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화
“사실 가장 의문인 건 그놈이 조직을 만든다는 건데, 혼자서 단신으로 돌아다니더라도 그놈을 막을 것이 없거든요. 기록상, 전쟁터 한복판에서 전차 열두 대가 동시 사격하는 포탄을 염력만으로 멈춘 전적도 있어요. 유일하게 부상을 입히고 그를 도망치게 한 건 중국이었는데, 중국의 강력한 이능력자 쉰 명이 달려들어 그를 속박하고 미국이 원거리에서 레일 건을 발포한 연합 작전이었죠.”
“그래도 아예 방법이 없을 정도로 괴물은 아니네요.”
“문제는 그 후 그를 제재했던 중국의 이능력자들이 모조리 살해당했다는 거예요.”
거기까지 말한 정세원은 아차 한 얼굴이었다. ‘이건 이야기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라는 문장이 표정에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는 그 화제에 대해 더 떠드는 건 계약에 불리하다고 깨닫고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아무튼 진짜로 전력이 부족하거든요. 적은 엄청 강하고 국제 공조는 하곤 있지만 다들 딴생각을 조금씩 하고 있고. 그러니 우리나라는 우리나라 사람이 지켜야 하지 않겠어요?”
다시 열심히 계약서의 서명란을 어필하며 손에 펜을 쥐여 주는 정세원이었지만 가람은 심드렁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이까짓 계약서에 서명을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었지만, 심적으로 매우 불안정한 상황이었고 가람은 아직 아무것도 결정한 게 없었다.
남을지, 떠날지.
“좀 더 생각해 볼게요.”
그 말을 끝으로 가람은 계약서를 접어 챙겼다. 정세원은 무척 아쉬운 얼굴로 마지막 말을 해 버린 게 패착이라고 생각했는지 연신 자책하는 모습이었다.
그는 너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 말아 달라고 끝까지 가람을 붙들고 늘어졌다. 인력이 부족하다더니 지부장쯤이나 되는 사람이…….
“나라를 위해서, 약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서 도와주세요. 가람 씨.”
가람은 대꾸하지 않았고 그것으로 그 자리는 마무리되었다. 그 후로도 정세원이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기억에 남은 것은 그의 눈이었다. 진심을 담고 호소하는, 도와 달라며 빤히 보는 눈.
가람에게는 너무나 익숙한 눈.
* * *
“그렇군요.”
이야기를 다 들은 의사는 늘 똑같은 대답을 한다. 정세원에게 계약서를 받고 나서 며칠 고민하던 가람은 상담일이 아닌데도 이 병원을 찾아왔다.
혼자 아무리 고민해도 가슴만 답답해질 뿐 뚜렷한 결론을 내리기가 힘들었다.
그러다가 비교적 자신의 형편을 잘 알고 있는 이 사람을 찾아오게 된 것이다. 가람의 사정을 모조리 망상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제가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결정할 수가 없어요.”
솔직하게 고백하자 의사는 사무적인 태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나 고민은 매우 짧았다.
가람은 반사적으로 그의 머릿속을 읽어 그가 실제로는 아무 고민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흠, 진정하고 차근차근 생각해 봅시다.”
의사가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한 점 고민 없이 나온 알맹이 없는 대답이라는 걸 알고 들으니 영 설득력이 없다.
이래서 상담을 받을 때는 가능한 한 머릿속을 읽지 않으려고 하는데 습관이 되어 있다 보니 쉽지가 않았다. 가람은 의식적으로 독심 능력을 봉인하며 의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생각을 아무리 많이 해 봐도 결론 내릴 수 없다면 할 수 있는 건 하나뿐이죠.”
“뭔가요?”
“행동이요.”
으음. 가람이 짧게 앓았다.
“그냥 여기를 떠나는 게 좋을까요?”
“아뇨, 반대예요. 일단 한번 해 보라는 거죠. 그쪽 단체에서 부탁하는 일이라는 게 가람 씨의 능력에 비해 별것 아닌 수준이라면서요? 그러면 일단 시험 삼아 해 보는 것도 괜찮지 않겠어요? 뭐 큰일이야 나겠습니까?”
모든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손에 넣은 후 가람이 얼마나 더럽고 끔찍한 일을 많이 봤는지, 권력자들의 밑바닥과 사악함을 어느 정도로 많이 목격했는지, 그로 인해 인간 전체에 대해 깊은 환멸을 가지게 됐고, 그런 자신을 얼마나 오랫동안 타일러 지금과 같은 상태가 되었는지 전혀 모르는 의사는 그저 대수롭지 않게 권했다.
“전에 말했다시피 아주 안 좋은 선례가 있어서요.”
“아.”
그제야 의사는 예전에 했던 상담 내용들을 기억해 낸 모양이었다. 그의 눈이 차트를 빠르게 훑는 동안 가람은 차분히 그 모습을 지켜봤다.
강력한 능력과 우유부단함이 만나면 별것 아닌 일들도 복잡해진다.
차라리 가람이 자신의 능력을 이용하려고 달려드는 권력자들을 일말의 망설임이나 고뇌 없이 목을 딸 수 있는 잔혹함을 지녔더라면, 그리하여 그 잔혹함에 무감각해진다면, 그리고 그런 자신에게 별다른 유감이 없었다면 일은 훨씬 간단해졌을 것이다.
패스파인더로서 평범한 인간과는 다른 자신을 받아들이고 경계를 선명하게 그은 채 모든 일을 결정한다면 고민할 것도 없이 모든 것이 깔끔하게 마무리될 것이다. 가람은 그것이 가능한 사람을 알고 있다.
모르드레드. 가람의 완벽한 반면교사. 그녀가 생각할 수 있는 가장 망가진 미래.
그가 얼마나 고민 없이 학살하고 가벼운 농담처럼 잔인한 짓들을 했는지 떠올리면 그쪽으로 기울던 성향이 마치 찬물을 맞은 것처럼 확 돌아오는 것이다.
한참 동안 차트를 훑어보던 의사가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더니 밝은 어조로 입을 열었다.
“그러면 더 좋겠네요. 한 번 실패한 경험도 있으니 그걸 바탕으로 다시 해 보는 게 어때요? 어디 보자, 여기처럼 힘을 다 드러내지는 말고 좀 숨기는 식으로. 어때요?”
“네?”
“평범한 비능력자에서 평범한 초능력자로 바꿔 살라는 이야기죠. 가람 씨 말로는 그 사람이 정부의 비밀 단체라면서요? 공무원 하라고 그랬다면서요? 그러면 그냥 평범한 초능력 공무원 하면 되는 거죠.”
거기까지 말한 의사는 스스로도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했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리고 웃음을 감추었다.
짐짓 생각하는 척 이것저것 조언하고 있긴 하지만 의사는 가람이 하는 말을 단 한 마디도 믿고 있지 않았다.
그러니 이렇게 간단히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크게 나쁘지 않았다.
비능력자에게는 알려지면 사회 혼란을 가속화시키기 때문에 감추어져 있을 뿐, 만약 이 세계에서 초능력의 존재가 정부의 인정을 받고 전 세계에 단체가 있을 정도로 일반적인 것이라면 평범한 초능력자로 사는 것도 그럭저럭 괜찮을지도 모른다.
비록 가람이 원하던 평범한 일상과는 약간 차이가 있지만, 공무원이니까.
“그런가?”
가람이 넘어올 것 같자 의사는 고개까지 끄덕이며 설득에 박차를 가했다.
“한번 해 봐요. 안 되면 어쩔 수 없죠.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알 수 없다고 마냥 그 자리에 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일단 가까운 길부터 한번 가 보는 겁니다.”
정말 생각 없이 하는 소리인데 의외로 그 말이 가슴에 와닿았다.
하긴, 어차피 떠나고 나면 이 세계는 자신과 관련이 없어진다.
차원 검색 조건에 패스파인더와 관련된 요소를 지정할 수 없으니 만약 이곳으로 돌아오고자 한다면 가람이 존재했다가, 실종되었다가, 다시 나타난 세계 중 초능력자가 있는 세계를 찾아야 하는데 그런 곳은 수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을 것이다.
어느 것이 진짜 자신이 있었던 차원인지 찾아서 다시 오게 될 가능성은 한없이 낮았다.
게다가 패스파인더와 한 번 엮였던 세계는 같은 개체의 패스파인더가 접근하려고 하면 밀어내는 경향도 있다.
이곳을 찾아내어 다시 돌아올 수 있는 확률이 아예 없다고는 말 못 하지만, 있다고 해도 한없이 제로에 가까운 확률일 것이다.
“좋아요.”
떠나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그렇다면 남아 있을 때 뭐라도 시도해 보는 게 좋겠지.
평범한 초능력 공무원은 원하는 삶이 아니지만 상처를 소독하던 부모님의 얼굴을 떠올리면 조금쯤은 더 유지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잘됐군요. 도움이 되었나요?”
“상당히.”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람은 새삼 상담실을 다시 돌아보았다. 일단 시도는 해 보겠지만 그 결과가 좋을 거라는 장담은 없다.
일이 틀어지면 가까운 시일 안에 이 세계를 떠날 테고, 그러면 조만간 이 상담실에 올 일도 없어질 것이다.
어쩌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 가람은 약간 감정적으로 여기저기를 훑어보았다.
만약 다음 세계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더라도 이런 종류의 정신 상담은 계속 받는 게 좋겠다. 그러다가 문득 차트에 눈길을 주었는데 의사는 그 시선을 오해한 모양이었다.
“차트에 뭐라고 적었는지 궁금해요?”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궁금하냐 아니냐 묻는다면.
“궁금해요.”
가람의 대답에 의사는 빙그레 웃었다. 그리고 차트를 스윽 당겨 집어넣으며 살짝 놀리듯 말했다.
“미안하지만 보여 줄 수가 없네요. 이걸 알게 되면 다음부터 정상적인 상담을 진행할 수가 없거든요. 정 궁금하면, 나중에 상담이 다 끝난 다음에 알아도 상관없을 때가 되면 그때는 보여 줄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가람은 충분히 납득했다. 그녀도 의사의 생각을 최대한 읽지 않으려 했으니까. 생각을 읽게 되면 그가 하는 대답이나 질문에 설득력이 반감된다.
다음 세계로 가더라도 이런 상담을 계속하고 싶었기 때문에 가람은 어깨만 으쓱였다.
“보여 달라는 뜻은 아니었어요.”
“그런가요?”
“네, 그럼 들어갈게요.”
문을 닫고 나가는 가람을 배웅하며 의사는 문득 의아해졌다. 늘 다음에 보자고 했던 것 같은데. 하긴, 어차피 그냥 던지는 인사말이니 별 이유 없겠지.
* * *
의사와의 상담이 있은 지 며칠 후 집으로 새카만 리무진 몇 대가 찾아왔다.
차의 주인은 정세원. 어쩐 일로 지부장이라는 명패에 걸맞는 의전을 챙겨 가며 나타난 것이다.
굉장히 눈에 띄는 방문이었다. 그 이후 별다른 접선이 없어 정세원이 어쩌면 자신을 포기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기대하던 가람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었다.
“누구세요?”
잔뜩 경계하며 가람의 어머니가 현관문을 열자 정장을 차려입은 정세원이 리무진을 배경으로 씨익 웃으며 한 손을 내밀었다. 그 손에는 당당하게도 수사증이 들려 있었다.
“안녕하세요, 특수 사건 수사청 서울 지부장 정세원입니다.”
저런 이름이 아니었던 것 같은데. 소파에 앉아 어머니의 어깨 너머로 정세원을 쳐다보며 가람이 턱을 긁적였다.
하긴, 이능력에 대한 내용은 민간인에게는 비밀이라고 했으니 초능력자 운운할 수는 없었겠지.
“그, 그런 데서 여기는 어쩐 일로…….”
뭔가 경찰 냄새가 나는 이름 때문인지 가람의 어머니는 좀 긴장한 기색이었다. 정세원이 당당하게 척 꺼내어 보여 준 수사증과도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
어머니가 불안하게 가람을 돌아보자 옆에 앉아 있던 아버지가 일어나 문가로 다가갔다.
“우리 집에 무슨 볼일이라도 있습니까?”
“예, 댁의 따님이신 한가람 양에 대해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그 말에 부모님의 시선이 단번에 가람에게 쏠렸다. 뭔가 묻는 듯한 시선에 가람은 어깨만 으쓱해 보였다.
계약서를 두고 갔으니 언젠가 올 거라곤 생각했는데 이렇게 화려하게 나타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우리 딸이 무슨 사고라도…….”
두 사람의 불안한 어조에 정세원이 서둘러 손을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오히려 저희가 부탁드릴 게 있어서요. 일단 약소하지만 선물을 좀 가져왔습니다.”
그 말에 그의 뒤에 서 있던 두 남자가 무언가가 가득 든 고급스러운 꾸러미를 집 안으로 들여왔다.
워낙 일상적으로 만나던 터라 잘 몰랐는데 이런 걸 보면 정세원의 위치가 꽤 높은 걸까? 아니면 이것도 꾸며 낸 것일까?
잠깐 유추하던 가람은 결국 어느 쪽이든 제게는 의미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실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