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88화 (188/256)

8화

경비병의 표정이 잠시 굳어졌다가 곧 멍청하게 풀어진다. 뒤이어 침 튀기는 폭소가 터져 나왔다.

그는 내 말을 웃긴 농담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얼굴에 마주 미소 지어 주었다.

“농담이 아닌데.”

처음은 얕은 지진이었다. 그러나 눈 깜짝할 사이 지진은 가만히 서 있기 힘들 정도로 강해졌다.

동시에 성벽 아래가 칼날을 박아 넣은 것처럼 날카롭게 갈라져 입을 벌린다. 그 사이로 시뻘건 용암이 치솟아 도시를 감싸는 장벽이 되었다.

무겁게 떨리는 공기에 집을 뛰쳐나와 그 광경을 목격한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입을 쩌억 벌리고 경악했다.

특히 내 앞에 서 있는 경비는 제 본분도 잊을 만큼 놀란 모양이었다.

“이, 이건 당신이 한 짓이오?”

용암이 도시를 감싸는 것은 평소에 볼 수 없는 장관인지라 그 광경을 감상하고 있던 내게 경비병이 질문했다.

제법 침착한 편이군. 그 빠른 자기 수습을 칭찬하며 나는 가볍게 고개만 까딱여 긍정해 주었다.

경비병은 손에 든 창을 부술 듯이 세게 잡고 그 끝을 내게 향했다. 아마도 이 창은 곰 인형 대신인 모양이었다.

나는 용맹이라고는 한 방울도 없이 달달 떨리는 창끝을 바라보았다. 창을 잡은 손아귀는 공포로 하얗게 질려 있었다.

“당신은 누구요. 왜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어떻게 이런 짓을 하는 거요!”

중의적인 질문이다. ‘어떻게’라는 것은 대체 어떻게 이런 파렴치한 짓을 할 수 있냐는 뜻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기술적인 원리가 궁금한 것일까. 어느 쪽이든 대답할 생각은 없었다.

나는 가볍게 손을 들어 그에게 흔들어 주었다. 그 손짓을 몹시 경계하며 경비병이 훌쩍 물러났지만 사실 손짓이 없어도 마법은 쓸 수 있다.

그 손짓은 그저 작별 인사였을 뿐이다.

달달 떨고 있던 경비병이 시야에서 휙 사라졌다. 거인이 몸을 일으키는 것 같은 돌풍이 피어오른다.

경비병은 그것에 말려든 것이다. 돌풍은 점점 거대해지며 사방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용암의 뜨거움도 예외는 아니었다. 화염이 뒤섞인 바람은 붉은색이다.

그 안으로 지붕이 으직으직 소리를 내며 빨려 들자 멍청한 얼굴의 거주자가 찢어질 듯 비명을 지르며 침대를 붙잡았다.

그러나 침대와 함께 말려들어 별로 의미는 없는 짓이었다.

살육은 축제와 닮아 있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은 마치 환호 소리 같다. 가만히 듣고 있으면 들뜨게 되는 것도 꼭 닮았다.

화염의 폭풍 속에서 고통과 공포에 찬 비명이 터져 나오고 폭죽 같은 불똥이 튀어 흥을 더한다.

폭풍의 진행 방향 반대편으로 필사적으로 도망가다가 바람을 이기지 못하고 넘어져 바르작거리는 사람들은 집단으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폭풍은 곧 그마저도 집어삼키고 만다.

폭풍이 휩쓸어 깨끗해진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폭풍은 마치 송곳과도 같은 긴 상흔을 남기고 황궁 앞에서 멈췄다.

나는 박살 난 황궁의 거대한 문을 넘어 죽은 기사들을 타 넘었다.

한때 고풍스러운 장식이었을 부서진 석재 조각을 뛰어넘고 온갖 부서진 집기들이 뒹구는 을씨년스러운 황궁으로 발을 들이밀었다.

보지 않아도 황궁이 얼마나 혼란에 빠져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창가에 매달려 이 소란을 바라보던 자들은 모조리 폭풍에 삼켜진 모양인지 깨진 창문가에 얼씬거리는 사람이 없다.

조금 더 들어가자 검을 든 기사들이 나타나 막아서긴 했지만 그마저도 곧 사라졌다.

검을 휘두르면 도리어 제 몸이 갈라지고, 소리치면 목이 잘려 죽게 되는 데다 내게 접근조차 하기 힘드니 그저 울분에 찬 시선을 던지며 조용히 길을 열 뿐이다.

그 얼굴에 차오른 굴욕과 비참함과 공포를 보니 가늘게 퍼져 나가는 환희와 전율을 감당하기 힘들 정도였다.

나는 대단히 만족스러운 기분으로 어전까지 걸어가 가장 높은 자리인 황좌에 앉았다.

“그래, 이렇게 맨발로 달려 나올 정도로 환영해 줄 줄은 몰랐는데.”

덤덤하게 인사하며 주변을 둘러보니 정말로 온갖 사람이 다 있었다.

뒤늦게 도착했는지 통로로 들어오다 어전의 기묘한 분위기를 느끼고 흠칫하는 신료들도 있고, 기회만 닿는다면 내 머리를 자르려고 몸을 팽팽하게 긴장시킨 기사들도 있고, 시녀에 하인, 병사, 경비 등 온갖 그럴듯하게 차려입은 자들이 한데 뒤섞여 내게 똑같은 시선을 던진다.

공포와 굴욕에 물든 그 시선은 정말로 즐길 만한 것이었다.

그 사이에서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나를 고문했던 총사령관이다.

나이를 먹긴 했지만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입가에 주름이 늘어도 그 야비한 인상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에 있는 사람은.

“이거이거, 황제 폐하, 그런 곳에 계시면 되겠습니까? 이리 오시지요.”

내 무례한 어조에 몇몇이 격분했다. 저자의 목을 당장 치겠느니 어쩌겠느니 웅얼거리는 소리가 터져 나오긴 했으나 내게 접근하는 자는 없었다.

아마도 내가 이리로 걸어오며 토막 친 기사들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황제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고 그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였다.

억, 하는 소리와 경악과 비명이 터져 나온다. 곁에 있던 자들이 황제를 붙잡았으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황제는 그대로 보이지 않는 손에 붙잡힌 것처럼 내 앞까지 주르륵 끌려왔다.

그 과정에서 사지가 여기저기 부딪히긴 했으나 어쩔 수 없지. 아직 기교가 좀 미숙하거든.

“폐하, 만나서 정말 반갑습니다. 도시를 부순 건 좀 미안하군요. 하지만 이해하시지요? 당신이 이해하지 않으면 누가 이해하겠습니까? 이런 건 사실 당신이 제일 잘하니까 말이지. 그날 내 궁을 점령한 건 참 인상 깊었어. 소리 없이 포위하는 그 기술이 참 놀라워서 나도 조용히 침소에나 숨어들어 볼까 했는데.”

내 무례한 언사를 무시할 심산인지 황제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린 상태로 나를 노려만 보았다.

그 모습이 자못 애처롭다. 슬쩍 내려다보면 그 시선을 받는 것만으로 수천만이 발발 떨었을 텐데 지금은 이런 비참한 모습이라니.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말이야.”

나는 슬쩍 미소 지었다. 불길한 무언가를 느꼈는지 기사들이 바짝 긴장한다.

“내가 숨어들 필요가 없더라고.”

그 순간 발밑에서 폭발적인 힘이 뿜어져 나와 사방으로 불어닥쳤다.

무형의 날카로운 기운에 담이 약한 자들이 아우성치며 도망쳤지만 모두 목숨을 잃었다.

본능적으로 검을 추켜세운 자들은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순식간에 살육도가 펼쳐진 제 주위를 보고 아연한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황제는 이미 한 줌 핏물이 되었다. 너무나 싱겁게.

살려 두고 황비나 황녀나 황자를 끌어다가 눈앞에서 죽여 주는 것도 좋은 방법이겠지만 고문할 사람은 한참이나 남아 있었다.

시간 관계상, 그의 목숨은 빠르게 지는 것이 좋다. 사실 싱겁게 죽여 버리는 편이 더 모욕적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나는 이 수도에 있는 자들을 모두 죽일 생각이었다. 한 놈도 살려 둘 생각이 없었다.

단, 총사령관은 나의 직접적인 증오의 대상이 되는 만큼 매우 고통스럽게 죽여 줄 생각이었다.

그런 목적으로 총사령관을 제외한 나머지 사람들을 모두 죽이자 그가 의도를 깨닫고 허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피와 화염으로 온통 붉은 그 얼굴은 순식간에 10년은 늙어 보였다.

“이곳의 모두를 다 죽일 생각인가?”

“그렇지.”

“어떻게 살아남았지?”

“나는 불사니까.”

“그 재에서……. 그렇군.”

그는 다 포기한 기색으로 입을 다물었다. 저에게 일어날 모든 일에 순응한다는 태도다.

세상을 다 잃은 그 얼굴을 보니 기대 이상으로 즐거웠다. 아, 실제로 거의 다 잃기도 했지만 말이지.

빙글빙글 웃으며 그에게로 손을 뻗는데 갑자기 통로 한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뒤늦게 대피한 사람들이 어전으로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뭐 간단히 죽여서 처리하면 되겠지 하고 마법을 일으키려던 나는 예상치 못한 얼굴을 보고 얼어붙었다.

3왕자.

죽었다 알고 있고, 죽었다 믿고 있던 나의 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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