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91화 (191/256)

11화

진실 사이에 거짓을 슬쩍 섞으면 결코 의심하지 못하겠지. 나는 그럴듯하게 포장하는 데 제법 능숙한 편이었다.

“너 정말 아는 게 하나도 없구나? 한마디로 네가 갈 수 있는 차원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이야기야. 지금은 베이스캠프와 여기밖에 오갈 수 없지만 차원을 하나 더 사면 거기도 갈 수 있지. 엄청나게 비싸긴 하지만 말이야. 이 차원을 포기하고 다른 차원으로 바꾸는 것도 있는데, 그건 조금 싸. 나는 거의 300년을 살았지만 다른 차원을 살 정도로 패스를 모은 사람은 본 적이 없어.”

이것은 완전히 거짓말이다.

패스파인더가 다른 차원으로 가기 위한 문을 여는 것에 패스 따위는 필요 없다.

패스파인더는 존재하는 모든 차원에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다.

단, 그렇게 연결된 차원은 한 번에 하나만이 가능하다. 패스를 아무리 모아도 그 제한은 풀 수 없다.

이쪽 차원에서 다른 차원으로 가는 문을 열면 이쪽 차원과의 연결 고리는 끊어진다.

아주 비슷한 차원을 열 수는 있지만, 같지는 않다.

아주 운 좋게 같은 차원에 또 올 수도 있지만, 수의 개념조차 통하지 않을 만큼 많은 차원들 틈에서 똑같은 차원에 두 번이나 올 정도의 운은 이미 운의 수준을 넘어선 것이겠지.

만약 그녀가 원한다면 베이스캠프와 아주 흡사한 차원을 떠올려 떠나면 된다.

물론 베이스캠프와 완벽히 동일한 차원은 아니고, 그녀가 인지할 수 없었던 부분에 차이가 있겠지만.

그것이 아마 베이스캠프를 되돌린다는 것에 가장 가까운 일일 것이다.

“사, 삼, 삼백?”

예상대로 가람은 전혀 상관없는 부분에 집중했다. 내가 말한 내용은 아무래도 좋은 모양이었다.

적당히 장단을 맞추어 주자 여유를 되찾고 기세가 살아나 똑바로 눈을 마주쳐 온다.

“어차피 패스파인더들은 수명이 없어. 패스를 찾아서 몸을 바꾸니까.”

“전 그냥 집에 돌아갈 건데요?”

“아니, 넌 반드시 패스를 찾으려고 할 거야. 그건 모든 패스파인더들의 본능이자 숙명이니까.”

숙명.

스스로 입 밖으로 꺼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거운 그 단어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지금은 결코 그 무게를 모를 것이다. 방황하는 영원한 삶에서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오직 패스뿐.

그것을 따라 산 망령이 되어 걷는 끝없는 삶. 이런 햇병아리가 알 수 있을 리가 없겠지.

그러나 곧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을 그녀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에게는 오직 그 길밖에 없으니까.

그래, 그 길밖에 없지. 고독하더라도, 고통스럽더라도, 절대로 벗어날 수 없는 길이다.

모든 것에게 끝을 선고하는 죽음조차도 패스파인더에게는 끝이 되지 못한다. 죽음조차 또 다른 시작일 뿐.

불사를 다행스럽게 생각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지금은 영원의 무게에 허덕이지 않는 것이 고작이다.

상념에 빠져 있다 문득 정신을 차리니 가람이 잔뜩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그 모습이 한심하면서도 동정심을 자아내어서 충동적으로 권하고 말았다.

“이봐, 원한다면 패스를 찾는 걸 도와주지.”

이것이 얼마만큼의 호의인지 알까. 제안하면서도 나는 나답지 않은 다정한 행동에 놀라고 있었다.

패스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능력 하나 없이 첫 패스를 찾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게 힘든 일이다.

내가 얼마 만에 첫 패스를 찾았는지 떠올려 봐도 그 일의 힘겨움을 알 수 있다.

게다가 내가 패스를 찾은 것도 그 행동을 정확히 인지하고 했다기보다 우연에 가깝지 않았던가.

그 우연이 없었다면 정말로 오랜 시간이 걸렸을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으니까.

지금 가람에게 이야기해 주고 있는 지식들도 패스로 구입한 것이었다. 그런 경험을 대가 없이 제공하겠다는 것이다.

“아뇨. 괜찮아요. 정말로.”

가람은 단호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거의 100년 만에 누군가에게 베푼 호의가 단호하게 거절당한 기분이 썩 좋지는 않다.

나는 일단 더 권하지 않았다. 어차피 때가 되면 도움을 바라게 될 것이다.

물론 그때 내가 지금처럼 호의로 도움을 줄 것인가는 알 수 없지만.

한 번 떠난 행운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법이다. 저 애송이에게는 제법 좋은 가르침이 되지 않을까.

밤이 되어 모닥불을 피우고 둘러앉자 제롬이 가람에게 이것저것 질문하기 시작했다.

아무 말도 못 하고 쩔쩔맬 줄 알았더니 의외로 천연덕스럽게 거짓말로 둘러댄다.

순한 얼굴로 하는 거짓말이라 그런지 제롬은 일절 의심 없이 가람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

두 사람이 떠들어 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잠을 잘 필요는 없지만 눈꺼풀 아래의 적막은 좋아하는 편이다.

얼굴 위로 시선이 느껴진다. 누구의 것인지는 확인할 필요도 없다.

모두가 조용해진 뒤 눈을 뜨자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잠든 가람이 보였다.

노숙에 익숙지 않은 모양인지 엉성하게 웅크린 몸이 한눈에 보기에도 불편해 보인다. 하지만 곧 익숙해지겠지.

* * *

다음 날, 얼마 가지 않아 수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제롬과 가람은 아직 눈치채지 못했지만 접근하는 속도가 빠른 편이니 곧 마주치게 될 것이다.

흘긋 가람을 보니 설렘과 졸림 사이에서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얼굴이다.

연신 하품을 하고 있는 것을 보니 잠을 깨려는 시도는 하고 있군. 좋아, 잠도 깨게 할 겸, 내버려 둘까.

기척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먼저 기척을 느낀 것은 제롬이었다. 수레가 급하게 멈춰 서자 가람이 호되게 머리를 박았다.

“적이다. 머리 숙여.”

내 말에 잠시 어리둥절해하던 가람은 날아오는 화살을 보고 하얗게 질렸다.

별것도 아닌 시시한 화살인데 세상이 멸망할 마법이라도 떨어지는 것을 보는 표정이다.

한심하기도 하고 놀려 줄까 싶어 일부러 화살을 머리 위에 꽂아 주었더니 더 창백해질 수 있을까 싶던 얼굴이 누렇게 떴다. 거품을 물고 기절이라도 할 것 같다. 저렇게 심약해서야, 쯧.

공격해 온 것은 산적이라고 하기에도 뭣한 떨거지들이었다. 그대로 녹여 없애자 제롬이 질린 시선을 보내왔다. 확실히 방금 것은 범인들이 보기에 대단한 것이지.

가람을 보니 이번에는 꽤 감동한 모양인지 찬탄 어린 시선을 보내고 있다.

이 정도면 집으로 돌아간다는 시시한 소망을 접고 힘을 위해서 패스를 찾게 하기에 충분한 동기가 되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건 오산이었다. 머리 위에 한 대 박혔던 화살에 완전히 겁을 집어먹은 모양인지 그 후로는 거의 말도 하지 않았다.

이래서 죽어 보지 않은 녀석은 성가시다. 한 번쯤 죽으면 무서워할 필요 없다는 것도 알게 될 텐데. 그러면 마음도 훨씬 편해지고 말이야.

“오늘은 조용해서 그런지 하루가 더 길게 느껴지는군.”

내 눈치를 살피며 제롬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긴, 그렇게나 말이 많던 입을 다물고 있으려니 꽤 지루하기도 했겠군.

내가 자신의 말에 호응하는 것은 기대도 하지 않았는지 제롬은 자연스럽게 가람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해 질 녘부터 제 손등에 정신이 팔린 가람은 그의 말을 거의 듣지 않고 있었다.

뒤늦게 ‘네?’ 하고 되묻긴 했지만 그마저도 건성이다. 물러 터진 제롬은 가람이 낮에 너무 놀란 모양이라며 너털웃음만 터뜨렸다.

깍듯이 대하던 제롬에게마저 저럴 정도라면 지금 내 말은 귓등으로도 들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말로 베이스캠프로 돌아가는 것만을 학수고대하고 있군.

베이스캠프.

좋지. 따듯한 집과 익숙한 세계. 그야말로 패스파인더를 위한 보금자리. 패스파인더가 자란 요람.

하지만 그것이 기대한 것과 똑같을 거라고 생각하면 어지간히 안일한 생각이다. 그쯤 되면 꿈도 깨겠지.

단꿈에서 순식간에 칼날이 시퍼런 현실로 들이밀어지면 그 멍청한 얼굴에도 제대로 된 정신이 깃들려나.

“가는 건가?”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을 미행해서 말을 붙였더니 작은 어깨가 펄쩍 뛰었다.

“놀랐잖아요.”

“제롬이 깰까 봐 조용히 올 수밖에 없었어. 그나저나, 결국 가는군. 탐나지 않나? 아까 낮에 봤던 그 힘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전 전혀 흥미 없어요.”

나는 조소했다. 지금이야 그렇겠지.

“작별 인사는 할 수 있겠네요. 잘 있어요. 모르드레드. 여러 가지 말해 줘서 고마워요.”

가람은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무작정 차원 문 안으로 들어섰다. 허공이 그녀의 상체부터 삼켜 간다.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발이 떼어지는 것을 보자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신발은커녕 내내 얇은 천만 두르고 있었던가.

“다음에 올 땐 신발 챙겨 신고 와!”

충동적으로 외친 것과 동시에 가람이 완전히 사라졌다. 들렸을까? 들리지 않았을지도.

되도록 들렸으면 좋겠는데. 다음에 올 때는 거칠고 긴 여행이 될 테니까.

발이 아프다든가 하는 칭얼거림은 질색이다. 가지고 있는 신발도 없고, 사러 가는 것도 귀찮으니까.

날이 밝은 후 갑자기 사라진 가람을 제롬이 의아하게 여긴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내게 물어보기에 모른 척했더니 한참 동안 사방을 뒤지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갈 길이 멀 텐데 잠깐 만난 여자를 상대로 지나치게 친절한 작자로군.

내버려 두면 하루 종일 들판을 헤매고 있을 것 같아서 암시를 걸어 명령하자 넋이 나가서 홀린 듯이 수레를 몰고 떠나 버렸다.

아마 적당히 중간에서 헤어진 것으로 기억되겠지.

인간들은 다루기 쉽다. 성가시면 죽이고, 그것도 내키지 않으면 기억을 조작한다.

짧은 명령으로 천재를 바보로 만들고 철혈의 군주를 사랑에 빠지게 할 수도 있다. 이렇게나 쉬우니 흥미를 가지고 진지하게 대할 수 있을 리가.

그러나 패스파인더는 이렇게 되지 않지.

기억을 건드릴 수도 없고, 관련된 소원을 빌 수도 없다. 패스파인더의 마음과 정신에 관련된 소원만은 절대로 빌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싶다거나, 똑똑해지고 싶다거나 하는 것들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다른 패스파인더에 대한 것뿐만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까지 모두 포함해서.

만능인 것 같은 소원이지만 의외로 안 되는 것이 꽤 많다.

첫째로는 패스파인더에 대한 소원, 둘째로는 모호한 소원.

패스파인더의 소원은 패스파인더의 상상력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니 패스파인더가 모르는 것, 형태를 가늠할 수 없는 것은 소원으로 빌 수 없다.

자신이 모르는 것을 소원으로 빌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상상력이 좋으면 꽤 괜찮은 소원을 빌 수 있지.

느긋하게 홀로 앉아 들판을 바라본다. 익숙한 고독의 냄새 사이에서 나는 기다리기 시작했다. 엉망으로 부서져 돌아올 애송이를.

* * *

“어서 와. 다시 올 줄 알고 있었어.”

비난 어린 검은 눈동자가 노려봐 온다. 시선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었다면 아마 지금쯤 나는 바닥에 나뒹굴며 피를 토하고 있었을 거다.

그나저나 며칠 사이에 몰골이 말이 아니군. 눈 밑이 시커멓게 죽은 것이, 누가 보면 방금 살아난 시체인 줄 알겠다.

“다 알고 있었어요?”

억누르는 기색이 역력했지만 목소리가 잘게 떨리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어깨만 으쓱여 주니 눈동자에서 불꽃이 확 튀었다. 곧이어 성큼성큼 다가와 주먹을 말아 쥐는 것이 멱살이라도 잡을 기세다.

“알고 있었다고!”

장난은 여기까지. 무례를 귀엽게 봐 주는 취미 같은 건 없다.

“나한테 이러면 안 되지. 내가 그렇게 만든 것도 아닌데 말이야.”

휘둘러 오는 발칙한 손을 간단하게 잡아 내렸다. 일순간 기세가 확 꺾인 것이 눈에 보일 정도다.

순식간에 기가 죽어 눈치를 살피는 것을 보니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은 끝났나 보군. 쓸 만한 편이다.

“저, 죄송해요. 너무 흥분했어요.”

“괜찮아. 이해하니까.”

적당히 친절하고 적당히 상냥하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너그러운 내 태도에 분위기는 한결 부드럽게 흘러가기 시작했다.

이것저것 말하고 어르고 달래어 꾀어내는 것에는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가장 필요한 것.

가장 원하는 것을 제시하면 두 번 볼 것도 없이 맹목적으로 달려들기 마련이지. 게다가 이런 의심할 줄도 모르는 순진한 애송이는 더욱.

“모든 걸 원래대로 돌려놓고 싶지 않아?”

물론 베이스캠프는 원래부터가 베이스캠프였으니 원래대로 돌린다고 한들 베이스캠프 그대로다.

베이스캠프는 활성 차원이 비활성 차원으로 바뀐 것이 아니라, 원래 활성 차원은 내버려 둔 상태로 각성 순간에 원래 차원에서 분화해서 나온 별도의 비활성 차원이니까.

이 녀석이 그렇게나 그리워하는 자신이 살던 차원은 원래대로 흘러가고 베이스캠프라는 차원이 하나 더 늘어난 것에 불과하다. 마치 선택지가 늘어나듯이. 하지만 또 다른 방법이 있지.

“패스를 찾아서 그걸로 네 가족들을 사야지.”

꽤 정확한 표현이다. 패스파인더의 소원은 패스파인더의 상상에 기초하여 이루어진다.

그러니까, 그 머릿속에서 그렇게나 간절하게 원하는 가족이라는 고깃덩이를 형성해 내는 것도 가능하다는 말이지.

가구처럼 네 가족을 구입해서 네 세상을 닮은 곳에 비치해 두는 거야. 네 상상을 기반으로 움직이는 고깃덩이를 만들어 내는 거지.

원래대로라고 했을 때 떠올린 이미지를 구상하는 데 드는 패스가 얼마나 될지는 모르겠지만, 이 애송이 망아지를 정신없이 달리게 할 정도는 되겠지.

“패스를 찾겠어요. 그리고 모든 것을 원래대로 돌려놓겠어요.”

제법 유효한 제안이었는지 애송이의 표정이 결연해졌다.

수많은 순간을 가르는 결정 중에서 결정자가 분명하게 결과를 인지하고 내리는 결정은 얼마나 될까.

대부분은 그 결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상태로, 혹은 결정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이 내리게 되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려진 결정들은 당연하겠지만 대부분이 잘못된 결정이고, 대단한 후회와 절망을 불러오기 마련이다.

이 애송이는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겠지.

그 목표를 달성하든 하지 않든 그 끝은 동일할 것이다. 그때를 기다리며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여흥이다.

이 애송이는 절대 모를 것이다.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변화할지. 그저 불안에 떠는 것이 고작일 뿐이지.

나는 잘게 떨리는 가람의 어깨를 두드리고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좋아. 잘 생각했어. 내가 찾는 걸 도와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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