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193화 (193/256)

13화

손을 맞잡은 상태로 안대가 물어 왔다. 고개를 가로젓자 히죽 웃으며 악수를 풀었다. 손을 들어 확인하니 붉은 손자국이 남아 있다.

“무슨 소녀처럼 새침하군. 이 친구 말은 할 수 있어?”

안대가 나를 데려온 더벅머리에게 질문했다.

“있고말고. 2번에 걸겠다고 말하는 걸 들었다고.”

“그래? 수줍음이 많은가 보군.”

안대가 나름대로 납득하자 다른 놈들이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혼자 온 것처럼 보이는데. 동료는 없나?”

그 질문에 갑자기 동료가 아니었냐고 외치던 가람이 생각났다. 불쾌한 감정이 피어오른다.

이것이 무엇인지 잘 알고 있다. 흐린 하늘에 시커먼 구정물을 풀어서 마구 휘저어 놓은 색의 감정. 후회다.

빌어먹을. 후회라니.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내가 후회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더없이 불쾌하다.

그깟 애송이 따위가 뭐라고 후회를 한단 말인가. 무언가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잘못되었다. 내가 이런 걸 느끼는 건 옳지 않아. 옳지 않다고. 후회라니, 대체 무엇에 대한 후회란 말인가?

“저번에는 지긴 했지만 이번에는 이길 거야.”

“지고도 살아남은 검투사는 정말로 강하다는 뜻이지.”

“그래도 크레타는 만만치 않은 상대야.”

“시끄러워. 초 치는 말 하지 말라고. 크레타 그놈은 별것 아니야.”

“그래, 아슈가 최고지.”

상념에 잠긴 내가 침묵하고 있던 탓인지 화제는 아슈라는 검투사에 관한 것으로 넘어가 있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우리뿐만이 아니라 여기저기 삼삼오오 둘러앉아 자신이 돈을 건 검투사에 대한 맹신을 토하느라 뜨겁다.

“오, 시작하려나 본데.”

더벅머리가 경기장을 가리키며 외쳤다. 네 사람 정도가 경기장을 청소하고 있었다.

돌이나 무기 파편이 떨어져 있지 않는지 세심하게 살피고 꼼꼼히 바닥을 정돈하더니 순식간에 자리를 떴다.

그사이 관중석이 조금 조용해졌다. 자신들끼리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아까처럼 열기 어린 외침은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아, 제발. 이번에도 잃으면 안 된다고. 아슈, 아슈, 아슈!”

우락부락하고 지저분한 놈들이 남자의 이름을 진심으로 간절하게 부르는 모습은 아하른에서 제법 흔한 모습이다.

저놈은 아마 스스로가 어떤 식으로 보이는지 절대 모르겠지. 쯧, 하고 혀를 참과 동시에 뿔 나팔이 길게 울었다.

“시작이야!”

“아아, 아슈. 제발!”

“으아아, 아슈!”

내 주변에 자리한 사람은 모두 아슈라는 검투사에게 건 모양이었다. 초조함으로 울부짖는 남자들 사이에서 조용한 것은 나뿐이었다.

나팔의 울림이 사라질 무렵 경기장 양쪽에 자리한 거대한 철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사방에 자리한 북이 울리며 공기 전체가 떨리기 시작한다. 흥분한 남자들이 두서없이 꽥꽥 소리를 질러 대었다.

점점 빨라지는 북소리는 흥분을 고조시키는 효과가 있다. 떨리는 공기 사이로 욕설과 애원이 마구 뒤섞인다.

문이 모두 열리고 잠시의 시간이 지나자 침묵이 소란의 자리를 대신했다. 모두의 시선이 경기장에 쏠린다.

이 기대 어린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은 없다. 검투사가 가장 먼저 싸워야 하는 것.

무시무시하게 무거운 기대를 헤치고 어두운 문 밖으로 뛰쳐나와 경기장에 서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런 징조도 없이 철문 안에서 두 명의 검투사가 갑작스럽게 걸어 나왔다.

장내는 순식간에 함성으로 가득 찼다. 제각각 응원하는 검투사의 이름을 외친다.

와글와글 뒤섞여 무엇을 말하는지조차 알 수 없는 그 소음 속에서 유일하게 고요히 서 있는 두 검투사가 시선을 교환한다.

검투사의 무장은 별것 없다. 갑옷 없이, 방패 없이, 오직 검 한 자루만 주어진다.

관객은 유혈이 넘치고 사지가 잘려 나가는 잔인한 광경을 원한다. 그러니 방어구는 정말로 의미 없는 낭비에 불과한 것이다.

“싸워, 가서 죽여 버리라고 아슈! 돈 낭비 하게 하지 마!”

“가! 가! 가! 가라고! 호모 새끼들처럼 서 있지 말고!”

“저 새끼 똥구멍에 박아 주란 말이야, 이 호모 새끼들아!”

내 옆에 선 뚱보가 술병을 마구 휘두르며 외쳤다. 술과 침이 사방에 흩뿌려진다. 내 로브에도 조금 묻었다.

그 얼룩을 잠시 바라보다가 고개를 드니 뚱보와 눈이 마주쳤다. 사냥감을 발견한 야비한 기쁨이 뒤룩뒤룩한 얼굴에 스친다.

시비를 걸 태세가 만만하다. 경기장을 보고 있지 않은 것은 뚱보와 내가 유일했다.

“왜? 무슨 불만이라도 있나? 계집애 같은 새끼가!”

“조금 조용히 하는 게 좋겠군.”

나직하게 말하자마자 뚱보의 입이 빠르게 다물렸다.

한 번도 떠들어 본 적 없는 사람처럼 입을 닫은 뚱보는 매우 당황한 얼굴로 제 입술에 손을 넣어 벌려 보려고 시도했지만 손가락을 입 안에 넣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얌전히 앉아서 경기를 보는 거야.”

거의 소곤거리는 수준으로 작게 말했지만 뚱보의 귀에는 천둥보다 큰 소리로 들렸을 것이다.

뚱보가 어색한 움직임으로 관중들 사이에 웅크려 앉았다.

제 몸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란 눈동자가 허둥지둥 사방을 살피다가 마침내 나에게 고정되었다.

“시끄러운 돼지는 경기가 끝나면 구워 먹을 테니까.”

나는 이름 모를 뚱보의 눈에 천천히 공포가 퍼져 나가는 것을 들여다보았다.

와들와들 떨리는 눈동자가 필사적으로 무언가를 호소하려고 했지만 별로 들어줄 마음은 없다.

순식간에 얌전해진 녀석을 내버려 두고 다시 경기장으로 눈을 돌리자 이미 검투가 한창이었다.

눈을 뗀 것은 아주 잠깐이었는데 검투사들은 벌써 상처를 입고 있었다.

한 녀석은 어깨를 베여 피를 흘리고 있고, 다른 녀석은 허벅지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출혈이 큰 쪽은 허벅지를 베인 녀석이었다. 주변에서 외치는 말을 들어 보니 저 녀석이 아슈인 것 같다.

시간을 끌수록 아슈가 이길 확률은 점점 줄어들 것이다. 아직은 현기증이 오지 않은 모양이지만, 시간문제다.

승률을 올리려면 크레타에게 상처를 입혀서 자신보다 더 엉망인 상태로 만들어 주는 수밖에 없다.

아슈는 칼을 세우고 신중하게 크레타를 탐색했다. 그에 비해 크레타는 우락부락한 근육을 과시하며 괴물처럼 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박력 넘치게 휘둘러지는 검의 움직임에 크레타에게 돈을 건 남자들이 환호성을 보냈다.

“으아아!”

괴성을 지르며 아슈에게 달려든 크레타가 무겁게 검을 휘둘렀다.

아슈가 필사적으로 검을 들어 막았지만 육중하게 내려쳐 오는 무게를 모두 감당하긴 힘들었다.

쇠 부딪치는 소리가 검투장을 쪼갤 듯하다. 아슈는 거의 저항을 하지 못하고 필사적으로 막기에 급급했다. 검을 내려치는 크레타는 마치 장작을 패는 나무꾼을 연상시켰다.

아슈를 응원하는 목소리는 이제 거의 없다. 경기장에 크레타를 연호하는 소리가 넘쳐 난다.

아슈는 전의를 상실하고 있었다. 이렇게나 흐름이 한쪽에 치우치면 경기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안 돼!”

응원이 없으면 힘이 빠지기 마련이지. 더벅머리의 단말마를 끝으로 경기가 완전히 끝났다.

크레타의 장검이 아슈를 꿰뚫은 것이다. 복부에 박힌 검을 옆으로 휘둘러 꺼내자 아슈는 거의 반 토막이 났다.

크레타는 피 웅덩이에 누워 꿈틀거리는 아슈를 한 번 걷어차고 관중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환호성이 한층 더 커진다. 바닥에 쓰러져 피를 줄줄 흘리는 아슈에게 관심을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랑해, 크레타!”

“크레타! 네가 최고야!”

“난 이길 줄 알았다고! 이제 난 부자다! 부자야!”

경기가 끝난 후 분위기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손을 흔들던 크레타가 사라지자 경기장 위에는 반쯤 숨이 끊어진 아슈만 남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눈동자에 빛을 가득 담고 찬양하던 남자들은 아슈를 향해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이 손에 들고 있던 쓰레기를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쓰레기가 된 티켓, 먹던 음식 찌꺼기, 낡은 신발 따위가 한때 그들이 사랑해 마지않았던 검투사에게 쏟아진다.

그 쓰레기 사이에서 아슈는 천천히 숨을 거두었다. 야유 속에서 죽어 가는 아슈를 동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두 자신이 잃은 돈에 대해서 분노할 뿐이다.

“빌어먹을! 빌어먹을 아슈! 당신은 괜찮아? 방금 전 재산 건 것 같던데.”

“뭐? 전 재산?”

더벅머리가 내게 건네는 말에 안대를 낀 놈이 반응했다. 잠시 무언가 생각하던 그는 은근한 목소리로 내게 제안했다.

“한 판 더 하고 싶지 않아? 내가 돈을 빌려주지. 따서 갚으면 되잖아. 잃고 집에 간다는 건 말도 안 되지.”

안대를 낀 놈은 침이라도 흘릴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군침을 삼키고 있는 그 얼굴이 의미하는 것은 분명하다.

이 녀석은 노예상이다. 이런 곳에서 돈을 빌려주고, 갚지 못하는 사람을 검투장에 팔아넘기는 것이다.

아마 그런 식으로 팔아넘겨진 인간들은 저 불쌍한 아슈 같은 신세가 되었겠지.

“그래. 이번 판을 졌으니까 다음 판은 이길 거야. 지고 집에 간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다음 판의 루키를 알려 줄게.”

더벅머리가 옆에서 부추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더벅머리와 안대가 의미심장한 시선을 주고받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뭐, 뻔한 수작질이다.

“망설일 것 없어. 자자. 받으라고.”

안대가 강제로 내 손을 벌리고 동전을 쥐여 주었다. 손을 펴 보니 10골드짜리 금화 한 닢이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빌려주기에는 지나치게 큰 금액인데. 하지만 이들은 태연했다. 돌려받을 자신이 있는 것이다.

“행운을 빌어.”

더벅머리가 썩은 이빨을 드러내며 히죽 웃는다. 그리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작은 계약서에 사인하도록 했다.

약한 마법적인 구속이 느껴지는 것을 보니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다. 그저 계약을 증명하는 도구에 불과한 문서였다.

바로 다음 경기에 10골드를 모두 걸었다. 안대의 남은 한쪽 눈이 번들거리며 나를 응시한다.

돈을 빌려줄 때는 친절한 척했지만 아마 내가 갚지 못하면 대번에 돌변할 것이다.

더벅머리는 적당히 혼자 온 것 같은 사람을 잡아채서 지금까지 이런 식으로 돈을 빌리게 하고 신세를 망치게 만든 것이 분명하다.

기대하고 있는 안대와 더벅머리가 알면 실망할 일이지만 나는 더 이상 돈을 잃을 생각이 없다.

이기는 곳에 돈을 거는 것이 아니라 내가 거는 곳이 이기게 될 것이다. 아주 약간의 장난이면 충분하다.

내가 돈을 건 검투사에게 가벼운 마법을 걸면 전설의 용사라도 된 것처럼 날뛸 테니까.

당연한 수순으로 그다음 경기에서 나는 열 배가 넘는 돈을 손에 넣었다.

내가 빈털터리가 되기를 기대했던 안대는 잠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기는 했지만 나름대로 축하해 주었다.

“역시 운이 좋군그래. 자, 이제 돈을 갚으라고, 부자 씨. 15골드야.”

더벅머리와 안대의 동료들이 주머니에서 손칼을 꺼내어 위협적으로 만지작거린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높은 이자지만 이런 위협 앞에서 거부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겠지. 나는 동전을 튕겼다. 10골드 금화였다.

“이봐, 이자를 빼먹었는데.”

허공에서 탁 하고 동전을 잡아챈 안대가 능글능글 웃었다.

재수 없는 웃음이다. 놈의 동료들도 비슷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다.

그래서 나도 마주 웃어 주었다. 서로를 보며 미소 짓는 광경. 화기애애하지 않은가?

“이자에 대한 이야기는 듣지 못했는데.”

“그런 것은 상식이지 상식. 쪼잔하게 굴지 말라고. 큰돈도 벌었으니 몸 성하게 돌아가야 하지 않겠어?”

상식이라. 뭐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나는 5골드 동전을 들어 보이며 권했다.

“그래? 가져가.”

안대와 더벅머리, 그리고 그들의 동료가 덜컥 하고 굳어졌다. 그리고 식은땀을 줄줄 흘리기 시작했다.

한 발자국이라도 움직이면 몸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은 공포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왜 그래?”

이해할 수도, 납득할 수도 없는 두려움에 악을 쓰면서 손을 뻗으려던 두 녀석이 다음 순간 실금했다.

가랑이가 축축하게 젖어 어쩔 줄 몰라 하는 그들을 내버려 두고 나는 몸을 돌렸다.

“안 받겠다니 어쩔 수 없지.”

등 뒤로 황당한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 * *

아하른에서 며칠을 보내는 사이 나는 제법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연이어 승리를 이어 가는 도박판의 행운아라는 것이 유명세의 가장 큰 이유겠지만, 주머니를 노리고 달려든 녀석들을 좀 손봐 준 것도 아주 관련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직접적으로 도륙을 내거나 하는 짓을 한 적은 없다.

하지만 나에게 시비를 걸었던 놈들이 어느 순간 도시에서 사라지는 데다, 그 사라진 인간의 수가 스물이 넘어가니 아무리 눈치가 없는 놈들이라도 무언가 위험하다는 감이 오는 모양이었다.

덕분에 성가신 일이 줄어들어 편하긴 했지만 조금 무료해진 것도 사실이다. 매일매일 도박만 하니 점점 지겨워졌던 것이다.

게다가 경비병들도 귀가 없진 않았는지 사방에서 은근히 감시하는 시선을 던져 오는 통에 성가시기 짝이 없었다.

그런 이유로 나는 지금 아하른을 떠나 그 근처에 있는 멜론다스라는 소도시의 작은 여관에서 묵고 있었다.

“여어. 모르드레드, 왔나?”

방을 나와 층계를 내려가자 묵고 있는 여관에서 안면을 익힌 사내 중 하나가 느긋하게 인사해 왔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아마 남자도 별로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오늘도 쌀쌀맞구먼.”

그대로 인사를 무시하자 남자가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제프릭 씨. 그만해요. 싫어하시잖아요.”

제프릭. 그런 이름이었군. 비어 있는 의자에 적당히 앉자 제프릭에게 핀잔을 준 점원이 다가와 이것저것 먹을 것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일일이 값을 치르는 것도 귀찮았기 때문에 도박에서 딴 돈의 대부분을 여관비로 지불했더니 알아서 모시겠다는 태도였다.

먹거나 잘 필요가 없는 나에게는 사실 별로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지만 굳이 주는 것을 마다하는 성격도 아니다.

“아니, 싫어하다니. 난 그냥 인사를 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불한당 취급을 하면 나 정말 슬퍼.”

연약한 척 제프릭이 우는소리를 했지만 점원은 흥 하고 콧방귀만 뀌었다.

하긴, 얼굴에 털이 부숭부숭한 흉악한 남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칭얼거림이지.

“그나저나, 미나는 아직 안 왔나?”

슬쩍 주변을 둘러본 제프릭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미나라는 것은 이 여관의 여주인 이름이다. 이 여관의 이름이 ‘미나의 집’이니 외우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 된다.

“곧 오실 거예요. 아직도 포기 안 하셨어요? 그 술은 안 판다니까요.”

“그래도 혹시 모르잖아.”

“절대, 절대 안 파실 거예요. 그건 특별한 술이라고요.”

“특별한 건 나도 알아. 그러니까 마시고 싶은 거지.”

제프릭은 뱃살이 두둑한 털보다. 그는 매일 이곳에 와서 여관 주인을 기다린다. 그리고 매일 이런 실랑이를 반복한다.

미나가 가지고 있는 특별한 술. 그것을 마시는 것이 제프릭의 목표였다. 시시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봐, 모르드레드.”

갑자기 내 테이블로 다가앉은 제프릭이 빵을 찢어 우물거리며 말을 걸었다. 저 빵은 당연히 내 몫으로 놓여 있던 것이다.

나는 대답 대신 수프를 떠먹기 시작했다. 완벽한 무시였지만 나와 마주치는 내내 받던 취급이기 때문에 제프릭은 자연스럽게 혼자 떠들기 시작했다.

“당신 부자잖아. 미나한테 한번 제안해 보면 안 될까? 금화 백 개 정도면 팔아 줄지도 모르잖아. 사람 하나 살린다고 생각하고. 응? 내가 그 술 한번 먹어 보려고 이 여관에 드나든 게 벌써 5년이라고.”

얼굴 시커먼 털보의 눈물이 그렁그렁한 애원은 밥맛을 떨어지게 하는 효과가 있다.

탁자에 탁 하고 나무 숟가락을 내려놓는데, 때마침 문을 들어서던 미나가 제프릭의 기대를 단칼에 잘라 내었다.

“억만금을 줘도 소용없어. 그건 특별한 술이라고.”

“아, 제발 미나.”

“이제 좀 포기해.”

“절대 포기 못 해. 죽어도 먹고 죽을 거야!”

장 봐 온 것을 들고 들어가는 미나의 옆에 따라붙은 제프릭이 어린아이처럼 칭얼거린다.

투닥거리는 둘을 향해 점원이 흐뭇한 미소를 짓는 것을 바라보던 나는 짧게 빛을 발하고 사그라지는 손등을 발견했다. 패스의 충전이 끝난 것이다. 슬슬 떠나야 할 때인가.

아니, 어쩌면 떠나지 않아도 될지도.

충전이 다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바늘이 유례없이 짧다. 거의 없는 것에 가깝다.

패스가 아주 지척에 있다는 뜻이다. 운이 좋았군. 최소한 이 도시 안쪽, 어쩌면 이 여관 어딘가에 있다.

“미나. 진짜 딱 한 모금만 마실게. 응?”

테이블을 정리하고, 식재료를 손질하던 미나가 눈을 치켜떴다. 제프릭이 두터운 어깨를 웅크리며 한껏 불쌍한 척 눈을 깜빡인다.

“제프릭. 정말로 소용없어. 그건 유품이야. 어머니가 살아 있을 때 만든 술 중에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거란 말이야. 그냥 오래된 여관의 비장의 술 같은 것이 아니라고. 그러니까 제발 좀 그만해.”

미나가 진지하게 말하자 제프릭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떨구었다. 하지만 나는 알고 있다. 제프릭은 포기하지 않았다.

패스가 여관 안의 어딘가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니 나도 조금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어쩌면 그 술병 안에 있을지도 모르지.

“이봐.”

슬쩍 손짓하자 점원이 길이 잘 든 개처럼 쪼르르 달려왔다.

“손님, 시키실 일이라도?”

“그 술, 어디에 있지? 제프릭이 탐내는 그 술 말이야.”

미나가 갑자기 경계 어린 얼굴로 나를 돌아보았다. 점원의 표정도 굳어졌다. 제프릭은 그 사이에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손님 그 술은 판매하지 않는…….”

“가져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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