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80화 (180/256)

14화

그렇게 시작된 테스트는 무척 길었다. 처음에는 간단한 체력 테스트였다. 달리기 최대 속도, 지구력, 근력, 심폐력 같은 건강 검진을 상기시키는 평범한 것들.

그러나 뒤로 갈수록 맨손 격투 능력이나 날아오는 물건 피하기, 사격술 같은 항목이 등장했다.

“전방에 배치될 일은 없다고 들었는데요.”

떨떠름하게 권총을 건네받으며 가람이 항의하자 사격술 테스트 담당자는 어깨만 으쓱했다.

“일단 매뉴얼에 있으니까요.”

실제 전투에서 총은 별 소용이 없지 않느냐는 말도 떠올랐지만 가람은 간신히 그 말을 삼켰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초능력의 존재조차 모르던 사람이 초능력 전투에 익숙한 모습을 보여 주는 건 좀 이상했다. 결국 시키는 대로 총을 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쏘는지 알아요? 잠시, 알려 줄게요.”

총 같은 건 이골이 나도록 써 봤다. 패스로 전투 능력을 갖춘 후에는 다룰 일이 별로 없었지만 그렇다고 쏘는 법까지 잊어버릴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람은 얌전히 담당자가 가르쳐 주는 것을 배우는 척했다. 그리고 시위하듯 탄창이 빌 때까지 연사로 방아쇠를 마구 당겼다.

“잠깐, 제대로 조준을 하고 쏴야죠.”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스럽게 가람을 제지한 담당자는 표적판을 확인하고 말을 잃었다.

“예전에 총 쏴 본 적 있어요? 실탄 사격장에 다니는 취미라도?”

“총을 본 것도 처음인데요.”

이 세계에서는.

뒷말을 빼니 거짓말이 능청스럽게 나왔다. 가람의 대답에 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멍하게 서 있다가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보통 처음 쏘면 가장자리에 한 발이나마 맞추면 다행이거든요. 아니면 두 군데 정도 구멍이 나 있거나……. 그런데 여기, 구멍이 한 개네요. 주변도 깨끗하고.”

“그러네요.”

“딱 한 포인트에 다 쏴서 맞췄다는 뜻이거든요. 게다가 막 쐈으니까 반동도 있었는데. 정말 처음인 거 맞아요?”

가람은 몇 번이고 처음이라 주장했다. ‘이 세계에서는.’이라는 뒷말이 생략된 대답이었다. 결국 다음 순서로 진행한 장거리 저격 테스트에서도 만점을 받자 그는 심각하게 후방 지원 저격수 포지션도 고민해 보라는 말을 남겼다.

그리고 다시 테스트가 이어졌다. 이번에는 좀 수상하고 초능력자 냄새가 진하게 나는 종류였다.

정신 방벽이나 출력 테스트 같은 것들이었는데, 대부분 가람이 뭔가 한다기보다 기계 장치 속에 들어가 측정당하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고 해도 기계에 들어가고 나오기를 오후 늦게까지 하고 나면 무척 기운이 빠지는 법이다.

결국 모든 테스트가 끝나고 정세원을 다시 만났을 때 가람은 녹초가 되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힘들죠? 원래는 며칠 걸쳐서 하는데 좀 급하다 보니. 그래도 사격 담당관이 무척 칭찬하던데요. 가람 씨한테 그런 재능이 있을 줄이야.”

뺀질거리는 정세원의 얼굴을 보자 안 그래도 지친 몸이 더욱 바닥으로 곤두박질 쳤다.

그런 가람의 표정을 읽었으면서 정세원은 일부러 모른 척하며 헛기침을 했다.

“그럼 오늘 할 일은 다 끝난 거죠? 집에 가도 될까요?”

“어, 음. 사실 하나가 더 남아 있어요.”

“뭔데요?”

“별건 아니고. 면담이에요. 면담. 아무래도 이제 제가 팀장이 될 테니 영입할 팀원과 심도 있는 이야기를 좀 해야 하거든요.”

“면담?”

가람의 눈빛이 날카로워지자 정세원이 얼른 앞장서며 길을 재촉했다.

“이렇게 통로에 서 있을 게 아니라 면담실로 가죠. 면담만 끝나면 오늘 할 일은 끝이에요. 정말로.”

그렇게 말하며 먼저 앞장서 걸어가 버리니 가람은 따라가지 않을 수 없었다. 혼자 거기에 서 있을 수도 없었으니까.

그리고 도착한 곳은 가람이 늘 다니는 정신병원을 떠올리게 만드는 구조의 작은 방이었다. 빛도 안 드는데 화분까지 놓여 있다.

“제 사무실로 갈까 했는데, 여기에 서류가 다 있어서요. 앉으세요.”

먼저 자리에 앉으며 정세원은 책상 아래에서 한 뭉텅이의 문서를 꺼냈다.

면담이라 해서 그냥 가벼운 대화 정도를 생각했는데 갑자기 자료집 같은 것이 튀어나오자 가람은 조금 의아해졌다.

“지금부터 보여 주는 정보는 극비 문서예요.”

그렇게 말하며 정세원은 여섯 묶음의 서류를 늘어놓았다. 서류에는 각각 외국인의 사진과 이름으로 보이는 알파벳들이 적혀 있었다.

“사실 내부에서는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가람 씨에게 이런 문서를 보여 주는 걸 반대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하지만, 오늘 당장 집에 가는 길에 이들을 마주칠 수도 있으니 저는 빨리 보여 줄수록 좋다고 생각해요.”

“이건?”

“메시아의 보스와 간부 다섯 명의 사진이에요. 멀리서 찍은 거라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아예 모르는 것보다는 나을 거예요.”

“흐음.”

가람은 흐릿하게 찍힌 얼굴들을 주의 깊게 살펴보았다. 기분 탓인지 좀 낯익은 것 같기도 하고.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봤더라?

미간을 찌푸린 채 기억을 더듬는데, 그런 가람의 얼굴을 걱정으로 해석한 정세원이 안심시키려는 듯 입을 열었다.

“보기 드문 치유 능력자이니 가람 씨의 존재를 아는 즉시 납치하려 들 거예요. 그걸 대비해 주변에 요원들을 배치해서 지켜 드릴 테지만, 혹시라도 이 얼굴을 발견하면 여기로 대피하세요.”

정세원이 그쯤 말했을 때 가람은 사진 속의 얼굴을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화질이 워낙 좋지 않아서 사진만으로는 떠올리기 힘들었지만, 여태까지 있었던 일들을 종합해 보니 딱 아귀가 맞는 사건이 있었던 것이다.

여섯 명의 간부, 납치와 세뇌.

가람은 얼마 전 패스를 찾으려고 방문했던 건물에서 사람들을 가둬 두고 있던 악당에게 정신 조작을 걸어 새사람으로 탈바꿈시켜 놓은 일이 있었다. 그 악당들이 딱 여섯 명이었지. 으음.

사실 그들이 정세원이 털끝을 곤두세우고 경계하는 메시아의 일원이라는 신호는 여기저기서 감지할 수 있었지만, 가람은 사진을 보기 전까지 전혀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어느 테러 단체거나, 그 산하의 초능력 테러 단체인가 보다 했을 뿐이다.

왜냐면, 너무 약했으니까. 강하다는 그 보스조차도.

“요즘은 활동이 뜸하지만, 방심하지는 않고 있어요. 언제나 폭풍의 눈이 가장 잠잠한 법이죠.”

정세원이 얼굴을 굳히고 진지하게 이야기했다. 가람도 얼굴을 굳혔다. 방심하면 이상한 얼굴이 될 것 같았다.

그렇게나 걱정하고 있는 그 악의 거두들이 자신들이 일삼던 정신 조작에 되레 당한 처지가 되어 새 삶을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면 정세원의 기분이 어떨지.

궁금하지만 가람의 입으로는 말할 수 없는 게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국내에 잠입한 메시아의 잔당들이 뜸하긴 하지만, 그래도 아주 활동이 없는 건 아니에요. 사고 치는 녀석들은 오히려 더 크게 사고를 쳐요.”

아마도 그 활동이라는 것은 갑자기 연락이 끊어진 수뇌부에 패닉을 일으킨 아래 조직의 발악 비슷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가람 씨는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꼭 지켜 줄게요.”

정세원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활짝 웃어 보였다. 계약서에 서명하긴 했지만, 그렇게 강한 상대가 적이라면 겁을 먹고 본부를 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인지 정세원은 최선을 다해 가람을 안심시키고자 하는 것 같았다.

가람은 결국 떨떠름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요. 오늘은 여기까지 하죠. 내일 출근하면 뭘 해야 할지 1층 안내 데스크에 가서 신분을 밝히면 알려 줄 거예요. 수고했어요. 퇴근하세요.”

정세원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가람도 드디어 퇴근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만족스러웠다.

* * *

긴 하루가 끝났다. 꽤 일찍 퇴근했다고 생각했는데 집에 오니 저녁밥을 먹을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소파에 기대어 TV를 보던 어머니가 가람을 보더니 알은체를 했다.

“퇴근했니? 오늘 어땠어?”

“그냥, 첫날이라 일은 안 하고 이것저것 배웠어.”

“사람들은 괜찮고?”

“몇 명 못 만나 봐서 잘 모르겠어. 괜찮은 것 같아.”

흐르듯 대답하며 가람은 어머니의 옆자리에 파고들었다. 푹신한 소파의 쿠션감이 온몸의 피로를 가벼워지게 떠받치는 듯했다.

가만히 기대어 아늑한 집의 공기를 들이마시는데, TV를 보는 척하며 가람을 흘끔거리던 어머니가 슬쩍 떠보듯 말문을 열었다.

“그 남자는?”

“그 남자?”

“우리 집에 선물 바리바리 싸 들고 와서, 따님을 주십사 했던 그 남자 말이야.”

그건 그저 업무상의 스카우트 제안이었을 뿐인데 어조가 의미심장하다. 부스스 눈을 뜨자 음흉한 미소를 지은 어머니가 가람을 보고 있었다.

뭐든 말해 보라는 표정으로 눈만 깜빡이는 그녀를 보며 가람은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그런 거 아냐.”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어우, 잘생겼던데? 그쪽에서도 너한테 관심 있는 것 같더라. 보통 그렇게 집으로 찾아온다니? 어머, 어머. 어쩜 좋아.”

가람이 어떤 반응이든 그녀의 어머니는 이미 가람이 결혼하고 조막만 한 손자 손녀를 데려오는 데까지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었다.

결혼할 때 입을 드레스는 어떤 형태로 할지, 식장은 호텔이 좋을지 아님 다른 데가 좋을지 침이라도 흘릴 기세로 김칫국을 퍼먹는 모습에 가람은 말문이 막혀 말리지도 못했다. 정세원이 어지간히 마음에 든 모양이군.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가람은 타이밍을 재어서 화제를 돌렸다.

“아빠는?”

“오늘 늦게 나갔어. 늦게 온대.”

“엄마 저녁은?”

“아직 안 먹었지.”

“뭐 시켜 먹을까? 취업 턱 내야지.”

냉장고에는 정세원이 가져온 고기와 과일이 가득하지만 저녁을 차리기에는 좀 늦은 시간이다.

어머니도 이제 와서 주방에 서는 것은 싫었는지 반색을 하고 눈을 반짝였다.

“그럴까? 아빠 몰래 우리끼리만 가람이 취업 턱 먹어 버릴까?”

아무래도 저녁을 시켜 먹는다는 사실보다 아빠 몰래 뭔가 한다는 점이 더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어머니의 개구쟁이 같은 모습에 가람은 짧게 혀를 차고 적당히 먹고 싶은 음식을 물어본 뒤 배달시켰다.

음식 주문 통화가 끝나고 배달될 때까지 할 일이 없어진 두 사람은 소파에 파묻혀 조용히 TV 드라마를 응시했다.

어머니는 곧 화면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그 옆에 기대어 어머니가 간간이 드라마를 향해 혼잣말하는 모습을 보며 가람은 마음을 가다듬었다.

이제부터 이어질 삶은 가람이 원하던 종류의 평범한 삶은 아니다. 이런저런 암초 같은 일들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그러나 이 저녁의 안온한 공기와 일상의 소소한 일들을 즐기기로 했다.

암초 중 하나였던 가람의 정신과 의사는 의외로 이후로도 별다른 사건을 일으키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가람의 진짜 속을 털어놓을 수 있는 유일한 숨구멍이 되어 주었다.

가람은 언젠가, 어쩌면 가까운 시일 안에 의사가 진실을 알아채거나 혹은 정세원이 그 의사를 찾아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놀랍게도 의사는 복권에 당첨되어 은퇴하는 그날까지 가람을 정기적으로 찾아오는 지갑 잘 여는 망상증 환자라고 믿은 것이다. 장장 10년 동안.

수백억의 복권 당첨금이 생기자 그는 미친 사람을 상대하는 지긋지긋한 직업을 접어 버리고 행복한 삶을 찾아 떠났다.

그래도 그 와중에 가람의 병세를 조금 걱정하긴 했지만, 그렇게 오랜 세월 차도를 보이지 않는 망상증이라면 희망이 없다고 생각하고 곧 체념했다.

게다가 평범한 생활이 불가능할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정세원의 팀에서 일하는 건 기대 이상으로 가람에게 회사원 같은 삶을 선사해 주었다.

가장 큰 위험 요소였던 메시아는 보스와 간부들이 이미 가람의 손에 해산되었으니 조용했고, 그 이후로 새롭게 거대한 범죄 단체가 출범해도 금세 가람에 의해 착한 사람으로 거듭났다.

가람의 힐러 능력 각성을 기대하며 한동안 곁을 맴돌던 정세원도 이렇다 할 사건이 없으니 맥이 빠진 듯 물러났고, 그 상태로 가람은 적당히 힐러로 각성한 척하며 유유자적하게 지낼 수 있었다.

그렇게 가람의 기대보다 더 긴 평범한 일상이 조용히 이어졌다. 가람이 바라 마지않던 평화롭고도 약간은 지루한 일상이.

― 에필로그 - 여정 이후의 이야기 終

<패스파인더>

외전. 모르드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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