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구르는 것이 멈춘 후에도 나는 한참 동안 웃었다. 즐거워서 견딜 수가 없다.
아까 느끼고 있던 짜증, 지겨움, 불쾌함이 모두 사라지고 마치 바보가 된 것 같은 즐거움만 남았다.
그렇게 웃고 있었더니 어느새 다가온 가람이 내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아, 좀 더 위로 들어 줄래? 정면에 네 가슴이 보이거든.”
참을 수 없이 즐거운 기분으로 농담을 던지자 가람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뭐가, 그렇게 웃긴 거야.”
당연히 즐겁지. 안 즐겁겠어? 이렇게 신나게 놀아 보는 건 정말 오랜만인데.
“나는 지금 너 때문에, 모아 둔 패스도 다 쓰고, 내 동료는 심각하게 다쳤고, 막막한 심정으로 힘내려고 노력하는데, 그런 내가 우스워? 아니, 네 꼴이 더 우습다고. 봐, 머리만 남았잖아! 내가! 이렇게! 마음대로 할 수 있도록!”
제법 침착하게 시작된 말이었지만 끝은 분노로 마감되었다. 가람이 외치면서 내 머리를 바닥에 내리쳤기 때문에 정신을 차리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즐거웠다. 강렬하게 유쾌했다. 가람이 내 머리를 휘두르며 무언가 떠드는 것 같았지만 귀가 부서질 것처럼 쾅쾅거려서 거의 들리지 않는다.
아, 한쪽 귀는 실제로 부서졌군.
무섭게 얼굴을 굳힌 가람은 재생 중인 내 몸을 그러모으고 그 위에 기름을 부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신경질적으로 퍼붓더니 곧 단단한 둔기를 집었다. 번들거리는 그 눈에 이성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아, 이번에는 정말로 놀랐다. 이 애송이에게 이런 모습이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는데. 나는 진심으로 내 생각을 수정했다.
나와 떨어져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나름대로 발전이 있긴 했던 모양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 애송이의 때가 조금 벗겨진 건가.
둔기가 내려치기 직전 나는 칭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잘했어, 정말로 잘했어, 애송이.
“꽤 하잖아?”
퍽 하고 내려쳐진 둔기에 머리 절반이 부서졌다. 말을 할 수가 없다.
나는 눈알이 부서지기 전까지 그녀가 살점을 휘날리며 내 머리를 깨부수는 것을 지켜보았다.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어린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어색하기까지 한 기분이다.
베이스캠프로 돌아온 건 정말로 오랜만이다. 죽어서 돌아온 건 더욱 오래간만이다.
보통 베이스캠프에 오면 기분이 더러워지기 마련인데 즐거움의 여운이 남아서 그런지 이번에는 그렇게까지 언짢지가 않다.
그렇게나 즐거웠던 것이다. 입이 부서지지 않았다면 연신 칭찬을 했을지도 모르겠다.
광기가 번들거리던 눈. 정말로 일품이었다. 짜릿하기까지 하다.
그래. 오랜만에 즐겁게 해 주었으니 일단 조금 내버려 둘까. 다음에는 얼마나 즐겁게 해 줄지 조금 기대되기 시작했다.
* * *
다시 만난 가람은 나를 정말로 실망시켰다. 그리고 분노하게 만들었다.
나를 부수고, 죽이고, 둔기에 살점을 묻히며 광기 어린 눈을 번들거리던 패스파인더는 어느새 웃고 떠드는 멍청이가 되어 있다. 그동안 얼마나 말랑한 시간을 보내었는지 뺨이 해사하다.
그런 표정으로 웃으라고 죽어 준 것이 아니다. 나를 죽인 것은 저런 얼간이가 아니다.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경멸에 대거리를 하고 싶은 기분마저 들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그 한심한 덩어리들을 토막 쳤다.
정말로 한순간이었기 때문에 소란은 거의 없었다. 사방에 너저분하게 흩어진 고깃덩이들은 말을 하지 못하기 때문에 숲속은 평화로울 정도로 조용했다.
그리고 잠시 후 비교적 멀쩡한 가람의 시신이 조용히 사라졌다.
나는 어둠을 드리운 나뭇가지에 올라앉아 아래를 바라보았다. 피워 놓은 모닥불이 힘없이 일렁이며 시신을 비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장작이 없었던 탓인지 모닥불은 금세 꺼지고 말았다. 그리고 가라앉은 검은 밤 속으로 가람이 나타났다.
가람은 목이 부서질 것처럼 울고 절망했다. 나로서는 정말로 이해하기 힘든 감정이다.
어차피 내버려 둬도 죽었을 것들. 그녀에게는 방해밖에 안 되는 쓰레기였다.
동족인 내가 있는데, 영원히 고독한 패스파인더의 삶에서 나를 만나는 행운을 거머쥐고도 어째서 저 쓰레기들에게 집착한단 말인가.
울고 웃으며 정신을 놓은 것처럼 행동하던 가람은 곧 덤덤하게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는 들개처럼 가람의 그림자를 밟았다. 그러는 내내 내 마음은 진창을 구르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그렇게 즐겁지 않았다. 그 쓰레기들을 떼어 내면 아주 만족스러울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남은 것은 한없이 가라앉는 우울함뿐이다. 원인을 알 수 없어서 더 답답했다.
마을 하나를 불태워 그녀를 도와 보았지만 그래도 마음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검은 얼룩은 지워지지 않는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모르겠다. 이럴 때의 정답은 정해져 있다. 외면하는 것이다.
그 일이 충격이 되었는지 가람은 예전보다 조금 삭막한 얼굴을 하게 되었다.
당황해서 금방 촉촉해지던 눈동자는 건조하게 메마르고 입 밖에 내는 말 중에 실없는 농담은 하나도 없다. 내가 바라던 모습이다.
그녀는 이제 더 이상 애송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아니게 되었다.
그런 끔찍한 짓을 어떻게 하냐며 기겁했을 일도 서슴없이 하게 되었는데, 그 결과로 나는 그녀가 피운 모닥불에 구워지고 있는 중이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로 할 줄은 몰랐다.
“이봐, 내가 저쪽으로 넘어가서 재생이 될 때까지 기다렸다가 돌아올 거라는 생각 안 들어? 날 이렇게 취급해도 되는 거야?”
처음에는 나를 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벌벌 떨었으면서. 그 모습이 짜증스럽기만 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조금 즐거웠던 것 같기도 하다.
“재생 못 하잖아.”
단칼에 잘라 오는 가람의 말은 확신을 담고 있었다.
“헤에, 알고 있었어? 저축만 하는 줄 알았더니 쓰기도 하는 모양이네. 그래, 뭘 산 거야? 치유 능력? 아니면 매혹술?”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는 능력.”
“뭐야? 그 쓸모없어 보이는 능력은? 너무 보잘것없잖아.”
“그러게. 무한히 되살아날 수 있는 사람이 구입한 반불사의 능력보다는 덜하겠지.”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래, 그런 과거도 있었다. 죽음이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는 것을 몰랐던 시절, 겁쟁이였던 나는 첫 소원으로 불사를 빌었다.
그리고 얻은 결과물이 이것이다. 부서지고 깨어져도 무한히 재생하는 신체. 불사를 위해 한계까지 끌어올려진 재생력.
복잡한 기분에 침묵했더니 가람이 갑자기 뜨거운 재를 끼얹었다.
그녀는 종종 별 이유 없이 일상적으로 나를 고문했는데, 처음에는 재미있었지만 슬슬 고역스러워지고 있었다.
“으윽, 심술부리지 마. 이봐, 내가 내 몸을 소환해서 가져다 붙이면 어쩌려고? 사실 힘을 쓸 수 있을지도 모르고 말이야. 아는 것 하나 없지 않아?”
“전에 베녹사스에서 네 머리 잘랐을 때 잠깐 느꼈는데, 머리 자른 후에 네 힘이 다 사라졌었지. 널 조각내고 1초 정도는 패스로 산 힘이 남아 있어서 알 수 있었어. 아마, 네 능력은 네 몸을 매개로 하는 거겠지? 그래서 그렇게 무력하게 변했고.”
“…….”
나는 다시 침묵했다. 정말로 이 여자가 전에 그 애송이가 맞는 건가?
그래도 이런 어린 패스파인더에게 밀린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했기 때문에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내가 패스로 뭔가 구입하면 상황이 바뀔 수도 있지.”
“패스로? 너 패스 못 쓰잖아. 문양도 없고.”
“문양이 왜 없어. 사실 문양은 내 눈 안에…….”
“아니, 손등에 있잖아.”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예전에, 생각 안 나? 치매가 왔나? 내 패스 가로챌 때, 손등으로 흡수했잖아. 기억하고 있어 아직도. 그런 주제에 마치 다른 곳에 문양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하려고, 내 문양이 손등에 있어서 다행이라는 둥 헛소리했었지.”
가람이 얄미운 얼굴로 비아냥거렸다. 치매라니.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고, 들을 일이 있으리라 생각지도 못했던 단어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산 채로 머리가 구워지는 기분은 어때?”
“아프지.”
조롱하듯 건네어진 질문에 나는 덤덤하게 대답했다.
가람이 갑자기 긴장했다. 멀리서 다가오는 기척이 느껴졌다. 두 명 정도.
수레 같은 것을 끌고 오는 모양인지 바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갑자기 입에 흙이 처넣어졌다.
“으읍, 읍?”
“조용히 하고 있는 거야.”
그대로 천에 감싸여져 버렸기 때문에 가람이 누구를 만났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다음에 본 가람의 기분이 아주 저조했던 것을 보면 그리 좋은 만남은 아니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가람은 정말로 정성스럽게 나를 짐짝 취급하고 있었다. 재생한 살점을 정성스럽게 자르고 내가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지 못하도록 온갖 수를 짜낸다.
얼마나 고민하는지 옆에서 지켜보는 내가 다 감동을 받을 지경이었다.
그 노력을 생각하면 좀 더 곁에 있어 주고 싶었지만 포대기 속의 세상도 슬슬 지겨워졌기 때문에 나는 적당히 기회를 봐서 탈출했다.
그리고 나를 약혼자라고 소개하는 가람의 말은 정말로 압권이었다. 그녀를 만나고 나서 그것만큼 나를 웃게 한 일은 없었지.
나는 빠른 재생을 위해 자의로 죽음을 택함으로써 서대륙에 돌아왔다.
죽은 패스파인더가 베이스캠프에서 이동하게 되는 지점이 마지막으로 차원의 문을 열었던 장소인 까닭이었다.
그녀는 지금 동대륙에 있으니 언젠가는 서대륙으로 오게 될 것이다.
베록에서도 동대륙에 갈 수 있기는 하지만, 서대륙에서 동대륙의 배가 서는 곳은 한 곳뿐이다.
나는 칼츠버그를 기점으로 느긋하게 재회를 기다리기로 했다.
* * *
“잘생긴 오빠. 놀다가 가요!”
팔을 부드럽게 잡아끌며 가느다란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그대로 뿌리치고 걸어갈 수도 있었지만 나는 멈춰 섰다. 흥미롭군.
나는 지금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로브로 감싸진 차림이다.
깊게 후드를 눌러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보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자는 나에게 잘생겼다고 말했다.
“잘생겼다고?”
내가 되묻자 여자가 조금 당황했다가 사르르 웃었다. 제법 미인인 편이다.
뽀얀 가슴을 절반 이상 드러내고 다 찢어진 치마를 걸치고 있는 것을 보니 사창가에서 일하는 여자인 모양이다.
“응, 분위기가 미남인걸.”
천연덕스럽게 대꾸하며 여자는 자연스럽게 나를 끌어당겼다. 딱히 가려던 곳도 없었기 때문에 순순히 따라나서기로 했다.
어차피 도시를 방황하며 가람을 찾아다니고 있을 뿐이었기 때문이다.
“이리로 와요. 자아.”
복잡한 골목을 헤치며 여자는 중간중간 나를 돌아보고 웃었다.
어린아이를 달래는 것 같은 웃음이라 나는 순간 내가 몸을 변형하지 않은 줄 알았다.
“여기예요.”
여자가 안내한 건 사창가 한가운데에 위치한 작은 건물이었다. 사방에 널린 창녀들이 퇴폐적인 시선을 던져 오자 나를 끌고 온 여자가 경계하듯 주변을 노려보았다.
그리고 먹잇감을 빼앗기기 전에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얼른 건물 안으로 나를 밀어 넣는다.
“여기가 내 방이에요.”
찰칵, 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걷고 있던 내가 어지간히 얌전해 보였던가. 그녀는 시종일관 이끄는 자세로 나를 대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귀한 집 도련님이라도 잡아먹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방은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어지간한 여관보다 깔끔하고 제법 괜찮은 냄새도 난다. 창문도 하나 딸려 있었는데, 내다보니 바로 앞에 여관이 보였다.
사창가를 찾는 가장 큰 손님이 여관에 묵는 여행자이기 때문에 여관 근처에 자리를 잡은 모양이었다.
창가 근처에 자리를 잡고 앉자 여자가 내 손을 잡아 부드럽게 문지르며 묘한 시선으로 눈을 깜빡인다.
“뭔가 마실 걸 드릴까요? 마침 괜찮은 술이 있는데.”
이런 곳에서 내놓는 술은 대부분 그렇게 좋은 술은 아니다.
하지만 먹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고개를 끄덕이자 여자가 아양을 떨며 두 손을 내밀었다.
“선불이에요.”
새하얗고 자그마한 손. 나는 그제야 여자를 똑바로 보았다. 아주 앳된 얼굴이다. 열다섯? 열여섯? 스물은 안 되어 보인다. 아마 사창가에서 일한 지도 얼마 안 되겠지.
그러니 로브로 온몸을 감싸고 있는 사람에게 잘생겼다느니 하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할 수 있었던 것일 거다.
대충 잡히는 대로 금화를 쥐어 손 위에 올려 주자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벌벌 떨리는 손가락이 여자가 얼마나 동요하고 있는지 알려 준다.
“아, 저. 거스름돈이…….”
“필요 없다.”
일축하자 잠시 멍하게 나를 바라보던 여자가 곧 환희에 젖었다. 손바닥에 새기듯이 금화를 꽉 쥔 그녀는 움켜쥔 손이 떨릴 정도로 힘을 주며 활기차게 외쳤다.
“저, 저 정말 잘할게요! 잘해 드릴게요!”
사창가에서 보기 쉽지 않은 씩씩함이다. 그녀는 우당탕 소리가 날 정도로 서둘러 방을 뛰쳐나가더니 곧 술과 먹을 것을 잔뜩 들고 들어왔다.
대단한 소란이었던 모양인지 문밖에서 의아해하는 기척이 서넛 기웃거리다가 곧 사라졌다.
“제 이름은 디오나예요.”
조심스레 따른 술을 나에게 쥐여 준 디오나가 슬쩍 몸을 붙여 왔다.
음식을 집어 입가에 대어 주는 것이 받아먹으라는 투였지만 별로 그러고 싶지 않았다.
“배가 고프지 않으신가요? 아, 내 정신 좀 봐. 아직 로브를 입고 계시네요. 벗겨 드릴게요.”
묘한 울림으로 마지막 단어에 강세를 두고 말한 그녀는 곧 조심스레 손을 뻗어 내 후드를 벗겨 내었다.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