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화
나무통이 잔뜩 실린 낡은 수레의 마부석에 앉은 남자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반색하며 활짝 웃어 보인다.
“드디어 돌아보는군. 어디로 가나? 나는 베록으로 간다네.”
이 길은 갈래 없이 베록으로 쭉 이어져 있다. 숲을 헤집고 다니지 않는 이상 이 길을 걷고 있다면 가는 방향은 뻔한 것이다.
역시 형식적인 질문이었는지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권해 왔다.
“설마 베록까지 계속 걸어갈 생각인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같이 가세. 태워 주겠네. 돈은 안 받을 테니 안심하게. 혼자보다는 둘이 낫지 않겠나?”
남자의 늙은 말이 지친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꽤 멀리서 온 모양인지 입가에 허연 침이 말라붙어 있다.
끌고 있는 수레의 무게가 더 무거워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얼굴이었지만 나는 그 간절함을 무시하기로 했다.
“사양 않지.”
단숨에 수레 위로 올라가자 남자가 냉큼 제 옆자리를 내어주었다. 두 마리 말은 체념한 얼굴로 다시 걷기 시작한다.
천천히 굴러가는 수레 위에서 내가 자리를 잡기를 기다린 남자가 싱글싱글 웃으며 말을 건네어 왔다. 정말로 적적했던 모양인지 두 눈에 기쁨이 가득했다.
“나는 제롬이네. 자네는?”
“모르드레드.”
“좋은 이름이군. 나는 벨바리아에서 오는 길이네. 베록에 포도주를 팔러 가는 길이지. 내 딸이 담근 포도주인데, 아주 끝내준다고. 인기가 아주 대단하다니까. 음, 그런데 그쪽은 어디에서 오는 길인가?”
시키지도 않은 자기소개를 장황하게 풀어놓은 남자가 은근슬쩍 질문했다. 똑같이 장황하게 대답해 주는 취미 따위는 없고, 슬슬 귀찮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짧게 대답했다.
“남쪽.”
제롬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조금 의아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남쪽? 남쪽이면, 미르드? 아니. 미르드에서 여기까지 걸어왔을 리가 없지. 아하른에서 오는 길인가?”
“비슷하지.”
내 대답에 제롬이 아 하고 탄성을 내질렀다. 무언가 깨달았다는 표정이다.
“아하른에서 왔다면 이해가 가는군. 그래, 많이 잃었나?”
제롬이 갑자기 나를 딱하기 그지없게 쳐다보았다. 침묵하자 그는 손을 들어 내 어깨를 두드리며 어설프게 위로하기 시작했다.
“너무 우울해할 것 없네. 나도 젊을 때 아하른에서 한몫 잡아 보려고 검투 도박을 했다가 노잣돈에 말까지 날려 버리고 알거지가 된 적이 있거든. 아하른 근처 도시에 사는 남자들 중에 그런 경험 하나 없으면 남자가 아니지. 안 그래도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말이 없을 만한 차림새가 아닌데.”
그는 내가 도박으로 빈털터리가 되어 맨몸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고 추측한 모양이었다.
한참 동안 자신의 젊은 시절을 떠들어 대며 나를 위로하던 그는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었다.
나는 그 얼굴을 바라보며 아하른을 떠올렸다. 커다란 도끼와 흉흉한 기세가 가득한 놈들이 길바닥의 모래처럼 깔려 있는 도시에서 도박을 하려면 돈 외에도 필요한 것이 많다.
예를 들어, 도박에 진 나머지 분풀이하려는 놈들에게서 자신을 지킬 만한 힘이나 배짱 같은 것들 말이다.
심약해 보이는 이 남자가 정말로 검투 도박을 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아마 어디선가 주워들은 것을 떠들어 대는 것이겠지.
남자가 알면 서운할 만한 사실이지만, 나는 아하른에서 오는 길이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하른의 남쪽에 있는 카마르혼의 둥지에서 오는 길이다.
패스가 둥지 안쪽에 있었던 덕분에 둥지를 박살 내게 되었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지. 그래도 목숨은 살려 줬으니 어딘가로 날아가 잘 살 것이다.
부리나케 도망치던 붉은 꼬리가 떠오른다. 그리고 그 뒤를 서럽게 울며 따르던 작은 새끼 용도.
지킬 수 없으면 도망친다. 짐승치고는 현명한 태도였다.
“아직 식사 전이면 이것 좀 먹겠나?”
계속된 내 침묵에 눈치를 살피던 제롬이 딱딱한 빵 덩이를 권해 왔다.
영 식욕이 당기지 않아 고개를 저어 거절했더니 시무룩한 얼굴로 혼자 으적으적 식사하기 시작했다.
“잃은 돈이 생각나서 입맛도 없는 모양이군. 그런데 자넨 뭐 하는 사람인가? 얼굴도 그렇고 차림새도 그렇고…….”
“마법사.”
제롬은 납득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기도 없이 혼자 걷고 있기에 걱정이 되어서 동행했는데, 나름대로 한가락 하는 청년이었군.”
떠드는 사이 해가 기울어 노을이 짙게 깔리기 시작했다. 길의 가장자리로 적당히 빠진 제롬이 능숙하게 나무를 모아 불을 피우고 물을 끓였다.
그사이 말들은 곯아떨어져 이 숲에 깨어 있는 것은 나와 제롬뿐이다.
“우울해도 먹게. 배가 차면 기분이 좀 나아지니까.”
제롬이 빵죽을 한 그릇 퍼서 내밀었다. 마른 빵을 잘라 넣고 육포와 마른 감자를 넣어 끓인 것이다.
식욕이 당기는 모습이 아니라 거절하자 두 번 권하지 않고 혼자 식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말이 없어서 불편했는데, 이것도 꽤 좋군. 나는 말이 많은 편이니까 실컷 떠들 수 있어서 자네가 마음에 들어.”
모닥불을 바라보다 고개를 들자 제롬이 빙긋 미소 지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롬도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닌 모양이다. 그는 지저분한 헝겊으로 먹은 그릇을 대충 닦아 내고 그것을 바닥에 깔아 모포 대용으로 사용했다. 아마 그는 내일도 저 천으로 그릇을 닦겠지.
동행하는 내내 제롬은 불만 없이 홀로 야숙을 준비했다.
수레에 앉아 있다가 모닥불이 피워지면 다가앉는 내게 투덜거릴 만도 한데 혼자 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얼굴이다.
쓸데없이 호의가 넘치는 것도 그렇고, 정말로 손해 보는 걸 기꺼워하는 성격이다.
물론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그 수다가 성가신 나머지 벌써 목을 잘라 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오, 드디어 야수들판이군. 이제 3일만 더 가면 되겠어.”
고개를 넘자 갑자기 시야가 확 트였다. 들판을 달려온 바람이 한껏 머리카락을 헤집는다.
땀을 식혀 주는 시원함이 여간 달가운 것이 아닌지 제롬의 얼굴이 한결 풀어졌다.
야수들판.
예전에도 자주 지나다니던 길이다. 길을 따라 촘촘하게 피어난 들꽃이 향기로웠다.
100년 전까지만 해도 여기저기 널린 시체로 악취가 가득한 길이었건만, 이제 그 풍경은 상상도 할 수 없다.
“자네는 마을에 가면 뭣부터 할 건가? 난 일단 제대로 된 음식부터 먹어야겠어. 아주 맛 좋은 음식점이 있는데, 도착하면 내가 한 끼 사겠네.”
“좋지.”
제롬과 동행한 지도 벌써 이틀째라 이런 수다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어 처음만큼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대충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제롬은 신이 나서 말을 재촉했다.
조금 신기한 일이지만, 제롬은 나를 아주 마음에 들어 하고 있었다. 야영지에서 한 말이 빈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 잠깐. 저기 사람 아닌가?”
제롬이 손을 들어 길 끝을 가리켰다. 손가락을 따라 시선을 옮기니 어렴풋이 사람 비슷한 것이 보이는 것 같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형태는 확실하게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여자인 것 같은데?”
“그렇군.”
“여자가 이런 길에 혼자 있다니. 위험할 텐데. 용케도 무사하군.”
검은 머리카락을 어깨쯤에 찰랑이고 있는 여자.
반신반의하는 제롬에 비해서 나는 확실하게 여자의 생김새를 볼 수 있었다.
마법의 힘을 빌리자 코앞에서 보는 것처럼 여자의 모습이 가까워졌다. 이국적인 생김새는 대단히 앳된 것이었다.
불안과 초조함으로 잔뜩 물어뜯기고 있는 입술이나 긴장으로 떨리고 있는 눈동자 따위가 어쩐지 기묘한 느낌을 불러일으킨다.
“길이라도 잃은 건가? 짐도 하나 없어 보이는군. 강도라도 만났던 건지도 모르겠어. 딱하게도.”
제롬이 떠드는 동안 나는 여자를 보면 볼수록 느껴지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알 듯 말 듯 한 감각이 꼬리를 살랑이며 스쳐 지나간다.
이 느낌. 어디선가.
“역시 태워야겠어.”
결심을 내릴 것도 없이 당연하다는 듯 제롬이 수레의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와중에도 기묘한 느낌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와 마주했을 때 그 감각은 낯설기 짝이 없는 따듯한 호감으로 바뀌어 나를 당황시켰다.
“어디 가세요?”
“베록시로 가오, 아가씨는?”
제롬과 대화를 나누는 그 모습은 내가 익히 아는 수많은 애송이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여자일 뿐인데.
이 납득할 수 없는 호감은 무엇이란 말인가? 나는 당황한 나머지 일부러 외면하듯 시선을 돌렸다.
“제 이름은 가람이에요.”
평범한 이름. 평범한 목소리. 평범한 외모에도 불구하고 그 순간 이끌리듯 시선을 주고 말았다.
의식적으로 외면하려던 노력을 순식간에 물거품으로 허물어 버리는 그 강력한 본능의 힘 앞에서 나는 마침내 깨달음을 얻었다.
늦었다. 늦은 깨달음이었다. 이미 한 번 겪었던 적이 있는 감각인데도 불구하고 너무나 갑작스러워 생각지 못한 탓이 크다.
이 여자는 패스파인더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감각. 단 한 번, 블리스에게서 느꼈던 그것이 심장을 뒤흔들었다.
150년 만에 만난 동족이다. 뜨거운 것이 왈칵 치밀어 올라 눈시울이 붉어질 뻔했다. 어처구니없게도 나는 지금 감동하고 있었다.
이 애송이 같은 어린 패스파인더를 만났다는 이유만으로. 그녀가 동족이라는 이유만으로.
그 갑작스러운 감동에 적응하느라 허둥대던 나는 조금 신기한 기분으로 눈앞의 패스파인더를 관찰했다.
순수한 눈망울을 보면 나이는 얼마 안 되는 것 같다. 패스파인더의 나이를 피부의 주름만으로 판단하는 것은 멍청한 짓이다.
외모는 그야말로 껍데기에 불과하다. 눈동자 속에 묻어나는 권태와 광기야말로 숨기려고 해도 숨겨지는 것이 아니지만 모두가 그것을 알아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오래된 것만이 오래된 것을 알아볼 수 있다.
그러니 이 패스파인더는 그렇게 나이가 많은 편은 아닌 것 같았다.
오래 살아온 자 특유의 느낌이 행동거지에 묻어 나오기 마련인데 이 패스파인더에게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런 곳에서 패스파인더를 만날 줄은 몰랐는데. 만나서 반가워.”
제롬이 멀어진 틈을 타 친절한 척 웃으며 가볍게 인사하자 어리둥절한 시선이 돌아왔다.
당황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금시초문이라는 반응에 잘못 짚었나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지금도 그녀의 손등에서 느껴지는 강렬한 패스파인더의 향기가 취할 것처럼 생생하니까.
이렇게나 풋풋하고 신선한 패스파인더의 느낌은 정말로 처음이다.
오래되어 바란 것 같던 블리스의 것과는 또 다른, 마치 방금 각성한 것 같은. 아.
이 애송이는 어쩌면 각성한 지 얼마 안 된 패스파인더일지도 모른다. 한 달, 혹은 일주일. 아니면 하루가 안 되었을지도.
정말로 갓 각성했다면 아무것도 모를 테니 뭐가 뭔지 모르겠지. 그렇다면 가장 확실한 확인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너 이계인 아냐?”
나는 그녀의 나이가 많지 않음을 고려해 일부러 가벼운 말투로 말했다.
무거운 말투보다 가벼운 말투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은 당연한 상식이다.
내 질문에 무슨 생각을 한 건지 어린 패스파인더는 펄쩍 뛸 기세로 부정했다.
그러나 가벼운 유도 심문에 넘어와 전전긍긍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대단히 한심했지만 일단 안심시켜 줄까 해서 슬쩍 웃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 나도 패스파인더니까.”
“패스파인더요?”
“나도 차원 이동 했다고.”
입을 쩌억 벌리는 멍청한 얼굴로 그녀는 한참 동안 말을 잃었다. 그 표정을 보니 대화가 길어질 것 같아 옆에 다가가자 그 와중에도 경계하는 것이 우스웠다. 너무 어설펐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눌 대화가 제롬이 들어 좋을 것이 없었기 때문에 결계를 두르자 기감은 예민한 모양인지 불편한 듯 몸을 뒤척인다.
“조심해. 얇게 친 결계라 쉽게 부서질 수도 있어.”
애초에 결계를 펼친 것도 정말 오랜만이었다. 내게 이런 능력이 있었던 것조차 오래도록 떠올리지 못했다. 결계를 칠 필요가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엿듣는 귀가 성가시면 죽이면 그만이고, 막지 못할 공격 앞에서는 죽으면 그만이니 방어라든가, 결계라든가 전부 거추장스럽고 쓸모없는 능력에 불과했다.
하지만 눈앞의 패스파인더는 어지간히 겁이 많아 보였기 때문에 제롬을 죽이면 제롬을 살려 두었을 때보다 더 귀찮아질 것 같았다.
질문을 주고받던 중 심증을 확신으로 굳혔다. 그녀는 정말로 어제 막 각성한 패스파인더였다. 정말 애송이였던 것이다.
애송이 패스파인더, 아니, 가람은 반쯤 경계하면서도 호기심을 감추지 못했다. 알고 싶은 것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의 질문은 대부분이 얕은 수준에 머물렀다.
나는 그녀가 패스파인더에 대해서 흥미 이상의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었다.
진지하지 못한 태도를 보아하니 아마 이것을 스쳐 가는 꿈 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어리석게도.
“차원을 산다는 건 무슨 말이에요?”
사육장 밖에서 동물에게 손을 흔드는 것 같은 느낌으로 가람이 가볍게 질문했다.
반드시 돌아갈 거라는 확신이 가득 찬 눈은 패스파인더에 대해 일말의 재고도 하지 않고 있다.
원래 세계가 아주 좋았던 모양인지 애정과 그리움이 가득한 표정이다. 그리고 그것이 나를 거슬리게 만들었다.
어차피 이 패스파인더가 아는 것은 거의 없다. 가볍게 던지는 질문이니, 나도 가볍게 장난을 쳐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