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화
디오나는 넋을 잃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받으며 나는 씁쓸하게 술을 머금었다.
예전이었다면 이렇게 잡아끈다고 해도 따라오는 일 같은 것은 없었을 것이다.
언제나 홀로, 나머지는 모두 귀찮은 물건들에 지나지 않았으니까. 이런 식으로 내 얼굴을 쳐다보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겠지.
가람에게 나도 물든 모양이다. 혼자 있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던 시절이 이제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녀의 보자기에 감싸여 이따금씩 투닥거리며 즐거워했던 시간이.
그립다.
그래, 인정하기는 싫지만 그리웠다. 가람과 함께 지낸 그 시간이 진심으로 그립다.
그래서 나는 이 빌어먹을 마을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너무 잘생기셨어요.”
디오나가 한숨처럼 감탄을 터뜨렸다. 나는 묵묵히 술을 들이켤 뿐이다. 술맛이 꽤 괜찮았다. 지금까지 먹어 본 것 중 손에 꼽힐 만하다.
“술맛이 좋죠? 벨바리아에서 만들어진 술이에요. 이제 더 구할 수가 없어서 아주 귀해졌답니다.”
잔이 비자 디오나가 얼른 술을 따라 주었다. 꿈에 젖은 눈망울이 나를 부드럽게 응시한다.
그녀의 눈에 나는 아마 지나가던 왕자님으로라도 보이는 것 같다.
“이야기나 하지.”
“네?”
뜻밖의 말이었는지 디오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녀는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앞섶을 헤집으며 가슴팍을 부드럽게 문지르던 중이었다.
“이야기요? 이야기만요?”
“그래.”
믿기지 않는지 연신 되묻는다. 하긴. 사창가에 이야기를 하러 오는 남자는 없지.
하지만 이런 것들과 지저분하게 뒹구는 것은 절대 용납할 수 없다.
“어, 음. 제 이야기를 해 드릴까요? 아니면, 잘생긴 오빠의 이야기? 그러고 보니 토박이가 아니시죠? 이렇게 잘생긴 사람은 본 적이 없어요. 칼츠버그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건지, 물어도 되나요?”
“사람을 기다리고 있다.”
“어머, 얼마나요?”
“글쎄. 최소한 세 달 이상.”
“여자?”
“여자이긴 하지.”
“어머, 사랑이네요!”
디오나가 두 손을 맞잡으며 꺅 소리를 지르며 뺨을 붉혔다. 사랑? 꿈 많은 소녀가 할 법한 생각이긴 하군.
“왜 그렇게 생각하지?”
“세 달이나 여자를 기다리면 사랑밖에 없죠.”
“그런 것이 아니다.”
디오나가 갑자기 푹 하고 내 가슴팍에 안기듯 기대어 왔다.
“그녀와 함께하고 싶어요?”
그렇다. 가능하다면 영원히. 나와 같은 삶을 사는 유일한 패스파인더이자, 나를 이해하고 함께할 수 있는 존재니까.
“그래.”
“그녀를 좋아하는군요.”
그건 조금 미묘하다. 나는 가람을 싫어했던 적은 있지만, 좋아했던 적은 없다. 재미있어하긴 했지만 그뿐이다.
“잘생긴 얼굴로 바보 같은 표정 하지 말아요. 좋아하는 게 맞다니까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하고 싶어 하기 마련이거든요.”
“아니, 좋아하진 않아.”
“흐응, 좋아요. 그러면 왜 기다리는 건데요?”
그 질문에 나는 뜻밖에도 당황했다. 답은 알고 있다. 하지만 입 밖으로 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한참의 망설임 끝에 나는 힘겹게 대답했다.
“그리움 때문일까.”
“사랑이네요.”
디오나가 단정 짓듯이 말하는 순간 나는 익숙한 소음을 들었다. 그렇게 큰 소리는 아니었다. 누군가가 병이라도 깬 소리일지도 모르지만, 그것과는 다르다.
단발성의 폭발음. 공기를 찢는 소리. 아주 익숙한 울림이었다. 가람이 제 무기로 라쿠카를 쏘아 죽일 때 내내 들었던 소리인 것이다.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디오나가 놀라 일어서는 것을 거칠게 밀쳐 낸 후 소리의 진원지를 찾아 나섰다.
울림으로 보아 한 곳뿐이다. 눈앞에 있는 낡고 지저분한 여관.
“왜 그러세요?”
바닥에 나동그라졌던 디오나가 내 팔을 잡아 온다. 나는 그대로 손을 뻗었다.
이대로 힘을 방출하면 이 여자는 자신이 죽는지도 모르고 죽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여자를 죽이지 않았다.
디오나가 아무렇지도 않게 웃으며 자신을 죽이려고 내밀어진 손바닥에 벗어 둔 로브를 쥐여 주었기 때문이다.
“가요. 가서 사랑을 잡아요.”
헛소리. 속으로 대꾸하며 나는 로브를 걸치고 여관으로 이동했다. 디오나는 사라지고 눈앞에 오래된 여관 문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여관 안으로 들어서니 한창 실랑이 중이었다. 낡고 더럽고 냄새나는 여관에 마찬가지로 낡고 더럽고 냄새나는 놈들이 입 냄새를 풍기며 떠들고 있었다.
“이봐, 생각해 봐. 착한 놈만 있으면 세상이 돌아가겠나? 이 세상에 선과 악은 없어. 상황에 따른 선택만 있을 뿐이지. 봐, 너는 지금 무고한 주인을 죽였다고. 말 몇 마디에 넘어가서 말이야. 그럼 넌 악인가?”
빙 둘러선 구경꾼들의 중심에 제법 열정적인 척 떠드는 놈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가람이 그 앞에 서 있었다.
“나도 피해자야. 세상이 날 이렇게 만들었다고. 내가 혼자서 이렇게 되었을 것 같나? 너도 짧게 굴러먹은 처지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 예전 일은 잊고 친하게 지내는 건 어떨까. 아까도 말했다시피 나는 수배당한 처지라 네 도움이 좀 필요하거든. 동대륙으로 가서 새 인생을 살 거야. 그곳에서는 아주 착하게 살 거라고. 어때, 우리 친해지자고.”
지겹기 짝이 없는 개소리다. 그러나 가람은 잠자코 듣고 있었다. 눈매가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니 인내심이 얼마 남지 않은 모양이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선 채 가람의 인내심이 언제쯤 바닥날지 셈해 보았다.
“단편적인 모습만 보고 판단하자면 나는 악당이겠지만 네가 나에 대해서 다 알고 있는 것도 아니잖나. 그놈들이 나를 망가뜨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안 드나? 이런 인간으로 만든 게 그놈들일 거라는 생각은 안 들어? 나는 복수를 했을지도 모르잖나. 게다가 내게서 직접 피해를 입은 것도 없으니, 좋게 좋게 지내자는 거지.”
가람이 어처구니없는 헛웃음을 터뜨리는 순간 내 건너편에 서 있던 놈이 나를 가리켰다.
“저놈 뭐야?”
놈의 가리킴에 따라 여관 안의 시선이 일시에 내게 당겨 온다. 눈치 빠른 가람의 얼굴이 굳어졌다.
후드를 벗어 얼굴을 드러내자 맹렬한 적의를 담은 시선이 난도질할 듯이 박혀 온다.
와글와글 떠들어 대는 멍청이들 사이에서 가람은 가라앉은 얼굴로 나를 응시했다.
“시끄럽군.”
오랜만의 재회인데, 버릇없는 짐승 따위가 끼어들게 할 수는 없지.
약간의 힘을 개방하자 떠들던 목소리가 죽은 듯이 사라졌다.
내 가까이에 서 있던 놈이 부르르 떨며 내게서 반 발자국 물러난다. 툭 치면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은 얼굴이다.
“오랜만이군.”
가람에게 미소를 보내자 그녀가 까딱하고 인사해 왔다. 그녀에게 다가서자 근처에 있던 놈이 억눌린 신음을 흘렸다.
열정적으로 웅변하던 멍청이다. 그사이 또 새로운 얼간이를 동료라고 사귀고 있는 건가.
“누구지?”
“나와 친해지고 싶어 하는 사람.”
전에 그것들이 없어졌으니 새것으로 다시 그 ‘동료’라는 것을 만들기라도 해 보겠다는 건가.
질리지도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먼젓번 것들보다 훨씬 질이 떨어지는 종류다.
“이제 이런 거랑도 친구를 하는 거야?”
“글쎄.”
“이제 굴러다니는 개똥과도 친구를 하겠군. 하긴, 네 안목이 그렇지.”
“이놈이 개똥만도 못한 건 사실이지만, 내 안목은 멀쩡해. 네가 여전히 미친놈으로 보이거든.”
가볍게 빈정거리자 가람이 거침없이 응수해 왔다. 한 마디 한 마디에 꽉 눌러 담은 적의가 이글거렸다. 나는 순간 멈칫했다.
새삼스럽지만 처음에는 발발 떨기만 하던 애송이가 많이도 컸다.
이제 땍땍거리지도 않고 떼를 쓰지도 않는다. 제법 발전한 편인가. 하지만 입이 꽤 험해졌다.
“입이 험해졌네.”
“덕분에. 그래, 부둣가에서 내가 오길 내내 기다리고 있었던 거야? 여전히 할 일이 없나 보네.”
“그런 편이지.”
가볍게 대답하는 순간 가람이 무기를 꺼내 들었다. 나를 공격하려고 하는 건가.
그런 소용없는 짓을―이라고 생각하기가 무섭게 가람의 총이 불을 뿜는다. 그리고 옆에서 내내 끙끙거리던 놈의 손이 날아가 버렸다.
“조용히 해.”
가람이 명령하자 남자가 목이 끓어오르는 기괴한 소리로 울었다. 아까 웅변하던 것을 보니 하고 싶은 말이 아주 많은 모양이었다.
“아니, 조용히 할 건 없지. 이 친구가 말이 많이 하고 싶은 모양인데, 들어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마법으로 묶어 놓은 머리를 풀어 주자 대번에 욕설이 터져 나왔다.
“이 미친 새끼!”
가람의 입이 험해진 건 이놈의 영향인가. 뒤이어 줄줄이 쏟아져 나오는 욕설을 들으며 나는 가람에게 짧은 소감을 전했다.
“네 친구 입이 험하군.”
“이런 거랑 친구라니, 이 녀석은 너 같은 놈인걸.”
친구가 아닌가. 그렇다면 이 시끄러운 돼지가 우는 것을 계속 들어 줄 필요도 없겠지.
결론 끝에 나는 놈의 입술을 도려내었다. 고의적으로 힘 조절을 하지 않았던 덕분에 입술과 함께 이빨 몇 개가 잘려 나와 뒹굴었다.
“좀 더 크게 말해 봐. 크게 말하라고 입의 크기도 늘려 줬잖아?”
슬쩍 웃어 주자 뻥 뚫린 입으로 남자가 왁왁 소리 지르기 시작했다. 가람은 미동도 없이 그 모습을 감상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로 아무 사이도 아닌가. 진짜로 동료 놀이를 하고 있었다면 그러지 말라고 매달려 왔을 텐데.
어쨌거나 입이 다 잘려서도 떠들어 대는 남자는 볼만한 것이었다.
“재밌는 친구군.”
이렇게나 열정적인 모습을 보니 그 뜨거움을 외형으로도 좀 보여 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든다.
머리카락에 불을 붙이자 남자가 불에 데인 듯이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 실제로 데었군.
“인간 양초라도 된 것 같군. 우스운 모습이야.”
“그러게, 우습네.”
가람이 작게 동조해 왔다. 나는 흠칫했다. 지금까지 이런 적은 없었는데. 그녀가 내 의견에 동의한 것은 처음이다.
“그렇다고?”
“귀 먹었어? 늙어서 그런가. 하긴 갈 때 다 됐지, 안 그래?”
나는 당황했다. 가람은 나에게 동조하면서도 나를 적대하고 있었다. 이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니, 그보다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은 건가? 인간들을 그렇게나 좋아했던 주제에 그 짧은 시간 동안 정말로 이런 것들에 담담해질 수 있단 말인가.
“늙었다니, 이런 도시 한두 개 정도는 무리 없이 불태울 수 있을 정도로 뜨거운 청춘인데.”
과연 저 담담함이 허세인지 진짜인지 나는 시험해 보기로 했다.
“그럼 해 보던가.”
“뭐라고?”
“해 보라고.”
가람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가람은 인간들이 죽는 것이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그저 나를 무시하기로 했을 뿐이다. 싫어하고, 증오하고, 또 무시하면서 마치 없는 인간으로 취급하기로 한 것이다.
갑자기 초조함이 밀려왔다. 그 사이에서 잊고 있던 남자가 다 뭉그러진 입으로 목숨을 구걸한다. 죽음이 그렇게 두려운가. 나는 달래듯 그에게 속삭였다.
“죽지 않게 할 테니 걱정 마. 원한다면 영원히라도 살아 있게 할 수 있어.”
나는 가람이 동질감 어린 시선으로 남자를 바라보는 것을 발견했다. 내가 이 남자와 함께 자신도 토막 치기라도 할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어느 쪽이든 동족이 이런 쓰레기 따위에 동질감을 느끼는 것은 불쾌하다.
“뭘 생각하는지는 알겠지만 난 그러지 않을 거야.”
“그럴 수 없는 거겠지.”
가람이 근처에 있던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그리고 정말로 덤덤하게 앉아 나를 지켜보았다.
잘 감상해 줄 테니 어디 한번 해 보라는 태도다. 예전이었다면 아마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을 텐데.
“두려움이 사라졌군.”
“내가 두려워하길 바란 거야? 그게 네가 원하는 거였어? 그러면 그러지 말았어야지. 이제 두려움으로는 나를 조종할 수 없네. 이를 어쩌나.”
가람이 극적인 어조로 나를 조롱했다.
“그런 것 같군.”
나는 담담하게 인정했다. 정말이다. 그 겁쟁이는 이제 없다. 가람의 말대로 그녀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별것 아닌 감정이지만, 두려움은 편리하다. 상대가 나를 두려워하면 내가 상대를 다루기가 훨씬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녀에게서 두려움이 사라진 지금, 나는 그것을 실감하고 있었다.
예전에 비해서 가람을 다루기가 정말 힘들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나를 무시하고 배척한다.
마음에 들지 않는 반응이다.
가람이 언제까지 나를 무시할 수 있을지 조금 궁금해졌다. 사라진 두려움을 어디에서 찾아올 수 있을까.
솔직히, 진짜로 그게 필요하다. 어쩌면 약간의 잔인한 광경이 두려움을 되찾아오는 계기가 될 수 있을지도.
나는 고통에 뒹구는 남자를 뭉개고 겹쳐서 주먹만 한 덩어리로 압축했다.
이건 꽤 대단한 기술이 필요하다. 죽이지 않겠다고 했으니 약속대로 살려 둔 상태로 이렇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뼈가 부서지고 살이 무너지는 광경에도 가람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이 상태로도 살아 있어. 귀를 가져다 대면, 봐. 심장 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지 않아?”
방금까지 남자였던 덩어리를 권하자 가람이 눈살을 찌푸렸다. 선명하게 드러나는 경멸의 감정.
“더러운 새끼.”
“나 말이야? 냄새라도 나는 건가?”
“그래, 아주 썩은 내가 난다. 미친 노인네의 역겨운 냄새 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