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한 박자 늦게 경이에 가득 찬 탄성이 터져 나왔다. 그는 가람이 얼굴을 변화시키는 내내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지간히 놀란 모양인지 한동안 거의 백치처럼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따위의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결국 슬슬 지겨워진 가람이 내리누르듯 강하게 묻자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더듬더듬 감상을 늘어놓았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뭔가, 저를 굉장히 많이 닮았군요. 마치 여동생이 있었다면 이런 외모일 것 같기도 하고. 아니, 그보다 대체 어떻게 한 겁니까? 이런 일이 가능하다니. 당신은 대체 누구입니까? 어떤 존재인 겁니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전에 한 것 같은데요. 직접 판단하세요. 저는 이미 다 말해 드렸으니까요. 음, 그나저나 평범해요?”
“평범……. 조금 미인인 편이라 시선을 끌 것 같긴 하지만 문제가 될 만한 수준은 아닙니다.”
그렇게 말한 하스펠은 뺨을 조금 붉혔다. 바로 직전에 가람에게 자신을 닮았다고 말한 것이 기억났기 때문이다. 자신을 닮았는데 미인이라니, 본의 아니게 자화자찬을 한 셈이다.
그러나 가람은 그를 안중에도 두지 않고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미인이라는 게 어느 정도인 거예요? 예쁘장한 편? 아니면 마성의 매력 같은 게 느껴지는 미인?”
하스펠은 매우 당혹스러워하다가 곧 마성의 매력까지는 아니라고 대답했다.
확신 없는 어조의 대답이 영 미덥지 못했던 가람은 다시 턱을 문지르며 고민에 빠졌다.
“피부에 잡티가 없어서 그런가?”
말하는 순간 콧등에 자잘한 주근깨가 나타났다. 하지만 가라앉아 있는 가람의 회색 눈동자와 주근깨는 영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라 곧 없애 버렸다.
그리고 눈을 조금 작게 해 보았는데, 어쩐지 그것도 이질적이라서 그만두었다.
그렇게 점을 넣어 보기도 하고 주름을 추가해 보기도 하던 가람은 곧 그 얼굴에 익숙해지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기분에 그냥 그 얼굴을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하스펠에게 간간이 질문을 던져도 쩔쩔매기만 할 뿐 이렇다 할 대답을 해 주지 않아서 객관적인 의견을 구할 곳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그렇게 평범한 것에 집착하는 겁니까?”
가람이 제 얼굴을 찰흙 인형처럼 주물러 대는 것을 바라보던 하스펠이 조용히 질문했다.
어느 정도 충격이 가라앉은 모양인지 아까 같은 넋 나간 표정은 아니었지만 가람의 인간 같지 않은 능력에 질린 것 같은 시선을 보내고 있긴 했다.
“으음, 같은 질문을 받는 게 지겨워서요.”
입을 벌려도 보고 웃어도 보면서 이리저리 얼굴을 만지며 어색한 부분이 없나 확인하던 가람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하스펠은 당연히 그 대답을 알아듣지 못했고, 다시 반문했다.
“같은 질문?”
얼굴에서 어색한 부분을 발견하지 못한 가람이 그제야 하스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하스펠은 그 시선에 움츠러들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가람은 가끔 아주 차갑고 메마른 눈동자로 사람을 쳐다본다. 그럴 때 그녀의 얼굴은 언제나 텅 비어 있었다.
그 인간 같지 않은 면모를 마주할 때마다 하스펠은 감히 눈을 마주쳐서는 안 될 것 같은 느낌에 사로잡히곤 했다.
“제가 차원을 얼마나 넘어 다녔을 거라고 생각해요?”
겨울바람처럼 삭막하고 메마른 어조로 가람이 질문을 던졌다.
“제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과 만나 봤을까요?”
하스펠은 침을 삼켰다. 긴장된 목울대가 움직이는 소리가 천둥보다 크게 들리는 것 같았다. 그를 가만히 바라보던 가람은 조용히 말을 이었다.
“수상한 사람으로 취급되는 건 이제 지겹거든요.”
어디에서 왔는지, 누구인지, 무언가 이상한 것을 캐어 내기 위해 집요하게 쏟아지는 의심 가득한 질문들. 진실을 말해도 믿지 않고, 거짓 대답을 하기도 지친다.
어디에서 왔는지 말해도 그곳을 아는 사람이 없고, 누구인지 물어도 차마 할 말이 없다.
그저 여행자라고 대답하면 어떤 여행자인지 또 계속해서 물어 오는 것이다. 그러다가 어딘가 이상한 점이라도 발견하면 그 부분에 대해 파고들어 온다.
계속해서 가람에게 어떤 존재인지 물어 왔던 하스펠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가람이 생긋 웃었다.
“그래서, 어때요? 평범해요?”
일부러 가벼운 어조로 물어 오는 질문에 하스펠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 정도면 문제없을 수준입니다.”
“다행이네요. 그럼 이제 하나만 남았네요.”
“무기?”
“아뇨, 하스펠의 복장.”
가람이 가리킨 것은 그가 걸치고 있는 한 세트 9,900원짜리 트레이닝복이었다.
Chapter 2
하스펠에게 적절한 복장을 마련해 준 가람은 정오가 약간 지난 시간에 텐트를 접을 수 있었다.
그리고 배낭을 메고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 가볍게 걷기 시작했는데, 하스펠은 그때부터 계속해서 가람에게 같은 말을 건네는 중이었다.
“제가 가방을 메겠습니다.”
“괜찮아요.”
“제가 메게 해 주십시오.”
“정말로 괜찮아요.”
가람이 거듭 거절하자 안절부절못하던 하스펠이 결국 다시 말을 꺼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가람이 메고 있는 가방은 그녀의 몸 크기에 필적할 만큼 거대한 것이다.
그에 반해 하스펠의 짐 가방은 머리통만 한 자그마한 것으로, 그는 이 불합리한 상황을 납득할 수 없었다.
그것은 가람이 놀라운 능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더라도 똑같았다.
짐 가방의 크기에 가려 가람의 몸이 잠깐씩 사라질 때면 죄책감과 수치스러움에 뒤따라가기가 괴로울 지경이었다.
스스로의 명예마저 깎아내려지고 있는 것 같은 느낌에 하스펠은 다시 요청했다. 누군가에게 목격당하기라도 한다면, 아니, 자신부터가 이미 이 상황을 참기 힘들었다.
“제가 메겠습니다.”
가람은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제 주변을 맴도는 하스펠을 즐겁게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도 사실 이 광경이 어떻게 보일지 충분히 알고 있었다. 누군가 목격하기라도 한다면 하스펠에게 별로 명예롭지 못한 평가가 내려질 것이다.
그러나 하스펠의 고지식한 반응이 생각 외로 꽤 귀여운 나머지 반쯤 놀리는 마음으로 거절하고 있었던 것이다.
“괜찮아요. 정말로 전혀 안 무거워요.”
감히 가방을 빼앗아 들 생각을 하지 못한다는 것이 또 재미있는 점이었다.
가람의 거절에 하스펠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진다. 마치 이번 파티에는 반드시 여장을 해야 한다는 말을 들은 사람처럼 괴로워 보였다.
가람이 그렇게나 거듭 거절하자 하스펠은 모든 것을 포기한 얼굴로 옆에서 터덜터덜 걷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연신 흘긋거리는 모습이 가람의 입에서 무겁다는 말이 나오기만을 기다리는 모양이었다.
짐 가방의 크기로 보면 하스펠에게도 그렇게 가벼운 가방은 아닐 텐데 어지간히도 이 상황이 부끄러운 모양이었다.
“옷은 불편하지 않아요?”
“아? 아주 좋습니다.”
하스펠은 가벼운 셔츠에 가죽조끼, 가죽 부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입고 있었다.
바지는 안쪽에 기모가 덧대어진 바스락거리는 질감의 평범한 검은색 바지였는데 어지간히 마음에 들었는지 텐트에서도 내내 그것만 입곤 했다.
아마 가람이 종종 마법을 걸어 주지 않았다면 너무 오래 입은 나머지 냄새가 났을지도 모른다.
“조만간 사람을 만날 수 있겠네요.”
깊게 팬 수레바퀴 자국에 시선을 주며 가람이 조금 설렌 어조로 말했다. 아마 두어 시간 전에 지나간 흔적인 듯 거의 훼손되지 않은 상태다.
바퀴 자국이 여러 갈래인 것을 보아하니 한두 대의 마차로 이루어진 정도가 아니라 꽤 대규모의 행렬이다.
들뜬 가람과는 달리 하스펠은 갑자기 매우 초조해하기 시작했다.
“가방을 제가 들게 해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가람과 함께 적당한 속도로 걷던 하스펠이 서둘러 뛰어가더니 곧 가람의 앞을 막고 고개를 숙였다.
당황스러울 정도로 필사적인 모습에 가람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못 이기는 척 가방을 벗어 건네자 받아 든 하스펠의 표정이 묘하게 변했다.
“말했잖아요. 무겁지 않다고.”
그 말대로였다. 하스펠은 받아 든 가방을 허공에 가볍게 던져 보았다. 이 가방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그는 알고 있었다. 가람이 짐을 싸는 것을 내내 지켜보았으니까.
절대 가벼운 물건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방은 마치 작은 베개 하나가 들어간 것 정도의 무게였다. 들고 있는데도 믿어지지가 않을 정도다.
“이건……. 마법입니까?”
“딱히 마법은 아니고, 양자고정섬유라는 건데 이쪽 차원 물건은 아니에요.
음, 과학 기술이 아주 발전된 세계에서 2050년에 출시된 상품인데 이걸로 가방을 만들면 안에 아무리 많은 것을 담아도 가방 자체의 무게밖에 느껴지지 않게 되죠.
거기에서는 이 섬유를 응용해서 건축이나 화물 운송 같은 여러 가지 분야에 쓰곤 했어요.
뭐 그렇게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냥 상점에서 저렴하게 떨이로 팔기에 몇 개 사서 챙겨 둔 거예요.”
하스펠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가 알아들을 수 있었던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슨 말인지 모르면서 납득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이 가람이 알던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든다.
“다른 세계의 물건이라는 거군요.”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대단한 것처럼 느껴지네요.”
“실제로 대단합니다.”
어쨌거나 가방을 넘겨받은 하스펠은 한결 후련한 얼굴로 앞서 걷기 시작했다. 가람은 조금 허전해진 등을 문지르다가 하스펠의 작은 짐 가방을 빼앗듯 넘겨받아 등에 메었다.
그렇게 걸은 지 얼마 되지 않아 가람은 마침내 야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길 한쪽에 마련된 공터에는 세 대의 마차와 여섯 마리의 말, 서른 명이 조금 넘어 보이는 인원이 북적이고 있었는데 그중 절반 이상이 갑옷이 번쩍거리는 기사들이었다.
그들은 마차를 둘러싸고 경계하듯 서서 다른 여행자들이 가까이 오는 것을 배제했다.
야영지 땅 중 상당수를 차지하고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눈알을 부라리는 모습이 꽤 볼썽사나웠다.
당연한 말이지만 나머지 열 명 정도의 사람들은 야영지의 가장자리에서 초라한 규모의 모닥불을 피워 놓고 간신히 누울 자리를 마련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델리움의 귀족이군요.”
마차의 문양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하스펠이 말했다. 이곳의 지리는 물론 국가나 계급 따위에 별다른 관심이 없던 가람은 델리움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사실 하스펠과 함께 다니고 있긴 했지만 가람은 언제든 충동적으로 이쪽 차원을 떠날 수도 있었다.
그런 마당이니 일일이 그런 것들에 관심을 가지지 않게 된 것이다. 게다가 국경이니 나라이니 하는 것들이 가람에게 의미가 없어진 지도 꽤 오래되었다.
“델리움?”
“예. 대륙의 북쪽에 위치한 강대국 중 하나입니다.”
“그래요?”
두 사람이 마차를 관찰하는 동안 기사들도 갑자기 나타난 가람과 하스펠을 관찰했다.
가람은 별로 경계할 것이 없어 보였지만 하스펠이 검을 차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하스펠에게 향하는 시선이 따가워졌다.
그것을 느낀 가람은 뺨을 긁적이며 가장자리에 피워진 모닥불 쪽으로 다가섰다.
모닥불을 둘러싸고 앉아 있던 사람들은 가뜩이나 좁은 자리에 사람이 더 늘어나는 것이 달갑지 않은 기색이었지만 그래도 좀 더 당겨 앉아 말없이 가람과 하스펠을 위한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이쪽에 앉아요.”
가람과 하스펠이 엉거주춤 서 있기만 하자 앉아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나섰다.
열둘 정도로 보이는 작은 여자아이로 가람을 향해 반짝이는 시선을 보내고 있었는데, 그러고 보니 이곳에 있는 사람들은 거의 이십 대 후반, 삼십 대 중반 사이의 남자들이다.
그런 이유로 오랜만에 보는 여자가 아주 반가운 모양이었다.
“고마워요.”
작게 인사치레하며 가람이 앉자 소녀가 수줍게 뺨을 붉혔다.
그러자 소녀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흐뭇한 얼굴로 소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제법 인상이 좋은 사람이었다.
소녀가 더욱 부끄러워하며 제 품의 무언가를 꼬옥 껴안는다. 인형인가 했더니 자그마한 남자아이였다. 한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인다.
미동도 없이 소녀에게 껴안긴 남자아이는 눈만 또랑또랑하게 뜨고 가람과 하스펠을 관찰하고 있었다.
“어디서 오는 길이시오?”
소녀의 옆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하스펠을 흘긋거리며 가람에게 질문했다.
시작부터 난이도가 꽤 있는 대화인 걸, 하고 생각하며 가람이 망설이자 하스펠이 대신 대답했다.
“페이튼에서 오는 길입니다.”
“아, 그런가. 나는 핌토에서 오는 길이라네. 리베르튼에 귀리를 팔러 가는 길이지. 이쪽은 내 딸 엘렌. 아들인 제렌이고, 나는 고한이야.”
“저는 하스펠, 이쪽은 가람입니다.”
“남매인가?”
눈 색도 그렇고 머리색도 어딘가 닮아 있기 때문에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스펠이 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당황하자 가람이 웃으며 끼어들었다.
“네. 제가 동생이에요. 스물다섯이고 하스펠 오빠는 스물일곱.”
“오빠……?”
그 터무니없는 호칭은 하스펠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가 입을 다물자 대화는 자연스럽게 가람과 고한의 것이 되었다. 고한이 뺨이 움푹 패도록 미소 지으며 가람에게 따듯한 시선을 보낸다.
“하하하, 남매가 사이좋게 여행이라니. 정말 보기 좋군.”
“감사합니다.”
하스펠은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는 가람을 아연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그러거나 말거나 가람은 고한과 훈훈한 덕담을 나누고 있었다.
보기가 좋다며, 엘렌과 제렌도 그렇게 되면 좋겠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한참 동안 늘어놓던 고한이 문득 정신을 차린 듯 물었다.
“내 정신 좀 보게. 피곤하고 배고플 텐데 떠들기만 했군. 아직 식전이면 이것 좀 들게나. 엘렌, 여기 부빵 좀 주겠니?”
식량이라면 하스펠이 등껍질처럼 메고 있는 가방에도 가득 있었다. 하지만 가람은 굳이 고한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처음 먹어 보는 이쪽 차원의 음식이 궁금하기도 했고 굳이 고한을 무안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가 내민 부빵을 받아 든 가람은 감사 인사도 잊을 만큼 어처구니가 없어졌다.
“사양하지 말게.”
고한이 푸근한 미소를 지으며 부드럽게 권한다. 그가 내민 것은 가람의 손가락 반 마디만 한 작은 빵 조각이었다.
손바닥 위에 뎅그러니 굴러다니는 그 빵 조각과 고한을 번갈아 보며 가람은 그가 자신을 놀리고 있는 것인가 고민했다.
그러나 하스펠이 아무렇지도 않게 감사 인사를 하며 그것을 입 안에 털어 넣었기 때문에 속는 셈 치고 입 속에 넣어 씹어 삼켰다.