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92화 (192/256)

12화

* * *

동족이라는 것은 신기하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 피부 아래를 긁어내는 것 같은 어찌할 바 모르는 고독감이 사라지고 호감이 솟아오른다.

나같이 삭막한 인간이라도 실없는 농담에 약간의 진심을 담아 웃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건 정말로 신기한 일이다. 이게 얼마나 나에게 있어 신기한 일인지 다른 사람은 절대 모를 것이다.

아마 이 애송이도 나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막 태어난 새끼가 어미를 따르듯이 따르는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그녀는 정말로 쉽게 믿었다. 일말의 의심조차 없다. 지금까지 누군가에게 속거나 악의 어린 행동을 당해 본 적이 없었던가 싶을 정도다.

전에 보니 거짓말은 어떻게 할 줄 알던데, 아무리 패스파인더의 유대감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를 이렇게나 따르는 것을 보면 천성이라고밖에 할 수 없을 것 같다.

멍청하기까지 한 그 천진함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속이 뒤틀렸다. 생각해 보면 불공평하기 짝이 없다.

제롬조차도 착한 놈이지 않았나. 누구는 각성한 후에도 각성 전에도 내내 악당 같은 놈들만 만났는데.

이것이 치졸한 질투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래서 뭐? 당연한 감정이 아닌가.

저 빌어먹을 천진함을 보면 만년 동안 갈 것 같던 따듯한 호감도 차가운 악의로 굳어지고 이글거리는 질투가 끓어올라 심장을 터뜨릴 것 같다.

보고 있을 때마다 이렇게나 불쾌감이 솟아오르는데도 한편으로는 본능적인 호감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패스파인더들의 동족 유대.

싫은데도 호감이 간다. 불쾌한데도 함께 있고 싶다. 그래서 최근 깨달은 것이 있다면, 블리스에 관한 것이다.

나와 함께해 놓고도 마지막엔 내가 싫다며 떠난 그 패스파인더.

요즘은 정말로 블리스가 이해가 간다. 나를 싫어하면서도 함께 있었던 이유. 그리고 끝내 떠나 버린 이유.

동족 유대가 불러일으키는 호감은 오래된 패스파인더들의 고독을 치유하는 효과가 있다.

그것은 쩍쩍 갈라진 목구멍에 떨어뜨리는 몇 방울의 이슬같이 영롱한 것이다.

“뭐 해?”

야영을 준비하라 했더니 어느 순간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게 앉아 있는 것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천 뭉치 같은 것을 쓰다듬던 가람이 화들짝 놀라 대답해 온다.

“네?”

“이건 뭐야?”

“침낭이에요. 안에 들어가서 자는 거.”

사각거리는 천과 부드러운 것이 덧대어진 이불 같은 물건이었다. 모포 같은 것인가.

비는 막을 수 없겠고, 보온도 잘 되지 않을 것 같은데. 뭐, 상관할 바 아니겠지.

“물 끓어. 난 안 먹어도 되는 몸이지만, 넌 뭐 먹어야 하지 않겠어?”

모닥불에 올려놓은 냄비를 턱짓하자 가람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주섬주섬 일어나 가방에서 네모난 종이봉투 같은 것을 꺼냈다.

꽤 두툼한 것을 보니 무언가 들어 있는 듯하다.

그러고 보면 이 녀석은 함께 다니는 내내 저 봉투에 든 음식만 먹었다.

내게도 권하기에 몇 번 먹어 보긴 했는데,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과 달리 상당히 맛이 좋은 편에 속했다.

“라면이라도 끓여야겠네요. 모르드레드 씨도 같이 먹어요.”

이계의 물건들은 신기하다. 아주 놀라운 물건까지는 아니었지만 그 형태나 용도를 짐작하기 힘들어서 꽤 흥미를 자아내는 편이었다.

어떻게 하나 지켜보았더니 봉투 안에서 노랗고 구불구불한 빵 같은 것을 꺼내어 끓는 냄비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조그마한 봉투를 뜯어 가루를 풀자 갑자기 음식 냄새가 확 풍겼다.

이럴 때면 이 녀석이 애송이라는 것을 실감하곤 한다. 소원을 빌어 본 적도 없고, 쫓겨 본 적도 없고, 패스를 찾아 본 적도 없는 애송이. 스스럼없이 질문하고 스스럼없이 대답을 믿어 버리는 조심성 없는 멍청이.

죽어 본 적조차 없는 애송이.

이런 애송이는 모르겠지만, 숲에서 음식 냄새를 풍기며 요리를 하면 이것저것 성가신 것들을 불러 모으기 마련이다.

게다가 이런 곳에는 라쿠카가 대량으로 서식하고 있기 때문에 더욱 위험하다.

“단걸 싫어하시면 잘 못 드시겠지만, 저는 좋아하는 건데 드셔 보세요.”

음식 냄새가 퍼지지 않도록 결계를 치고 있는데 가람이 무언가를 내밀었다. 받아 들어 껍질을 벗기고 보니 거무튀튀한 돌멩이다.

단것을 싫어하는가 하는 말을 보면 단맛이 나는 물건인가. 이계의 음식 외양은 솔직히 진짜 이상한 것들이 많다.

이런 것이 길바닥에 떨어져 있으면 의심의 여지 없이 돌멩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한 입 베어 물자 조금 딱딱하고 찐득거리긴 했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경고한 대로 강렬한 단맛에 멈칫하긴 했지만 신기했기 때문에 금방 하나를 다 먹어 버렸다.

“모르드레드 씨의 베이스캠프는 어떤 곳이에요?”

야영 준비가 끝나고 나니 심심했던 모양인지 가람이 질문했다.

“별거 없어. 여기랑 거의 비슷하지 뭐.”

“저, 모르드레드 씨는 여기가 처음 연 차원이에요?”

“뭐, 비밀도 아니니 말해 주지. 나는 벌써 차원을 세 번 바꿨어.”

솔직히 적은 편이라고 생각한다. 첫 번째 차원은 살아 있는 생물이 없는 상태고, 두 번째 차원은 대륙 하나가 멸망했다. 그리고 세 번째 차원이 이곳이었다.

“왜 바꾸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슬슬 이것저것 물어 오는 것이 귀찮아지기 시작해서 나는 대충 대답했다.

“그냥 질려서 바꿨어. 좀 더 신기한 세상을 보고 싶기도 했고.”

“모르드레드 씨는 베이스캠프를 이미 활성화시키셨나요?”

베이스캠프의 활성화? 아아, 이 녀석에게 가벼운 장난을 쳐 놓았지. 당연히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답은 간단했다.

“아니.”

“왜…….”

갑자기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지 않은 지 벌써 몇 년이나 되었다.

베이스캠프의 기억을 떠올리지 않은 지도 몇 년이다. 가람의 질문은 잊고 있던 기억을 불러일으켰다.

“네가 상관할 바 아니잖아?”

가만히 쳐다보자 가람이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허둥지둥 당황했다. 그리고 끓어오르는 냄비로 화제를 옮겨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아무렇지도 않은 척 권해 왔다.

“다 불겠네요. 드실 거죠?”

두 번째로 말하는 것이지만, 이계의 음식은 정말로 이상한 모양새다.

솔직히 시뻘건 국물에 지렁이 같은 것이 둥둥 떠다니는 것이 지옥에서나 먹을 것 같은 형태였지만 냄새는 제법 근사했다.

처음 보는 것이니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라서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거 이름이 뭐지?”

“라면이에요.”

지금까지 한 번도 먹지 않았던 걸 보면 흔한 음식이 아닌 걸까.

“귀한 음식인가?”

“아니요.”

“그럴 거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천해 보이는 음식이군.”

가람의 얼굴이 구겨졌다. 한껏 준비해서 권했는데 이런 소리나 들으니 기분이 상한 모양이었다.

얼굴로 욕을 하고 있는 모습이 꽤 웃기다. 이 애송이는 표정이 풍부한 편이라 제법 놀려 주는 재미가 있다.

먹지 말라고 하고 싶은 눈치가 역력했지만 그렇게까지 치졸한 성격은 아니었는지 한 그릇 떠서 건네곤 말없이 식사하기 시작한다.

그런 반응을 보여 주면 놀리지 않는 것이 오히려 무례한 행동이겠지.

“너는 여자가 이게 징그럽지도 않나? 지렁이 같은 걸 잘도 먹는군.”

툭 하고 말을 건네자 눈썹이 울컥해서는 솟아올랐다. 간신히 참기에 속으로 좀 웃다가 나도 음식을 먹어 보았다.

솔직히 좀 놀랐다. 굉장히 기괴한, 벌레를 먹는 느낌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상당히 괜찮은 음식이었다.

국물의 감칠맛도 그렇고 식감도 훌륭한 데다 간도 적당하다. 물을 끓여 대충 처넣어 휘휘 젓던 조리 과정에 비하면 정말로 놀라운 수준의 음식인 것이다.

“한 그릇 더.”

빈 그릇을 내밀자 가람의 입술이 꿈틀거렸다. 아마 욕설을 하려던 모양이지만 자제력 좋게도 직전에 멈춘 것 같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그릇을 흔들어 보이자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곧 가득 담아 그릇을 돌려주었다.

한 그릇씩 더 청할 때마다 입술이 씰룩이긴 하지만 차마 거절하지 못하는 것이 놀리는 재미가 쏠쏠하다.

나중에는 더 먹고 싶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놀리기 위해서 일부러 더 달라고 할 정도였다.

어쨌든 오랜만에 배가 부르니 한껏 노곤해져서 나는 잔뜩 풀어져 바닥에 늘어졌다.

“으음.”

바닥에 누워 있으니 가람이 빈 그릇을 보며 난처한 표정을 짓는다. 배가 고픈가? 하지만 먹은 양이 적은 편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아니, 솔직히 놀리느라 표정만 봐서 얼마나 먹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왜?”

“설거지를 해야 하는데, 물이 없어서요.”

길바닥에 누워서 자는 처지에 어울리지 않게 깔끔을 떠는 모습이다. 제롬은 깔고 자던 천으로 대충 닦아 내던데.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 무시하려다가 충동적으로 허공에 손을 휘저었다.

“우와!”

허공에 거대한 물 덩이가 맺혔다. 별것 아닌 마법이었지만 가람은 탄성을 아끼지 않았다.

한참 동안 허공의 물에 손가락을 넣기도 하고 표면에 손을 대어 보기도 하던 그녀는 곧 부지런히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나는 느긋하게 누워 설거지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묘한 느낌이다. 이 감정을 무어라고 해야 할까. 증오? 악의? 질투? 물론 그런 것도 있다. 하지만 그것뿐만이 아니다.

패스파인더로서의 본능이 이끄는 강력한 호감.

타인에 대한 관심을 완전히 잃었다고 생각했던 나를 놀라게 할 정도로 강렬한 그 호감이 지저분하고도 차가운 감정과 어우러진다.

“왜 그래요? 제 얼굴에 뭐가 묻었어요?”

빤히 보고 있던 내 시선을 느끼고 가람이 어색하게 제 얼굴을 쓰다듬었다. 손바닥에 묻어 나오는 것이 없자 더욱 의아한 얼굴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타인의 행동에 의해 스스로의 행동을 결정하는 식의 삶을 산 지가 언제인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이니 상대가 어색해한다고 배려하는 것이 오히려 새삼스러운 것이다.

그래, 새삼스럽다. 새삼스럽고 낯설다. 농담에 웃는 자신이, 친절을 베푸는 자신이, 놀리면서 재미를 얻는 스스로가 낯설기 짝이 없다. 갑자기 덜컥 두려움이 몰려왔다.

“어디 아프세요?”

만져 보지 않아도 내 얼굴이 굳어 있으리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가람과 만난 지는 겨우 일주일도 되지 않았다.

그사이에 나는 웃고 농담하고 장난을 치는 사람이 되어 있다. 이 애송이가 나를 이렇게 변화시킨 것이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다.”

이건 좋지 않다. 블리스가 떠났을 때 얼마나 절망했는가를 기억하면 이 이끌림은 내게 결코 좋지 않다.

게다가 블리스는 아주 오래된 경이로운 존재였다. 그에 비해 겨우 이런 한심한 애송이 따위가 나를 바꾸려고 들다니. 지독하게 불쾌했다.

“음, 어디 아프시면 말해 주세요. 통하는 약이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렇게 말한 가람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곧 침낭이라고 불렀던 천 뭉치 안으로 꼬물거리며 파고들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곯아떨어졌다.

고단했던 모양이다. 낮은 숨소리가 고롱고롱 울리는 가운데 갑자기 커다란 꾸르륵 소리가 끼어들었다.

자고 있다고 생각했던 가람의 몸이 흠칫 굳는다. 필사적으로 자는 척을 하고 있지만 꼬르륵거리는 배 울음은 연신 이어졌다.

* * *

“지금 제 패스를 가로채신 거예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가람이 으르렁거렸다. 위협하는 모양새였지만 전혀 무섭지 않다.

아마 지금 내가 받고 있는 건 세상에서 가장 의미 없는 위협이 아닐까?

“가로채다니. 말은 똑바로 하자고. 이건 싸게 먹힌 거야. 내가 너한테 알려 준 지식들, 내가 패스로 샀을 때는 얼마였는지 알아? 설마 내가 그걸 공짜로 알려 주기라도 했을 거라고 생각했어?”

“우린 동료였잖아요!”

가람이 억울하게 외쳤다. 아아, 순진하기도 해라.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면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동료라는 것은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일방적으로 도움을 받는 관계는 동료라고 하지 않지.

그런 의미에서 가람은 절대 동료가 아니다. 도움은커녕 오히려 거슬리니까.

“이봐, 동료? 동료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난 그냥 내 패스가 충전되는 동안 너에게 수업을 해 주고 수업료를 받은 거야. 그것도 아주 저렴하게. 지금은 멋몰라서 내가 원망스럽겠지만, 나중엔 나에게 감사할걸? 그나저나, 네가 지금 걱정할 건 이깟 작은 패스를 내가 가졌다거나 하는 그런 게 아니야.”

그녀에게 알려 준 지식을 얻는 데 얼마나 많은 패스를 소모했는지 안다면 결코 나를 원망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행 내내 베푼 가르침만 해도 나는 이 패스를 얻을 자격이 충분하다. 물론, 패스를 가로챈 것도 가르침의 일종이다.

정신 놓고 멍하니 살면 이런 꼴을 당하게 되기 마련이지. 솔직히, 300년쯤 패스파인더를 하면 패스 한두 개는 전혀 아쉽지 않게 된다.

설령 그것이 패스파인더의 초기 생활을 쉽게 해 주는 500의 첫 패스이더라도 별로 욕심나지 않는다. 그리고 이제 마지막 가르침을 줄 차례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곧 알게 될 거야. 죽으면 더 좋고.”

그 말을 마지막으로 나는 아주 높은 상공으로 이동했다. 하늘에서는 가람을 둘러싸고 있는 라쿠카 무리가 한눈에 보인다.

자아, 사냥 시간이다.

예상대로 느린 상황 파악 덕분에 가람이 도망친 것은 늦어도 한참 늦은 시점이었다.

포위당한 다음에 도망쳐 봐야 아무 소용이 없지. 가방에서 이것저것 꺼내어 던지는 듯했지만 의미 없는 짓이었다.

그리고 외마디 비명 소리와 함께 가람이 라쿠카에게 뒤덮였다. 그 뒤는 지켜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아 나는 자리를 뜨기로 했다.

향하는 곳은 남쪽. 제롬과 나눈 대화 덕분에 아하른의 검투 도박을 건너뛰고 온 것이 뒤늦게 아쉬워졌기 때문이다.

* * *

아하른은 난폭하고 메마른 갈색 도시다.

철과 광물이 풍부한 암석 산은 식물이 자라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늘이 없기 때문에 주변 도시들에 비해서 독보적으로 무덥고, 비는 거의 오지 않아 운 좋게 싹을 틔운 식물이 있다고 해도 필연적으로 말라 죽기 마련이다.

덕분에 이 도시에서 농부를 보는 것은 밭에서 물고기를 보는 것만큼이나 힘들다.

이곳에서 가장 흔한 직업은 광부이고, 그다음은 대장장이, 그리고 나머지는 검투사와 도박꾼들이다.

사실 엄밀히 말하자면 광부든 대장장이든 여관 주인이든 모두가 도박을 한다.

사람들은 모이기만 하면 강한 검투사에 대한 정보를 떠들고 돈을 가장 많이 딴 사람에 대한 소문을 퍼뜨린다.

그러면 거의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만큼 그 사람은 으슥한 뒷골목으로 끌려 들어가곤 했다.

그런 일이 비일비재해도 도박을 그만두는 사람은 없다. 옛날이야기에 괴물이 나온다고 해도 어린아이가 요정을 포기하지 않고 그 으슥한 숲으로 들어가듯이.

도박으로 일확천금을 벌어 부자가 되는 환상을 꿈꾸며 강한 검투사를 요정처럼 동경하는 덩치들이 도시 가득 바글거렸다.

그렇기 때문에 아하른 중심에 위치한 거대한 검투장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떠들썩하다.

온갖 놈들로 정신없이 소란하니 내가 이렇게 갑자기 슥 나타난다고 해도 수상하게 여겨질 염려라곤 없는 것이다.

도박에 참여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여기저기 널려 있는 커다랗고 우스꽝스러운 붉은 모자를 쓴 사람을 찾아가 검투사의 이름을 말하고 돈을 건네면 종이에 회차와 베팅한 금액을 적어 돌려준다.

나중에 이것을 같은 사람에게 내밀어 돈과 바꾸는 것으로 배당금을 손에 쥘 수 있다.

승률에 따라 배당금이 다르고 고로 인기 있는 검투사는 배당금이 아주 낮다.

당연히 방금 여기에 온 나는 누가 인기 있는 검투사인지도 모른다. 그냥 적당히 아무 번호에나 걸 생각이다. 바람직한 도박 방식이라곤 볼 수 없다.

하지만 하나같이 시시한 검투사들에 대해 열 올리며 떠들어 대는 것도 할 짓이 못 된다.

잘난 듯이 검투사에 대한 정보를 늘어놓는 얼간이들과 얼굴을 붉히며 뜨겁게 토론하는 멍청이들을 헤집고 모자를 찾아보았다. 마침 근처에서 적당한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2번에 걸어 줘.”

검투는 보통 최소 두 명이서 하니까 2번이면 적당한 놈에게 걸리겠지. 금화 다섯 개를 내밀자 모자가 이채 어린 얼굴로 돈을 받아 들었다.

그는 말없이 빠르게 도장을 찍은 베팅 표를 내게 건넸다.

“당신, 방금 아슈에게 걸었지?”

표를 받아 들자마자 누군가가 내 어깨를 잡아챘다.

앞니 두어 개가 새카맣게 썩은 더벅머리 남자다. 눈알이 노랗고 악취가 심했다.

아슈라. 2번 검투사의 이름인가? 말없이 보고 있었더니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동무를 해 왔다.

“나와 함께 가자구. 아슈한테 거는 놈들이 많아. 아슈는 정말로 대단한 놈이야. 이번에는 꼭 딸 거라고.”

어깨에 둘러진 손이 우악스럽게 나를 잡아끌었다.

별 저항 없이 따라갔더니 이놈과 비슷하게 이가 썩고 냄새나는 것들이 미소 지으며 반가운 척을 한다.

“여어, 어서 와. 새로운 친구인가?”

그렇게 말하며 악수를 청한 것은 한쪽 눈에 안대를 한 남자였다. 내민 손을 대충 잡아 줬더니 갑자기 위협하듯 꽉 잡아 왔다.

투박하고 커다란 손에 비해 내 손은 희고 섬세한 편이라 누가 봐도 남자가 내게 기선 제압을 시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였다.

아아, 그렇군. 알겠다.

“그래, 도박은 처음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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