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화
씹어뱉는 혐오 가득한 목소리.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가람의 사라진 두려움을 되찾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머리를 후려치는 것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 지금까지는 별로 신경 쓰지도 않고, 대수롭지도 않게 여겼던 사실이다.
싫어하든 말든 그녀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거라고 자신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신경 쓰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것이 무엇인지도 잘 몰랐다.
그리고 지금 나는 처음으로 그것의 의미를 깨닫고 있었다.
그녀는 나를 싫어한다. 싫어하기 때문에 무시하고, 거부하고, 나를 내버려 둔 채 얼마든지 떠나 버릴 수 있다. 그리고 나는 그녀를 더 이상 마음대로 다룰 수 없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연 내가 원하던 것이 이런 것이었나? 아니, 그럴 리가 없지. 이런 것을 원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아니, 정확히는 무엇을 원한다고 자각하고 있었던 적조차 없다. 가람이 그립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그것을 깨달은 것조차 최근이다.
나는 스스로가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르는 상태로 지금까지 행동한 것이다. 내가 생각한 영원히 함께한다는 것조차 막연하기 짝이 없는 바람이었을 뿐.
“아, 실수했어.”
실수다. 정말로 실수였다.
“예전처럼 두려워서 파들파들 떨 때가 재밌었던 거 같은데.”
내가 아는 관계는 공포로 맺어진 것밖에 없다. 그것이 나에게 가장 익숙한 것이다.
그래서 가람이 나를 두려워할 때는 정말로 쉬웠다. 쉽고, 즐겁고, 재미있고.
그러나 그녀가 더 이상 나를 두려워하지 않는 지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런 것은 모른다. 이런 관계는 모른다. 이제부터 무엇을 해야 할지 완전히 백지였다.
갑자기 왈칵 두려워져 나는 도망치듯 그곳에서 떠나 새카만 밤하늘로 이동했다.
그녀는 고독해야 한다. 고독한 만큼 나를 원할 테니까. 그러나 지금 그녀는 선명한 고독을 드러내면서도 나를 증오하고 경멸했다.
사방에 아무도 없어도 그녀는 여전히 나를 싫어한다. 그녀를 위로하는 애송이들이 없어도, 나에게 오는 일은 없는 것이다.
극심한 후회가 몰려왔다.
오히려 예전이 나았다. 나를 두려워하던 한심한 꼴이 짜증을 불러일으키긴 했지만 그때의 그녀는 나를 무시하지 못했으니까.
그러나 두려움이 사라진 그녀는 손가락에서 빠져나가는 바람처럼 나를 통과할 뿐이다.
어떤 것도, 무슨 짓을 해도 가람에게 아무런 영향을 끼칠 수 없다. 빌어먹을, 그녀가 나를 무시하기 때문에.
그 고독함에도 불구하고 나를 무시하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솔직히 나도 그녀가 썩 마음에 드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홀로 영원히 고독한 것보다는 나았다.
무한한 차원의 미로에서 서로를 이해할 수 있는 동족을 만난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운인지 그녀는 아직 모를 것이다.
그것이 나를 안타깝게 만들었다. 가람의 그런 연약함이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
아.
결국은 이렇게 되고 말았다.
나는 이런 것을 경계했던 것이다.
홀로 괜찮았던 나를 부수고 고독을 고통스럽게 느끼게 만드는 것.
이렇게 되는 것을 염려해서 가람이 나를 흔들 때마다 그렇게나 불쾌해하며 멀리하려고 노력했지만, 꿀에 꼬이는 개미처럼 허덕이며 달려들어 이렇게 되고 말았다.
가장 어리석은 것은 바로 나였다.
여기까지 와서도 아직도 멈추지 못하는 내가 가장 어리석다.
하지만 이미 내 손을 떠난 일. 이제 그저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두는 수밖에 없다. 그 끝이 어디든. 어딘가에는 도착할 테니까.
* * *
기척을 느끼고 눈을 떴다. 얼마나 잠이 들어 있었던 건지 몸 위에 이끼가 수북했다.
기척을 낸 것은 검은 로브를 두른 채 웅크린 남자였는데 야영 준비를 하는 모양인지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가 이끼에 파묻혀 있었던 덕분에 저쪽에서는 나를 발견하지 못한 것 같다.
몸을 일으키자 이끼가 우수수 떨어졌다. 그 바람에 남자가 화들짝 놀라 나에게 검을 겨눈다.
아주 빠른 몸놀림이었다. 지금까지 본 검사들 중에도 손에 꼽히는 수준이다.
“당신…….”
남자가 무언가 말을 걸었지만 아마 정체가 무엇이냐느니 하는 시시한 질문일 것이 분명했기 때문에 나는 온몸에 묻은 이끼를 털어 내는 데 집중했다.
하지만 아무리 털어 내도 풀물이 들어서 그런지 계속 입고 다닐 만한 옷 상태는 못 된다.
그래서 결국 허공에서 새 옷을 불러와 걸치고 나니 어느새 나를 겨두고 있던 칼날은 사라져 있었다.
그야말로 황당하기 짝이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던 남자는 일단 내가 유해하지는 않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뭐, 그가 뭐라고 생각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나는 남자가 피워 놓은 모닥불가에 다가앉아 남자의 가방을 뒤져 음식을 꺼내었다. 그럭저럭 괜찮은 빵이다. 향신료를 넣어 구운 것을 보니 아마 남쪽에서 구입한 것인가.
내가 워낙 자연스럽게 가방에서 물건을 꺼내었기 때문에 제지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서 있던 남자는 내가 빵을 한 입 베어 물고 나서야 화들짝 놀라 달려왔다.
내 손에서 다급하게 가방을 낚아채었는데, 그 바람에 물건 하나가 가방에서 튀어나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떨어지기가 무섭게 남자가 다시 낚아채어 갔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장님이 아니고 시력도 꽤 좋은 편이라 남자의 재빠름에도 불구하고 무리 없이 그 물건이 무엇인지 인지할 수 있었다.
기묘한 문양이 음각으로 새겨진 금속 상자.
“봉인의 궤로군.”
내가 물건의 이름을 말하자 남자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다.
나는 이 남자를 안다. 낯익은 느낌이다 했더니 100년 전에 지겹도록 많이 보았던 녀석들이다.
신을 잃고 방황하는 망령들. 제 신의 잠을 깨우기 위한 기사들이다.
“그렇습니다.”
남자가 순순히 대답했다. 제법 많이 알려진 이야기니까 내가 알고 있다고 해서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지는 않는 모양이다.
“그래, 어디서 손에 넣었지?”
“지스나하의 가장 깊은 곳에서.”
“열쇠는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군.”
남자의 얼굴이 묘하게 굳어졌다. 봉인의 궤와 그것을 찾아다니는 광신의 기사들.
이것은 꽤 유명한 이야기지만, 봉인의 궤와 열쇠가 함께 존재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극소수다.
“그걸 어떻게…….”
“말해 줄 의무는 없지.”
세상은 이들이 처음부터 없던 신을 우상화하여 자신들을 속였다고 떠들어 대지만 사실 신은 있다.
정확히는 있었다. 지금은 크페타인의 호수에 잠들어 깨어나지 않지만, 아직 있는 것은 확실하다.
나는 신을 봉인했을 뿐 죽이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북쪽의 차가운 호수에 그들의 신을 잠재워 둔 것이 벌써 100년 하고도 수십 년도 더 된 이야기다.
그것은 진짜 신은 아니었다. 하지만 약한 것들이 의지하고 선망할 정도는 되는 존재였다.
초월적이기는 했지만, 나에게 견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런 주제에 동정심이 넘치는 모습이 아주 거슬렸기 때문에 적당히 조용히 시킨 것이다.
북쪽에서는 이 이야기가 와전되어 여신 신화의 일종으로 불리고 있는 모양이지만.
어쨌거나 그런 신이라곤 해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던 모양인지, 신을 잃은 종교는 순식간에 타락했다.
신물과 성녀, 교단의 권위를 약탈하기 위해 왕과 권력자들의 손길이 사방에서 뻗어 오고, 불러도 대답 없는 신에 절망한 사제들은 자신의 안위를 사기 위해 믿음을 팔아넘겼다.
그중에 특별한 하나의 신물이 있었는데, 봉인의 궤와 그 짝이 되는 열쇠가 그것이다.
무엇이든 봉인할 수 있는 그 궤는 사악한 자의 손에 넘어가면 세상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물건이라, 신심이 깊은 기사들이 몰래 들고 도망쳐서 누구도 찾을 수 없는 곳에 숨겨 놓았다.
이제 아는 사람이 거의 남지 않은 이야기지만, 봉인의 궤에 대한 기원은 나도 아주 관련이 없지 않다.
옛날 아주 재미있는 술법이 행해졌다. 산 자와 죽은 자가 한데 뒤섞이도록 만드는 술법이었다.
죽은 것들과 산 것들의 경계가 무너지자 신은 봉인의 궤를 사용해 그 안에 술법을 가두었다.
그리고 그것과 한 쌍이 되는 열쇠에 봉인의 힘을 불어넣었는데, 그것이 이 신물의 기원이다.
아, 물론 그 재미있는 술법을 행한 사람이 바로 나다.
신이 내 술법을 봉인하는 동안 나는 수많은 신관을 죽여 그 혼이 함께 봉인되도록 만들었다. 그래야 신이 약해져서 다루기 쉬워지기 때문이다.
“그렇습니까. 아, 제 이름은 서드입니다.”
“모르드레드.”
내 이름을 들은 녀석의 표정이 일변했다. 오호, 기록에 내 이야기가 나오긴 하나 보군.
“설마 당신, 정말인가?”
솜털을 잔뜩 부풀리고 기세를 북돋아 올린다. 천천히 수인을 맺는 모습에 나는 코웃음 쳤다.
애송이 주제에, 나를 어떻게 해 보겠다는 건가. 보아하니 봉인의 수인이다. 나를 봉인하기라도 하겠다고? 열쇠도 없는 봉인의 궤를 가지고?
“너로는 무리야.”
“지금은 무리일지도 모르지만, 열쇠를 찾으면 얼마든지 가능하다.”
“아니, 절대 불가능할 거야.”
내가 날카롭게 꼬집자 놈이 이를 악물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서, 네 신도 불가능했는데 너라고 가능할 리가 있나.
아마 이 녀석은 열쇠를 찾은 다음 북쪽으로 가서 궤를 해방시킬 계획이었을 것이다.
잠든 신의 바로 위에서 성국의 유령과 악령이 날뛰면 아무리 봉인된 신이라고 해도 그 냄새를 맡고 깨어나겠지.
하지만 그 계획이 이루어지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다.
나를 향해 전의를 불태우던 기사의 손아귀에서 봉인의 궤가 심상찮은 기세로 덜걱거렸다.
자욱한 사기가 뭉클뭉클 솟아 나와 순식간에 사방이 시커멓게 물든다.
아, 내가 한 것은 아니었다. 이건 순전히 우연이다. 어쨌거나 진귀한 구경거리라서 나는 빵을 뜯으며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갑작스러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았던 모양인지 어리석은 기사는 상자를 들고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나라면 상자를 내팽개치고 도망치는 쪽을 추천하겠지만.
“열쇠가 망가졌나 보군.”
저대로 두면 죽을 때까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겠다 싶어서 친절하게 설명해 주자 기사의 얼굴이 경악에 물들었다.
있을 수 없다는 표정이군. 그래, 나도 놀랍긴 하다. 하필 이때에 말이지.
봉인의 궤는 열쇠와 궤, 두 가지로 나뉜다. 열쇠가 파괴되지 않는 이상 봉인의 궤는 그 역할을 다한다.
그러나 바꾸어 말하자면, 열쇠가 파괴될 경우 궤는 힘을 잃는다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별로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가람이 그 열쇠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은데.
어디 쇳물에 녹이지 않는 이상 절대 파괴하기 힘든 물건일 텐데. 아, 설마 쇳물에 녹인 건가.
“으, 아. 안 돼. 나는…….”
서드의 로브가 궤에서 흘러나온 사기에 삭아 뭉그러지고 있는 것을 보고 나는 마법으로 내 옷을 보호했다.
손가락과 얼굴이 시커멓게 물든 그가 내게 손을 뻗는다. 그 손을 바라보면서 나는 빵을 씹었다. 약간 질기긴 하지만 향은 괜찮군.
서드는 이제 사기에 거의 다 잡아먹히고 있었다. 절망과 회한, 체념이 차례대로 스쳐 가는 얼굴.
그리고 마침내 모두 다 삼켜진 그는 이제 원래 모습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새카만 괴물이 되었다.
존경받던 성기사가 사기에 삼켜져 마귀가 되는 것은 언제 봐도 감동적인 모습이란 말이야.
예전에는 일부러 고명한 사제를 붙잡아다가 몸 안에 악마를 밀어 넣기도 했었지.
차라리 그냥 죽게 해 달라고 애원하던 목소리가 떠오르자 나는 조금 그리운 기분이 들었다.
“이런, 정말로 나에게 덤빌 셈이냐?”
침을 뚝뚝 흘리는 검은 마귀가 나를 보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봉인의 힘이 사라진 상자는 그저 고철 상자일 뿐이라, 순식간에 열린 저승에서 망령들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마귀와 한데 뒤섞여 나를 향해 달려들었다.
내 영혼에 이끌려 군침을 삼키고 이를 드러내며 혀를 날름거리지만 이런 하찮은 것들에게 잡아먹힐 만큼 무르지 않다.
물론 일반적인 인간들이라면 순식간에 집어삼켜졌겠지만, 그것은 일반 인간들의 이야기.
패스파인더인 나는 이미 영혼의 급이 다른 것이다.
가볍게 힘을 뿜는 것만으로 마귀는 모래처럼 흩어졌다. 빛 앞의 그림자처럼 망령들 또한 혼비백산해서 흩어진다.
손을 들어 그대로 주술을 부숴 버리자 돌아가지도 못하고, 내게 접근하지도 못하는 그것들이 가늘게 울었다.
그리고 며칠 동안 나는 유령들과 어울려 지냈다.
그러는 사이 꽤 재미있는 것을 보게 되었는데, 굳이 유령을 보겠다고 찾아오는 멍청이들이 바로 그것이다.
그 얼간이들에게는 다행스럽게도 내 영혼에 완전히 홀린 망령들은 그들의 옅은 영혼에 전혀 흥미를 보이지 않았지만, 만약 조금이라도 흥미를 보였다면 금방 잡아먹혔을 것이다.
얼간이들은 잔뜩 겁에 질려 달달 떨면서도 유령들 사이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끊임없이 불렀다.
가만히 듣고 있었더니 아마 죽은 사람의 이름인 것 같았다. 그런가. 이렇게라도 죽은 사람이 만나고 싶었던 건가.
하긴, 그렇겠지. 다른 사람들은 불사가 아니니까. 그래서 내가 그 주술로 산 자와 죽은 자가 서로 만날 수 있게 만들어 주려고 했는데 그 신이 쓸데없는 짓을 했지.
죽은 사람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정말 감동적인 이야기잖아? 일단 하나가 죽어야 가능한 이야기지만 뭐 그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이다.
어차피 열 살에 죽으나 백 살에 죽으나 죽는 것은 똑같은데 조금 일찍 죽는 것이 더 슬플 이유도 없지.
일단 죽고 나면, 감동적인 재회를 하는 거야. 아, 이건 정말 좋은 생각이었는데.
그러고 보니 가람도 그 녀석들이 보고 싶을지도 모르겠군.
마침 그 생각을 하는 순간 나는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다. 바로 가람과 함께 다니던 두 명의 애송이였다.
공교로울 정도의 우연이라 나도 잠깐 멈칫했을 정도다. 성국의 유령만을 봉인했던 것 같은데.
아마 주술의 영향으로 저승에서 흘러들어 온 모양이다. 그렇다곤 해도 정말로 대단한 우연이었다.
설마, 하고 자세히 살펴봤더니 역시 그놈들이다.
이 모든 우연이 하나의 흐름으로 이어지는 것 같아서 어처구니없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한마디도 듣지 않았지만 운명이 내게 말하는 것 같다. 흐름에 저항하지 말라고.
좋아, 알겠어. 그렇게 해 주지. 해 주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