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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스파인더-194화 (194/256)

14화

말을 끊고 가볍게 암시를 걸어 명령하자 점원이 홀린 듯이 벽장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점원이 술을 가져올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던 여관 주인이 비명을 지르며 벌떡 일어났다.

“덴버! 무슨 짓이야!”

그녀는 그대로 다듬던 채소를 내던지고 점원을 향해 달려들었다. 그사이에 어느새 다가온 제프릭이 멱살을 잡아 나를 일으켜 세웠다.

“너, 무슨 짓을 한 거야.”

바로 코앞에서 제프릭의 얼굴이 으르렁거리고 있었다. 두꺼운 어깨와 굵은 팔은 단숨에 나를 후려쳐서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처럼 보인다.

흉흉하기 짝이 없는 그 기세에도 불구하고 나는 태연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어?”

자신의 위협에도 불구하고 아무렇지도 않아 하는 내 태도가 그를 헷갈리게 만든 모양이었다.

그가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그의 손에서 내 옷깃을 빼냈다. 잠깐 사이에 주름이 지고 말았군. 나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내 손짓은 가볍기 짝이 없었지만 제프릭은 난폭하게 날아간 헝겊 인형 같은 몰골로 벽에 처박혔다.

울컥하고 피를 토한 그는 가까스로 고개를 들고 나를 노려보았지만 그뿐이었다. 내장이 다 박살 난 인간이 할 수 있는 건 별로 없다.

나는 무력해진 제프릭을 내버려 두고 미나를 향해 다가섰다. 미나와 점원 덴버는 아직도 실랑이 중이었다.

“덴버, 정신 차려.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술병을 끌어안은 미나가 울먹이며 애원했지만 덴버는 존경하던 자신의 상관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덴버에게서 술병을 빼앗는 와중에 몇 대 맞은 모양인지 미나의 얼굴은 붓고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었다.

미나가 안고 있는 저 술병이 아마 제프릭이 그렇게나 염원하던 술일 것이다. 나는 가볍게 그것을 끌어당겼다.

필사적으로 술병을 끌어안고 있던 미나가 덤으로 함께 딸려 온다. 그녀는 세상에 다시없을 끔찍한 것을 보는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당신, 당신 뭐야! 왜 이런 짓을…….”

내게 소리치던 미나가 순간 무언가에 얻어맞은 것처럼 말을 멈췄다.

아마 술병을 잡고 있던 자신의 양팔이 어깨부터 잘려 나갔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아직도 술병에 붙어 있는 잘린 팔을 털어 내고 병 안쪽을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싸구려 유리로 만든 병이라 그런지 내용물이 잘 보이지 않는다. 충격에 빠진 미나를 내버려 두고 나는 제프릭에게로 걸어갔다.

미나를 향해 절규하던 그는 내가 갑자기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기겁하며 기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가까이 가서 보니 제프릭의 두 다리는 완전히 부러졌고 상체가 괴상하게 움푹 들어가 있었다.

아마 뼈가 부러진 모양이다. 내버려 두면 아마 한 시간 정도 살다가 죽을 것처럼 보인다.

“뭐, 뭐야. 가까이 오지 마. 이 괴물!”

“괴물이라니. 네 소원을 들어줄 사람에게 말이 너무 심하군.”

제프릭은 완전히 겁에 질려 멍하니 나를 바라보았다. 소원이, 죽기 전에 꼭 이 술을 마셔 보는 것이었지?

나는 그의 입을 벌리게 하고 그 바로 위에서 술병을 터뜨렸다. 부서진 술병의 유리 조각과 흘러나온 술이 제프리를 덮치듯이 쏟아진다.

입 안으로 들어온 술과 유리를 뱉기 위해 제프리가 컥컥 숨을 내쉬었다.

아쉽게도 패스는 술병 안에 없었다. 나는 손가락에 묻은 술을 핥았다. 별맛은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니 완전히 아수라장이었다.

테이블과 의자는 한데 뭉쳐 박살 났고 점원은 넋이 나간 얼굴로 멍하니 서 있다.

여관 주인은 다리를 이용해 잘린 팔을 수습하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있었다. 눈물과 피가 얼룩져서 썩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그나저나, 괜한 짓을 했군. 술병에 패스가 있다고 생각하지만 않았어도 이런 귀찮은 짓을 하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하늘로 올라가 멜론다스에 마법을 쏟아부었다. 모든 것이 재로 변해 허물어지는 마법이다.

패스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쓰레기나 다름없으니, 이렇게 도시를 잿더미로 만들면 건물을 일일이 돌아다니며 찾는 수고를 덜 수 있다.

고운 가루가 된 도시의 밤은 매우 고요했다. 그 사이에서 패스는 홀로 별처럼 빛난다.

나는 평화로운 도시에서 70의 패스를 손에 넣었다. 적은 패스이긴 했지만, 소도시의 가치 따위에 비할 만한 것이 아니다.

* * *

“구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뮐러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가 정중하게 인사했다. 나는 이 남자가 마법사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보았다.

마법사라곤 해도 그야말로 하찮은 능력의 소유자다. 마법사라고 부르기도 아까울 정도다.

그래도 옆에서 나를 경계하고 있는 사냥꾼보다는 훨씬 나은 녀석이다.

검은 머리 사냥꾼 녀석은 주제넘게도 내게 탐색하는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거슬린 나머지 그냥 죽여 버릴까 하고 생각하던 차에 마법사가 녀석의 옆구리를 찔러 시선을 돌리도록 만들었다.

“은인에게 무례한 시선은 그만두십시오.”

내게 들으라는 듯이 마법사가 사냥꾼을 타박한다.

마법사는 내가 자신들을 구했다고 굳게 믿고 있는 모양이지만, 사실 그것은 완전히 오해였다. 패스를 찾던 중에 일어난 우연에 불과했다.

패스를 찾아 베녹사스의 밀림에 들어서니 숲속의 새들을 다 쫓아낼 기세로 작은 용 한 마리가 발광하고 있었다.

바위 사이에 머리를 들이밀고 거친 독무를 뿜어내는 것이 약이 보통 오른 게 아니었다.

마침 바늘이 가리키고 있는 방향이 녀석이기도 해서 머리를 잘라 내었더니 바위 안에서 갑자기 이 두 녀석이 튀어나온 것이다.

“저, 그런데 마법사십니까?”

한참 동안 눈치를 살피던 마법사가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대답할 의무는 전혀 없다.

이 녀석도 정말로 궁금해서 질문한 것은 아닐 것이다. 마법이 아니면, 검도 없는 내가 어떻게 맨손으로 용의 머리를 잘라 냈을까.

내가 말없이 용의 고기를 베어 내어 모닥불에 굽기 시작하자 마법사가 얼른 돕기 시작했다.

사냥꾼은 그저 멀뚱멀뚱 서서 하는 양을 보고 있을 뿐이다. 약삭빠르지도 않고, 눈치가 있는 것도 아니다.

별로 강해 보이지도 않는 이 사냥꾼이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남았는지 신기할 정도다. 설마 용을 잡겠다고 들어온 건 아니겠지.

“저…….”

마법사가 쭈뼛쭈뼛 운을 띄웠다. 나는 시선도 주지 않고 묵묵히 고기를 구울 따름이다.

패스는 아마 용의 배 속 어딘가에 있는 것 같았지만 뭐 급할 것은 없다. 이왕 커다란 고깃덩이가 생겼으니 조금 구워서 맛을 보는 것도 좋겠지.

“숲에 동료가 남아 있는데 말입니다.”

그가 눈치를 보며 힘겹게 말하는 순간 나는 고개를 들어 숲을 응시했다.

어둠 속, 길게 죽어 있는 용의 뒤에서부터 살금살금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졌다. 누구의 것인지는 궁금해할 필요도 없다.

선명하게 닿아 오는 존재감. 패스파인더의 것이다. 이렇게나 풋내 나는 패스파인더의 기운은 내가 아는 한 한 명밖에 없다.

가람.

그 이름을 떠올림과 동시에 그녀가 모습을 드러냈다. 조금 기쁜 기색으로 거침없이 다가오던 걸음이 나를 발견하고 갑자기 느려졌다.

불안이 가득한 얼굴로 망설이기에 나는 기대에 부응하기로 하고 후드를 끌어 내렸다.

“안녕, 좀 들지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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