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87화 (187/256)

7화

* * *

데파르.

어둠 속의 심지에 상념의 불꽃이 피어오른다.

그리움과 걱정, 아릿한 슬픔과 함께 묵직하게 벅차오르며 심장을 가로지르는 감정들. 그 사이로 여러 가지가 어른어른 매달렸다.

예를 들어, 왕은 어떻게 되었을지. 그리고 내 몸은 어떻게 되었을지.

아아, 아마도 나를 죽인 기사들은 문책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총사령관이라는 작자는 내 몸으로 불사를 얻어 낼 궁리를 하고 있었으니 나를 죽인 기사들에게 분통을 터뜨렸겠지.

이 생각은 언제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언제쯤 되면 저승에 도착하는 거지? 죽은 상태라는 건 생각보다 시시하군.

지옥도 천국도 없이 그저 이렇게 새카만 공간 속에서 혼자 넋두리나 하는 것이 죽음인가. 이런 걸 그렇게나 두려워했다니. 우스울 따름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문득 이질감을 느꼈다. 촉감이 느껴진다. 뺨에 거칠거칠한 직물이 닿는 느낌. 몸이 없을 텐데 촉감이라니?

설마 잿더미에서 부활하기라도 했단 말인가. 만약 그게 정말이라면 이 능력으로 어딘가에서 그럴듯한 신의 시늉이라도 하고 살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연한 마음에 반쯤 농담처럼 그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실소했다.

그러다가 정말로 웃어진다는 것을 깨닫고 천천히 눈을 떴다. 내가 보고 있던 새카만 공간은 내 눈꺼풀 안쪽이었던 것이다.

여기는 어딜까.

눈에 보이는 것은 지극히 평범한 낡은 나무 천장이었다. 왕궁 생활에 익숙해진 내 눈에는 좀 궁색하게 보였다.

가만히 정신을 집중하니 가난한 집 특유의 냄새가 난다. 청결하지 못한 냄새. 오물과 오래된 식량이 뒤섞인 쿰쿰한 냄새.

나는 그 냄새를 맡다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좀 더 많은 것을 볼 수 있었다.

낯선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매우 익숙한 곳이었다. 저쪽 세상으로 넘어가기 전까지 살던 내 원래 집이다.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울며 잠들던 그 침대였다. 다리 한 짝이 부러진 것을 대충 고쳐 놓아 얼기설기한 것까지 똑같았다.

경악하지 않는 것이 이상할 것이다. 이 상황은 나를 혼란에 빠뜨리기 충분했다.

생각이 얽히고 꼬여 최소한의 추측도 할 수 없는 진탕으로 빠져든다.

어째서? 왜? 어떻게? 따위의 단편적인 질문이 내가 던질 수 있는 가장 정형화된 의문이었다.

설마 그 모든 것은 꿈이었던 걸까? 아버지에게 흠씬 두들겨 맞고 울며 잠든 어린아이의 슬픈 꿈에 불과했던 건가. 그 모든 일이.

그럴 리가 없다. 증거를 찾아야 했다. 그 일들이 꿈이 아니라고 증명할 만한 증거를.

매우 악질적인 장난에 말려든 기분 속에서 나는 침대를 짚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곧바로 증거를 찾아내었다. 원래대로라면 없었어야 할 이질적인 것이 내 방 구석에 열려 있었기 때문이다.

빛이 소용돌이치는 차원 문. 내 방의 쓰레기 같은 물건 더미 틈에 열려 있던 탓에 발견이 조금 늦었다.

그 신비로운 자태는 모든 초현실적인 일들을 증명하기에 충분했다. 그래, 꿈이 아니었던 거다.

나는 정말로 차원을 넘어 저쪽 세상으로 넘어갔었다. 그렇다면 지금은 왜 이곳에 있단 말인가?

지난 시간들의 실존에 대한 확신을 얻고 나자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이대로 자리에 앉아 의문만 던져 봤자 얻을 것은 없었다.

갑작스레 이곳으로 온 것은 당황스럽지만 어차피 저쪽 왕궁에서도 간혹 생각하던 일이었다.

아버지를 이길 정도로 강한 남자가 되고 나면 언젠가 돌아와서 나를 업신여긴 작자들에게 그 수모를 갚아 주고 말겠다고 다짐하지 않았던가.

어떤 원리로 돌아오게 된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더욱 상황을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나갔다. 낡은 경첩이 요란하게 우는 바람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러나 다행히 거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닥에 아버지가 어질러 놓은 것들이 잔뜩 깔려 있긴 하지만 그 주범은 어디에도 없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빛 사이에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아버지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마을 어디에서도.

아버지뿐만이 아니다. 마을 전체가 텅 비어 있었다. 하루 종일 마을을 돌아다닌 결과 사람이 아닌 개나 곤충 따위의 다른 생물들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상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내 시선이 닿아 있을 때는 멀쩡히 잘 흐르던 시냇물이 의식하지 않으면 금세 멈춰 버린다.

게다가 시간이 한참 지났는데도 마을은 여전히 여명의 푸른빛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해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납득하기란 쉬운 것이었다. 어차피 어릴 때 이후로 거의 잊고 있던 마을이니 새삼 슬플 것도 없었다. 있으나 마나 하다고 여기던 마을 어찌 되든 알 바 아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대략적인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이 마을은 내가 떠난 후 이렇게 텅 비어 완전히 멈춰 버린 모양이었다.

날이 밝지 않는 것을 보니 마을뿐만이 아니라 이 세계 전체가 멈췄을 확률이 높았다.

일단 상황 판단이 끝나자 나 혼자만의 작은 축제가 시작되었다.

이 집 저 집 할 것 없이 마구 쳐들어가 맛있는 것을 훔쳐 먹고 값나갈 것 같은 것을 집어 들고 나왔다.

불한당처럼 마음에 안 드는 것을 깨부수기도 하고 아버지의 침대를 엉망으로 만들기도 했다.

실컷 배를 채우고 마을에서 가장 깨끗하고 부유한 집의 침대에 앉아 주워 온 것들을 늘어놓고 있던 나는 불현듯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고문에 너무 지쳤던 모양이다. 고작 마을의 하잘것없는 재물을 모아 놓고 즐거워하다니.

그동안 즐거울 것이 너무 없어 그런 것에 굶주렸던 것 같다. 이제라도 자각했으니 다행한 일이다.

수모를 갚아 주겠다고 마음먹었던 마을이 이 꼴이 된 건 아쉬운 일이지만 그 외에도 원수는 산적할 만큼 많이 있지 않던가.

해묵은 증오가 어슬렁어슬렁 기어 나와 주변을 배회한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은 채찍을 닮아 있다.

워낙 오래되어 색마저 바랜 그 감정은 이제 원래의 들끓던 빛깔이 아니지만 그 음험함은 여전하다. 나는 손을 내밀어 처음으로 그 짐승을 쓰다듬어 주었다.

짐승은 나와 함께 이를 드러내고 웃어 주었다. 사이사이에 피가 맺히는 느낌으로 나는 복수를 곱씹었다.

어설프게는 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짓밟을 것이다. 두 번 다시 일어설 수 없을 정도로 밟은 후, 그 자리에 나의 데파르를 앉혀 놓을 것이다. 최고의 자리는 그에게나 어울리는 법이니까.

데파르가 죽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 그는 쉽게 죽을 사람이 아니었다. 설령 죽었다고 해도 내가 되살려 낼 것이다.

그래, 나는 그럴 힘이 있다. 바라는 모든 것을 이루어 낼 힘이 있는데도 사용하지 않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일단은 모든 일이 끝난 후 데파르를 찾아 방문하자. 그리고 준비된 옥좌에 그를 앉히는 것이다.

그러자면 빛나는 그것들이 아주 많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 위치는 손등의 문양으로 알아낼 수 있겠지.

* * *

“혼자 왔니?”

여관 주인이 의아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원래 세상에서 이것저것 챙겨 온 탓에 거지꼴은 면해서 박대는 받지 않았지만 그래도 홀로 여관을 찾는 어린아이라는 것은 확실히 기묘하다.

지금 이 몸의 나이는 아홉 살이지만 여관 주인은 더 어리게 가늠하는 것 같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패스파인더로 막 각성할 무렵에는 굶는 것이 일상이었으니.

“이곳에서 부모님을 만나기로 했습니다. 방 있습니까?”

“뭐 그렇긴 한데.”

대충 둘러대자 떨떠름한 시선이 내 작달막한 체구에 와 닿는다. 어린아이가 쓰기엔 지나치게 딱딱한 어투였던 모양이다.

하지만 바꿀 생각은 없었다. 외형은 어차피 별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나는 곧 변신할 수 있게 될 테니까.

“사흘 묵겠습니다.”

“4페니카다.”

미심쩍어하던 얼굴의 여관 주인도 내가 대단히 익숙한 태도로 돈을 꺼내자 별일 아니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미리 바꾸어 둔 돈을 꺼냈다.

저쪽 세상에서 돈을 챙겨 오긴 했지만 당연하게도 이곳의 화폐와는 모양이 많이 다르다.

그래서 값나가는 것들을 팔아 돈을 만들어야 했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었다. 어린아이에게 누가 제값을 주고 물건을 사려고 하겠는가?

하지만 제값을 받지 않아도 별로 상관없었다. 요 몇 달간 나는 꽤 많은 것들을 알아낸 상태였다.

며칠만 있으면 저쪽 세상으로 다시 넘어갈 수 있다거나, 내가 집어 온 저쪽 세상의 물건들이 돌아갈 때마다 원래대로 복구되어 있다거나 하는 것들이었다. 물건이 무한하게 생겨나는 이상 돈은 그저 무겁기만 한 물건에 불과했다.

중요한 것은 그깟 돈이 아니다. 나는 물질적인 모든 것에서 초탈했다. 금빛의 그 구슬만 모은다면 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바늘이 이 근처를 가리키고 있으니 곧 조금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점점 더 강해질 수 있다.

이번에 그것을 얻는다면 가장 먼저 이 어린아이의 모습을 벗어 버릴 생각이었다. 이 모습은 너무 불편하다.

“먹을 것도 좀 주십시오.”

“뭐로 줄까?”

“여기서 먹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걸로 부탁드립니다.”

내 공손한 태도에 여관 주인은 고개를 끄덕이고 주방으로 사라졌다. 나는 근처 테이블을 하나 잡고 앉아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배가 고픈 것은 아니다. 내 목적은 다른 곳에 있었다. 내가 그렇게 사라진 후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좀 알아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여관에는 온갖 작자들이 몰려들기 마련이니 이곳에서 사나흘 정도 머물면서 낮에는 근처에서 금빛의 그것을 수색하고 저녁에는 정보를 좀 모을 생각이었다.

정보 길드라는 것도 있지만 그리 대단한 것은 못 된다. 그렇게 대단한 정보를 일개 길드에서 다룬다면 나라에서 가만히 두지 않았겠지.

그런 곳에서 취급하는 정보는 거의가 이런 여관 바닥에서 수집된 것들이다.

그러다 보니 정보를 얻으려고 해도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확실히 알고 가지 않으면 헛돈을 쓰기 딱 좋았다.

내가 원하는 정보는 그런 방식으로는 얻을 수 없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 경험상 정보상이라는 것들은 대부분 혀만 잘 놀리는 사기꾼에 불과했다.

정보상이 파는 정보가 전부 진실이라는 보장이 어디 있는가?

퍽이나 순진한 작자들은 아무 생각 없이 그들이 제 직업적인 의무를 성실히 수행할 거라고 생각하지만 대부분은 아니었다.

진짜 직업을 가진 경비병도 농땡이를 치는 세상에, 혀로 벌어먹는 비렁뱅이에게 성실함을 논하다니. 코웃음이 나올 지경이다.

슬슬 해가 지기 시작하자 막 마을에 도착한 여행자나 일을 마친 일꾼들이 여관 안으로 밀려들었다.

여관은 음식과 술을 제공하기 때문에 보통 선술집이 없는 마을에서는 여관이 선술집의 역할을 대신 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온갖 주정뱅이들이 몰려들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그중 5할은 허풍이고 3할은 세상에 대한 불평, 2할 정도가 진지한 이야기다.

나는 모든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제국은 다행히 나에게 수배령을 내리거나 하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공식적으로는 내가 왕이던 나라의 왕족은 모두 그 자리에서 처형되었다.

하긴, 재가 된 사람을 수배하려 드는 행위는 신중한 태도로 보이기보다는 제정신이 아닌 작자로 보이게 할 확률이 높았다.

그 외에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 한 나라가 멸망했는데도 너무나 조용하다.

아마도 제국이 압도적인 무력으로 순식간에 왕궁을 점령한 덕분에 백성들의 희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왕이 하던 일들은 임시 총독이 대신 하고 있다. 민심을 얻기 위해 군량을 푼 덕분인지 사람들의 얼굴빛은 오히려 전보다 더 좋았다.

가면 같은 평화로움 속에서 나는 바늘만을 쫓았다. 마침내 도착한 이 마을은 콜차트나라는 조금 웃긴 이름의 마을로 베바트나와 바르트나의 사이에 있는 곳이었다.

혹시나 알아보는 자가 있을까 경계했지만 그런 스스로가 한심해질 정도로 아무도 내게 신경 쓰지 않았다. 수도와도 꽤 떨어진 곳이다 보니 더 나라 사정에 영향을 받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작은 체구 탓에 가끔 주목을 받긴 했지만 대부분의 시간은 무난하게 흘러갔다.

지겨울 정도로 바늘을 따라 걷고 여관으로 돌아와 주정뱅이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거친 작자들이라 시비를 걸어오거나 하는 귀찮은 일이 생길까 염려했지만 예상 밖에 그런 일은 없었다.

하긴, 꼬맹이와 실랑이하는 것은 아무리 갈 때까지 간 놈이라고 해도 부끄러울 수밖에 없겠지. 그러나 다른 의미로 귀찮은 일은 종종 있었다.

시선.

음흉한 속내를 날름거리며 탐욕스런 시선으로 뒤통수를 핥아 오는 시선이 그것이다.

승냥이마냥 호시탐탐 나를 노리지만 스윽 돌아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능청을 떤다. 이런 것들은 내버려 두면 오히려 더 귀찮아지는 법이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주점을 나갔다. 예상대로 은밀하게 뒤를 밟아 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밤의 거리를 홀로 걷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하지만 이 마을은 등을 꽤 많이 걸어 두는 편이라 다른 마을보다 사정이 나았다.

그러나 그런 것도 내가 지금 향하고 있는 골목까지 오면 아무 소용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가야, 이런 시간에 혼자 다니면 안 되지.”

충분히 들어왔다 싶었는지 뒤따라오던 남자가 히죽 웃으며 말을 걸었다. 많이 얻어맞고 다닌 듯 어딘가 기형적인 얼굴이었다.

평범한 어린아이라면 보는 순간 울음을 터뜨렸을지도 모른다. 어쨌거나 나는 만족스러웠다.

이곳은 충분히 은밀하다. 고향에 돌아온 것 같은 안정감이 느껴졌다.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를 더러운 골목은 다른 이들에게는 매우 위협적으로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안정감을 느꼈다. 아마 내 앞에 있는 작자도 똑같은 감정을 느낄 것이다.

“꼬마야, 아저씨랑 놀까?”

남자가 슬쩍 뒤춤을 뒤져 포대기를 꺼낸다. 아하, 이거였군. 흔한 수법이다. 납치한 사람을 팔아먹는 그런 일.

시시한 수준이라 갑자기 흥미가 식었다. 나는 손을 들어 남자를 가리켰다. 그리고 불태웠다.

비명을 지를 틈도 없었다. 남자는 순식간에 열화 하여 그 형상 그대로 새하얀 재가 되었다.

그 재마저도 뒤늦게 부슬부슬 흩날려 사라지고 만다. 남은 것은 바람이 씻어 내지 못한 일부의 재뿐이었다.

나는 이런 놈들이 싫었다. 시궁창을 기어 다니는 놈들을 볼 때마다 소거해 주고 싶은 욕망을 참기 힘들었다.

놈들을 보면 나쁜 기억이 벌레처럼 스멀스멀 몸을 기어올라 소름이 돋았다. 역겹다. 역겨웠다. 이유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바늘을 따라 돌아다니면서 나는 종종 이런 식으로 나를 노리는 자를 꾀어내어 일부러 불태웠다.

나중에 변신하는 능력을 손에 넣고 나서도 종종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변해 이런 자들을 불태우기도 했다.

바늘을 따라 걷는 나날은 늘 평탄한 것만은 아니었다. 처음 1년은 정말 온갖 곳을 맨몸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펄펄 끓는 용암 속으로 몸을 던져야 했고, 어느 도시 지하에 있는 그것을 찾느라 기나긴 땅굴을 파야 했다.

그 외에도 바늘이 나를 이끄는 곳은 정말로 고생스러운 곳밖에 없었다.

그나마 누군가의 집에 있다거나 하면 집주인을 죽이고 빼앗아 오면 그만이었지만, 저 구름 위에 있다거나 하면 정말로 딱 미치고 싶었다.

그런 과정 속에서 죽음은 그저 불사를 즐길 수단이 되어 버렸다. 죽고 나서 다시 살아난다.

이것은 대단히 짜릿한 경험이었다. 그러나 곧 당연해졌고 금세 지루해졌다.

나는 물건 하나를 버리는 것 같은 감각으로 내 몸을 다루기 시작했다. 통각을 없애는 능력을 얻은 다음부터는 정말로 그저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약 3년쯤 지나자 그럭저럭 능력을 갖추어 바늘을 쫓는 것이 부쩍 편해졌다.

공간 도약이나 더욱 강한 마법, 다채로운 능력들은 그것을 찾는 일을 단순히 수집 정도의 난이도로 바꾸어 버렸다.

그쯤 되자 나는 이따금씩 데파르가 생각나기 시작했다.

솔직히 데파르에게 바로 달려가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일부러 위치를 찾지 않았다.

그저 그의 생존만을 확인했을 뿐이다. 그를 찾아가는 것은 모든 준비가 끝난 후였다.

더럽고 추악한 일을 끝낸 뒤 아무것도 모르는 척 그의 곁으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나의 목표였다.

물론 그가 황제가 되고자 한다면 제국을 멸망시킨 뒤 왕좌를 그의 구미에 맞도록 고칠 의향도 얼마든지 있었다.

그렇게 흘러간 수많은 시간 속에서 내게 다가온 인연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하나같이 나의 재물을 노렸다. 그런 작자들은 내 손에 불타는 최후를 맞이했다.

그렇게 10년.

바늘을 따라 걷고 찾아내고, 사람을 불태우고 죽이고 빼앗고, 나 자신을 죽이기도 하면서 모은 빛의 화폐는 1만을 헤아리고 손에 넣은 능력은 다 떠올리기도 힘들 만큼 방대했다.

마음만 먹는다면 이 대륙을 세상에서 지워 버릴 수도 있었다.

나는 오랜 복수의 준비가 끝났음을 깨달았다. 이제는 제국으로 향할 때였다.

은혜는 잊어도 원수는 잊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라 했다. 내게 있어 데파르는 눈을 멀게 할 정도로 찬란한 존재이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 빛이 조금 바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복수심은 오히려 더 뜨겁게 불타올랐다. 그날의 고문과 수모는 점점 덧칠되고 과장되어 기억을 갉아먹고 자라났다.

나는 좀 더 냉혹하고 차가운 성격으로 변해 갔다. 불사의 생을 가진 유일무이한 내 앞에서 다른 자들은 비단 앞의 낡은 헝겊처럼 볼품없었다.

누구도 나와 같지는 않았다. 나와 같을 수는 없었다. 나는 특별했다. 이 세상으로 넘어오며 기대했던 특별함을 나는 진작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다. 다만 내가 깨닫지 못했을 뿐.

영혼의 태생 자체가 다르다. 이런 하찮은 것들과는 아예 다르게 만들어진 존재였다. 누구보다도 강해질 수 있고, 누구보다도 우월해질 수 있다.

그런 우월감 속에서 나는 손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하찮은 벌레들에게 자비를 베풀 필요는 없었다.

잠시나마 저런 것들과 뒹굴었던 과거가 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다. 더군다나 저들은 대부분 더러운 제국민이지 않은가? 어디를 가나 있는 흔해 빠진 사람들에 불과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 제국의 경비병처럼.

“방문 목적을 말하시오.”

의례적인 질문이었다. 하지만 나는 의례적인 질문을 싫어한다. 정확히는 그런 쓸데없는 것에 대답하는 것을 싫어했다.

“방문 목적을 말하란 말 못 들었소?”

경비병의 언성이 조금 높아진다. 나는 그의 어깨 뒤로 펼쳐진 제국의 수도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에게 대답을 닦달하던 경비병이 뒤늦게 그 사실을 눈치챈다. 그의 시선이 나와 같은 방향으로 향했다.

“아름다운 도시로군.”

내 감상에 경비병의 표정이 누그러졌다. 대답하지 않았던 이유가 등 뒤의 도시에 넋을 빼앗긴 탓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는 매우 자랑스러운 어조로 나의 감상에 살을 붙여 넣었다.

“수도에 처음 오나 보군. 아름다운 도시지. 어디에도 이렇게 아름다운 도시는 없을 거요. 저 새하얀 첨탑을 보시오.”

경비병은 그 뒤로도 줄줄이 자랑을 늘어놓았다. 경비가 아니라 여행 안내원을 해도 제법 잘할 것 같았다.

그는 이 도시의 자랑이라며 32방위로 열린 거대한 검문소에 대해 찬양을 해 댔고 아름답고 깨끗한 길거리에 대해 떠들어 대었다.

그 말대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그렇게나 탐욕스러운 정복욕을 감추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순백의 황성과 신비하기까지 한 첨탑들, 저 멀리에서도 보이는 거대한 분수나 사람들의 옷차림, 다채로운 지붕 장식들까지. 정말로 아름다운 도시였다.

파괴하기 아까울 만큼.

“흠흠, 내가 말이 너무 많았군. 그럼 슬슬 방문 목적을 말해 주시오.”

잔뜩 흥분해 떠들던 경비는 뒤늦게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고 근엄한 척 요청했다. 나는 감상에 젖어 순순히 내 용건을 말해 주었다.

“이 제국을 멸망시키기 위해서.”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