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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186화 (186/256)

6화

그러나 고분고분하게 잡힐 생각은 없다. 나는 꺼져 가는 마법을 양손 가득 모았다.

긴장 때문인지 추위 때문인지 모를 이유로 이가 딱딱 부딪쳤다.

완전히 포위되었다.

어디로도 나갈 수 없었다. 나는 조용히 체력을 모으며 기사들의 접근을 기다렸다.

지금 이 순간에도 나의 멍청한 머리는 구원을 바라고 있다.

그날처럼 데파르가 나를 구하러 오기를, 내게 달콤한 삶을 선물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나의 구원자가 건재하게 나타나기를 바랐다.

그러나 절대로 그럴 일은 없겠지. 이유 모를 설움 속에서 아주 예전에 잊어버렸다고 생각했던 어머니가 불쑥 떠올랐다. 알 수 없는 이유였다.

그녀는 나에게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흔들리는 그녀의 그림자에 다가서는 기사들의 횃불이 겹쳐진다.

“순순히 항복해라.”

마침내 도착한 기사가 성의 없는 어조로 권유했다. 항복 권유는 일종의 의례 같은 것이다.

나는 그 말을 콧등으로 무시하고 대답 대신 불덩이를 던져 주었다. 내게 말을 건 기사가 순식간에 숯덩이로 변했다.

동료의 죽음에 기사들의 눈에서 섬광이 튀었다. 그 빛이 검에 옮겨붙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흉흉한 칼날 감옥에 갇힌 것 같다. 처음과는 달리 신중한 안색으로 싸움에 임하는 그들에게 나는 다시 불덩이를 던져 주었다. 그것이 싸움의 효시가 되었다.

내가 몹시 지쳐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싸움은 격렬했다. 격돌 속에서 기사 스물이 불타 죽었고 나는 팔을 네 번 잃었다.

마법은 바람 앞의 촛불처럼 불안정했다. 마법을 끌어모으다가 되지 않으면 기사들의 얼굴이나 손을 물어뜯기도 하고 흙을 뿌리기도 했다.

도망치다가 싸우고, 혹은 기어서 칼을 피하기도 했다. 그런 싸움 방식은 제법 효과가 있는 듯했다. 비록 지원군이 도착하기 전까지에 불과했지만.

어느 순간 마법이 뚝 끊겼다. 마법력의 고갈은 칼날에 저항할 수단이 없어졌음을 의미했다.

순식간에 정강이가 베어져 나가고 나는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 위로 칼날이 쏟아진다.

누운 채 올려다본 기사들의 얼굴은 악귀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져 있었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팔다리가 잘리자마자 재생되기 시작하는 적이란 정말로 악몽이 따로 없겠지.

내 재생 능력이 어지간히 두려웠던 모양인지 기사들은 나를 토막 치고 채 썰어 기름을 끼얹어 불태웠다.

수많은 횃불이 탑처럼 내 몸 위에 쌓인다. 뜨겁고, 밝았다. 그것이 나의 최후가 되었다.

* * *

“무슨 헛소리야!”

소리를 지른 것은 붉은 도끼였다. 그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다른 이들의 표정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는 이야기를 끊고 좌중을 둘러보며 질문했다.

“무슨 문제라도 있나?”

오랜만에 옛 기억을 떠올렸던 탓에 나는 꽤 감상적인 상태였다. 모처럼의 회상을 방해받은 탓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러나 내 기분과는 상관없이 붉은 도끼는 주먹을 불끈 쥐고 소리쳤다. 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였다.

“어디까지 하나 두고 보려고 했더니 도저히 못 참겠군. 이 허풍쟁이 같으니!”

“그래, 처음부터 미끈하게 생긴 낯짝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헛소리도 정도가 있지.”

“우리를 완전히 바보로 아는군!”

붉은 도끼를 필두로 여기저기서 격양된 말소리가 터져 나왔다. 놀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는지 대놓고 불쾌해하는 얼굴의 작자들도 있었다.

어쨌거나 둘러앉은 여행자들은 입을 모아 비아냥거리기 시작했다. 일제히 쏟아지는 비난 속에서 슬쩍 아서를 바라보자 그도 불편한 얼굴로 내 시선을 외면했다. 모두들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나는 제일 먼저 소리친 붉은 도끼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는 내 시선을 느끼고 잠시 멈칫하더니 질세라 눈을 부릅뜨고 마주 봐 왔다.

그 외에도 몇 명을 더 시야에 담았다. 다른 이들을 선동하듯 사람들을 향해 소리치고 있었다.

그들 전부가 흥분한 것은 아니었고, 그중에는 재미있는 놀이라도 발견했다는 듯이 흥미진진한 표정으로 이 사냥 아닌 사냥을 관전하고 있는 이도 있었다.

“그런 헛소리를 못 하도록 쓴맛을 보여 주겠어!”

붉은 도끼가 그렇게 선언하는 순간, 사악 하고 공기가 미끄러지는 소리가 났다.

‘어라?’ 하는 멍청한 소리를 끝으로 순식간에 적막이 찾아든다. 모닥불의 불똥 튀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소란스러운 것은 떨리는 눈알뿐이다. 사람들의 경악한 시선이 붉은 도끼와 그 주변인들에게로 쏟아졌다. 단숨에 팔다리가 토막 쳐진 붉은 도끼가 피 웅덩이 속에서 바르작거리고 있었다.

순식간에 유혈이 낭자해진 상황에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얼어붙었다.

내 옆에 앉은 아서는 완전히 석상이 되었다. 언뜻 보니 지린내 나는 액체가 바지를 적시고 있는 듯싶었다. 빠르기도 해라. 그것참, 신속한 방광이로군.

“으, 으아아아!”

“마법사다!”

“와아아악! 와아아아악!”

갑자기 정신이 돌아온 듯이 누군가가 발작하듯 비명을 질렀다.

다채로운 비명 소리 속에는 제법 상황 판단에 능한 사람도 있는 듯싶었다. 그 와중에 내가 마법사라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필사적이었으니.

안타깝게도 그 사람이 아서는 아니었다. 꼬챙이처럼 마른 그 청년은 비명도 못 지르고 그저 눈물만 줄줄 흘리며 내 옆에서 달달 떨고 있었다. 내게서 떨어질 용기도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것이 우습기도 해서 어깨를 짚었더니 하늘로 솟을 기세로 펄쩍 뛴다.

아까까지의 넉살 좋은 청년은 어디로 간 거지. 나는 안타까움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사람들은 불 속에 던져진 메뚜기처럼 펄쩍펄쩍 뛰어 내게서 멀어지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다리가 풀렸는지 사지가 멀쩡한데도 불구하고 바닥에서 버르적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흠.”

쏟아지는 공포 어린 시선 속에서 나는 묘한 기분에 빠져들었다. 조용히 이야기를 들을 때가 좋았는데 말이지.

갑자기 미친놈들이 날뛰는 현장으로 변한 이곳이 몹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볍게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사이 사람들은 내가 만들어 둔 막을 두드리며 이곳에서 나가게 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급하기도 하지, 잠시만 기다려 봐. 생각할 시간 정도는 기다려 줄 수 있지 않나?

내가 만든 결계를 두드리던 사람들은 그 행동이 소용없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일제히 머리를 박고 빌기 시작했다.

그 사이에서 아서는 아, 으, 하고 지진아처럼 입 안으로 맴도는 비명을 더듬더듬 내뱉고 있었다.

모두가 무릎을 꿇거나, 혹은 무릎을 잃은 이 일대에서 그가 유일하게 서 있는 사람이었다.

“사, 살려 주세요!”

내 시선이 스윽 가서 닿자 아서가 꼿꼿하게 얼어붙은 채 외쳤다. 그 즈음 나는 짧은 고민의 답을 내린 상태였다. 그 답에 이들의 죽음은 필요치 않다.

“좋아.”

고개를 끄덕여 긍정하자 아서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사람들도 고개를 번쩍 들고 나를 바라보았다.

다들 살았다는 표정이 만연했다. 기쁨이 넘실거리는 그들을 바라보며 나는 손가락을 튕겼다.

“……?”

아마도 말을 할 수 없을 것이다. 폐가 없을 테니까.

나는 바닥에 주르륵 놓인 열댓 개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모닥불가에 다시 앉았다. 고요하다.

팔다리가 잘려 고통의 비명을 지르던 자들도 지금은 예의 바르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상황 파악이 되지 않았는지 머리들이 얼떨떨하게 시선을 교환한다. 시야가 너무 낮아진 것이 이상한 모양이었다.

이윽고 제 모습을 깨달은 머리들 사이로 소리 없는 경악이 퍼져 나갔다.

“살려 줄게.”

죽인 것은 아니다. 머리들은 모두 살아 있었다.

비록 구조적인 결함으로 인해 말을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보고 듣고 입을 움직이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

아, 생각도 할 수 있군. 다급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을 보니 그 머릿속이 얼마나 소란스러울지 상상이 간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생각들보다는.

“이봐.”

주의를 끌자 곧장 시선이 모여 오는 것이 매우 흡족했다. 부릅뜬 눈을 화자에게 모으고 조용히 경청하는 것을 보니 비로소 이야기를 들을 준비가 된 모양이다.

아주 올바른 청자의 태도였다. 모닥불가에 모인 머리들과 이야기꾼. 훈훈한 풍경이다. 나는 미소 지으며 상냥하게 말했다.

“들어 봐, 이제 재미있는 부분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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