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그 의미를 알아듣고 잠시 말을 잃어버렸다. 데파르는 말하고 있었다. 도망가도 좋다고. 대신 자신이 죽겠다 말하고 있었다.
내가 절대로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를 내밀고 있었다. 내가 어떻게, 그 얼굴을 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겠는가.
그는 나의 은인이고, 나의 아버지이고, 지금 이 순간에도 나 대신 죽겠다는 사람인데.
그제야 깨달았다. 그가 남은 것은 나를 데려가기 위해서가 아니다. 내가 만약 도망쳤을 경우에, 대신 죽기 위해서였다.
나는 마구 일그러지는 입가를 추려 모아 어설픈 미소 같은 것을 만들어 냈다. 그와 나 중 하나가 반드시 남아야 한다면.
“아닙니다. 데파르.”
왕의 옷을 건네받기 위해 손을 뻗는 그에게 나는 고개를 저어 거절했다. 그리고 눈물을 줄줄 흘리고 겁에 질려 와들와들 떨면서도 의연한 척 웃었다.
데파르니까. 내 앞의 이 사람은 나의 구원자인 데파르니까 그럴 수 있었다. 그렇게 해야만 했다.
그 와중에도 데파르가 내게 죽으라 한 것이 나를 향한 개인적인 미움이 아니라 기사의 사명을 다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 기뻤다.
내가 이곳에서 잡혀 죽는다고 해도 나는 데파르의 사명을 대신 수행하는 것이다. 나도 그처럼 긍지 높은 일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적지 않은 고양감을 불러일으켰다. 나를 둘러싼 공포에 고양감과 서글픔과 슬픔, 그리고 온갖 이름조차 붙이지 못할 감정이 몸을 터뜨릴 것처럼 잔뜩 몰려와 뒤섞인다.
나는 그 혼란 속에서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남겠습니다.”
그는 아무런 반응도 없었다. 그저 강하게 나를 한 번 안아 주었을 뿐이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숨겨진 비상구로 나가는 그를 바라보며 옥좌에 앉아 내 목에 겨눠질 칼날을 기다렸다. 죽음이 두렵지는 않았다. 나는 불사의 왕이었으므로.
* * *
세 달째 나는 살아 있다. 나의 바람과는 상관없이.
나의 불사는 생각보다 훨씬 강력한 능력이었다. 저렴한 가격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벌써 두 달 전부터 죽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도 이루어질 기미는 없어 보였다. 이처럼 강력한 영혼의 감옥은 없을 것이다.
“신기하단 말이야.”
야비한 표정의 남자가 나지막하게 감탄을 터뜨린다. 나는 그가 막 뽑아낸 내 이빨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고문관이 시도 때도 없이 쏟아붓는 잔인한 짓거리들 덕분에 내 정신은 상당히 수세에 몰려 있었다.
지금 내 이를 뽑아낸 것은 제국군의 총사령관이었다. 고문관은 남자의 뒤에서 쥐새끼처럼 얌전하게 서 있다.
나는 말끔하게 차려입은 제국군의 총사령관을 간신히 올려다보았다. 기사 출신의 아주 높으신 양반.
나는 이가 몽땅 빠진 입으로 비소했다. 뱃속의 검은 짐승이 고통을 주워 먹고 기어 나와 함께 웃어 주었다.
“어떻게 살아 있을 수 있지? 마치 사람이 아닌 것 같아. 아무리 잘라 내도 계속 재생하는군.”
그가 나를 바라본다. 눈 속에는 들끓는 탐욕이 가득하다. 불사가 탐이 나는 것이겠지.
처음 의례적으로 고문한 뒤 나를 죽이려던 이들은 나의 불사를 발견하고 고문의 목적을 바꾸었다. 불사의 비법, 그것이 이들이 찾는 것이다.
“말해 봐. 말하면 풀어 준다니까? 아. 이가 없어서 말하기 힘든가?”
조롱하며 웃는 그에게 나는 피 섞인 침을 뱉었다. 침이라곤 해도 거의가 피였다.
시뻘건 액체가 놈의 얼굴에 뿌려진다. 나는 즐겁게 그 모습을 구경했다. 고문관이 허둥지둥 닦을 것을 건네자 놈은 느릿한 동작으로 내 침을 처리했다.
뒤늦게 내 눈에 스민 웃음을 발견한 놈이 빙긋 마주 웃는다. 그리고 짧은 명령.
“계속해”
고문관은 공손하게 허리를 숙여 보이더니 나를 돌아보고 활짝 웃었다.
놈은 고문관의 어깨 너머 한 발자국 떨어진 위치에서 흥미로운 시선으로 이 짓거리들을 감상하고 있었다.
즐거운 여흥이라도 발견한 것처럼 반짝이는 그 눈동자는 순수하기까지 했다.
아마도 내 얼굴은 몹시도 흉악하게 일그러져 있을 것이다. 나는 줄기줄기 치솟는 증오와 악의를 이번에는 내리누르지 않았다.
그리고 순간, 칼끝이 입 안으로 파고들어 오기 시작했다.
입 안 가득한 피 덕분에 혈액 특유의 쇠 맛에 무뎌졌음에도 불구하고 살을 파고들어 오는 쇠를 느낄 수 있었다.
불타는 얼음 칼날에 찔린 것처럼 뜨겁고 섬뜩하게 차가웠다.
날카로운 칼날에 떨어져 나간 내 살점은 집게에 붙잡혀 있음에도 불구하고 꿈틀꿈틀 움직여 필사적으로 본래 자리로 돌아가려고 했다.
불사의 힘이 관장하는 압도적인 재생력. 이 저주가 그렇게 탐이 나는 모양이다.
일반적인 인간들과 궤를 달리하는 재생력 덕분에 어디서도 볼 수 없는 광경이 연출되고 있었다.
잘려진 단면에서 근육 다발이 조금씩 뻗어 나와 나를 향해 팔랑거린다. 마치 헤어진 연인이 손을 잡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 같았다.
그러나 총사령관 놈과 고문관은 그 애처로운 광경을 보고도 재미있다는 표정만 지을 뿐이었다. 서커스라도 보고 있는 것 같은 유쾌함이었다.
가만히 그 광경을 바라보던 놈은 거의 맞붙기 직전의 살점을 툭 찢어 내듯 잡아당겨 미련 없이 떨어진 쪽을 바닥에 버렸다.
나는 내 모든 신체에 그 반복적인 고문을 겪고서야 겨우 그에게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죽지 않는 포로에게는 휴식도 필요 없었다. 총사령관 놈이 충분히 흥미를 채우고 나자 이번에는 고문관이 천천히 칼을 집어 들었다.
끔찍하고 고통스러운 고문들이었다. 보통의 죄인들은 하루도 견디지 못하고 죽어 버려서 몹시 아쉬웠다며 그가 이따금씩 나를 칭찬했다.
총사령관은 모든 고문을 감상하고 우아한 태도로 등 돌려 고문실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고문관은 한구석에 놓은 마편을 집어 들었다. 얇고 탄력적으로 휘는 막대의 끝에 작은 쇳조각이 붙어 있는 것이다.
잠시 그것을 홀린 듯이 바라보던 고문관이 불시에 손을 휘둘렀다. 공기를 찢는 소리와 함께 뺨에 화끈한 통증이 일었다.
사람의 살에 댈 물건이 아닌지라 스치는 곳마다 살이 쭉쭉 패었다. 놈은 내 몸에 상처의 그림이라도 그리는 것처럼 즐겁게 놀고 있었다.
제 가학성을 남김없이 드러내던 고문관이 조용하고 나긋나긋하게 입을 열었다.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모를 4왕자라지?”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상황이 못 되었다. 그러나 놈은 제 말에 장단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지 마편을 다시 휘둘렀다. 짜악 하는 소리가 추임새처럼 이어졌다.
“너 같은 놈들은.”
마음의 가장 어두운 부분에 고문관의 말이 손톱을 박는다. 듣지 않았지만 이어질 다음 말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평생 제대로 된 인간이 못 돼.”
박힌 손톱이 그대로 긁어내려졌다. 상처 사이로 스산한 감정이 피처럼 몽글몽글 솟아오른다.
어슬렁거리면서 기어 나온 검은 짐승이 즐거워하며 그것을 핥았다. 킬킬거리는 웃음이 들리는 것 같았다.
한때 데파르가 나의 아버지가 되는 꿈을 꾼 적이 있다. 차분하고 단단하게 올곧은 그는 나의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 대신 이렇게 남았다고 해도 나는 여전히 그에게 빚을 지고 있었다. 아니, 빚이라는 말은 틀렸다. 그것은 갚을 수 있을 때 쓰는 말이니까.
그는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나에게 신뢰와 빛을 가르치고 따듯한 양지의 삶과 미래를 가르쳤다.
그것은 결코 계산적으로 갚아 낼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내가 그에게 바칠 수 있는 것은 오직 끝없는 존경과 충성뿐이었다. 그리하면 언젠가는.
그러나 그 미래가 지금은 어째서 이리도 검고 어두운 걸까. 분명히 아름답게 빛나는 것이었는데.
나는 여전히 그가 나를 구하러 올 거라 믿고 있는데. 그래, 믿는다. 데파르는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
저 녹슨 강철 문을 열고 들어와 내 피폐해진 육신을 안고 울어 줄 것이다.
“너 같은 놈들 많이 봐 왔지. 딱 보면 안다고. 바닥을 굴러먹던 놈들 말이야. 봐라, 명예도 긍지도 없이 이런 치욕에 그대로 굴복하고 있지 않나.”
고문관은 감흥 없는 어조로 설교하듯 주절거렸다. 문장마다 마편이 날아들어 살을 찢는다. 짜악 하는 소리가 실제 통증보다 더 아팠다.
그러나 가장 아픈 것은 고문관 놈의 말이었다. 할 수만 있다면 놈의 혀를 잘라 내고 싶었다.
“그래도 속은 시커멓고.”
마편이 다시 날아든다. 뺨에 피가 튀었다.
“멍청하고.”
내리쳐지는 마편. 나는 이를 악물고 그저 그 고통을 견뎠다. 시간이 가고 고문관이 지치면 쉴 수 있을 것이다. 놈도 슬슬 이 짓거리가 지겨워지는 모양이었으니.
“약하고.”
마편이 연이어 날아든다. 어깨, 얼굴, 머리 할 것 없이 가리지 않고 찢어 내었다. 상처는 찢김과 동시에 아물기 시작했다.
고문관은 반응 없는 내 턱에 마편을 가져다 대고 힘을 주었다. 저를 쳐다보게 하는 그 행동에 나는 한껏 악을 담아 노려봐 주었다.
“이용해 먹기도 좋지.”
이용. 맞지 않았는데도 나는 무언가에 후려 맞은 것처럼 멈칫했다. 그 반응을 예리하게 감지한 고문관 놈이 나른하게 웃는다.
뱀처럼 가증스러운 눈은 잔인함으로 번들거리고 있었다. 금방 재생하는 몸보다는 낫지 않는 정신에 상처를 입히는 것이 정답이라 생각된 모양이었다.
“4왕자라곤 해도 그뿐이지. 실제 권력은 없었지 않나. 너를 정말로 사랑하기라도 했을 것 같나? 이봐, 생각해 봐. 너도 알잖아. 그냥 그 용도였던 거야.”
나는 고통 속에서 그 악마 같은 속삭임을 무시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놈의 혓바닥에 놀아나는 짓거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지독한 말들이었기 때문에 듣고 있기가 괴로웠다.
고문으로 약해진 정신에 쏟아지는 말들은 껍질을 벗긴 살갗에 문지르는 소금처럼 적나라하게 고통스러웠다.
놈이 도발할 때마다 손아귀에 마법을 모으고 싶은 충동을 억제하는 것은 정말로 어려운 일이었다.
나의 마법은 무언가를 태우거나 부수는 용도로는 적합했지만 주변 상황을 감지하는 데는 쓸모가 없었다.
근처에 대한 정보 없이 섣불리 힘을 사용했다가는 개미 떼 같은 군대에 둘러싸일지도 모른다. 그러한 상황 판단하에 나는 간신히 자제하고 있었다.
이대로 계속 살아 있기만 한다면 언젠가 소문을 듣고 데파르가 나를 구하러 올 것이다. 나의 기다림은 그런 희망을 원동력으로 삼고 있었다.
그러나 어느 날 유난히 기분 나쁘게 히죽거리던 고문관이 슬쩍 말을 흘렸다.
“제국으로 너를 데려가서 실험체로 쓸 거야. 평생 실험당하겠지. 즐겁게 여기라고. 가치 있는 일을 하게 되는 거니까 말이야.”
결과적으로 고문관의 그 말은 그를 죽여야겠다는 결정에 핵심적인 이유가 되어 주었다. 나는 몹시 다급해져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이곳을 나가야 한다. 왕성 지하라면 데파르가 어떻게 구하러 올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제국으로 간다면 그가 찾아올 수 없었다.
찾아온다고 해도 거절이었다. 사지나 마찬가지인 곳에 데파르를 끌어들일 수는 없지. 그래, 기다리지 말고 찾아가는 거다.
“그때가 되면 너와도 끝이니 아쉬움이 없도록 한껏 놀아야겠어.”
제 운명을 모르고 고문관이 히죽 웃었다. 웬일로 야심한 시간 찾아왔다 했더니 그런 이유였나.
어쨌거나 잘된 일이다. 시간이 시간인 만큼 탈출하는 것은 낮보다 수월할 테지.
“그래, 오늘은 등뼈를 하나씩 뽑아 볼……?”
고문관은 말을 채 잇지 못하고 벽에 처박혔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얼굴이었지만, 알고 있어도 어차피 막지 못했을 것이다. 마력에 의한 것이었으니까.
그가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몸을 추스르는 사이 나는 손을 천장에 고정하고 있는 쇠사슬을 끊어 내었다.
나뒹굴던 고문관이 경악한다. 나는 안타까운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마력을 아껴야 하는 처지라 충분히 괴롭혀 줄 수 없는 점이 아쉬웠다.
그러나 시간을 끌면 사람을 모으게 될 것이다. 재수 없이 총사령관 놈이라도 마주치면 끝장이었다.
고문관 놈의 목을 단숨에 자르고 감옥을 뛰쳐나왔다.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웠으나 곧 방향을 잡고 달리기 시작했다.
보초병 둘을 그대로 불태우고 문을 나서자 눈발이 휘몰아치는 공터가 나타났다.
나는 시든 잔디를 밟고 그저 달렸다. 차가운 바람이 폐부 가득 밀려든다.
식은땀에 젖은 넝마 같은 옷이 몸에 엉겨 붙었다. 잠시 멈추고 숨을 몰아쉬다가 문득 불길한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사냥개가 컹컹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병사들이 개를 푼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해도 너무 빠른 반응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꽁꽁 얼어붙은 발이 깨지는 것처럼 아팠다.
휘몰아치는 추위 속에서 뺨 위를 흐르는 뜨거운 눈물이 그나마 위안이었다.
그러나 울면 쉽게 지친다. 나는 눈물을 삼켜 목구멍을 녹이며 몸으로 추위를 갈랐다.
추적의 손길은 불붙은 기름처럼 선명하고 크게 퍼져 나갔다.
넝마 사이로 불어닥치는 시린 바람을 움츠린 손으로 막으며 고개를 드니 먼 곳에 둥근 불빛의 선이 보인다. 그것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기사들의 포위망이다. 불빛의 정체는 횃불이었다. 나는 뻣뻣해진 다리를 채찍질했지만 지쳐 가는 육신은 마음처럼 움직여 주지 않았다. 내가 구입한 능력은 불사이지 지치지 않는 체력이 아니었다.
절망이 두 무릎을 내리치는 것을 애써 막으며 나는 악문 이에 힘을 주었다.
어찌나 세게 물었는지 이가 잇몸 속으로 들어가 버릴 것 같았다. 더 이상은 움직이기 힘들었다.
몸에 기운이라는 것이 있기나 했었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한 걸음 한 걸음이 무거웠다.
이대로라면 잡히고 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