 그럭저럭 평범한 생활을 유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고민도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간 해 왔던 고민은 완전히 쓸데없는 행위였다. 처음부터 가람에게는 선택지가 없었으니까.

정세원이 서울 지부장이라는 소리는 부산 지부장, 경기도 지부장 같은 타 지역의 단체도 있음을 암시했다. 어쩌면 해외에도 비슷한 단체가 있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는 기분이었다. 패스를 찾아다닐 때 꼬리를 잡힌 적은 없겠지?

기억을 뒤져 봤지만 딱히 문제 될 만한 일은 떠오르지 않았다. 가람이 이 세계를 살아온 시간이 짧기도 하거니와 패스를 찾아다닐 때는 투명화에 기척까지 지우고 다녔으니까.

혹시라도 열 감지 카메라 같은 가람이 모르는 감지 기술에 감지될까 봐 일정 기간 동안 어떤 것에도 감지되지 않는 능력까지 샀다.

그러니 패스를 찾아다닌 행보가 들킬 일은 없다.

거기까지 생각하고 나서야 가람은 약간 안심했다. 그러나 너무 늦었는지 정세원은 딱딱하게 굳은 가람의 얼굴을 이미 봐 버린 후였다.

“많이 놀랐어요? 하긴, 보통 사람은 정부 소속이라고 하면 주민 센터나 경찰서 같은 곳만 접하니까……. 일종의 비밀경찰 같은 거라고 생각해요. 사실 저희도 정식으로 인가받은 지 얼마 안 돼서 좀 어색하긴 해요. 이런, 더 이야기하면 너무 길어지겠다. 자세한 건 나중에 이야기할게요.”

자세한 이야기 같은 것은 듣고 싶지 않다 대꾸하고 싶었지만 가람은 고개만 끄덕였다.

아직, 아직은 고민할 시간이 더 필요했다. 어떻게 행동할지 결정하기 전까지는 평범한 시민으로서의 태도를 고수할 필요가 있었다.

“그럼, 다헌아. 잘 부탁한다.”

정세원의 당부를 끝으로 신다헌이 턱짓했다. 걸으라는 뜻이었다.

무뚝뚝하고 고압적인 태도가 무척 거슬렸지만 가람은 주눅 든 척 어깨를 움츠리고 조심조심 집으로 향했다.

가로등이 하나둘 켜지기 시작하는 초저녁 골목길 위로 가람의 걸음이 내려앉았다.

등 뒤에 따라오는 신다헌도, 정세원과 헤어진 후 고민에 빠진 가람도 입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적막 사이로 구멍 난 비닐 봉투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만 들렸다.

찢어진 비닐 봉투는 뚫린 구멍을 막고 안아 들지 않으면 내용물을 다 흘릴 판이어서 가람은 자연스럽게 품에 봉투를 껴안았다.

그러고 나니, 웃기게도 기분이 조금 안정되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품에 안는다는 것은 꽤 큰 정서적인 안정 효과가 있다. 그게 설령 상처 난 감자와 으깨진 두부더라도.

덕분에 생각을 이어 나가기도 한결 편해졌다.

이제 어떡할까.

자신이 꿈꾸던 평범한 생활을 이어 나간다는 선택지는 이미 잿가루가 되어 날아간 지 오래였다. 상황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흐르게 될 가능성이 높다.

아마 몇 달 안에 정세원의 팀, 혹은 그 비슷한 것에 소속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아니라면 감시를 받거나.

이대로라면 가람이 원하는 형태의 삶은 절대 살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쯤에서 결정해야 했다.

이대로 길을 계속 걸어 집으로 들어갈지, 아니면 이 세계를 떠날지.

고민하는 사이 거리는 성큼성큼 줄어들어 어느새 길 끝에 집이 보이고 있었다. 창문으로 새어 나오는 빛을 보자 마음이 약해졌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실종된 것으로 알려진 딸이 살아 돌아오자 부모님이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떠올랐다.

이대로 다른 차원으로 떠나면 이 세계의 부모님은 영영 자식을 잃게 된다.

자신은 다른 차원으로 떠나도 금방 새 부모를 만나 다시 시작할 수 있지만 이들은 아니었다.

지난 삶 중에서 부모님이 살아 있는 도중에 그 세계를 떠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이 세계의 부모님은 아마 죽기 전까지 가람을 기억하고 떠올릴 것이다. 죽어서야 해방될 수 있는 그리움은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일까.

가람은 그 비슷한 것을 알고 있었다. 이들은 죽음으로써 모든 고통에서 벗어나지만 가람에게는 죽음이 없다.

영원한 후회, 영원한 그리움, 영원하게 이어지는 기억들, 혼자서만 기억하게 되어 버린 아름다운 추억들.

애착을 가지고 의미를 갖는 것이 많아질수록 시간이 쌓아 놓는 괴로움은 점점 늘어만 간다.

오늘 이 차원을 떠난다면 부모님에게 딸을 잃게 한 선택은 얼마만큼의 후회로 돌아올까.

“여깁니까?”

망설이는 사이 어느새 집에 도착해 버렸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이자 신다헌은 어서 들어가 보라며 재촉했다.

아직 갈피를 잡지 못한 가람은 결국 아무런 결정도, 준비도 하지 못하고 집 안으로 들어서고 말았다. 등으로 신다헌의 시선이 잠시 느껴지다 곧 사라진다.

“가람이니?”

현관의 기척에 즐겁게 마중 나오던 어머니가 흠칫 굳어졌다.

“너, 다리!”

하얗게 질려 얼른 다가서는 모습에 가람은 어쩐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장 본 것을 내밀며 얼버무렸다.

“여기 장 본 거, 오는 길에 넘어져서 좀 뭉개졌어.”

“지금 장 본 게 문제니? 세상에, 정말 크게 다쳤잖아. 어서 여기 좀 앉아 봐. 얼른!”

내미는 비닐 봉투를 대충 받아 바닥에 내려놓은 가람의 어머니, 미연이 허겁지겁 소파로 딸을 떠밀었다.

구급상자를 찾으며 허둥지둥 당황하는 모습에 가람은 결국 멋쩍게 한마디 하고 말았다.

“별로 안 다쳤어.”

“무슨 소리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정말, 어쩌다가 이렇게 다친 거야? 어쩌지. 흉 지겠네.”

어느새 구급상자를 찾아 가지고 온 미연은 거즈에 소독약을 적셔 무릎 주변을 살살 닦아 냈다.

가람이 아플까 안색을 살피는 얼굴과 상처를 소독하는 손에는 조심스러움이 흠씬 묻어났다.

가람은 그제야 자신의 상처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솔직히 대수롭지 않은 상처였다. 팔다리가 떨어져 나간 것도 아닌데.

하지만 이런 별것 아닌 상처에 칼에 목이라도 떨어진 것처럼 어머니가 속상해하는 모습을 보자 가슴 한쪽이 따듯해지는 느낌이다. 얼마나 속상해하는지 눈에는 눈물까지 맺혀 있었다.

“흉 지면 어떡하지. 정말, 속상해 죽겠네. 어쩌다가 이렇게 다쳤어?”

“그냥, 버스 타고 오다가 누가 떠밀어서 넘어진 거야.”

“뭐? 뭐 그런 이상한 사람이 다 있다니? 어디에서 그랬어? 누구야? CCTV에는 찍혔어?”

누가 그랬는지 찾아내기라도 하겠다는 듯 서슬 퍼런 모습에 가람은 다시 눈을 피하며 얼버무렸다.

“당황해서 못 봤어.”

“다음부터는 택시 타고 다녀. 아니, 이참에 차를 뽑는 게 나을까? 면허부터 따자. 내가 아빠한테 제일 튼튼한 차가 뭐냐고 물어 놓을게. 그거 타. 알았지?”

“에이, 그건 너무 유난이야.”

“유난이긴.”

눈을 흘기면서도 가람의 어머니는 조심스럽게 상처를 매만졌다. 약을 바르고, 어디가 얼마나 다쳤는지 요리조리 고개를 기울여 가며 살펴보는 사려 깊은 시선.

가람의 전신을 꼼꼼히 훑어보던 그녀는 결국 가람의 손에서 생채기를 발견하고 또 소독약을 들이댔다.

가람은 얌전히 앉아 그 치료들을 받으며 이 세계의 제 어머니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눈앞의 이 사람은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가람의 진짜 부모가 아니었다.

패스파인더가 되기 전의 가람을 키워 주었던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이곳에서 시간을 보내며 느낀 것이지만, 진짜와는 어딘가 미묘하게 다르다.

가람이 기억하는 자신의 부모님은 이렇게 자식을 살뜰히 보살피는 사람이 아니었다. 애정이야 주었지만 이렇게 갓난아기라도 돌보듯 다 큰 성인을 싸고도는 성격은 아니었다.

실종된 자식이 살아 돌아온 덕분인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곳의 부모는 가람에게 몹시 애틋했다.

그게 마음에 들어서 가람은 이곳에 남았다. 이 애틋함이 좋았다. 어쨌거나 오랜 방황으로 지친 가람은 이런 맹목적인 애정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에 와서는 이 애정이 가람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날 저녁 내내 가람은 몹시 고민했다. 아버지의 귀가가 늦어져 저녁을 대충 먹고 혼자 방에 눕자 생각이 더욱 많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분명 마음의 짐으로 남을 결정을 하는 것이 옳을까? 끝없는 영생에 후회 하나를 더 얻느니 그냥 이곳에 남아 평범한 삶 한 번을 망가뜨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이 세계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할 때마다 상처를 들여다보며 자신이 다친 것처럼 아파하던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처음 이 집을 방문했을 때 믿을 수 없어 눈을 크게 뜨고 쥐어뜯듯 가람을 꽉 껴안은 채 오열하던 어머니가 떠올랐다.

자신이 미쳐서 환영을 보고 있는 것이라면 차라리 미친 채 살고 싶다던 방문 너머 부모님의 대화가 떠올랐다.

그런 사람들이 다음 날 아침 문을 열고 텅 빈 딸의 방을 보면 어떤 심정이 될까.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떤 기분일까? 자식을 두 번 잃으면 어떤 생각이 들까?

차라리, 실종된 자신이 돌아왔던 시점부터의 기억을 지워 버리고 떠나는 건 어떨까?

원래는 새벽에 조용히 떠날 생각이었지만 가람은 쉽게 결정할 수 없었다.

미련 없이 떠나 새로운 삶을 다시 처음부터, 더욱 철저하게 시작하는 것이 옳다는 것을 아는데 자신을 보고 쏟아 내던 눈물과 자신을 향해 형언할 수 없는 애정을 품은 부모님의 얼굴들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가람의 마음은 떠나지 않아도 될 이유를 짜내며 이성을 설득하느라 필사적이었다.

고민은 결국 자정을 지나 새벽까지 이어졌다. 한 번 결정해 실행에 옮기면 결코 되돌릴 수 없으니 생각이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깊은 새벽, 가람의 방문이 밖으로부터 조심스럽게 열렸다.

이어지던 모든 생각들이 일시에 뚝 끊어진다. 정세원? 아니면 그 반대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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