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스파인더> 3부
1화
프롤로그
미지의 장소에 첫발을 내디딜 때마다 가장 입체적으로 다가오는 감각은 후각이다.
그 뒤로 시각과 촉각이 뒤따르긴 하지만 그 어떤 감각도 발 디딘 후 들이마시는 첫 숨의 강렬함을 따라오지 못한다.
콧속 가득 파고드는 이질적인 공기를 맛보는 순간 자신이 다른 장소로 왔음을 확실하게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냄새가 전혀 이질적이지 않게 될 무렵이면 가람은 비로소 그 차원에 동화되었음을 느끼곤 했다.
차원의 향기라고 하면 대단히 거창하게 느껴질지도 모르지만 사실 대부분은 별것 아닌 것들이다.
쌀쌀한 바깥을 전전하다가 음식 냄새가 풍겨 나는 주방으로 들어섰을 때, 혹은 비행기에서 막 내린 후 맡게 되는 그 국가의 향신료 냄새나 공기 중에 은은하게 섞여 풍기는 땅 냄새 같은 것들과 별로 다를 것도 없다.
계절조차도 그 특유의 향을 가지고 있어서 겨울에는 겨울의 냄새가 있고 여름에는 여름의 냄새가 있다.
그러니 차원이 향을 가지고 있지 않을 리가 없는 것이다. 차원의 향기라는 것은 그런 맥락의 의미다.
오랜 세월 패스파인더로 살아오며 권태감에 찌들어 가고 싶은 곳을 잃어버린 가람은 주로 ‘아무 데나’라는 장소로 이동하는 것을 즐겼는데, 무작위로 차원을 이동하다 보면 종종 바다나 산, 화염, 심지어는 쓰레기통 같은 온갖 장소에 머리를 처박게 된다.
그런 이유로 차원 이동 후 맡는 이질적인 냄새에도 익숙해져 있고, 쓰레기통에 갑자기 머리를 파묻게 된다고 해도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는 가람이었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특별했다.
눈앞에는 보기만 해도 싱그러워지는 아름다운 녹음이 우거져 있었다.
그러나 숲의 녹음을 무색하게 하는 강렬한 피 냄새가 코를 자극한다. 상큼한 나무들과 진득한 피 냄새. 시각과 후각의 괴리감이 상당하다.
근처에 짐승이라도 죽어 있는 걸까. 짐승의 피 냄새라면 보통 큰 놈이 아니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주변을 둘러보아도 그만한 짐승은 보이지 않았다.
딱히 특별할 것도 없는 숲. 활엽수 사이로 비쳐 오는 햇살 덕분에 평화롭기까지 한 숲이었다. 다만, 조금 적막하다는 것 외에는.
이건 조금 이상하다.
숲이라는 장소는 이렇게 조용한 곳이 아니었다. 작은 짐승이나 곤충들이 울고 떠드는 소리로 소란한 것이 보통이다.
아니면 그냥 단순히 이 차원의 동물들이 과묵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것과는 조금 다른 위화감을 잡아내지 못할 정도로 가람은 둔하지 않았다.
굳이 집중해서 맡지 않아도 자욱한 피 냄새, 발밑으로 깔리는 것 같은 무거운 적막.
제법 흥미로워 보이는 일이었지만 안타깝게도 가람에게는 정체불명의 피 냄새를 쫓는 음침한 취미 따위는 없었다. 아마도 근처에 뭐라도 죽어 있는 모양이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가람은 가볍게 걷기 시작했다. 피 냄새만 빼면 따사롭게 스며드는 햇볕이나 예쁜 색깔의 잎사귀가 가득한 근사한 숲이라 조금 둘러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가람은 작은 마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이 세계에서만 자생하는 특이한 마차 모양의 나무가 아니라면 분명히 마차일 것이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최소한 마차를 만들 수 있는 지성체가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운이 좋다면 마차의 주인을 만나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 곳이나 갔으면 좋겠다 생각하고 이동해 온 참이었기 때문에 과연 어떤 생물이 살고 있을지 알 수 없었던 가람은 조금 설레는 기분으로 조심스럽게 마차에 접근했다.
그러나 가람의 기대와는 달리 가까이 다가가도 느껴지는 인기척은 없었다.
버려진 마차인가 하고 좀 더 자세히 살피려던 가람은 그 뒤로 펼쳐진 광경에 잠시 멈칫했다.
패배한 시체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있었다.
뒤늦게 발견했지만, 마차에는 기다란 화살이 몇 대나 꽂혀 있다. 1미터는 넘을 것 같은 커다란 화살이었다. 창이 아닌가 싶을 정도다.
생존자가 있을까 해서 마차로 다가가 살펴봤지만 안은 텅 비어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근처에서 화려한 옷을 입은 한 구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열다섯? 열여섯쯤 되었을까.
예쁜 금발 머리가 베인 목에서 튄 피로 얼룩진 것만 빼면 제법 괜찮은 상태였다.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는지 얼굴에는 아직 혈색이 남아 있었다. 고급스러운 옷은 흙과 피로 온통 더러웠지만 그래도 나머지 시체들에 비하면 양호한 상태다.
주변에 죽어 있는 시체가 모두 갑옷을 입은 것으로 보아 아마 기사님에게 보호받던 아가씨쯤 되는 모양이었다.
흔히 있는 일이다.
아까 맡았던 피 냄새의 정체는 이것이었나. 가람은 혀를 차며 시체 사이를 걸었다. 치열했을 전투의 현장이 그대로 떠오를 정도로 역동적인 자세로 죽은 시체가 많았다.
그러나 그 유혈 낭자한 풍경을 바라보는 가람의 표정은 심드렁할 뿐이다. 동정도 슬픔도, 충격이나 공포조차 없다.
일단 이 차원은 사람이 사는 곳인가. 옷도 입고, 쇠를 가공하는 수준의 기술력과 문화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정도로도 그리 나쁘지 않은 수확이다. 물론, 시체가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쪽 차원의 첫 만남에 대해 가람은 비교적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어쨌거나 최악은 아니었다.
도착하자마자 거대한 괴수의 입 안으로 내던져지거나 부화 직후 굶주린 거대 개미들에게 둘러싸이는 것보다는 시체 십수 구 사이를 걷는 것이 무엇으로 보나 훨씬 낫다.
그렇다고 해도 산책하기에 좋은 장소는 아니었기 때문에 가람은 미련 없이 이곳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순간 이동으로 한 50미터쯤 떨어진 장소로 이동하면 아마 적당하겠지. 고민할 여지조차 없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결론은 순식간에 났다.
어느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 좋을까 가늠하던 가람은 문득 시체들 사이에서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주 작은 움직임이었다. 그것을 발견한 것은 순전히 운이나 다름없다.
나비의 날갯짓처럼 여리고 하찮은 움직임이었지만 모든 것이 죽어 멈춰 있는 그 풍경에서 유일하게 멈추지 않은 것이다.
시체를 뜯어 먹는 벌레가 날아오기라도 한 걸까. 잠시 관찰하던 가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움직임의 정체는 아주 의외의 것이었다. 바로 눈꺼풀의 깜빡임이었던 것이다.
눈꺼풀의 주인은 거의 다 죽어 가는 남자였다. 복부를 관통하고 바닥에 박힌 두 자루의 칼이 남자를 마치 표본의 곤충처럼 고정하고 있었다.
여기저기 베인 상처도 대단했지만 두 자루의 칼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 남자는 입가를 피로 적신 채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정면으로 누워 칼에 꿰뚫린 상태라 더 할 수 있는 것도 없어 보였다.
가람은 남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자신 위로 그림자가 지자 남자의 시선이 가람을 향했다. 초점을 잡기 힘들어 보이는 흐트러진 눈동자다.
그러나 눈의 색깔은 대단히 아름다웠다. 잿빛과 푸른빛이 뒤섞여 마치 금속 같은 광택이 난다. 가람은 그 눈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남자를 능히 살려 낼 힘과 능력이 있었지만 가람은 남자의 눈 색깔을 감상하는 이상의 일을 하지 않았다. 이 남자는 여기서 죽을 것이다.
그것은 가람에게 슬픈 일도 아니고, 나쁜 일도 아니었다. 죽도록 만들어진 생물이 죽는 것이 어째서 비극이란 말인가?
심지어 가람이 아는 사람도 아니었다. 아는 사람의 죽음조차 만성이 된 가람이 모르는 사람의 죽음에 슬퍼할 이유는 없었다.
그것은 오랜 시간 동안 의식적으로 만들어진 초연함이었다. 무언가가 죽어 가고 있을 때 그것을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
가람에게 있어서 지극히 익숙한 일이며 익숙해야만 하는 일이었다. 가람 주변의 거의 모든 것들은 실시간으로 죽어 가고 있었으니 일일이 그런 것을 괴로워하다가는 정신이 견디지 못한다.
나이 먹고 늙어 가는 것 자체가 죽어 가는 것이다. 칼에 찔리는 것과 비교했을 때 속도의 차이가 있을 뿐 끝은 완전히 동일했다.
가람은 늙어 가는 이들의 시간을 묶어 두지 않았고, 그들을 죽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렇게 하고 싶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저 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그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학습했기 때문이다.
죽음이 파도처럼 쏟아져 소중하고 의미 있는 것들을 앗아 간다고 해도 가람은 스스로를 억눌렀다.
물을 주먹으로 움켜쥐어도 의미가 없는 행동임을 알듯이, 죽음을 막는다고 해도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시 그런 충동을 참는 것은 언제나 힘든 일이다. 죽어 가는 사람이 가람에게 소중한 사람일수록 인내는 더욱 힘겨웠다.
그러나 때로는 슬픈 사라짐이 더 나을 때도 있다는 것을 가람은 어렵게 배웠다.
눈앞의 이 남자를 내버려 두는 이유도 그런 일들의 연장선에 있었다. 흘러가던 톱니바퀴를 억지로 비틀어 빼면 그만큼의 무언가가 뒤틀리기 마련이다.
아마도 이 남자가 여기서 죽지 않으면 손해 볼 사람들이 그 피해자가 되겠지.
그래도 다행인 것은 남자가 죽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 가람에게 그다지 힘든 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면식도 없는 사이이니 인간적인 동정 외에는 별 감정이 들지 않는 것이 당연했다.
아마도 10분에서 15분.
남자의 남은 수명일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니 함께 있어 주는 것 정도는 할 수 있다.
그렇게 가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어 가는 남자를 내려다보는 기묘한 시간이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갈수록 남자의 눈은 점점 더 흐려져 갔다. 조금씩 움직이는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무언가를 보고 있기는 한 것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간간히 깜빡이던 눈꺼풀도 완전히 멎었고 뺨은 파리하게 질려 있다.
출혈이 많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아마도 몸은 점점 무거워지고 감각이 멀어지면서 매우 졸릴 것이다.
아주 사소한, 초점을 맞추는 것조차도 힘겨울 것이 분명했다. 그쯤 되면 눈을 감고 싶은 생각이 간절할 텐데 남자는 안간힘을 써서 눈을 뜨고 있었다. 시선은 가람이 아닌 그 어깨 너머에 닿아 있었다.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보는 하늘.
확실히 아름다운 하늘이었다. 청명하고 맑은 하늘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다. 흰 구름과의 경계도 깨끗하고 햇살 또한 따사롭다.
열망 어린, 집착 어린 쇳빛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살고 싶다는 건가. 가람이 짧게 실소하는 순간, 믿을 수 없게도 남자의 피투성이 입술이 움직였다.
남자의 몸 상태를 봤을 때 시체가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악마도 웃는군.”
가람은 자신을 악마라고 생각하는 듯한 남자의 말에 어처구니가 없어졌다가 약간의 흥미로움을 느꼈다.
차원 이동 후 이루어지는 언어의 동화는 어떤 형태로든 그 언어를 접한 후에 이루어진다.
보거나 듣기 전에는 그 사람이 어떤 언어를 사용하는지 모르기 때문에 의사소통이 불가능했다. 이런 과정은 언어를 등록한다는 말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가 먼저 입 열지 않았다면 가람이 이 남자와 대화를 나누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절대로 말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남자가 갑자기 말을 건네 온 것이 재미있었다.
게다가 그 내용도 인상적이다. 따져 보자면 시답잖은 말인데 그것을 생의 얼마 남지 않은 힘을 소모해서까지 필사적으로 시도하다니.
그의 말이 영 납득 가지 않는 것은 아니다. 죽어 가는 순간 머리맡에서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는 여자라면 악마가 아니라 더한 것이라고도 생각할 수 있을 법하다.
하지만 이런 취급은 정말로 처음이었다. 가람은 다시 짧게 웃다가 남자에게 가볍게 제안했다.
“살고 싶어요?”
순전히 변덕이었다. 이런 제안을 하는 것은 처음이다. 질문 없이 무조건 살려 주던가, 아니면 살려 주지 않던가 하는 두 가지 경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전자의 경우는 보통 가람이 책임을 져야 하는 일에 해당되었고, 후자는 가람의 책임이 없는 경우였다.
남자가 이런 상태가 된 것에 가람의 책임은 한 톨도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지금 그에게 도움을 제안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정말로 이례적인 일이다.
뭐 괜찮을 것이다. 숨이 끊어진 시체를 되살리는 거창한 일도 아니고 그저 약간의 선의로 치료를 해 주겠다는 거니까. 남자의 핏기 없는 얼굴을 내려다보며 가람이 슬쩍 덧붙였다.
“보통 이런 제안을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만 하면 살려 줄게요.”
“대가는 내 영혼인가?”
가람은 다시 짧게 웃었다. 이런, 이렇게 자주 웃은 게 얼마 만이지. 입가에 남은 웃음기를 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가람은 남자가 제 착각을 깨달았을 때 지을 부끄러운 표정이 궁금해서라도 남자를 살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가람의 반응을 긍정으로 해석한 남자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살고 싶다. 내 영혼이라면 마음대로 해.”
반쯤 자포자기한 것 같은 남자의 대답에 가람은 빙긋 미소 지으며 경고했다.
“좋아요. 이제 칼을 뽑을 거니까 죽지 않게 조심해요.”
남자의 배를 꿰뚫은 두 자루 검을 단단히 움켜쥐며 가람은 속으로 덧붙였다.
쇼크사해도 어쩔 수 없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