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그는 피가 흥건해 호수를 이루고 있는 광경을 보고 새파랗게 질린 채로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나를 발견하고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시간이 사라진다. 결코 여기에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 네가 왜 이곳에, 어째서 여기에?
아주 찰나 동안 수십 개의 가정과 소망이 머리를 스쳤다. 그러나 모두 거짓일 뿐이다.
나는 진실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3왕자만 살아남은 걸까? 혹시 지금까지 볼모로 잡혀 있었던 걸까?’ 하고 희망적인 생각을 떠올리던 나는 뒤이어 도착한 1왕자와 왕과 고위 귀족을 발견하고 그 희망을 털어 버렸다.
그 속에는 데파르도 있었다.
볼모로 잡혀 있던 것치고는 너무나 좋은 혈색.
더 이상은 변명도 필요 없었다.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 냉혈한같이 구는 내가 유일하게 인간적으로 변해 물렁해지는 사람들이다.
데파르가 아니었다면 그러한 사실들은 씨알도 먹히지 않았을 것이다. 손에 넣은 진실을 간파하는 능력이 아프게 고백해 온다.
어째서 내가 그곳에 남았는지. 어째서 내가 갑자기 왕자가 된 것인지.
나는 어리석게도 그 모든 것들을 순수하게 호의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던 것이다.
내게 이렇게 빛나는 삶을 안겨 준 사람들이 제 나라를 팔아먹고 나를 이용해 죽은 왕을 만들어서 제국과 뒷거래로 제 안위를 챙기는 자들이 아니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이 모든 거대한 거래에서 나는 희생양이었다. 아름다웠던 시간과 애정과 내가 사랑한 모든 것들이 순식간에 썩어 사라진다.
눈물도 나지 않았다. 나의 그 복수심은 무엇이었단 말인가. 들숨과 날숨에 한기가 돈다.
싸늘한 기분 속에서 나는 당황한 얼굴의 데파르를 바라보았다. 침묵이 길었다. 깨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데파르. 오랜만이네요.”
끓어올라 터져 버릴 것 같은 마음인데도 그 표면만은 싸늘하리만치 가라앉아 있었다.
데파르는 귀신이라도 본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어 뺨을 더듬어 보니 아마도 웃고 있는 듯했다.
사실은, 그 얼굴을 보며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많은 것을 바라지 않았다.
그가 나를 아들로 삼지는 않아도 그래도 인정하고 사랑해 주기만 하면, 그저 그것만으로 충분했는데.
그것만으로 나는 당신을 위해 죽을 수도 있었는데, 어째서 그런 거냐고 내게 왜 그런 거냐고 소리치고 싶었다.
울며 매달리고 싶었다. 구차하다 해도 그렇게 해서라도 이 일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이미 산산이 조각난 현실이 너저분하게 늘어져 있었다.
그가 나를 배신했다. 아니, 처음부터 나는 그런 용도였을지도 모른다.
갑자기 고문관의 킬킬거리던 목소리가 떠오른다. 그는 혹시 무언가 알고 있었던가.
그래서 그렇게나 의미심장한 소리를 했던 걸까. 하긴, 나 같은 이방인. 아무래도 상관없었겠지.
메마른 심장에 모래가 스며든다. 슬쩍 풀어졌던 가슴은 단단히 굳어져 산산조각 났다.
나는 애정이니 뭐니 하는 것을 속삭이는 어른들을 조소하던 시절로 되돌아가 버렸다.
아니, 오히려 그보다도 나쁘다. 나의 사전에 신뢰라는 단어가 있었다면 지금 이 순간 완벽하게 먹칠되어 두 번 다시 쓰이지 못하도록 되어 버렸다.
살육은 건조하리만치 담담하게 진행되었다. 고문하는 내 손에는 어떤 살의와 증오도 없었다.
그저 가슴이 아팠다. 왕자들을 토막 치고 피 웅덩이에서 뒹굴게 하고 서로의 뇌수를 핥게 만들면서도 그저 서글펐다.
데파르의 관절을 뽑고 그 처절한 고통의 비명을 들어도 오로지 슬픈 기분뿐이었다. 서글프고 버석한 실망에 휩싸여 나는 조용히 울었다.
피 속에 눈물이 뒤섞여 옅어진다. 모두가 죽은 황궁은 조용했다. 황궁의 수뇌부가 모조리 도륙당했지만 아마 다시 정권을 잡은 누군가가 이 황성을 차지할 것이다.
나는 이 황성을 데파르에게 선물하고 싶었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벌어져 버렸다.
깊은 실망감을 정리하며 어째서 흐르는지 모를 눈물을 닦아 낸 나는 황궁을 떠났다. 그리고 두 번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시간이란 신기하고도 잔혹한 것이다. 대부분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이 있지만 간혹 상처를 더 곪게 만들기도 한다.
데파르의 일이 까마득해질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났지만 나는 본질적으로 그 깊은 실망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넘치게 쌓인 패스로 다시 살려 내어 데파르를 인형처럼 굴게 만들어도 마음은 채워질 기미가 없었다.
깊은 실망 속에서 나는 건조한 나날을 보냈다. 만나고 기대하고 실망하는 것을 반복하다 보니 어느새 실망하기 위해 기대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만나고, 기대하고, 실망한 뒤 그들을 도륙한다. 너무나 시시한 이야기였다. 기대하고 매달려도 돌아오는 것은 끝없는 실망뿐.
끝이 있는 삶을 가진 그들은 억척스럽고 탐욕에 가득 차 있었다. 무한한 삶을 가진 나는 오래 살아갈수록 더욱 그들과 어울릴 수 없게 되어 갔다.
당연한 일이다. 애초에 우리는 너무나 달랐다. 기대가 조롱으로 변질되는 것에는 많은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렇게 본질적인 목적조차 잊고, 이 땅의 완벽한 이방인이 되어 마치 무기물과도 같은 삶을 이어 가던 어느 나날의 끝에서 나는 블리스를 만나게 되었다.
죽음의 사막이라 불리우는 이 땅에서 가장 넓은 사막을 횡단하던 중이었다.
그 중앙에는 짜디짠 염전 호수가 있었는데, 덕분에 아무것도 살지 않았다.
황톳빛 모래 속에 박힌 그 염전 호수는 멀리서 보면 마치 살색 뺨을 가진 거인의 눈처럼 보인다.
그런 신비로운 풍광에도 불구하고 그곳은 고독에 휩싸여 있었다.
간혹 도전 정신 강한 멍청이들이 접근하곤 했지만 대부분 죽음을 선불로 지급하고 대가를 얻지 못한 채 사막에서 말라붙었다.
그 호수의 표면을 그녀는 여유롭게 산책하고 있었다.
“안녕.”
그녀와 나 사이에는 백 걸음도 넘는 거리가 있었지만 그녀는 마치 옆에 있는 사람에게 인사하듯 단조롭게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소리는 또렷하게 들렸다.
하늘의 별을 그대로 반사하는 호수 위의 그녀를 보고 나는 마침내 이 세계에 사는 무언가 초월적인 것을 만났다고 생각했다.
염도가 강해 넣으면 뭐든 잘 뜨긴 하지만 그래도 발을 디디고 설 정도는 아니다.
한데 블리스는 마치 무게 없는 깃털처럼 호수 위를 사뿐사뿐하게 걷고 있었다.
별빛을 반사한 호수가 그녀의 발끝에서 피어난 동심원에 찰랑찰랑 흔들린다. 그녀는 느긋한 걸음으로 다가와 내 앞에 섰다.
“뭐 해?”
그 태연한 물음에 순간 당황했다. 내가 이 여자를 알던가? 고민하는 사이 블리스는 자연스럽게 내 옆에 앉았다.
그리고 허공에서 온갖 음식을 만들어 내더니 길게 누워 하나씩 집어 먹기 시작했다.
유랑이라도 나온 그 작태를 보고 있으니 마치 홀리기라도 한 기분이다.
“당신은 누구지?”
“블리스. 너와 같은 패스파인더지.”
“패스파인더?”
나와 같다는 말에 반사적으로 되묻자 그녀는 귀찮다는 듯 눈을 게슴츠레하게 뜨더니 손을 휘휘 내저었다.
그 손에 들려 있던 술잔에서 술이 출렁 튀어나왔다가 기묘한 힘에 간섭을 받은 듯이 그대로 다시 빨려 들어갔다.
“아, 가르치는 건 귀찮은데.”
그렇게 말한 그녀는 대충 성의 없이 툭툭 던지듯이 정보를 뱉어 놓았다.
나는 이야기보다 그녀의 외형에 주목했다. 가까이서 보니 정말로 기괴한 차림이다.
괴상한 형태의 옷이야 그렇다 치고, 머리칼이 한 뭉치씩 색이 전부 달랐다. 온갖 색의 깃털을 꽂아 둔 것처럼.
“그런데 몇 살이야?”
단순한 궁금증이었다. 내 질문이 뜻밖이었는지 블리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바라보더니 웃음을 터뜨렸다. 경박하게 웃으며 데굴데굴 굴러 대던 그녀는 매우 건방진 표정으로 픽 웃으며 말했다.
“상대의 나이를 물으려면 네 나이부터 밝히는 게 예의지.”
“백오십 살.”
내 외형이 겨우 스물다섯 정도로 보이는 것에 비하자면 경악할 만한 사실이다.
그러나 블리스는 별로 놀라는 기색도 없이 슬쩍 손을 뻗어 내 머리칼을 마구 헝클어뜨렸다.
“완전히 애기구만. 안녕 애기야?”
이런 취급을 받아 보는 것은 처음이라 나는 어처구니없는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손을 탁 쳐 내고 몇 살이냐 물었더니 하는 말이 가관이다.
“글쎄, 한 오천 살은 넘었을까.”
“뭐?”
“왜? 안 믿겨?”
“당연하지.”
퉁명스레 대답하면서도 나는 이 상황이 매우 신기했다. 방금 호수에서 만난 정체불명의 사람인데도 마치 오래전부터 알아 왔던 것처럼 친숙하다. 마음이 이토록이나 편안한 것은 정말로 오랜만이었다.
“좋아.”
뭐가 좋다는 건지 몰라 의아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증명해 줄게.”
증명? 어떤 방식으로? 다시 되물으려던 나는 그녀가 허공에 그리듯이 내뻗는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모았다.
마치 불꽃놀이의 심지처럼 불똥이 튀고 있었다. 여기까지는 별반 신기할 것도 없다. 나도 하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가볍게 흔들리는 순간.
“마음에 들어?”
블리스는 으스대는 기색도 없이 마치 물 한 잔을 따라 놓은 것처럼 태연한 얼굴로 자신이 한 것을 보여 주었다.
그러나 나는 태연할 수 없었다. 그녀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달이 두 개가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넋이 나가 입을 쩌억 벌리고 있으니 그녀가 가볍게 웃으며 다시 손가락을 흔들었다.
자꾸 불어나는 달은 환각이 아니었다.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손가락을 가볍게 흔드는 정도로 그녀는 힘든 기색도 없이 달을 만들어 낸 것이다.
“어떻게…….”
“놀랐어? 하하, 마음에 들면 하나 너 줄게.”
그렇게 말한 그녀는 무엇이 우스운지 다시 웃음을 터뜨렸다. 메마른 사막 바람에 물기가 스미는 것 같은 청량한 웃음이었다.
전지전능한 힘. 나의 것과는 궤를 달리하는 강력한 능력은 감탄스러울 만한 것이었으나 내가 탄복한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겨우 150년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권태에 찌든 나와 달리 그녀의 정신은 막 태어난 것처럼 생생했다.
무한하게 놓인 불사의 삶을 거의 반만년이나 살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나로서는 이해하기 힘든 깊이였다. 내가 그녀에게 매료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나는 그녀를 동경함과 동시에 좋아했다. 정말로, 좋아했다. 그 단어 외에는 설명할 말이 없었다.
그것은 애정보다는 싱그럽고 사랑보다는 가벼운 감정이었다. 친애와도 닮은 그것은 내 안에 조용히 퍼져 나가 나를 물들였다.
썩어 문드러졌다고 생각했던 여린 기대가 고개를 든다. 이번에는, 그녀라면 나를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영원히’ 함께할 수 있지 않을까. 버러지 같은 것들 사이에서 먼지처럼 살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연약한 기대 사이에서 나날은 향기롭게 피어났다. 패스를 찾고 충전이 되는 시간에는 그녀와 범인들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경이로운 시간을 보냈다.
별을 타고 여행하거나 세계의 중심으로 들어가 노닥거리기도 했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하루하루가 흘렀다.
“너는 결핍되어 있어.”
갑작스러운 말에 몸을 일으키자 그녀가 조용히 가라앉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뜬금없는 평가를 받은 기분이라 그 말의 의미를 깨닫는 데는 시간이 조금 걸렸다.
“결핍이라니?”
되물었으나 블리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부드러운 황금초 위로 부는 바람을 바라보던 그녀는 곧 표정을 바꾸고 쾌활하게 굴었으나 다음 날 똑같은 평가를 내게 내렸다.
같은 말을 두 번이나 반복해서 듣게 되자 나는 떨떠름한 와중에도 그냥 넘길 수만은 없게 되었다.
“네 결핍이 너를 잔인하게 만드는 거지.”
결핍이라는 말은 여전히 아리송했으나 그 뒤의 것은 짐작 가는 곳이 있었다. 그러나 새삼스럽기 짝이 없는 지적이라 나는 몹시 당황했다.
그녀와 지내며 내게 즐거움이 찾아왔다고 해도 여전히 그녀와 나를 제외한 모든 생명체들은 내게 별 가치가 없는 덩어리들에 불과했다.
나는 여전히 거리낌 없이 마을을 소거해 그 속에서 패스를 얻었고 그런 일들에 대해 그녀도 아무런 제재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자연스럽게 그녀도 그들에게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나에 대한 그녀의 평가가 마음을 무겁게 만든다. 적어도 그녀는 내 행동이 잔인하다 생각하고 있었다. 이것은 내게 있어 큰 의미였다.
“네가 싫다면 그만둘게.”
함께 지낸 시간이 아주 짧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제 블리스 없이는 안 될 것 같았다.
영원히 나와 함께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고 그것을 바랐으니 나는 행동을 조심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나 블리스는 뜻밖에도 고개를 저었다.
“싫다거나 그런 의미가 아니야.”
“그러면?”
“너에게 좋지 않다는 거야.”
나는 다시 어리둥절해졌다. 그녀는 전혀 알아듣지 못한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조금 서글픈 얼굴로 말했다. 아니, 독백에 가까웠다.
“네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 알아낸다면 해결할 수 있을 거야.”
“그게 뭐지?”
“나는 대답할 수 없어. 그리고 설령 내가 알려 준다고 해도 결핍을 충족시키는 것은 네 몫이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어.”
“그래, 그럴 테지. 하지만 내가 말해 줘도 쉽지 않을 거야. 다만 조언을 원한다면.”
그녀는 잠시 망설이다가 혼잣말하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들과 어울리고 사랑해 주도록 해.”
뜻밖의 말에 반사적으로 코웃음 친 나는 뒤늦게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았는지 눈치를 살폈지만 그녀는 예의 기분을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차분하게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건 필요 없어. 한낱 사막의 모래도 영원을 사는데 잠깐 살다 가는 그것들과 상종할 필요가 있을까.”
“하지만 모래와는 살 수 없지. 너를 봐. 넌 완전히 망가질지도 몰라.”
사실 블리스의 조언은 공감 가는 구석이 전혀 없었지만 오랜 세월 살아왔으니 그래도 그만한 지혜가 스며 있을 거라는 생각으로 나는 반쯤은 그녀의 말을 듣기로 했다. 그런 이유로 나는 타협안을 제시했다.
“좋아. 네 말을 따를게. 대신 네가 도와줘.”
“도와 달라고?”
그녀의 표정이 뜻밖의 말을 들은 것처럼 어리둥절해졌다. 내가 진지하게 다시 요청한다.
“네가 가르쳐 주는 거야.”
“모르드레드.”
나를 호명하는 목소리에는 곤란함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이 이상은 나도 물러설 수 없다.
서글픈 사실이지만 나는 진심 어린 사랑을 받은 적도 없고 그런 것을 본 적도 없었다.
그녀는 내가 그들을 아끼고 소통하기를 바라지만 아낌 받은 적이 없는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알지 못하는 것을 행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가 알려 주기를 바랐다.
“부탁이야.”
정말로 오랜만에 하는 부탁이었다. 나의 표정은 지금 부탁하는 것에 어울리게 적절한 형태를 하고 있을까? 볼 수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그러나 나는 진심으로 그것을 원했다. 그녀가 곁에 남아 나를 가르치기를. 그런 형태로라도 내게 남아 주기를.
“미안하지만 그럴 수는 없을 것 같아.”
블리스가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거절했다. 그것은 거절임과 동시에 미래의 작별을 예고하는 말이었다.
이제 거절에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가슴이 깨지는 듯이 아파 당혹스러웠다.
정말로 나는 그것을 원했구나. 새삼 깨달으며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질문했다.
“왜?”
차라리 하지 말 것을. 블리스는 뜻밖의 질문을 받았다는 듯 눈을 크게 뜨더니 입매를 부드럽게 하고 웃었다.
그러나 그 아름다운 미소에서 흘러나온 말은 시리도록 차가웠다.
“나는 네가 싫거든.”
제법 거센 바람이 부는 언덕이건만 그 순간에는 색 없는 그림이 된 듯 정지했다.
세상의 모든 것이 창백해지는 것 같은 현기증 속에서 그녀가 후련하다는 듯 미소 짓는 것을 바라보았다.
귀를 의심하며 그저 황망하게 바라보는데 그녀는 한 발짝 내게로 다가왔다.
아니, 다가온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다음 순간 사라졌으니까.
그녀가 내게는 보이지 않는 자신의 차원 문을 사용한 것이라는 걸 깨닫기까지는 좀 오래 걸렸다.
그리고 그녀가 정말로 완전히 떠나 버렸다는 것을 깨닫는 데는 더 오래 걸렸다.
살아 있는 것을 다 불태우고 산과 바다를 섞어 뭉갠 후에도 나타나지 않는 그녀가 그 사실을 증거 했다.
그녀는 내가 왜 싫었던 것일까? 그렇게나 싫었는데도 어째서 나와 어울렸던 걸까? 나는 그녀가 정말로 좋았는데.
굳이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예전 어머니도 사실은 내가 싫었던 걸까? 그래서 나를 버렸던 걸까? 사실 데파르도 내가 싫었던 걸까?
나와 함께했던 그 모든 사람들에게, 함께 웃었던 그 모든 순간들 속에 사실은 나를 향한 적의가 숨겨져 있었던 걸까. 나는 그들이 정말로 좋았는데. 좋았었는데.
비틀린 배신감이 스산하게 가슴을 채운다. 해묵은 저주가 되살아나 영혼을 휘감았다.
나는 다시 먼지같이 세상을 떠돌며 가장 끔찍한 악몽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비명과 공포 어린 시선을 받을 때면 진실된 소통을 하고 있는 것 같은 충족감이 들었다.
그것들은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것들이다. 나도 한때 넘치도록 품고 있던 감정이니까. 그것만은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아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그것마저 곧 지겨워지고 타성에 젖어 살아가던 어느 날 내 삶의 두 번째 패스파인더를 만났다.
햇병아리였다. 두려움에 떨고 있는 연약한 모습이 거의 잊고 있던 과거를 되살린다.
그러나 블리스를 만났을 때와 같은 감정은 들지 않았다. 이미 낡을 대로 낡고 마모될 대로 마모되어 마음이라는 것이 없어진 것 같았다.
사랑받고 자랐음이 분명한 앳된 얼굴. 빵을 훔쳐 맞아 본 적도 없고, 누군가를 죽이고 싶어 했던 적은 더더욱 없었을 것 같은 말간 얼굴은 불안으로 조금 흐려져 있었지만 여전히 밝고 곧다.
“이런 곳에서 패스파인더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만나서 반가워.”
300년을 살며 얻게 된 얼굴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그중 가장 친절한 것을 골라 쓰며 인사하자 그녀는 조금 경계하더니 어색하게 받아들였다.
그녀에게 친절하게 군 것은 거의 본능과도 같은 것이었다. 아마 패스파인더끼리는 마치 혈연과도 같은 정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블리스에게 내가 그토록 집착했던 것도 그 때문이 아니었을까.
너무나 약하고 선량하고 유약한 그 패스파인더 또한 내가 블리스를 따랐듯 나를 따랐다.
변덕과 본능, 그리고 재가 된 마음에 남은 약간의 온기로 나는 그녀를 이끌었다.
나와 달리 그녀는 돌아가고 싶은 것 같았다. 가족에 대해 이야기하는 그녀의 얼굴은 그리움에 젖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원하는 것에 대한 약간의 실마리를 제공했다. 일부러 전부 알려 주지는 않았다.
진짜 원하는 것은 스스로 손에 넣어야지. 그리고 내심 이 애송이가 진실을 알아내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약간의 실마리만으로 우물 속에서 동아줄이라도 잡은 것처럼 빛나는 눈을 보니 갑자기 속이 뒤틀렸다.
이 낡은 심장 어디에 숨어 있었을까 싶은 뜨거운 감정이었다.
그것은 밑바닥에서 끓어오르는 것 같은 질투였다. 그래, 몹시도 행복한 삶을 살았던 모양이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고 싶다면 정말로 강한 패스파인더가 되어야 할 거야.
나는 앞서 걷는 그녀의 뒤에서 피를 머금은 듯이 비린 감정을 품었다. 오래도록 잊고 있던 짐승이 권태 속에서 깨어나 음험하게 웃는다.
너를 강하게 만들어 주지. 누구보다도 강하게, 어떤 일이 있어도 망가지지 않을 철혈의 여인으로.
내가 네게 줄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니까. 그것에 만약 악이 필요하다면 내가 기꺼이 그 악이 되어 줄 용의도 있었다.
그것은 선의가 아니었다. 악의와 시기와 질투, 그리고 패스파인더로서의 약간의 동질감이 범벅 된 지저분한 것이었다.
온갖 오물을 뒤섞어 냄새나는 곳에 옅은 향수를 뿌려 둔 것 같은 감정이 텅 빈 가슴에 묻어난다.
기대해, 가람. 네 소원은 충분히 잔혹할 테니까.
거기까지 이야기한 나는 입을 다물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제법 최근의 것까지 이야기해 버리고 말았다.
어쨌거나 이야기를 끝냈는데도 박수가 없는 것은 조금 아쉽다.
나는 박수 대신 앞에 놓인 머리를 터뜨리는 것으로 받아야 할 칭찬을 대신했다.
머리가 깨어지고 뇌가 터져 나와 공중에서 철벅이며 부딪히는 것이 박수 소리와 조금 닮아 있었다.
“그럼 들어 줘서 고마웠어. 저승에서도 행복하길.”
― 모르드레드 1 終
외전. 모르드레드 2
“이보시오.”
아까부터 뒤통수에 달라붙는 부름을 무시하고 묵묵히 걷고 있던 나는 마침내 남자를 돌아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