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그러나 기다려도 목에 닿아 오는 칼날은 없었다. 나는 갈등했다. 빌어야 하나? 그러면 그냥 보내 줄까?
“괜찮은가?”
어깨 아래로 들어와 나를 부축하는 손길에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고개를 들었다.
차가운 표정에 따듯한 눈동자가 나를 직시하고 있었다. 우직하게 뻗은 눈썹 아래에서 선량해 보이는 갈색 눈이 나를 응시한다.
태어나서 처음 받아 보는 걱정 어린 시선. 그것이 나와 기사 데파르 백작과의 첫 만남이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했는지 모르겠다. 겁에 질려 떠는 내가 많이 다쳤다고 생각했는지 냉정한 얼굴의 상냥한 기사는 나를 제 성으로 데려가 씻기고 먹을 것을 주었다.
그는 왕자의 곁을 지키는 기사였지만 동시에 백작 작위를 가진 귀족이기도 했다.
처음으로 들어와 본 성은 천국처럼 호화롭고 아름다운 장소였다. 길바닥의 쓰레기에게 베풀어지기에는 불가사의할 정도로 과분한 장소.
태어나서 처음 겪는 호사에 나는 이 성을 나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기회였다. 나의 쓰레기 같은 삶 속에 유일하게 찾아온 빛이었다.
벌레가 끓지 않는 부드러운 침구를 만지며 나는 결의를 다졌다.
애원하든 빌든 무슨 짓을 해서라도 이곳에 남고 말겠다고. 약삭빠르게 굴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데파르는 눈물로 애원하는 나를 외면하지 못했다. 그 딱딱한 얼굴 속에 숨어 있는 선함을 발견한 것은 정말로 천만다행한 일이었다.
나는 그의 아래에서 종자 노릇을 하며 난생처음 제대로 된 곳에서 자고 먹을 수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훔치지 않고 일을 해서 급여를 받는, 정상적인 방법으로 무언가를 얻어 내는 생활을 할 수 있었다.
그쯤 되자 폭커의 악랄한 장난질이 고마워질 지경이었다. 놈은 내가 기사의 칼날 아래 병신이 되기를 바랐겠지만 그 장난은 나의 편이었다.
내 생에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나는 데파르의 종자에 불과했지만 진심으로 그를 따랐다.
그는 나의 은인이자 아버지이자 구원자였다. 썩어 빠진 지옥에서 끌어 올려 준 천사였다.
무뚝뚝한 얼굴에 속내를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나의 우상이었다. 그처럼 되겠다고, 그에게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어서 나는 안달했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구더기와 함께 뒹굴다 죽었을 것이다. 그가 아니었다면 나는 행복이 무엇인지 죽을 때까지 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에게 바치는 나의 충성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는 나에게 새 삶을 주었으므로 나의 삶 반절은 그의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나는 그에게 나의 운명을 맡겼다.
물론 성안에서의 생활이 마냥 즐겁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고성을 오래도록 지켜 온 늙은 집사는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내가 몹시 마땅찮은 기색이었다.
그러나 뒷골목에 굴러다니는 말 뼈다귀 같은 작자들보다는 훨씬 고상한 사람이라서 나에게 악질적인 장난을 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감시하듯 싸늘한 시선을 보낼 뿐이었다.
그 꼬장꼬장한 시선마저 나는 좋았다. 백작님께 누를 끼치지 말라며 쏟아지는 잔소리마저 행복했다. 마치 정말로 할아버지라는 것이 생긴 것 같았다.
늙은이 특유의 잔걱정 많은 성격은 내가 그를 정말로 할아버지처럼 따르게 만들어 주었다.
저를 좋아하는 이를 싫어할 사람은 없는지라, 집사 또한 천천히 내게 마음을 열어 가고 있었다.
간혹 어린 하인들이 비수같이 날카로운 말로 비아냥거리긴 했지만 그건 정말로 말뿐이었다. 성내에서 소란을 일으키는 것은 결코 용납되지 않는다.
듣는 동안 화가 나긴 했지만 언젠가 갚아 주겠다는 다짐으로 참아 넘기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그 기회는 영영 오지 않았다. 데파르가 왕궁으로 발령받으므로 인해 종자인 나 또한 성을 떠나야 했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나는 왕궁으로 가게 된 것이다.
“왕자님을 기억하나?”
원목 탁자 위에서 서류를 팔락이던 그가 문득 질문했다. 왕궁에서 완전히 상주 근무를 하게 되면 본성의 일을 거의 손댈 수 없어진다.
덕분에 그는 매우 바쁘게 일하고 있었다. 나는 어깨 너머로 그의 잉크병이 비지 않았는지 확인하며 대답했다.
“예.”
나의 나이는 열세 살이었다. 성에 들어오고 1년 사이 종자로서의 몸가짐이 제법 몸에 붙었다.
내가 서 있는 곳은 언제나 데파르의 등 뒤였다. 대각선으로 반 발자국 떨어진 곳이 나의 위치였다.
나는 그의 충성스러운 개였으므로 그 정도 대우는 당연한 것이다. 그 위치를 자각할 때마다 나는 인정받고 있다는 확신에 기뻤다.
“왕자 전하께서도 너를 기억하고 계시다. 성으로 가면 나와 함께 전하를 보필해야 한다.”
왕자는 나보다 두 살 정도 어렸다. 그래도 잘 먹고 큰 덕분에 신체 조건은 나보다 월등히 뛰어났다.
나는 어릴 때보다야 나아졌지만 그래도 비쩍 마른 개처럼 왜소했다. 검을 제대로 들지도 못하는 나에 비해 왕자는 벌써 검을 제법 다룬다는 소문이 드높았다.
슬그머니 피어나는 치졸한 질투를 나는 나의 위치를 되새김으로써 짓밟았다.
질투라니, 가당치도 않았다. 데파르의 반 발자국 뒤, 그곳이 나의 위치다. 나의 유일한 긍지.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데파르는 미소 지었다. 그가 의자를 돌려 앉아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는 말 잘 듣는 개처럼 그에게 다가가 부드러운 쓰다듬을 받았다.
이것은 상이다. 인자한 얼굴로 나를 쓰다듬는 그 얼굴을 볼 때마다 나는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가슴이 울렁거려 요동친다. 그럴 때면 나는 마음속 깊은 곳에서 비밀스러운 소망을 중얼거렸다.
그가 나의 진짜 아버지라면 얼마나 좋을까.
그렇다면 당신은 이렇게 개를 쓰다듬듯 나를 쓰다듬는 것이 아니라 그 단단한 팔로 나를 안아 주지 않았을까. 여느 아버지들이 아들을 지키듯이.
* * *
데파르의 종자라는 위치상 나의 생활은 왕궁에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데파르가 직무를 수행하는 동안 그의 뒷바라지를 해 두는 것이 나의 일이었다.
그 외에 자질구레한 심부름이 있었지만 그래도 성에 있을 때보다 훨씬 개인 시간이 많았다.
백작 성에 있을 때는 모두에게 인정받기 위해 데파르의 종자 일과 함께 하인의 일도 병행해야 했다.
그러나 왕궁에서는 데파르의 갑옷 손질이나 그의 자잘한 심부름만 하면 끝이었다.
넘쳐 나는 여가 시간 동안 나는 왕궁에서 내게 허락된 장소를 즐겼다.
흔히 왕궁은 위험한 곳이니 조심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왕궁은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가의 손길이 닿은 회랑의 기둥들은 그 하나하나만으로 위대한 작품이다.
그 사이를 거닐고 있으면 무언가 위대한 존재를 만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굳이 그 이유가 아니더라도 나는 내가 왕궁에 있다고 자각할 수 있는 순간이 좋았다.
그것은 감격스러운 일이었다. 바닥에서 쓰레기와 뒹굴던 모르드레드가 왕궁에 있다.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비록 데파르의 종자로서 머무는 것이지만 먼발치에서나 보던 그 드높은 곳에 내가 들어와 있는 것이다.
누구도 이런 것은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내 생에 이런 장소가 허락되다니, 골목길의 그 누구도 믿지 못하겠지.
감격하고 있는데 저 멀리서 시녀들이 급히 머리를 숙이는 것이 보였다. 아마도 귀하신 분이 행차한 모양이다.
무리도 아니다. 이곳은 왕궁이니까, 귀한 분이야 모래사장의 모래만큼이나 흔한 것이 당연하다.
나도 급히 머리를 숙였다. 귀하신 분이 어느새 내 근처까지 당도해 있었기 때문이다.
고개를 숙이고 그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뜻밖에도 그는 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옷의 끝단을 장식한 루비를 보고 나는 그가 1왕자임을 알아챘다.
그는 올해 열아홉으로 거의 왕세자로 낙점된 인물이었다. 모후에게서 물려받은 금발과 금안이 아름다운 청년이었다.
나와는 달리 날 때부터 빛이 흐르는 피를 타고난 자. 오랜만에 몸속 깊은 곳에서 검은 짐승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마악 이를 드러내는 그것의 콧잔등을 지그시 밟으며 더욱 깊게 머리를 숙였다.
“못 보던 얼굴이군.”
태생적으로 군림하는 자의 어조다. 명령이 자연스러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가 고개를 들라고 명령했기에 나는 조심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큰 청년이었다. 나 같은 것은 한 팔로도 휘두를 수 있을 만큼 강인한 체구의.
또다시 으르렁거리려는 짐승의 목줄을 나는 꽉 잡아당겼다.
“데파르 님의 종자인 모르드레드라 합니다. 전하.”
표정을 공손하게 갈무리하며 소개하자 1왕자가 흥미로운 얼굴로 되물었다.
“데파르 경의?”
“예. 전하.”
태연한 척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좀 긴장한 상태였다. 나는 왕궁 내부의 세력 다툼에 무지했다. 그런 알력 싸움은 귀족들의 것이다.
나는 일개 종자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에 데파르는 나에게 정치를 가르치지 않았다. 사실 배울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 옳다.
왕자의 얼굴에 떠오른 호감에 나는 데파르 경이 1왕자의 인물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실제 그런 이유는 아니었다.
“그럼 막내가 길에서 만났다는 평민이 너겠군.”
그는 나를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미묘한 기분 속에서 1왕자가 제 형제를 3왕자라고 부르지 않고 막내라는 친근한 호칭으로 지칭했음을 깨달았다.
“마침 막내를 만나러 가던 길이니 함께 가지 않겠느냐? 막내도 반길 것이다.”
제안의 형태를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명령이었다. 나는 고분고분하게 그 뒤를 따랐다.
몇 개의 문을 지나 막내 왕자의 궁에 당도하자 막내 왕자가 쪼르르 달려와 1왕자의 옷자락에 매달렸다.
“형님! 오랜만이에요!”
마냥 어리지 않은 데다 발육 상태가 좋아 어리광을 부릴 만한 외형은 아니었지만 제 형의 소매를 잡고 흔드는 모습이 퍽 귀엽다고 할 수 있었다.
나는 한쪽에 서서 두 형제가 담소를 나누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다지 영양가 없는 대화가 오간 뒤 1왕자가 나를 돌아보며 소개했다.
“모르드레드다. 전에 시장에서 만났다고 했지?”
3왕자, 아니, 막내 왕자의 말간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그대로 두어 번 끔뻑이며 기억을 더듬는 듯싶더니 작게 탄성을 내질렀다.
“아.”
“3왕자 전하를 뵙습니다.”
“안녕!”
3왕자가 발랄하게 인사했다. 그는 조금 모자란 구석이 있었다. 장애에 가까울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보통 사람보다는 지나치게 천진난만했다.
막내 특유의 때 묻지 않은 면 덕분일까. 어쨌거나 그는 왕실 식구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었다.
“만나서 반가워. 나랑 놀 거지?”
가타부타 소개도 없이 갑자기 직설적으로 제안해 오는 그 장난기 가득한 행동은 무시무시한 파괴력을 갖고 있었다.
나는 그날부터 3왕자의 놀이 상대로 발탁되었다. 사실 기사의 평민 종자 하나쯤 왕자의 장난감 같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 * *
“모르드레드, 저쪽 개암나무 너머에 토끼가 아기를 낳았대. 보러 가지 않을래?”
뭔가 큰 비밀이라도 있는 것처럼 굴기에 뭔가 싶었더니 결국 별것 아닌 내용이었다. 3왕자의 격 없는 행동은 내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었다.
이런 식으로 그의 놀이 상대가 된 사람이 꽤 있었는지 3왕자의 시종들은 익숙한 기색이었다. 나는 김이 빠져 선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내가 왕자의 놀이 상대가 되자 데파르는 적극적으로 나의 처소를 왕자 궁으로 옮겨 주었다.
나는 더 이상 데파르의 종자가 아니었다. 덕분에 자연스럽게 그를 볼 수 없어졌다. 간혹 3왕자 궁으로 찾아오긴 했지만 그뿐이다.
아버지 같던 그와 멀어지고 있다는 사실은 나를 우울하게 만들었다.
“모르드레드, 왜 그래? 우울해?”
“아닙니다, 전하.”
“하지만 눈이 이―렇게 되었는걸.”
제 손으로 눈꼬리를 한껏 잡아 내려 축 늘어뜨린 왕자가 다시 말똥말똥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그만 픽 웃고 말았다. 왕자를 상대로 지나치게 무례했지만 지금 여기에는 그 사실을 지적할 사람이 없었다.
“괜찮습니다.”
나는 슬쩍 손을 뻗어 어린 왕자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깜짝 놀랐을 행동이다. 그러나 호들갑을 떠는 것은 왕자의 아랫사람뿐이었다.
정작 3왕자는 기분 좋은 얼굴로 내 손길을 받곤 했다. 그렇게 작은 머리를 쓰다듬고 있다 보면 나는 기묘한 기분에 젖어 들곤 했다.
그가 마치 정말로 나의 남동생이라도 된 것 같은 기분. 그 그늘 없는 살가운 성격은 내게도 영향을 미쳤다. 나는 어느새 그가 귀엽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쓰다듬을 받으며 배시시 웃던 3왕자가 갑자기 결심했다는 듯 결연한 얼굴로 제 작은 호주머니를 뒤적였다.
“이거! 줄게.”
튀어나온 물건은 단내 가득한 사탕이었다. 어의의 명령으로 하루 간식 양을 제한받고 있는 왕자에게는 귀한 물건이었다.
게다가 왕자가 가장 좋아하는 맛이었는데 그 영롱한 색의 사탕을 제 손아귀에 놓고 아까운 기색도 없이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걸, 제게요?”
“응! 가져. 맛있어.”
애매한 얼굴로 사탕을 내려다보았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 왕자가 어째서 내게 이렇게나 친근하게 구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분에 넘치는 호의를 받고 있는 것 같아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행복했다. 마치 악마의 선물을 받아 들고 있는 것처럼.
“모르드레드, 울어?”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감정을 갈무리하는 내가 울 것같이 보였던 모양이다. 나는 얼른 얼굴을 수습하고 그에게 웃어 주었다.
하지만 씁쓸한 미소였던지 3왕자의 눈이 금세 울망울망해졌다. 아아, 악마의 선물은 무슨. 이렇게나 귀엽고 천진한 왕자인데.
“치이, 어쩔 수 없지. 정말 마지막이야.”
무엇이 마지막인지는 곧 알 수 있었다. 제 쌈지를 탈탈 털어 낸 3왕자가 내 손에 마지막 사탕을 쥐여 줬기 때문이다.
왕자인데도 지나치게 소탈하면서도 소중한 선물 탓에 나는 결국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 * *
아무리 소탈한 왕가라도 할 것은 다 한다. 3왕자는 죽을 것 같은 얼굴로 마법학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었다.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엔 지나치게 난해한 내용이다. 물론 그 뒤에 시립해 있던 나 또한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왕자의 수업에 아랫사람이 함께 참관한다는 것은 사실 유례가 없는 일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나를 좋게 본 왕과 왕비의 지시로 나는 3왕자와 함께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아마도 3왕자가 제 부모를 살살 녹여 두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쨌거나 나는 마법학 수업이 좋았다.
마법학 수업이 다른 수업보다 좋은 이유는 마법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본 마법은 경이로운 것이었다.
손끝에 피어나는 신의 기적을 목도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나는 금세 마법에 매료되었다.
그러나 뿌리 끝까지 무식한 나의 바탕 덕분에 마법을 습득하는 데는 많은 어려움이 따랐다.
내내 노력했지만 겨우 약한 불똥을 하나 피워 내는 것이 나의 성취의 끝이었다.
빈약한 신체 덕분에 검도 잡을 수 없는 나는 마법에서조차도 재능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매우 침울해졌다.
그런 나를 달래 주는 것은 언제나 3왕자였다. 궁 뒤편의 연못가에 앉아 청승을 떨고 있으면 부쩍 자란 귀염둥이가 슬쩍 다가와 성심성의껏 나를 위로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와 3왕자는 더욱 친밀해졌다. 제왕학 수업으로 인해 잔뜩 바빠진 1왕자의 빈자리를 채운 것이 나였기 때문이다.
2왕자는 어릴 때 제국으로 유학을 간 지 오래고, 그나마 놀아 주던 1왕자가 바빠지니 3왕자는 내가 정말로 형제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어찌나 친근하게 구는지 가끔 나도 착각을 할 지경이었다.
“모르드레드. 너무 실망하지 마. 마법이랑 검이 세상의 전부는 아니잖아?”
제법 머리가 큰 3왕자가 의젓한 척 조언했지만 내 귀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나는 힘이 갖고 싶었다.
구질구질한 삶 따위 한 번에 날려 버릴 수 있는 힘을 간절히 원했다. 강한 검이나 강한 마법, 그중 무엇이라도 갖고 싶었는데.
“모르드레드?”
기운 차려 봐. 하는 말소리 틈으로 나는 예민하게 적의를 감지해 냈다. 바람 소리 사이로 낮은 으르렁거림이 들린다.
소리의 기척을 따라가자 수풀 사이로 낮게 엎드린 주둥이가 보였다. 송곳니가 반쯤 드러난 상태로 침을 뚝뚝 흘리고 있는 맹도견이었다.
어찌 되었거나 왕궁에 있을 만한 짐승은 아니었다.
왕궁 뒤편은 왕자의 개인적인 공간이었기 때문에 주변에는 그 흔한 경비병 하나 없었다.
내가 주변을 살핌과 동시에 놈이 달려들었다. 커다란 이빨이 나와 3왕자에게 짓쳐 든다.
몸이 크긴 했어도 험한 일을 겪어 보지 못한 3왕자는 그대로 빳빳하게 얼어붙었다.
왜 그랬는지 나도 모르겠다. 나는 반사적으로 3왕자를 끌어안았다. 개의 이빨로부터 그를 지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사나운 주둥이 속에서 내 약한 팔 한쪽이 으스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3왕자가 찢어지는 비명을 질렀다.
나는 바르작거리는 3왕자를 끌어안고 개를 걷어차며 대항했다.
맹도견이 괜히 맹도견이 아니다. 빈약한 십 대 소년이 저항하기에는 개가 너무 사나웠다.
살점이 뚝뚝 떨어져 나와 금세 흰 뼈가 드러났다. 물주머니가 터진 것처럼 사방에는 피가 낭자했다. 전신이 밀랍처럼 말라붙으면서 차가워졌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죽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의 입에 내 팔을 더 밀어 넣었다.
잘근잘근 씹히는 팔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나는 3왕자를 안간힘을 다해 감싸 안았다.
희미하게 흐려져 가는 의식 속에서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나는 이 꼬맹이가 정말로 소중해졌다.
나는 나도 모르게 3왕자를 내 동생처럼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를 지켜 주고 싶었다.
아끼고, 보듬고, 그가 언제까지나 천진하게 있을 수 있도록 지켜 주고 싶었다.
내가 그러지 못했던 만큼 그만은 행복했으면 했다. 대리 만족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를 보고 있으면 검은 짐승이 힘을 잃고 납작 엎드렸다. 나는 저주에서 풀려나 행복할 수 있었다.
“모르드레드! 죽으면 안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