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패스파인더-201화 (201/256)

2화

Chapter 1

남자는 자신이 포근하고 따듯한 무언가에 감싸여 있음을 느꼈다. 영원히 눈 뜨고 싶지 않은 안락함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상냥한 바람이 따듯하게 자신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는 것 같다. 한없이 빠져들고만 싶은 느낌이었다.

그러나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는 깨어나고 있었다. 손발의 감각이 돌아오고 눈꺼풀의 색을 인지할 때쯤 그는 자신이 눈을 감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당연한 수순으로 눈을 뜬 그는 조금 느리게 눈앞의 사물을 인지했다. 천장에 붙은 책장에 가득 꽂힌 두꺼운 책들.

다음 순간 남자는 제법 요란하게 침대 위에서 굴러떨어졌다. 천장에 꽂힌 책이 자신에게 쏟아지는 것을 피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구른 결과였다.

그러나 남자의 기겁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책장은 마치 천장을 땅이라고 생각하는 듯이 굳건하게 달라붙어 있었다. 물론 책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어딘지 모르겠지만 일단 낯선 곳이라는 것을 알게 된 이상 멍하니 누워 있을 수는 없었다.

그곳이 혹여 천국일지라도 남자는 그렇게 할 것이었다. 게다가 이곳은 아무리 봐도 천국으로 보이지 않는다.

마지막 기억을 반추해 보면 자신이 천국에 있을 리가 없는 것이다. 검에 꿰뚫린 채 죽음 앞에 절망하며 떨던 자신 앞에 나타난 악마.

죽음 직전에 본 환상이라 생각하고 아무렇게나 지껄였지만 자신은 지금 살아 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그녀가 정말로 악마라는 것이다. 혹은 그에 준하는 존재이거나.

악마에게 혼을 팔아 목숨을 구걸했다.

그 사실이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남자는 이를 악물고 사방을 둘러보았다. 정말로 이상하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장소였다.

온갖 물건들이 난잡하게 배치되어 있는데, 태반은 무엇인지 감도 잡을 수 없는 것들이다.

천장, 벽, 바닥, 허공에 아무렇게나 놓여진 물건들은 정돈이라는 개념을 비틀어 부숴 버리고 싶은 것처럼 보였다.

주춤주춤 일어나 허공에 떠 있는 구슬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본 그는 한쪽에 뚫린 문을 발견하고 천천히 걸어 나갔다. 두려움과 얼떨떨한 심정으로 문을 나서자 마치 거실 같은 커다란 공간이 나타났다.

거실의 작은 창문 너머로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푸른 나무들도 보였다.

벽에 하얀 종이가 발려 있다거나, 물건이 허공과 벽에 붙어 있다거나 하는 부분만 빼면 마치 평범한 집과 같은 모습이다.

악마의 집치고는 지나치게 밝은 느낌인데.

그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작게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바로 근처에 누군가 누워 있었다. 이것저것 높게 쌓여 있고 여기저기 널려 있는 물건들 탓에 미처 발견하는 것이 늦었던 것이다.

흠칫한 그가 반사적으로 크게 물러나며 높게 쌓여 있던 책을 밀쳤다. 당연한 수순으로 책들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책이 무너지는 소란에 몸을 일으킨 가람은 자신을 바라보며 딱딱하게 굳은 남자를 발견했다. 완전히 겁에 질린 얼굴이 절망에 차서 일그러져 있었다.

생명의 은인에게 보이기에는 별로 적절치 않은 얼굴이 아닌가 하고 생각하며 가람은 가볍게 인사했다.

“몸은 좀 괜찮아요?”

흉터가 좀 남긴 했지만 배는 치료 마법으로 완벽하게 치료했으니 순전히 인사치레였다.

그 말에 남자가 눈에 띄게 움찔하더니 천천히 제 배를 쓰다듬었다. 옷 위로 만지긴 했지만 배에 구멍이 뚫려 있는지 아닌지 정도는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남자가 침통하게 대답했다. 가람은 초면에, 그것도 생명의 은인에게 반말로 일관하는 그가 조금 무례하다고 생각했다.

물론 남자는 아무리 가람이 자신을 살려 주었더라도 악마 따위에게 공대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기 때문이지만 가람이 알 리 없는 일이다.

“통성명이나 하죠? 전 가람이에요.”

“하스펠.”

대답만 하고 말을 딱 자르는 남자의 태도에 가람은 더 이상의 대화를 이어 가고 싶은 마음이 사라져 버렸다.

하긴, ‘살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은혜를 갚겠습니다.’ 운운하면서 달라붙어 오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은 일이긴 했다.

어쨌거나 남자가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그에 대한 흥미도 거의 사라지고 책임감마저 퇴색된 지 오래였기 때문에 가람은 가볍게 손을 흔들어 작별 인사를 하기로 했다.

사실 가람이 그를 살린 것은 그저 추위에 떠는 고양이 한 마리를 변덕으로 주워 온 것과 같은 무게였기 때문에 그가 살갑게 굴지 않는다고 해서 아주 아쉽거나 하지도 않았다.

“나았으면 그만 가 봐요.”

팔짱을 끼고 선 가람은 턱 끝으로 출구를 가리켰다. 그러자 작은 나무문이 딸깍하고 자동으로 열린다.

그러자 당황스러워진 것은 하스펠이었다. 그는 문자 그대로 어쩔 줄을 모르는 얼굴로 가람을 바라보았다.

“나는 어떻게 되는 거지?”

“그걸 왜 저한테 묻죠?”

가람이 어처구니없는 얼굴로 반문하자 하스펠은 꿀 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한참 만에 망설이며 중얼거리듯 말했다.

“나와 어떤 거래를 한 거지?”

“거래?”

거래라니? 죽어 가는 남자를 자신이 치료해 준 것 외에 무슨 일이 있었나? 가람이 금시초문이라는 얼굴로 눈을 크게 떴다.

“내 영혼을 대가로 나를 살려 주지 않았나.”

실로 굴욕적이기 짝이 없다는 어조로 하스펠이 말했다. 스스로가 악마의 종복임을 시인하는 것은 정말로 불쾌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에 가람은 깨달음을 얻었다.

“아.”

짧게 탄성을 내지른 그녀는 곧 웃음을 터뜨렸다. 죽어 가며 오락가락하던 때라면 몰라도 멀쩡하게 깨어나서까지 그 악마 타령을 믿고 있을 줄은 몰랐다.

황망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 조금 귀엽게 느껴졌기 때문에 가람은 상냥하게 설명해 주기로 했다.

“저는 악마 같은 게 아니에요. 굳이 말하자면, 여행자에 가깝죠.”

하스펠은 진심으로 가람이 자신의 영혼을 주워 먹으러 온 검은 까마귀라고 생각했다.

하스펠이 자란 팔렘시아에는 죽을 때가 되면 검은 까마귀, 혹은 검은 사신이나 악마가 나타나 죽은 자의 영혼을 삼켜 버린다는 전설이 있었다.

가람에게 부리가 달려 있지 않았고, 그렇다고 사신이라고 보기에는 위압감이 없었으므로 악마쯤이려나 하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게 정말이오?”

여전히 반신반의하긴 했지만 한결 누그러진 기색으로 하스펠이 물었다.

가람이 고개를 끄덕여 대답을 대신하자 그는 조금 고민하다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마치 기사들이 주군에게 하는 것 같은 예스러운 자세였다.

“은인께 무례를 범한 점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런.”

가람이 당황해서 마주 무릎을 굽히며 급히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적당히 무안해하는 얼굴을 보여 주는 것 정도로 충분한데, 이렇게까지 숙이고 들어오면 오히려 이쪽이 곤란해지는 것이다.

“딱히 무례했던 것도 없으니 됐어요.”

하스펠은 조금 불안한 표정이기는 했으나 가람이 단호하게 제지하자 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고 있을 때는 몰랐지만 그는 꽤 딱딱한 인상이었다. 물속에 잠긴 검처럼 건조한 청회색 눈동자와 짧은 회색 머리카락이 마치 그를 잘 벼려진 무기처럼 느껴지게 한다.

하지만 그런 외형에도 불구하고 가람은 그가 조금 귀엽다고 생각했다.

물론 가람의 나이쯤 되면 지나가던 할아버지도 어린아이처럼 귀엽게 느껴지기 때문에 특별한 감정은 아니었다.

“배고프죠?”

사실 필사적으로 외면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아까부터 하스펠의 배가 요란하게 울어 대고 있었다.

그의 위장이 스스로가 텅 비어 있음을 깨달은 모양이었다. 하긴, 배가 고플 때가 되긴 했다.

“아닙니다.”

하스펠이 부정함과 동시에 그의 배가 우렁차게 꼬르륵거렸다. 가람과 그가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였다. 가람은 그를 더 놀리지 않기로 하고 웃으며 앞장섰다.

“따라와요. 주방으로 가죠.”

붉어진 귀로 뒤따르는 하스펠은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았다.

* * *

자신만만하게 부엌으로 데려왔으니 응당 요리를 해서 먹여 주어야 함이 마땅했지만 안타깝게도 가람은 하스펠에게 주방을 사용하는 법을 알려 주고 식탁에 앉는 수밖에 없었다.

이쪽 차원의 인간들이 무엇을 먹는가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예전에 들렀던 차원에서는 고기를 구워서 내놓았더니 갑자기 칼을 빼 들고 신성 모독이라고 외쳐 대어 가람을 매우 당황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불은 신성한 것이라 거기에 시체를 굽는 가람의 행동을 용납할 수 없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그리고 어떤 곳에서는 가람이 내민 빵을 낯설게 받아 들더니 한 입 베어 물고 그대로 즉사했다.

아마 밀에 들어 있는 어떤 물질이 그들에게는 독소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빵이라는 것 자체를 아예 먹지 않고 고기만 먹는 사람들이었다.

그 외에도 요거트에 든 유산균에 감염되어 죽는 등 가람을 놀라게 하는 사건이 정말 많았다.

물론 대부분은 가람이 권한 음식을 별문제 없이 소화했지만 그래도 저런 몇몇 사건은 가람에게 조심성을 심어 주었다.

그런 이유로, 가람은 하스펠에게 화덕과 냉장고, 식기와 급수대의 위치를 알려 주고 난처한 기색의 그를 지켜보고 있는 중이었다.

하스펠은 제일 먼저 식재료를 손에 넣어야겠다고 생각했는지 가람의 눈치를 살피며 냉장고 문을 열었다.

갑작스럽게 냉기가 쏟아져 나오자 조금 당황한 듯했지만 냉장고 안의 식재료들이 낯설지는 않은 모양인지 익숙하게 소고기 한 덩이를 집었다. 그리고 가람이 알려 준 대로 냉장고의 내부를 한 바퀴 돌렸다.

가람의 냉장고는 마치 회전문과 같은 형태로 되어 있었는데, 문을 열고 이리저리 돌려 가며 사용할 수 있는 것이었다.

돌릴 때마다 정육, 곡물, 캔 음식, 과일, 가공식품 따위가 가지런히 진열된 공간이 나타났다.

고민하던 하스펠은 냉장고에서 밀빵 몇 개와 사과 두 알, 그리고 밀가루와 달걀을 꺼내었다.

이어서 그는 소고기를 다지고 버터와 밀가루를 이용해 간단한 고기파이를 만들어 식탁에 내려놓는 데 성공했다.

“일단은, 됐습니다.”

목재 식탁 위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고기파이가 놓인다. 사과를 다지고 볶아 반죽 안에 깔고 고기를 듬뿍 넣어 만든 고기파이였다.

풍겨 오는 냄새부터가 식욕을 돋우는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한 파이다. 예상치 못한 솜씨에 가람이 감탄을 터뜨렸다.

“대단하네요. 정말 맛있어 보여요.”

가람의 칭찬에 하스펠이 뿌듯한 표정을 지으며 파이를 갈랐다. 크게 자른 조각을 접시에 덜어 가람에게 밀어 주려던 그가 흠칫 멈췄다.

처음 써 본 화덕이 영 낯설었던 탓인지 파이의 안쪽이 거의 익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파이를 막 받아 들어 맛보려던 가람도 그 사실을 알아챘다.

“이런, 좀 덜 익었네요.”

“다시 구워 오겠습니다.”

“아니에요, 그럴 필요 없어요. 이 이상 구우면 겉은 너무 타 버릴걸요.”

빙긋 웃은 가람이 파이의 위에 슬쩍 손을 가져다 대었다. 그러자 설익은 단면이 순식간에 노릇하게 익어 갔다. 이미 익은 부분은 변화가 없이, 설익은 부분만 구워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실로 놀라운 재주로 일을 마친 가람이 아무렇지도 않게 파이를 집어 들자 하스펠은 그제야 가람에게 묻고 싶은 것이 아주 많다는 것을 깨달았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스펠이 정중하게 입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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