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외전. 모르드레드 1
길 위에서 여행자를 사귀는 가장 간단한 방법은 모닥불을 피우는 것이다.
환하게 타오르는 모닥불을 앞에 두면 아무리 철벽같은 성정을 가진 여행자라고 해도 노곤노곤하게 녹아내리기 마련이다.
그렇게 흘러내리는 피로를 양분 삼아 이야기들이 피어난다.
“다들 저녁은 드셨나요?”
모닥불의 온기를 나누며 앉아 있던 남자 하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콧등에 주근깨가 가득한 얼굴이 소싯적 꽤 장난꾸러기였을 듯했다.
둘러앉은 남자들은 고갯짓만으로 대답했다. 다들 몹시 고단한지 입을 열기 싫은 기색이었다.
“이것 좀 드시겠어요? 고향에서 어머니가 싸 주신 건데.”
늘어진 여행자들의 반응에도 기죽지 않은 남자는 제 짐을 뒤적이더니 볼품없는 빵을 꺼내어 권했다.
영 식욕이 당기지 않는 외양이라 나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는데, 몇몇은 고맙게 받아 들었다.
무언가를 먹어 본 것은 꽤 오래전 일이다. 인간이 살아가며 행해야 할 수많은 행동들은 이미 권태로워진 지 오래다. 배를 채우는 행위 또한 그중 하나가 된 지 한참 되었다.
먹지 않아도 몸을 유지하는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면 아마 나는 비쩍 말라 해골처럼 살아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먹지 않는 것 정도로 몸이 그렇게나 마르는 것도 참 성가신 일이라, 일찌감치 그 능력을 구입해 둔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앉은 것도 인연인데 통성명이라도 하는 게 어떨까요? 저는 아서입니다.”
아서라고 자신을 소개한 주근깨 청년은 무언가를 기대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이런 귀찮은 녀석은 평소라면 무시했겠지만 모닥불의 마력은 굉장하다. 자각하지 못한 사이 나는 어느새 입을 열고 있었다.
“모르드레드.”
짧게 이름만 말해 주자 그것으로도 애송이는 감지덕지한 표정을 지었다. 내 소개를 시작으로 하나둘씩 제 이름을 뱉어 놓기 시작했다.
나는 모닥불 위로 날아드는 잡벌레를 바라보며 그 시간이 끝나기를 기다렸다. 불 위에서 타 죽은 나방의 냄새가 고소하게 피어오른다.
“다들 어디로 가는 길이오?”
싸구려 옷에 싸구려 검. 그러나 우락부락한 근육을 자랑하며 질문한 남자가 둥그런 눈으로 여행자들을 둘러보았다.
무어라 이름을 소개한 것 같긴 한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차피 금방 죽고 금방 사라지는 자들의 이름이다. 기억할 가치가 없었다.
“저는 약초와 양털을 사러 도시로 가는 길이에요.”
“촌뜨기구만? 엄마가 보고 싶지는 않으냐? 꼬마 여행자?”
아서가 양순하게 대답하자 질문했던 남자가 짓궂은 말투로 놀렸다. 여기저기서 킬킬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온다.
아서는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고개를 푹 숙였다. 나는 덜 자란 청년의 작은 주먹이 바들바들 떨리는 것을 바라보았다.
모닥불에 모여 앉았다고 해도 애송이가 객기를 부리기엔 거친 상대들이다.
길바닥 위에 굴러다니는 것들 중에는 엄마가 싸 주는 빵이나 챙겨 먹으며 자란 청년이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악독한 자들이 많으니까.
범죄자는 물론이요, 무뢰한에 살인자, 도둑놈 등 야비한 사기꾼들이 넘쳐 난다.
장난처럼 강도질을 하는 놈들도 있다. 제 성질에 조금 거슬린다 싶으면 가차 없이 검을 휘두르는 작자들도 많았다.
아마 눈앞의 이자들도 비슷한 부류일 것이다. 피로로 인해 순한 척 굴고 있지만 본질은 아무도 모르는 법이지.
“형씨는 뭐 하는 사람이요?”
“그러게. 아까부터 분위기 잡는 게 장난이 아닌데. 이보쇼, 로브 좀 들춰 봐.”
아서가 제 감정을 갈무리하는 데 성공하자 별 재미가 없다고 느꼈는지 실망한 무뢰배들이 대상을 바꾸었다. 별로 좋은 선택지는 아니었다.
나는 냄새나는 것들을 비스듬하게 내려다보았다. 옆의 아서가 조마조마한 얼굴로 저들과 나를 연신 번갈아 본다.
“이봐, 말 안 들리쇼?”
대답 없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남자의 어투가 점점 거칠어졌다. 이제 그냥 시비를 거는 것이나 다름없다.
순간적으로 귀찮아져 모두 토막 내어 저승의 개밥으로 던져 줄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것도 귀찮다.
겨우 이 정도로 뜨거워지기에는 나는 너무 오랫동안 식어 있었다. 그래, 너무나 오래 식어 있었지.
“말 들으세요. 다들 검을 차고 있어요.”
곁에 앉은 아서가 작은 목소리로 소곤거렸다. 눈물이 어른거리는 눈을 보니 어지간히 겁을 집어먹은 것 같다.
그 얼굴을 보니 다시 변덕이 일었다. 다들 저녁은 먹었냐며 쾌활하던 때가 좋은 것 같은데. 좋아, 선심 쓰지.
“그러지.”
로브의 후드를 젖히자 순간적으로 사방이 고요해졌다. 잠시 침묵한 남자들은 별로 좋지 못한 의도의 시선을 주고받았다.
시선의 의미를 모르는 바가 아니나 나는 그것들에 크게 관심 두지 않았다. 기묘한 적막 사이로 아서가 감탄했다.
“우와! 대단해요! 저 이렇게 잘생긴 사람 처음 봐요! 왕자님 같아요!”
몇몇이 떨떠름한 얼굴로 동의한다. 그들이 내 외모에 대해 품평하는 것을 그대로 무시하자 다시 적막이 내려앉았다. 또다시 화젯거리를 꺼낸 것은 아서였다.
“다들 고향이 어디세요?”
이 작은 애송이는 아무래도 침묵이 매우 불편한 모양이었다. 무리도 아니다.
두 팔로 황소 목도 졸라 죽일 수 있을 것 같은 우락부락한 놈들 사이에서 이 청년은 마치 마른 꼬챙이처럼 보였다.
그나마 곱상한 얼굴의 내가 있어 적지 않게 위안이 된다는 듯 아까부터 내게 찰싹 달라붙어 일행처럼 굴고 있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아하른에서 검투사를 하려고 가는 몸이지. 들어는 봤나? 붉은 도끼의 프람이라고.”
으스대듯 말한 남자는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어 보였다. 붉은 도끼라는 이름에 어울리게 과연 등에는 커다란 도끼가 메여 있었다.
붉은 도끼니 뭐니 하는 것은 사실 허풍일 가능성이 높았다. 아마 나무꾼과 산적을 병행하며 밥벌이를 하다가 검투질을 하러 가는 모양이지. 변변찮아 보이는 놈이니 얼마 안 가 불구가 되거나 죽을 것이다.
“우와, 대단해요!”
아서가 눈을 번쩍이며 감탄했다. 프람이라는 작자는 아서의 감탄이 제법 마음에 들었는지 그 뒤로 몇 마디를 더 주절거렸다.
그러나 그 내용이 심기에 거슬린 사람이 있는 모양이었다.
“헛소리도 수준급이군. 아하른에서 검투사를 한다고? 으스댈 내용이 아니지 않나.”
콧방귀를 뀌며 끼어든 자는 붉은 도끼만큼이나 우락부락한 남자였다.
그 내용에는 나도 동감했다. 곧 불구가 될지도 모르는데 해맑은 작자로군, 붉은 도끼.
“뭐라고?”
지적당한 붉은 도끼가 분노에 휩싸여 도끼 자루를 움켜쥐었다. 아서는 으악 비명을 지르고 싶어 하는 얼굴로 손끝을 입에 넣고 초조하게 씹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점점 험악하게 돌아가자 둘러앉은 사람들은 슬쩍 물러서서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두 남자의 격돌을 바라보았다. 초조해하는 것은 아서뿐인 것 같다.
“검투사가 뭐라도 되는 듯이 으스대는데, 사실 따지고 보면 돈에 몸을 판 칼 노예나 다름없지. 어디 노름빚이라도 진 모양이지?”
“이 자식이!”
마침내 두 남자가 날붙이를 뽑아 들자 아서는 완전히 겁에 질렸다. 누가 보면 두 남자가 아서에게 덤벼드는 줄 알 거다.
흥미로워하는 사람과 불안해하는 사람. 그중에서 나는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굳이 말하자면, 지겨워하는 쪽이었다.
“자, 잠깐만요!”
격돌하는 날붙이 사이로 아서가 끼어들었다. 꼬챙이 같은 애송이는 금방이라도 부러질 것처럼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그 측은한 모습이 동정심을 자아냈는지 두 남자는 흥분이 조금 가라앉은 얼굴로 아서를 내려다보았다.
“저, 이 좋은 밤에 피를 보실 필요는 없잖아요. 결국 다치기만 할 뿐이에요. 너무 흥분하지 마시고 따듯한 모닥불에 스튜나 끓여 먹으면서 이야기나 더 나누는 건 어떨까요?”
“허? 애새끼가 끼어들 데가 아니니 닥치고 있어.”
자신에게 무례한 소리를 한 놈을 반드시 쪼개어 버리겠다는 얼굴로 붉은 도끼가 경고했다.
아서는 자신의 제안이 씨알도 먹히지 않는 데다 무서운 시선까지 받자 오줌을 쌀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서와 붉은 도끼, 그리고 또 다른 남자 셋 중에서 누가 먼저 쪼개어질지 갑자기 조금 흥미로워졌다.
“그, 그러지 마시고. 여기 앉아 있는 이분의 소개를 듣는 건 어떨까요? 예? 범상치 않으신 차림이니 분명 재미있는 사연을 갖고 있으실 거예요.”
아서가 갑자기 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건 예상치 못한 전개다. 안타깝게도 아서의 제안은 무시되지 않았다.
주절거리는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화가 가라앉기라도 했는지, 두 남자는 서로를 매섭게 노려보긴 했지만 무기를 집어넣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나는 내게 쏠리는 시선에 담담하게 생각했다. 다 죽여 버릴까.
배짱 좋게도 나를 팔아먹은 아서는 뿌듯한 얼굴로 내 옆에 답삭 달라붙었다.
닿아 있는 그 부분부터 용암을 끼얹어 타들어 가게 만들어도 그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마도 그럴 수 없겠지. 무엇보다 그 짓도 너무 자주 해서 이제 지겹다.
나는 내게 모여든 시선을 한차례 둘러보았다.
“듣고 싶나?”
우렁찬 대답, 격렬한 고갯짓, 반짝이는 눈빛 등 수많은 종류의 긍정이 쏟아졌다.
그래, 이것도 나쁘지 않겠지. 지겹지 않다는 점에서 좋은 일이다.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이것은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 * *
약한 것들의 삶은 어디에서나 고달프기 마련이다.
삶에 고통을 못 박는 망치는 매우 다양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태생적인 환경이 그 망치가 되어 주었다.
더럽고 궁색한 집안 살림에 폭력적인 아버지, 그리고 홀로 서기엔 너무 약한 어머니와 겉도는 형까지.
“모르드레드, 슬슬 들어가야지.”
떨떠름한 얼굴의 덴버가 재촉한다.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마른 장작을 불 속으로 던져 넣고 일어났다.
아직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내가 삯을 받을 만한 일은 거의 없었기 때문에 나는 마을 장인의 아래에서 허드렛일을 하며 약간의 빵을 얻어 연명하고 있었다.
연명, 그렇다. 이건 정말로 올바른 표현이다. 내게 허락된 것은 죽지 않을 정도로 작은 빵 한 조각이 전부였다.
덕분에 나의 몸은 해골에 가죽을 입혀 놓은 것마냥 비쩍 말라 있었다. 사실 네 살 이후로 거의 크지 못했다.
“자. 오늘 몫이다.”
덴버는 적선하는 듯한 태도로 빵 덩어리를 꺼내어 주었다. 마르고 딱딱한 오래된 빵이다.
곰팡이를 털어 낸 그것은 식량 창고 뒤쪽에 쓰레기처럼 쌓여 있다.
높으신 분들에게는 음식의 범주에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비루한 것이지만 나는 이것도 없어 배를 곯는 일이 많았다.
나는 빵을 손에 들고 덴버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덴버는 다른 기구들을 정리하다가 내가 아직 남아 있음을 깨닫고 흠칫 놀라 눈을 부라렸다.
“뭐냐?”
빵 덩이가 다른 날보다 유난히 작다. 그는 얼마 안 되는 나의 빵 일부분을 횡령했다.
아마 그 일부분은 다른 어린아이의 손에 들어갔을 것이다. 빵 한 덩이로 두 명을 부리는 편이 이익이겠지.
나는 뻔히 보이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항의하지 못했다. 대신 시선을 거두고 빵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단단한 빵은 으스러지지도 않는다.
“어서 집에 가. 집에는 기다리는 아버지도 있잖냐. 다른 아이들에 비하면 행복한 줄 알아야지.”
말을 마친 그는 손에 든 자루를 휘둘러 나를 쥐나 새라도 되는 듯이 쫓아내었다. 화롯가의 온기에서 벗어나자 금세 추위가 닥쳐온다.
나는 쓰러질 것 같은 다리를 추슬러 집으로 향했다.
부지깽이를 들고 내 다리를 부러뜨리고 싶어 하는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기다리는 즐거운 집으로. 행복한 집으로.
여닫힌다는 이유만으로 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한쪽 벽을 열고 들어가자 무언가가 날아와 내 옆에서 박살 났다.
머리 바로 옆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